#1


어찌하여 내가 이 곳까지 이르게 된 것인지 모르겠다. 뾰족한 나무들이 한 데 뭉쳐 뾰족한 산을 이루고, 그 중턱에 선뜻 뾰족하게 자리한 산장의 입구에 다다른 지금, 지금까지의 행보에 어떤 원인이 깔려있는지 되새기지 아니 할 수 없었다. 산행은 물론이요, 익숙치 않는 잠자리와 낯선 사람들, 세 요소 모두 내가 되도록이면 멀리하며 살아왔던 것들인데, 그 세 요소가 모두 포함된 이 곳을 홀로 오른 까닭이 위화감을 불러왔다.

말이 산장이지, 산장을 운영하는 가족들과 분리되지도 않은 건물에 방 하나를 얻어 지내는 형태였다. 요즘 세상에 인터넷 홈페이지나 카페도 운영하지 않는 숙박업체를 쉽게 신뢰할 수 없겠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며칠동안 집요하게 이 곳을 찾아 헤메었다. 아니, 집요하게 찾았다는 말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집요하게 나를 숨겨가며 찾아야 했기에, 여러 애로사항이 발생했다고 하는 것이 옳은 표현이다.

철저히 단골고객과 단골고객들의 입소문으로만 운영한다는 산장의 주인은, "어떤 분께 소개 받으셨어요?"란 질문을 던져왔다. 나는 그녀의 회사인 M업체를 댔다. "M업체랑 프로젝트하다가 그 분들이 회사 MT로 거기서 지내셨는데, 좋았다는 얘기를 들어서요."

"...그렇군요?"

주인은 이상한 침묵과 이상한 물음표를 붙이며 말을 받았다. 딱히 손님이 반가워하지 기색이 역력했는데, 도착해서보니 이렇게 분리되지 않은 공간에서 타인과 생활한다면, 아무리 산장주인이라도 썩 반갑고 좋은 일만은 아닐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손님은 반가우면서도 귀찮은 존재다.

하지만 일련의 행동들에 기저에 무언가 확신을 갖고 행동한 것은 아니었다. 안개를 헤쳐나가며 산을 오르던 바로 직전까지의 나는, 무언가의 뒤꽁무니는 쫓는 심정으로 거슬러왔다. 불안한 정신상태는 평소와는 다른 이상행동을 유발한다. 고작화된 패턴과는 다른 반응이 튀어나오는 것이다. 싫어하는 3요소를 모두 감수하고 이 곳에 오른 것이, 지금의 나와 평소의 나는 그녀를 처음 만날 때와 헤어지던 날의 나 만큼이나 꽤 긴 거리를 두고 멀어져있었다.

그 모든 '나'들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인지 모르겠지만.



#2


먼저, 약간의 고해성사를 해야겠다. 이 산장을 알게 된 경위에 대한 이야기다. 

지난 여름이 가기전에 그녀와 이별한 것은 벌써 반 년이 다 되어가는 이야기다. "어쩐지 너와 가을을 함께 할 수 없을 것만 같아."라며 두려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던 그녀는, 본인이 한 말을 지키면서 완벽한 합리주의자의 면모를 다시금 보여줬다. 나라는 균열이 그녀를 헤집다가 다시 틈을 메우며 완벽한 안녕-. 우리의 이별은 그토록 평온하고 제법 깔끔했다. 아마 이별의 본보기로 삼아도 좋을 것 같다. 

물론 어디까지나 표면적으로 그렇다.

함께 밤을 지새우던 어느 날, 꽤 격렬한 잠을 자는 그녀를 훔쳐보던 나는, 문득 못된 생각이 샘솟았다. 그녀에게 '꽤 괜찮은 인간'임을 어필하기 위해 여러모로 노력하던 나는, 들인 수고가 그녀에게 닿기에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꽤나 좌절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어쩌면 이 모든 것들이 전지적 그녀 시점에선 유치하고 촌스러운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염려가 생각의 지평을 까마득히 뒤덮고 있었다. 나는 전전긍긍했고, 그녀는 점점실망했다.

새벽이 깊어가던 그 시간, 찰나의 순간을 비집고 들어온 못된 생각의 속삭임은 이러했다. 

'만약 그녀랑 헤어지면 아마 그녀는 다시는 너와 연락을 하지 않을거야. 너도 알고 있잖아?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아마 그녀는 블로그도 없애고 번호도 바꿀거야. 그러기 전에 그녀의 핸드폰을 해킹해놓는 것이 어때?'

강하게 저항했다. 그러나,

'생각해봐. 분명 너는 헤어진 후에 늘 그래왔듯, 지난 사랑에 괴로워하고 그리워하게 될 거야. 게다가, 그녀는 지난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특별함을 지녔잖아? 더 힘들어질지도 모른다고. 완벽하게 궁금해하지 않고 찾지도 않을 수 있다고 다짐할 수 있어?'

다짐할 수 없었다. 물론 그 날, 그녀에겐 "걱정하지마. 찌질한 짓은 이제 하지 않을거야" 라며 웃으며 말했으나, 다짐하는 것과는 또다른 문제였다. 헤어진 후에 나의 모습은, VR 영상을 볼 때처럼 지나치게 생생했다. 어쩌면 이런 게 미래를 보는 능력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생생했다.

결국, 나는 자는 그녀의 핸드폰에 해킹 툴을 하나 심어놨다. 일주일에도 몇번이나 클리너 앱을 돌리는 그녀의 결벽증에도 해킹 툴은 잘 살아남았다. 아무래도 파일명을 '치코리타' 어쩌구로 해놓았던 덕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고 해서 매일 그녀의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세상이 끝난 것처럼 이별을 겪던 중2병 시절은 이미 겪고 난 터였다. 나는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나름대로 기준을 다져가며 보냈다. 운전하다가, 글을 쓰다가, 일을 하다가, 걸어가다가, 노래를 듣다가 스며드는 그녀에 대한 기억에도, 그녀에게 말했던 "찌질한 짓은 하지 않을거야"란 약속은 지켜가며 지냈다.

그럼에도, 회색 빗물이 고요를 삼켜버린 날이나, 완전히 차지 않은 달이 별무리를 이끌고 있는 밤은, 도저히 견디기가 힘들었다. 그런 날에만 들여다 봤다. 이런 야무지지 않은 다짐이 결국 그녀와의 거리를 벌어지게 만든 제1의 원인이었지만, '다시 돌아가/네 앞에 선대도/어쩌면 나는/ 그대로일지 몰라.'라는 가사말을 가진 요즘 자주 듣는 노래처럼 나는 그대로인 것이다. 만약 운이 좋아 다시 만난다 하더라도, 똑같은 결말만이 머지 않은 미래에 도래하리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안다.'는 것에 대한 참 뜻이 무엇인지에 대해선 이견의 여지가 있다고 본다.

일주일 전, 소복히 쌓인 눈 속에서 한걸음도 내딛지 않는 방 안에서, 나는 눈 내리는 배경에 몽상을 그리고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찰랑이는 흑단발과 심연을 담은 눈동자로 날 응시하고 있었다. 몽상의 끝에서 결국 그녀의 핸드폰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녀는, 누군가와 카톡을 주고 받고 있었다.

회사의 동료인 듯한 남자와 그녀는 여행 사진을 주고 받고 있었다. 이 산장을 알게 된 경위는 바로 여기에서였다. 붉은 색의 작은 등빛이 간신히 어둠과 다투고 있는 방, 울퉁불퉁한 나무기둥들과 잘 깎은 나무로 만든 침대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와 그는 즐거운 표정으로 순간에 남아있었다. 사진이 말하는 바는 행복과 맥이 닿아 있었다. 그녀는, 날 위해 자르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결국 그녀를 좋아한다고 말하게 만든 흑단발이 아니었다. 허리깨까지 내려오던 장발을 싹둑 자른 그녀였으나, 벌써 그녀의 머리는 어깨선을 지나고 있었다.

그것을 보자, 혼란함을 가둬놓은 둑에 약간의 금이 가기 시작했다. 단 한 순간도 나의 것이라는 생각 따위는 가지지 않았다고 자신있게(내가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정말 얼마 되지 않는다.) 말할 수 있으나, 그럼에도 길어진 머리는 나의 세계와 완전히 끊어졌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거기서 멈췄어야 했으나, 모든 안 좋은 일은 멈추지 않음에서 벌어지는 법이다. 다음에 이어진 대화 속에서 그녀가 이름모를 남자에게 건넨 말들은 가슴이 두근대고 흥미가 진진한 것들이었다.

"너를 만나서 참 다행이야. 네 덕에 머리도 기를 수 있고."

"너 같은 사람은 내 인생에서 처음이야. 고마워."

나는, 그녀에게서 영영 그런 말들을 들을 수 없으리라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랬다. 그러나 그녀는, 태연히도, 명징하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그녀를 처음 볼 때의 나와 헤어질 때의 나 사이의 거리보다, 나와 헤어질 때의 그녀와 지금의 그녀의 거리가 태양계를 아득히 넘을 만큼 멀게 느껴졌다. 언뜻 훔쳐본 것만으로도 둘 사이엔 잔망스러운 것들로는 전혀, 아니, 행여나 감당하기 힘든 무거운 사건에도 흐트러짐이 없을 견고함이 굳어져 있었다. 나는 그 남자를 전혀 알지 못하나, 그가 그녀에게 건네는 말들은 내가 전혀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채우며 함께할 수 있다는 것, 다름 사이에서도 온전한 균형을 유지하는 것.

그녀가 말했던 이상이면서, 나는 결코 다다르지 못했던 환상이 거기에 있었다.



#3


이 역시 진심이지만, 나는 정말로 그녀가 다른 좋은 사람을 만나 잘 지내기를 바랬다. 이 얼마나 진부하고도 주제넘은 생각이냐 하겠지만, 나름의 선의이면서 동시에 불온전한 나의 행위에 대한 합리화였다. 어떤 식으로든 실패를 상쇄하기 위해, 혹은, 아주 자그마한 자욱이라도 그녀에게 남겨지기 위해, 애써 친 몸부림이었다. '제발 괴롭고 힘들어졌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없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비율로 따지지만 2:8 정도로 선의가 앞섰다. 

'제발 나와 함께 한 시간이 어떠한 의미도 남지 않는 무익한 시간이 아니게 되길'

사실은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솔직하겠다. 이 저열한 이기심이란, 

그러나 제법 바라마지 않았던 현실을 목도하는 순간, 내 마음의 엘리베이터는 갑자기 전력이 끊어져 지하 30층까지 자유낙하하는 기분을 느꼈다. 모공이 송연해지고 머리끝이 쭈뼛서는 파리함에 흥미진진했던 것들은 무너지는 존재를 위해 자리를 비워주었다. 심연을 담고 있던 눈동자에서 피어나는 생명의 아름다움은, 그녀를 닮은 색이 이젠 보라가 아닌, 샛노랑과 새빨강 사이 어딘가로 보였다.


'그것'을 본 뒤로부터의 나의 일상은, 산장을 찾아야겠다는 마음 뿐이었다. 일상을 영위했던 균형감은 무너지고 오직 그 산장, 아니, 그들이 웃음꽃을 피우며 대화를 나눴던 그 방을 찾아가야겠다는 마음만이 남아 하루를 무너뜨렸다. 최대한의 노력을 다해 스스로 그 정보를 지우려한 산장 때문에 다소 시간이 걸렸고, 갈증은 더해갔다.

비로소 이곳에 도래한 것이다.


"어느 방을 쓰시겠어요?"

수염이 송송 난 아저씨의 물음에 나는 잠시 당황했다. 얇은 복도가 가로지르는 내 눈 앞에서 방 세개가 나란히 있었다. 나는 사진 속 배경이 어떤 방인지 전혀 몰랐다. 

"음..."

아저씨는 갈등하는 나를 보며 다소 찡그렸다. '귀찮으니까 빨리 고르라고!'

"방이 모두 똑같은가요?"

"아니요. 일단 오른쪽 방은 장기 투숙객이 계시고, 맨 왼쪽 방은 원래 우리 아이들 자는 방이라 디지몬 인형도 있고 장난감도 있어서 정신이 좀 사납습니다."

명백하게 왼쪽 방을 고르지 말라는 압박이나 다름없었다. 처음부터 답은 가운데 방으로 정해져있었다. 그가 얼굴을 찡그린 까닭을 이해했다. 답은 정해져있으니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았으니. 그러나 나는 고민했다. 디지몬을 미친듯이 좋아하는 그녀는 분명 왼쪽 방을 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저씨가 내게 했던 말과 똑같은 말을 했다면? 타인에게 불편을 끼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그녀라면 당연히 가운데 방을 택했을 수도 있다. 나 역시 왼쪽 방은 안 된다는 주인장의 말을 듣고 기어코 왼쪽 방을 택하는 타입은 아니었으나, 포켓몬 인형은 선택지의 확률을 확 높여주었다.

하지만 주인은 한 마디를 더 붙이며, 선택지를 고민할 자유를 박탈했다.

"아, 왼쪽 방은 그냥 일반 방이라서 조명이 별론데, 가운데 방은 손님용으로 만든 거라 그래도 조명이 꽤 괜찮습니다."

절대로 방을 열어 보여줄 기미는 보이지 않으면서 설명으로 일관하는 태도의 주인장은 설명을 덧붙였고, 나는 사진 속에 가득한 붉은 빛의 조명을 떠올렸다. 어둠을 간신히, 간신히 이겨내고 있는 그 붉은 빛. 가운데 방이 확실했다. 

문풍지가 두꺼운 방문이 힘껏 삐걱대며 열렸다.

문을 열고 들어오자, 깊은 산 속의 고요가 바람과 함께 한없이 밀려들어왔다. 문을 닫자, 바람은 도로 나갔는데 고요만 여전히 남아있었다. 나는 방 한 가운데 우두커니 서서 그림을 그렸다. 그녀와 그가 마주 앉아 말을 나누던 바닥, 그녀와 그가 아침 안개가 더럭마다 묻어있는 풍광을 구경했을 문턱, 그리고, 그녀와 그가 사랑을 나누고 또 확인하며 다시 피워냈을 작고 하얀 침대를 응시했다. 망막에는 잠시 침대가 불에 타는 잔상이 맺혔다가 사라졌다. 잔상에는 휘발유 통을 들고 있는 나의 뒷모습도 잠시 나타났었다.

그러나 현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째깍대는 초침소리만 아득하게 남아있었다.


화려한 조명과 웅장한 음악, 그리고 수많은 배우들의 역동적인 연기가 펼쳐진 뮤지컬이 끝난 뒤의 무대는 사람을 시니컬하게 만든다. 모든 게 한바탕 꿈같이 느껴지며 삼라만상이 사실은 허상같은 것 아니었나 회의하게 한다. 새로운 무대를 준비하는 와중에도, 뒤돌아보는 것을 멈추지 않는 것이 인간, 아니다. 나의 습성이다.

그들의 사랑이 멀찌감치 떠난 방을 찾아와 뭘 어쩌겠단거였지.

그렇다고 갓 대금을 지불한 지금, "이제 가볼게요."라고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떠나는 일도 영 자연스럽지 않았다. 이 곳에 올라오는 일 역시 만만치 않았다. 한편으로 이 곳에서 하룻밤을 지내는 것도 영 내키지가 않았다. 타인의 사랑은 언제나 불편하고 고약스럽다. 침대에 조심스레 누워봤으나, 고약스러운 마음과는 달리 불편해지는 바짓자락에서 최하의 인간이 여기있음을 고하고 있었다. 나는 불현듯 몸을 움직여 바닥으로 향했다. 이곳도 썩 편치는 않았지만, 침대에서 자는 것 보다야 훨씬 낫겠지.

잠시 뒤, 문이 열리며 산장 주인이 들어왔다.

"어떠세요? 맘에 드세요?"

"네. 깔끔하고 좋네요."

이부자리와 여러 용품들을 갖고 들어온 그에게서 여전히 귀찮은 태도가 역력했지만, 그래도 할 껀 다 해야한다는 의무감도 동시에 보였다. 그는 이토록 귀찮아하면서 왜 산장을 운영하는 것일까. 궁금했다.

"저기, 사장님."

"예?"

"왜 인터넷으로 홍보를 안 하시는 건가요?"

자주 받는 질문인듯, 그는 식상함에 물든 표정으로 대답했다.

"사람이 많은 게 싫어서요."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의외다. 사람이 싫은 데 산장을 운영하는 이 아이러니, "나는 널 갖고 싶지만, 갖고 싶지 않아."라 말하던 기시감이 흠뻑 젖어들었다. 

"그럼 다른 일도 같이 하시나봐요?"

"아 예, 뭐 산이니까 약초캐고 뭐 그런 일 하지요."

"산삼도 캐고 그러신가요?"

"예 뭐."

점점 대답이 짧아지는 걸 보니 슬슬 대화를 알아서 끊어줘야 하는 타이밍임을 알았지만, 첩첩산중, 인간이라곤 눈 앞에 서 있는 수염 송송난 아저씨 밖에 없어서인지, 자꾸만 말을 붙이게 되었다. 

"그럼 아이들도 같이 사는 건가요?"

"예. 방학이라 어디 갔어요."

"아~ 어ㄷ.."

"그럼,편히쉬시고, 저녁식사는6시인데그때나오시면됩니다. 주변에산밖에없는데, 오늘날씨가영심상치않으니너무멀리가지는마세요."

더이상은 못 참겠는지, 주인은 '아이들은 어디갔나요?'란 내 질문을 매몰차게 끊고, 꼭 해야하는 말을 순식간에 내뱉고 홀연히 사라졌다. 모든 일이 순식간이라 어쩌면 산 속에서 도사님을 만났는지 착각할 만도 했다. 

주책이 아닐 수 없었다. 싫다는 사람 붙잡고 뭔 짓이었던가. 민폐도 적당해야 하거늘.


안개가 자욱한 숲으로 발을 옮겼다. 방 안에 누워있어봐야, 순백색의 침대가 자꾸만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 영 불편했다. 시골집 냄새라도 가득하면 위아래가 모두 불편한 상황을 이질감으로 덮어버릴텐데, 모텔을 들어설 때 나는 락스 냄새 비슷한 것이 방 안에 가득했다. '모텔 냄새'라는 것을 인식하자마자, 수많은 사랑이 피어나고 사라졌을 모텔 침대에 대한 거부감은 단 한 번도 없었던 것이 떠올랐다. 이름 모를 타인들이야 어떤 사랑을 나누든 알 바가 아니다. 그러나 그녀의 몸짓과 표정은 여전히 내 뇌 속에서 생생하다. 문제는 저 순백색의 침대에 그녀를 그려넣고 자연스레 이름모를 다른 남자 역시도 그려진다는 점이다. 그 둘의 몸짓을, 문에 구멍을 뚫어 훔쳐보는 나까지.

고개를 저었다. 짙은 안개는 수미터 앞도 가늠할 수 없게끔 세계를 축소시켰다. 좁은 시야가 불편해 나왔더니, 자그마한 물 알갱이들이 이젠 망상의 나래를 이루는 원자가 되어준다. 산세는 험한 편이었지만 주인 아저씨가 자주 다니는 길인지, 등산로는 제법 인간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었다. 그래도 망상과 함께 걷다보면 영원한 망상의 세계로 훌쩍 넘어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약간의 긴장감이야 말로 일상의 균형을 유지하는데 가장 필요한 것 아니던가. 그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똑같이 적용됐다.

그러나 좁은 등산로도, 궃은 날씨도 망상만큼은 막지 못했다. 죄의식에 젖었던 훔쳐보기는 어느새 스릴넘치는 포르노 시청이 되어버렸다. 나의 뇌가 이토록 형형색색하며 스무스하게 전개되는 훌륭한 상상을 자아낼 수 있었는지 놀라웠다. 괜찮아. 내 모든 죄악은 안개가 가려줄테야. 망상과 착각은 자유라는 오랜 말도 있잖아. 걸음이 빨라지고, 심박수가 올라가며, 눈엔 힘이 들어갔다. 몇시간이고, 몇시간이고 더 표류할 수 있음에 즐거웠다. 마치 일찌감치 같은 배게를 배고 누우며, 몇시간이고 더 함께 있을 수 있어 즐거워하던 그 때처럼. 그 안락함과 배려에 너무 빨리도 젖어버려, 그녀가 원한 최소한의 약속까지도 수면 부족을 핑계로 어영부영 넘어가려 하던, 나태함으로 점칠된 본연의 모습은 아마 오늘 내앤 나오지 않을 것이다. 고작 오늘이므로, 고작 오늘이니까.

"돌아갑시다."

정신이 들었다. 눈 앞엔 산장 주인이 서 있었다.

"너무 멀리 가지는 마시라고 분명히 말씀드렸는데..."

나는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딴 생각을 좀 하다보니."

그는 시야를 돌리며, 말을 붙였다.

"예. 뭐. 갑시다."

그가 시야를 돌린 이유가 바지의 모양새를 부자연스럽게 만든 그 '몹쓸 놈' 때문은 아니기를 바랬다. 아니, 촛불에 후 바람을 불어 꺼버리듯, 망상을 강제 종료시킨 그가 바로 몹쓸 놈인지도 모르겠다. 두 몹쓸 놈에 대한 원망스러움과 함께, 어색함을 애써 감추고 돌아왔다.

방으로 돌아와마자, 난 순백색의 침대에 누워 자위를 했다. 순백색의 침대는 지나치게 더러워졌고, 나는 마음 편히 바닥에 누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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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빵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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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개의 달 중에서 하나가 휘리릭 지나는 시간동안, 동호회를 빙자한 그녀와의 거리는 조금도 좁혀지지 않았다. 그녀의 머리칼 만큼이나 늘어가는 것은 비루한 기타실력 뿐, 처음 그녀를 대할 때 느꼈던 어색함과 어려움은 상호 간에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오로지 순수한 음악에의 열정으로 가입한 동호회의 참 뜻을 구현하고 있는 이, 나뿐이리라. 삿되고 어리석은 욕심이 끼어들어 늘 그래왔듯 구렁텅이로 나자빠지기를 바랬을 봉투 녀석의 계략을 능히 파쇄할만큼, 정말로 기타만 열심히 치고 있었다. 

그게 나쁘다는 것은 아니고. 아무튼 뭐 그렇다.

한 달이면 사랑이 익기에 충분한 시간이라는 듯, 신촌 버뮤다 삼각지대로 사라지는 두 명의 사람들처럼, 생업보다 취미를 더 중히 여겨 커트 코베인보다 더 음악에 미쳐 있는 듯한 열정맨들조차도, '원래 거기에 있었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소리소문없이 사라졌다. 남성회원 한 명이 사라지면, 항상 그 다음주엔 여성회원이 사라졌다. 

고작 한 달이 지났을 뿐이다. 잉크로 사랑이란 단어를 쓰면 적어도 석 달은 지나야 제대로 마르지 않겠나. 도대체 사람 마음이란 것이 어쩌다가 이토록 가벼운 구름같이 되었나! 요즘 세태에 통탄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녀와 함께 정말로 기타만 쳐대는 무사수행 중이었으므로, 지조없는 사람들의 갈지자 행보에 흔들리지 않았었다. 적어도 그저께까지는.

그저께, 또 한 명의 남성회원이 사라졌다. 충격에 충격을 금할 수 없게도. 회식자리에서 되도 않는 아재개그를 남발하며 처음 보는 이성으로부터 야유를 얻어 먹은 그 남성회원이 사라졌다. 나는 감기이길 빌었다. 지독한 독감에 걸려 불참하게 된 것이기를...! 빨리 완쾌되어 웃는 낯으로 다시 나와 자리를 빛내주기를...! 봉투 녀석에게 이 얘기를 하자, 녀석은 그 지조없는 사내를 비난하기는 커녕 오히려 내게 

"병 주고 약 주는 기도네. 인성이 그 모양이니 너만 남는게지."

라며 '가장 위험한 적은 언제나 내부에 있다.'는 말을 증명했다. 그 남성회원의 기타실력이 일취월장하여 모든 회원들의 선망을 받게 되고, 그리하여 나조차도 떠난 동호회를 끝까지 지키는 존재로써 우뚝 서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우러난 기도를 그런식으로 매도하는 것은 옳지 못하나, 오늘에 이르러서는 다소간 생각이 바뀌었다. 왜냐하면, 그 남성회원은 물론, 한 여성회원조차 불참했기 때문이다.

나는, 외계인들이 지구인을 납치하고 돌아다닌다는 음모론을 진지하게 믿어보기로 결심했다. 이 편이 아니면 눈 앞에서 벌어진 기이한 상황을 설명할 수가 없다. 여성회원들이 내게 이성적인 관심이 눈꼽만큼도 없는 것은 지극히 이해한다. 내가 여성이었어도 이런 닝겐, 퍽 가까이하고 싶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그 충격적인 아재개그 사내를, 왜, 도대체, 어찌하여...!

젖어드는 황망함에 나는, 피크를 집었던 손을 내리고 리미트가 풀린 멍때림을 시전했다.



"흠,흠."

"..."

"뭐하세요?"

"아,네?"

늘 그렇듯, 가장 늦게 모임에 온 그녀는 내 앞에 섰다. 그동안 그녀와의 대화는 지극히 필요한 수준에서만 이뤄졌다. 만나고, 연습한 것을 서로 확인하고, 약간의 평과 함께, 빠이 빠이. 사람들이 회식을 하건 노래방을 가건, 그런 건 그녀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때로는 참석할 때도 있었지만, 조용히 술만 스트레이트로 넘긴다든가, 뮤비가 흘러나오는 노래방 화면을 응시하며 가사를 곱씹는듯한 모습으로 일관하기만 했다. 

그녀가 오기만을 목 빼들고 기다리던 내가, 막상 그녀가 들어서는 순간 모른 척하며 기타를 치고 있으면, 다가와 "안녕하세요?"란 인사와 함께 검은 머리칼을 다시금 흩뿌리며 자리에 앉는 것이 한 달간의 반복이었다. "뭐하세요?"란 인사가 다분히 낯설었다.

"어, 음. 사람이 많이 줄어서요."

"어디요? 거리에?"

"아뇨. 동호회에요."

"...그런가?"

그런가?가 아니다. 자리마다 가득했던 첫 모임에 비해 드문드문 보이는 이 여백은, 자신이 탈모임을 확인 한 후 매일 매일 머리숱을 확인할 때마다 드는 황량함, 아마 그것에 가까울 것이다.

"뭐, 다들 사정이 있나보죠."

그녀는 무심한 듯 짧은 논평과 함께, 자리에 앉아 기타를 꺼낸 뒤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리곤 나를 지긋이 바라봤다.

"...뭐하세요?"

두 번째 뭐하세요. 질책의 뉘앙스가 살짝 담겨 있는 뭐하세요였다.

"아, 맞다. 잠시만요."

내려두었던 피크를 집어들고 인트로를 연주하기 위해 손을 가다듬었다. 그러나, 수면마취상태에서 깨어날 때 저 멀리에서 의식이 성큼 돌아오는 때처럼, 빅뱅의 흔적을 담은 우주배경복사가 티비 안테나에까지 흘러들어와 치지직 소리를 낼 때처럼, 며칠간 강행연습에 매진했던 코드도 주법도 새까매졌다.

더듬더듬, 애꿏은 am 코드만 쥐어뜯고 있는 내 모습을 계속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녀는, 기타를 내려놓더니 다시금 말했다.

"뭐. 하. 세. 요?"

약간의 질책에서 완벽한 힐난으로 변한 어조에 식은 땀이 솟아났다.

"아, 저, 그...갑자기, 생각이 안 나네요. 왜 이러지? 아이 참,"

"흠"

"아니, 연습 엄청 열심히 했는데. 왜 이럴까요? 왜 이러죠?"

"글쎄요 저한테 물어보시면."

"아, 그렇죠. 왜 생각이 안 나지."

쩔쩔대는 나를 관찰하던 그녀는, 기타를 가방에 넣기 시작하며 말했다.

"생각 안 나시면, 다음에 하죠 뭐"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기타를 챙겨넣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갑자기 초조함이란 녀석이 저 옛날 폼페이를 뒤덮기 위해 육중하면서도 매서운 속도로 강림하시는 화산재처럼, 혹은 어린 날 서해바다에서 신나게 놀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밀물을 가득찼을 때처럼, 나에게 밀려 들어왔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서로를 공전하던 두 행성 사이에 문과는 모를 힘의 변화 탓에 한 쪽 행성이 이탈, 두 행성은 다시는 함께 할 수 없었단다. 라며 어느 쌍성의 변천과정을 설명해주는 지구과학 시간때처럼 나와 그녀의 관계도 그리될지 모르겠다는 순간적인 위기감이 마구 쏟아져내렸다.

무슨 말을 하지. 어떤 말을 하지. 뭐라도 입 밖에 내야 하겠는데. 뭐라고 하지.

그러나 내 입에서 불쑥 튀어나온 말은, 결국 그녀에게서 비롯된 것 뿐이었다.

"저기, 주말엔 보통 뭐하세요?"

아아, 봉투 녀석이 이 광경을 보았다면, 삼일 간 먹지도 마시지도 않은 채 배를 치며 웃었을 것이다. 너무 웃어제끼다 못해 봉투가 찢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뭐하세요라고 물은 그녀에게 뭐하세요로 답하다니, 자신의 멍청함을 새삼스럽게 마주하는 것은 퍽 괴로운 일이다.

하지만 그녀는 잠시간 생각해보더니, 말을 이었다.

"별 일 없어요."

"아 그래요?"

또다시 정적.

"그러면, 저기, 영화라도 보실래요?"

아아, 멍청함이 된장처럼 푹 익어간다. 통제권을 잃어버린 입이 난을 일으키는데, 조정이 자리잡은 뇌는 초조함이란 녀석이 국정농단을 펼치고 있다. 익숙한 결말과 응답이 예상되었다. 오랜 단골 손님인 패배감이란 분이 저 멀리서 손짓하며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 때. 그녀는

"그러죠."

라더니,

"연습한 건 이제 생각나요?"

라는 것이었다.

대오각성이란 것이 이런 느낌에 닿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녀가 내쉰 물음표 음절이 끝나는 순간, 환하게 세상이 밝아지며 지워졌던 음표들이 머릿속에서 춤췄다. 신기한 일이었다. 기이한 일이었다. 

"어, 그..러네요? 이제 생각나요."

그제서야 나는, 연습했던 그 곡을 연주할 수 있었다. 1절이 끝나기 전에 그녀는 다시 자리에 앉았고, 나는 처음으로 한번도 틀리지 않고 완곡을 해냈다. 물론 그녀 역시 항상 그래왔듯, 나보다 훨씬 훌륭한 연주를 뽐냈고, 나는 다시 좌절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주말의 약속을 위해 연락처를 받아온 것이 평소와는 다른 점이었다.

첨언하자면, "한번도 틀리지 않고 완곡을 해냈다."라는 논평을 듣자마자 봉투 녀석은 "구라치지마"란 말로 받아쳐냈다. 그렇다해도 썩 괜찮은 하루여서 굳이 토달지 않았다.

사라졌던 아재 개그가 제발 다시 돌아오길 바랬던 그 순간을 생각하자면, 참으로 썩 괜찮은 하루가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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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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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빈은 잘 쌩겼다. 하지만 우리 률형이 더 잘쌩겼다.

 

 

 

 

나왔다. 미니앨범 [답장]. 데뷔 25년 차. 자신이 걸어온 길에 시그니쳐가 철철 흘러넘쳐, 그 이름 석 자만 듣더라도 모든 이들이 "아! 그 양반!"이라며 그가 하는 예술이 어떤 색인지, 어떤 소리인지, 어떤 느낌인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공감할 수 있는 것은, 모든 예술인이 바라마지 않는 경지가 아닐까 싶다. 김동률은 수많은 브랜드 중에서도 압도적인 경향성을 가졌다. 경향성은 하나의 장르가 되고, 곧 정합성을 낳는다. 세대를 초월하는 률덕의 스펙트럼 속에서 '찌질한 2030 남자닝겐' 포지션에 담긴 본 률덕, 이번 미니앨범의 수록곡들과 같이 듣기 좋은 이전의 곡들을 정리하며 신입 률덕 영업을 뛰어본다. 누구 맘대로 분류하냐고? 엿장수 맘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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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머겅

 

 

1. 다시류 - <답장>

 

타이틀곡 <답장>은 김동률 이별 노래의 주된 감성인 '다시' 류로 분리하겠다. 일찍이 <기억의 습작>에서 '많은 날이 지나고 너의 마음 지쳐갈 때'라 노래했던 그 감성은, 25년의 세월 동안 조금씩 변화하며 '다시 돌아가 널 볼 수 있대도, 어쩌면 나는 그대로일지 몰라'로 되돌아왔다. '다시'라는 단어는 김동률 음악에서 매우 중요하다.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 - <다시 떠나보내다.> - <다시 시작해보자> 3연타로 이어지는 '다시' 시리즈에서 읽을 수 있듯, 만남과 이별, 후회와 재회가 거듭되는 한편의 모노드라마를 떠올리게 한다. 2011년, EP앨범의 타이틀곡이었던 <replay>에서 '너 머물렀던 그때로 거슬러, 멈춰있는 어리석은 내가 있지'의 가사는 '다시류' 음악을 한 줄 정리해준다. '닝겐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물론 각각의 곡이 그려내는 상황과 화자의 감성은 모두 제각각이지만, '다시류'는 '이별 이후의 치명적인 감정에 휘둘리지만, 그래도 삶은 이어나가는' 사람들에게 충분한 위로(라 쓰고 구여친에게 새벽 2시에 '자니?'라 보낼 수 있는 용기)를 건네준다. 사실 2집 앨범에 <편지>라는 곡이 있는데, 시종일관 g minor로 후려치는 곡이라 듣기에 쉽진 않다. 다만 노래에 깔린 감정이 얼마나 성숙해졌는지 비교하기에 참 좋다.

 

여기서 쬐끔 더 나가면, <그건 말야>나 <오래된 노래>, <그 노래>, 혹은 <오늘> 같은, 조금 더 묵은 감정을 이야기하는 노래가 등장한다. 회한이나 체념의 자세는 잃지 않지만, 완전히 마음속에서 지워지지 않을 그녀의 기억은 삶의 순간순간마다 깜빡이도 안 켜고 훅 들어온다. 스무 살, 서른 살, 마흔 살에도 기억은 쉬이 지워지지 않는다. <답장>은 '묵은 감정'으로 나아가기 이전, '되돌아가고 싶다.'라는 아주 약간의 희망이라도 품게 되는 감정의 한복판에 서 있는 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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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시절. 잘쌩겼다. 리얼루다가.

 

 

2. 쓰담류 - <Moonlight>

 

토이의 <나는 달>과 유사한 설정의 노래다. '당신이 해를 만나는 동안, 난 무엇도 할 수가 없답니다.' 달을 노래할 때 클리셰 같이 쓰이는 문장이지만, 일렁이는 선율에 얹으니 이대로 접싯물에 코 박고 코 잘 수 있을 것만 같은 노래가 되었다. ASMR와 수면다큐가 유튜브에서 입소문을 타는 시대, 고된 하루에 위로를 보내주는 '쓰담류' 음악은 여전히 가치 있다. 선율의 흐름과 곡의 분위기는 <크리스마스잖아요>나 <한 겨울밤의 꿈>과 닮았고, 곡의 메시지는 <괜찮아>나 지난 앨범의 <동행>과 궤가 닿아있다. 얄궂게도 위로는 "잘 될 거야"란 말을 들을 때 보다, 다른 이야기를 들을 때 뜬금없이 뚝 떨어지듯 내려올 때가 있다. 그런 점에서, 포근한 선율로 불쑥 솟구치는 외로움을 지우는 노래든, '괜찮아. 우리 같이 해보자.'라는 말을 건네는 노래든, 모로 가도 위로로만 가면 그만이라는 점에서 쓰담류로 분류하겠다. 특히, 언제든지 돌아갈 수 있는 존재를 오래도록 자처했던 경험을 통해보자면, 그런 존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된다 카더라.

 

사실 쓰담쓰담 같은 거 익숙하지 않아서 분량이 짧다. 아참, 이미 <자장가>란 노래가 있는데, 이 노랜 정말로 아기에게 자장자장 하는 노래라(...) 뭐 어쨌든 이 노래도 쓰담류의 일종이긴 하다. 데헷

 

 

3. 끝장류 - <사랑한다 말해도> (feat. 갓소라)

 

언제나 이별은 도래하기 마련이다. 예감하든 예감하지 못했든, 언제나 다가올 수밖에 없다. 단순히 예감이 아닌, 사랑이 끝장나고 있음을 온몸으로 느끼는 기간도 때론 있다. 이때를 담은 김동률의 노래들을 '끝장류'로 분리해본다. 

 

먼저, 4집 마지막 곡 <고별>이 있다. 우주로 떠나버릴 듯한 사운드에 무게감 있는 가사로 끝장남을 야무지게 노래하는 곡이다. '그 어떤 목숨에도 끝이 있는 법 / 길 위를 구르는 저 잎새들처럼'과 '우리의 만남에도 생명이 있어 / 어느새 조용히 숨 거두려 하네' 라는 가사들이 언뜻 들으면 뭔소리하나 싶겠지만, 꼭꼭 씹듯 들으면 우주적인 사운드가 끝을 향해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준다. 앨범의 마지막 곡으로 담기에 교과서 같은 곡이랄까. 또 5집 수록곡 <뒷모습>이 있다. 담백하면서도 기본에 충실한 탱고 선율에 운율감을 매우 잘 살린 곡이다. '사랑은 이미 우리를 떠나가고 있었네, 당신이 나의 곁에서 떠나버리기 전부터'이란 가사는, <사랑한다 말해도>의 '사랑'과 유사한 놈이다. 몹쓸 놈 이란 얘기다. 두 곡이 한 명의 당혹감, 체념, 각오, 후회를 담는다면, <사랑한다 말해도>는 갓소라의 음색이 더해지며 아름답게 끝장나는 노래가 되었다.

 

또한, 이 곡은 당연히 김동률이 만들고 이소라가 부른 <사랑이 아니라 말하지 말아요>를 다시 듣게 한다. 두 곡 다 '사랑'이란 단어가 지닌 사전적 의미를 해체하는 곡이다. 이런 사랑타령이라면 아무리 해도 지겹지 않다. 4집 앨범 수록곡, <사랑하지 않으니까요>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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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는 모습도 잘 쌩긴 우리 률형..

 

4. 하오류 - <연극>

 

사실 <연극>이란 곡은 김동률의 디스코그라피에서 독특한 곡이다. 언뜻 들어도 고상지의 존재감이 뿜뿜 쏟아져 나오는 곡이라서일까. 그래도 완성도는 훌륭해서 귀가 은혜로워지는 기분이다. 그래도 영업은 해야 하니까, <연극>의 마지막 가사 '이봐요 당신 이미 오래전 / 연극은 벌써 끝이 났다오'를 어거지로 끄집어내 '하오류'로 묶어본다. 원래 덕질 영업은 철판을 깔아야 한다카더라.

 

'하오체'의 계보를 잇는 명곡들이 있다. <그림자>, <동반자>, <잔향>. 하오체로 쓰였으며, 김동률 최고의 곡으로 꼽을 만하다. 팁을 좀 드리자면, 김동률의 보컬은 과거보다 현재가 더 나은 것 같다. 때문에 라이브 앨범에 수록된 <그림자>와 <동반자>가 듣기에 훨씬 좋다. 아님 말고 좌우간, '하오류'의 음악들은 '다시류'에서 노래했던 후회와 체념의 감정이 훨씬 더 농익고 푹 익어 고이 우려낸 듯한 곡들로 정의해본다. 김동률 본인이 밝혔듯, 김동률이 하오체를 선호해서가 아닌, 곡의 무게가 하오체를 부르는 격이라 그 안에 담긴 감정에 더 집중할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2집의 <희망>이나 3집의 <귀향>도 하오류로 분류해 본다. 재밌는 것은, 20대 시절엔 하오체로 곡을 썼었는데, 정작 나이 먹으니 하오체가 잘 안 나온다. 

 

이 중에서도 특히 <동반자>는 윤도현의 러브레터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곡으로 밝혔다. 워낙 깨알 같은 에피소드를 듣기 어려운 사람이라 러브레터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동반자>는 본인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담겨있으며, 상대방의 양해를 얻고 쓴 가사라 한다. 정재형과 국밥집에서 국밥 먹다가 '다시는 이런 가사를 쓸 수 없을 것 같다.'며 <동반자>의 가사를 보여줬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아무튼, 이 세 곡은 김동률이란 아티스트가 표현할 수 있는 가장 깊은 감정을 그려내고 있다.  대중음악에서 쉬이 들을 수 없는 편곡과 가사를 가진 곡들인데, 김동률의 최근 앨범엔 하오체 곡이 없어 몹시 아쉽다.  현기증나니까 다음 앨범엔 꼭 하오체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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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률형은 피아노위에 있을 때 제일 잘쌩겼다

 

5. 뜬금류 - <Contact>

 

덕질에 심취하다 보면 고정관념에 젖게 된다. '김동률이니까 당연히 이런 곡이겠지?'라는 생각을 갖기 마련이다. 그러다 보니 앨범마다 가장 이질적인 느낌을 주는 노래들이 있다. '이것도 김동률' 류의 노래들을 뜬금류로 분류해본다.

 

박새별과 함께 부른 <새로운 시작>의 분위기와 흡사한 곡, 동명의 영화에서 영감을 얻었을 것으로 심히 추측되는 <Contact>는, 여기저기서 힘을 준 편곡으로 듣는 이의 정신을 무한한 공간 저 너머로 보낸다. 가사는 안정적인데 노래는 혼란하다. 펫 메시니 아재의 전조로 꽉 찬 곡을 듣는 듯한 느낌이다. 6집에선 <퍼즐>, EP앨범의 <크리스마스 선물>, 3집의 <구애가>, 그리고 본인이 트로트 풍으로 걸쭉하게 편곡해 부른 2집의 <님> 같은 곡들은 각각의 분위기나 메시지가 모두 다르지만, 기존의 김동률이 해오던 노선에서 약간 삐딱선을 탄 듯한 노래다. 이질감을 주는 곡 중에서 단연 탑은, 마이언트메리 정순용과 함께 부른 5집의 <Jump>가 아닐까 싶다. 저어기 불란서 빠리의 샹젤리제 거리 카페에서 쓰디쓴 에소를 홀짝이며 열심히 악보를 들여다볼 것만 같은 김동률도 '우리네랑 같은 사람이구나'라는 새삼스러운 생각을 들게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물론 <Contact>는 이런 곡들보다 그 이질감이 확 낮다. 아무래도 수록곡이 5곡밖에 안 되는 미니앨범이라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김동률답지 않게 수록곡이 적은데, 날이 갈수록 달라지는 음악 시장에 대한 고민이 얼핏 느껴진다. 사실 싱글 몇 개 던져도 뭐라 할 사람 없는데, 장인처럼 꿋꿋이 '앨범'의 형태 고집하는 바보스러움이 보인다. 수록곡은 적지만, 앨범이기에 새로운 시도도 해보고 싶은 마음이 <Contact>의 편곡에 힘이 실린 원동력이 아닐까. 아님 말고 222

 

 

6. 오글류

 

천 번 만 번 다행스럽게도 이번 앨범엔 오글류 곡이 없다. <아이처럼>이나 <욕심쟁이>, 그리고 결혼식 축가로 유명한 <감사>, 지난 앨범의 <내 사람>같은 곡이 그렇다. 이런 노래는 그만하시고 우울우울열매를 만 개쯤 절인듯한 곡만 써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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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딩은 절대 입지 마셨으면 해요 형 (왼쪽은 정재형)

 

 

 

뜬금없는 얘기인데, JTBC의 <비긴어게인>을 즐겨봤었다. 각자의 위치에서 최정점에 선 뮤지션들이 버스킹을 떠나는 이야기도 흥미로웠지만, 세 사람이 음악을 대하는 태도가 더 눈 여겨졌다. 윤도현에게선 정말로 음악을 즐기면서 하는 모습을, 이소라에게선 음악을 마주할 때 뮤지션이 가져야 하는 자세를, 유희열에게선 모든 사람들을 잘 버무려서 좋은 결과물을 내려는 노력이 보였다. 

 

김동률의 음악을 들을 때마다 이소라의 모습이 떠오른다. 두 사람이 곡 작업을 해서가 아니라, 프로불편러의 자세로 깐깐하게 음악을 대하지만, 그 모든 것이 청자를 향해 있다는 진심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콘서트 영상에서 뮤직팜 이사님이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김동률을 대하기 어려웠다고 토로했을까. 물론 그것이 꼭 정답이란 법은 없다. 윤종신처럼 뻔뻔해도, 김동률처럼 깐깐해도, 유희열처럼 능글맞아도 결국 창작자로서 고민과 진심이 담겨 있다면 반드시 청자도 선율과 가사 속에서 그것을 느낄 수 있다.

 

바로 그, 섬세한 고집스러움이 오매불망 김동률의 신보를 기다리게 한다. 한 아티스트가 25년을 버텨오기란 참 쉽지 않다. 단순히 재능러으로만 보기엔, 미니앨범을 내놓는데 들인 1년의 시간이 부정하고 있다. 전성기가 어디인지 쉬이 꼽을 수 없이 앨범마다 각각의 가치를 뽐내는 그에게, 여러모로 워너비인 나는 그저 감지덕지할 뿐이다. 앞으로 몇 장의 앨범이 더 나올진 모르겠지만, 방송 활동 따위 앞으로도 안 하셔도 되니 제발 음악 좀 많이 쏟아내 주셨으면 한다. 조금 덜 깐깐해도 되니까요 박리다매좀

 

김동률 페이스북에 신보 발표를 앞두고 이런 글이 올라왔다. 이곳으로 모인 률덕들, 숨은 팬 여기 있다고 손들어보자.

 

마지막으로, 조금 뒤에 설레는 맘으로 음악을 들어 주실 곳곳의 숨은 팬 여러분들. 

길거리에서 알아봐 주는 사람들이 없어도, 이제 생일 선물이나 초콜릿 선물 같은 건 들어오지 않아도, 조용히 각자의 삶 속에서 제 음악을 듣고 계신 분들이 많다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모쪼록 제 음악이 추운 겨울 조금이나마 위로와 힘이 되었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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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하고 다니니 누가 알아봅니까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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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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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에도, 역시 틀렸다.

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큼은 확실히 알겠다.


목표를 향해 시속 200km/h로 돌진하는 기차같은 인생이 어딘가엔 꼭 있다. 지도 한 구석에 빨간 스티커를 따악 붙여놓고 오로지 그곳만을 향해, 그 여정에 걸리적거리는 잡초와 추위와 배고픔과 괴로움과 귀찮음과 포기하고싶은 마음과 집어치자는 유혹과 분탕질과 반동질과 엄마보고시픔과 외로움, 기타 등등의 모든 고난이 도래하더라도 그 모든 것을 한 큐에 날려버리고 꿋꿋이 걷는 사람들이 어딘가엔 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아쉽게도 나는 아니었다. 지금껏 나는 귀찮으면 집어치고, 될 대로 되라며 미뤄두고, 오늘 할 일은 다음주로 미루며, 옷깃을 스미는 봄바람에도 시리다며 투덜대고, 떡볶이나 초콜릿을 무사의 마음으로 참아내는 인내 따위도 없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났으면 단 10분 만에 3등 신민으로 분류되어 징병조차도 못 당했을 터다. 뜻밖의 개이득이랄까.


'성실'이라는 단어와 나의 거리는, 교차 편집으로 반전을 낚시한 <너의 이름은>의 마코토 감독이 야무지게 포장하더라도 마리아나 해구의 최저점과 카일라스 산의 최고점의 거리보다 멀다. 아니, 이것으론 부족한 표현이다. '성실'과 나의 거리는, 그 사이에 수금지화목토천해왕성을 다 집어넣어도 넉넉할 만큼의 거리를 지녔다.


그러나 완벽한 타원형 궤도란 것은 없듯, 나와 '성실'이란 녀석이 견우와 직녀처럼 아주 오랜만에 짧은 만남을 가지게 될 때가 있다. 다른 이들이라면 아마 이때가 성장의 타이밍, 채사장이 말한 <열한계단>의 한 계단쯤은 될 수도 있으나, 유감스러운 것은 '나'라는 단어를 리꼬르하자면, '무능'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 '무능'과 '성실'의 조합, 이 치명적인 졷망행 로맨스가 고비마다 폭풍 역주행이란 아름다운 결과로 도출되곤 했었다.


요즘은 그래서, 아주 잠깐 성실과 부비부비하며 항상 아쉬운 이별과 애타는 마음을 가지고 살 바엔, 그냥 불성실하는 건 어떨까 싶다. 초지일관으로 불성실하면 민폐라도 끼치지 않게 될 수도 있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프로계약도 맺지 못하고 방출당한 에펨 생성선수같은 처지에 놓이게 되겠지만, 생성선수도 게임에서 더이상 그려지지 않는 또다른 스토리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따위 스토리 따위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는다. 내가 그린 스물 여덟이 겨우 이토록 노잼의 연속일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듯, 모든 사람들의 시시콜콜한 스토리를 통틀어 꿀잼과 노잼의 비율이 9:1만 되더라도 꽤 괜찮은 나날이라 불릴 것 같다.


결말을 알고도 재밌는 영화가 진짜배기듯, 대기만성이나 로또당첨 따위의 대박역전은 애초에 성립할 수 없는 세계관에 산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스토리는 이어진다. 재미없어도 어쩔 수 없다. 요즘 쓰고 있는 아이템도 졸라게 재미없지만, 근대에서 넘어온 지 100년은 됐기에 모든 사람들이 스토리를 쓸 자유는 이미 보편화됐다.


자, 그럼, 늘 그렇듯 무한한 일상의 궤도를 잇는 스토리를 쓰러 가볼까. 댁도, 나도, 우리집 고양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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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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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드러지게 피어오른 벚꽃이 흐물흐물한 버찌로 변했을 때쯤인가, 나는 길 건너 약국을 찾았다. 

2000년대 중반에 지어진 듯한, 상가와 원룸을 겸한 전형적인 건물 1층에 자리한 약국의 분위기는 건물의 외관과 다소 이질적이었다. 꽤 깔끔해보이는 건물 디자인에 비해, 약국엔 한약방에서 볼 수 있는 나무 상자들이 가득했고 약사님은 백발이 성성한 어르신이었다. 구매 목적을 생각하면 다소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느릿느릿, 하지만 직업의 자부심을 잃지 않는 태도의 약사님 곁에는 부부인 것이 확실한 사모님이 계셨다. 그리고 난 들어선 지 30초도 되지 않아 그 사모님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약사님을 대하는 사모님의 태도가 지나치게 만화적이었기 때문이다.


사모님은 꼬박꼬박 '약사님' 호칭을 하는 것은 물론, 약사님의 모든 행동에 지근거리에 위치하면서도 약사님의 동선을 전혀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모든 일을 도왔다. 심지어 약봉투에 약을 넣는 것까지. 그냥 사모님 본인이 봉투에 넣어 손님에게 줘도 될 것을, 그냥 직접 카드를 긁고 영수증을 주면 될 것을, 희한하게도 사모님은 일처리는 거의 다 하고 마무리는 꼭 약사님에게 맡겼다. 이건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을 얹는 게 아니라, 그냥 목구멍에 넣어주고 턱을 위 아래 위위 아래로 움직이기만 하면 될 수준의 조력이지 않은가. 어지간해선 볼 수 없는 재밌는 광경에 나는 노부부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구경했다. 동년배의 나이로 보이는 어르신 손님들이 많은 덕에 대기시간은 꽤 길었다.

한참을 구경하자니, 벚꽃은 이미 길바닥의 쓰레기로 변했지만 일본 만화의 흐드러진 벚꽃이 떠올랐다. 벚꽃 아래 시골 저택, 무릎자세로 남편을 대하는 부인과 '고슈진'이란 낯간지러운 말을 써가며 부르는 목소리, 그리고 한없이 저자세인 듯한 태도까지. 건물도, 사람도, 삼성페이로 결제가 되는 포스기까지 모두 시간은 정상으로 흐르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었지만, 이 두 분은 마치 쇼와시대에서 훅 넘어오신 분들 같았다. 분명한 것은 무언가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와는 다른 분위기가 풍겨졌다는 점이다. 

무릎을 꿇고 있는 그림이 떠오르니 괜시레 무냐무냐한 생각이 발그레 떠올랐지만, 지나간 추억에 참교육 당하는 것은 일상을 유지하기에 썩 좋은 일이 아니다. 고개를 휘젓고 계산대로 나아갔다. 구매 목적을 밝히자 약사님께 잠시 잔소리를 들었으나, 어쨌든 무사히 계산을 마치고 문을 나설 때, 약사님은 "잘가요"라며 흔한 동네 인심좋은 할아버지의 목소리를 들려주셨다. 한 발 늦은 타이밍에 "안녕히가세요"라는 사모님의 목소리가 들려 잠시 고개를 돌려보니,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계신다. 황송하나이다, 라는 어투가 어울릴만한 광경이었다.




약사님을 다시 뵌 건 그 근처의 편의점에서였다. 자전거에 무거운 물을 실어가시려는 약사님을 잠시 도와주며 말을 걸 수 있었다. 누군가를 완력으로 도와줄 입장이나 처지가 되지 못한 것은 알지만, 그래도 70이 넘으신 할아버지보단 아주 약간은 나아 체면치레는 간신히 할 수 있었다. 약사님은 박카스를 건네며 잠시 의자에 앉으셨고, 나는 그 때의 궁금했던 바를 물었다.

약국의 개업년도는 무려 1962년. 반세기를 확실히 넘어선 곳이었다. 62년도엔 쏘오련과 천조국의 쿠바 미사일 위기가 불었고, 이탈리아에선 카톨릭의 대개혁을 이끈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렸고, 알제리가 프랑스에서 독립했고, 칠레에선 월드컵이 열렸으며, 우리나라에선 제3공화국이 시작된 해다. 뭐가 됐든 까마득하기만 한 연도다. 그동안 약국의 건물은 두 번 새로 지어졌고, 그 때부터 지금까지 드나드는 단골 손님은 딱 다섯 분만 남아계신단다. 세월의 무게가 느껴지는 어르신의 이야기와 나의 일상에서 공통점이라고는, 약국일도 이젠 지겨워서 빨리 그만두고 싶으시다던 한 마디 밖에 없었다. 젠장, 70살이 넘어도 일은 지겹기만 하다니. 40년 이상 남은 생애가 깜깜한 절벽 같기만 하다.

내가 쇼와의 이야기에 잠시 젖어들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 사모님은 일제강점기가 끝난 후,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은 일본인이셨단다. 정확히 말하면 사모님의 부모님이 돌아가지 않으셨고, 쇼와의 분위기와 풍습은 그 가정에 그대로 남게 되었다. 사모님은 지금도 아주 가끔, 명절정도 되면 유카타를 입으신다고. 약국 개업년도와 결혼식 년도가 같다는 할아버지의 멋쩍은 웃음에서 긴 시간을 함께 해온 부부의 신뢰가 느껴졌다. 

오그라드는 말과 행동이 험난한 세월을 헤쳐오며 쌓인 신뢰가 엑기스 가득 담긴 결과였다는 것, 슬쩍 본 것만으로도 느꼈던 것이나, 어르신과의 짧은 대화에선 느끼다 못해 어디를 잠깐 갔다올만큼 잔뜩 느껴졌다. 무릎을 꿇거나 속옷부터 겉옷까지 입혀주는 행위는 어디까지나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으므로 타파해야 할 풍습으로 여겼던 때도 있었다. 신뢰가 요식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요식이 신뢰를 만드는 척에 지나지 않는 것이므로 없어져야 한다고. 

어디까지 롤플레잉이 전제되어야 하지만, 그리고 그것은 때때로 즐거운 것이지만, '조건없는 대화'라는 말처럼'완벽한 관계'라는 말은 섬뜩하게 공허하다. 맞춰간다는 말도 그렇다. 퍼즐도 아니고 뭘 맞출 수 있는가. 코 앞에 있는 사람의 귀여운 볼을, 적절한 강도와 각도의 손바닥으로 맞추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거늘.

하지만, '고슈진사마'란 말을 들으면, 평소엔 일관되게 ㅣ의 형태를 유지하던 육체가 갑자기 ㅏ가 되는, 몰지각한 사람들도 분명 세상엔 많다. 나는 논외로 치자. 내가 그러한가 그러하지 않은가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어쨌든, 요식으로 공허를 채울 수 있다면 그것도 썩 괜찮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요식이 신뢰를 불러올 수 있다면 그것만큼 좋은 것은 없겠지.



생각해보니, 쇼와라는 연호에는 모든 신뢰가 와장창 무너졌던 기억이 담겨있다. 쇼와에서 신뢰를 도출해내려는 시도 자체가 어리석은 출발이었다. 어르신은 내게 관계가 주는 신뢰와 직업생활의 지루함 두 가지를 알려주셨는데, 떠나실 땐 후자만 남기셨다. 갓물주의 포쓰와 여유란 이런 것인가, 아득한 넘사벽에 다시한번 절망할 수 밖에 없었다.

갓물주의 위대함에 탄복한 나는, 잃어버린 신뢰찾기를 멈추고 하던 잉여짓이나 마저해야겠다는 긍정적인 인간으로 다시 태어났으니, 이거야 말로 메데타시, 메데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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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세 마리  (0) 2017.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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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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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매일 세 마리의 고양이를 만난다. 


개묘차라는 말을 들어본 적은 있지만, 캐릭터가 명확하게 나뉘는 녀석들의 꼬라지를 지켜보자면 자못 우스운 생각이 들다가도, 동네의 대빵이 치즈(돼지)고양이 녀석의 무언가 오만하고 나른하며 사람을 아래로 내려다보는 듯한 눈빛을 마주하면 열폭에 가까운 감정이 샘솟는다. 저 자식, 분명 방금 날 비웃은거지? 라며.


녀석의 이름도 성도 모르지만, 벌써 몇 년을 본 건지 모르겠다. 녀석에게 딱히 밥을 주는 것은 아닌데 어디선가 알아서 잘 주워먹고 다니는지 예의 그 풍만한 풍채는, 단체로 식량난에 허덕여 수령님 만세를 부르는 북한 군인들처럼 날 보면 애교를 부리는 다른 동네 고양이 녀석들과는 달리, 놀랄만큼 줄지도 늘지도 않았다. 나름대로 그 풍채를 유지하는 게 자기관리인듯 했다. 

어디까지나 귀납적인 결론에 지나지 않지만, 아무래도 녀석의 자기관리 비법은 예의 그 게으름이 아닐까 싶다. 녀석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는 것은 극히 희박한 일이라, 한 겨울 담배피러 나와 벌벌 떠는 내 모습을 보며 하품만 쩍쩍 내뱉는 녀석에게 괜한 심술로 위협적인 포즈를 취해봐도 이내 고개를 돌리는 것이 고작이다. 녀석이 몸을 움직이는 때는 주로 두 가지인데, 무언가 먹을 것을 찾으러 가거나, 무언가 먹을 것을 가져온 동네 고양이를 삥 뜯거나. 

전자의 경우는 느릿느릿 슬금슬금, 한없이 잉여에 가까운 숫사자의 엉덩이와 비슷하지만, 후자의 경우는 하이에나를 줘패는 숫사자처럼 무섭기 그지없다. 여기서 다른 고양이가 등장할 때다.


전형적인 코숏인 또다른 동네 길냥이는 치즈대빵 녀석과 번갈아가며 등장한다. 치즈녀석이 산으로 가면 녀석이 반대편에서 뿅하고 튀어나오고, 치즈 녀석이 다시 하산하면 녀석은 금새 괴도 루팡처럼 스르르 사라진다. 치즈 녀석이 킹무성처럼 오만하고 게으르며 느긋느긋해서 사람의 열폭을 돋게 한다면, 녀석은 요리조리 살랑살랑 민첩하게 잘 피해다니는 타입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어느날, 치즈녀석이과 코숏이가 누군가 먹다 버린 참치캔을 두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쓰레빠 질질 끌며 담배피러 나온 나는, 그 즉시 의자를 가져다 앉고 참관을 시작했다. 나는 일반적으로 육중한 캐릭터보단 날렵한 캐릭터를 좋아한다. 물론 더킹오브파이터의 김갑환과 장거한 중에선 장거한을 고르지만, 그 정도를 빼면 날렵한 캐릭터를 응원한다. 당연히 코숏이를 응원하며 패배할 치즈 녀석을 위한 육포를 준비했다.


그러나 40년 직장생활을 마치고 정년퇴직 후 집에서 빈둥빈둥 노닥거리는 어느 아버지같던, 방금 세 끼를 부페를 다녀와 배가 불룩해 움직이는 것도 힘들어 누워있는 내 친구같던, 겨울 방학숙제가 마감일이 내일 앞으로 다가왔지만 그저 빈둥거리며 "몰라 손바닥 맞고 말지"라 넘기던 내 과거같던, 사파리 암사자의 하렘 속에서 하품이나 하다가 관광객이 몰려드면 매너리즘에 가득찬 리액션을 하는 것이 고작인 숫사자같던 그녀석이, 놀랄만큼의 스피드와 광속 냥냥펀치로 코숏이를 제압하더니, 이내 그 육중한 체급으로 코숏이를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신경전으로 끝날 줄 알았는데, 저 녀석들, 꽤 심각하다.


아무튼 육포라는 데우스엑스마키나를 던지며 시합을 종료시켰지만, 코숏이는 나름대로 상처를 입은 듯 했다. 육포를 입에 물고 고새 어디로 사라져버렸다. 다시 치즈녀석을 보니, 이 자식, 언제 그랬냐는 듯 도로 그 게으르고 오만한 표정으로 입에 묻은 참치 기름을 낼름낼름 핥고 있다. 녀석의 태연함에 부아가 치밀어올라 참치캔을 치워버렸지만, 이미 깔끔하다. 


그때야 나는 깨달았다. 녀석이 누굴 줘 팰 때와 뭔가를 쳐묵할 때 만큼은 우사인볼트의 달리기나 아웃사이더의 랩핑보다 빠르다는 걸. 저 오만하고 게으른 모습이 사실은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를 숨기기 위한 위장술이었다는 걸. 몹쓸 자식같으니라구.


그 뒤로 코숏이는, 전보다 더 치즈 녀석을 경계했다. 아니 이젠 치즈가 햇볕 좋은 오후, 따스한 햇살에 취해 조느라 고개를 꾸벅거릴 때, 사정없이 꾸벅거리는 졸린 눈을 어쩌다가 마주할 때면 부리나케 튀어 바람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전혀 힘을 주지 않은 눈빛임에도 누군가를 떨게 하는 힘, 노란치즈돼지녀석에게는 태생적으로 마초적 기질이 있는 게 분명하다. 그것은 가끔씩 나도 희망하는 바이긴 했다.


시간이 좀 지난 후, 가게에서 길냥이를 키우기 시작했다. 물론 내 고양이는 아니다. 만사가 귀찮고 잘 챙길 자신도 없는 나는, 동물을 키우지 않는다. 같은 이유로 연애도 안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두자. 


누구를 잘 챙길 자신은 없지만 치즈돼지녀석과 코숏의 관계가 인상에 남은 뒤로, 나는 새로 만난 길냥이를 눈빛으로 제압하기 위한 여러 시도들을 했다. 8개월이 지났다. 녀석은 나름대로 잘 자라주었다. 오늘 나는, 유난히 까부는 듯한 녀석을 제압하기 위해 눈에 힘을 주고 잔뜩 찡그리며 위엄있는 어조로 명령을 내렸다. 녀석은 말을 잘 들었다. 발 빝에서 식빵을 구우며 나를 올려다 본 채 경청중이었다. 내 마음 속에서 만족함과 흡족함이 피어올랐다. 짜식, 키운 보람있구먼. 내 얘기가 끝나자, 녀석에게서 냥냥펀치가 날아왔다.


고양이도 못 다루는 데 누군가와 원만하고 이상적인 관계를 맺기란 애시당초에 틀렸다는 결론을 새삼 확인하며, 험난한 새디스트의 길을 걸으며 욕망을 성취하기 보다, 가까운 떡볶이 집의 소소한 행복에 감사하며 대충 떼우고 살자는 현자타임에 젖어본다. 아니, 조금 더 깊게 사유해보자면, 고까운 것을 보면 냅다 냥냥펀치를 후리는 녀석들처럼, 아름다운 사랑의 현장을 보면 냅다 죽창을 후리는 열사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도 든다.


생각이 거듭되는 가운데,

치즈녀석의 한심한 표정이 자꾸만 아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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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님과 사모님  (0) 2017.12.27

WRITTEN BY
빵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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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독자를 잃어버린 블로그에 글을 쓴다는 것은 참 버거운 일이다. 항상 타인의 시선에서 자신의 가치를 찾아다니는 못된 습성 탓이다. 오롯이 자신의 의지로 가득찬 그녀의 모습에서 나는, 영원히 다다를 수 없는 아득함을 느꼈다. 때때로 순간을 착각하고 문득 그때의 아득함이 불쑥 일어날 때가 있다. 

음, 독자를 잃어버렸기에 이런 글도 쓸 수 있는 거겠지.



#2


태생적인 게으름이 내면과 외면 구석구석을 가득채운 나는, 어지간해선 플레이리스트를 확 뒤집지 않는다. 1년에 한 두번, 그것도 플레이리스트가 꽉 차 기존의 곡들이 삭제됐다는 메시지가 뜰 때, 그제서야 무거운 손가락을 옮기곤 한다.

지난 가을에 플레이리스트를 정리했다. 무의식적으로 다음 곡 버튼을 누르며 운전하는 습관을 지닌 나는, "비오는 날엔, 모르는 노랜 듣고 싶지 않아"라는 가을방학의 <종이우산>처럼, 비 오는 날이 아니라 특별한 날과 특별하지 않은 날과 특별함과 특별하지 않음 그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 대부분의 나날 모두 모르는 노래가 흘러나오는 것이 영 거북하다. 따라 부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습관이란 게 무서운 거더군." 그래서 유감, 또 유감이다. 일주일에 세 번 이상은 듣는 듯한 김동률의 <동반자>를 들으면, 곡이 끝나고 몇 초 뒤 곱씹는 듯한 표정으로 "가사가 참 좋아."라는 말을 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오른다. 취향이 아니기에 전주가 나오자마자 다음 곡으로 돌리는 자우림의 <파애>는, 힘들 게 대관령 길을 오르던 때 노래에 담긴 배경을 설명해주던 목소리가 떠오른다. 지드래곤의 목소리가 나오기 전에 돌려버리는 아이유의 <팔레트>에선, 그 날 내가 저질렀던 망언과 그녀의 화난 목소리가 떠오른다. 플레이리스트 중에서 가장 이질적인 아티스트인 샘 옥의 <love>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관계로 접어들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찌질함의 나락으로 빠져들던 내가 떠오른다. 우리 가족 모두가 좋아하게 된 넬의 <Standing in the rain>에선, "우울한 날엔 어떤 노래를 들어?"라며 이미 수차례 물었던 질문을 아무 생각없이 다시 건네던 끔찍한 광경이 떠오른다. 윤종신에 대한 기사를 쓰면서 내내 듣던 <좋니>는, 마지막 스캣 부분을 왜 마저 부르지 않냐며 농담을 건네던 그녀의 말과 함께, 또 역시 고속도로 안에서 윤종신의 찌질한 노래들이 흘러나오자 "넌 항상 이렇게 짝사랑하는 노래만 듣네?"라는 그녀의 예리한 지적에 대책없이 바보같은 대응으로 일삼던 때가 떠오른다. 듣기가 두려워진 짙은의 <안개>는, 희뿌연 바다에서 나즈막히 읊조리던 나와, "적절한 선곡이군."이라며 최대한의 칭찬을 하던 그녀가 떠오른다. 

조각조각 흩어진 기억들이 깜빡이도 안 켜고 불쑥 튀어나오며 나를 놀래킬 때가 있다. 정적에 가까웠던 일상에 균열이 생기고 익숙한 자괴감이 새어 들어온다. 그때에나 잘 기억하면서 살았을 것이지, 무의미하다는 표현을 붙이기에 그 잉크가 아까울 무게의 무의미한 되새김질. 그러나 항상 쓰는 성찰의 글은 진정성을 잃고 동어의 반복에 빠졌고, 그 인지부조화로 인해 결국 파국을 맞았던 것 모르지 않으나, 모르지 않으나, 모르지 않으나, 

다음 문장이 떠오르지 않을 만큼 할 말이 없다.


#3


익숙한 곡에서 튀어나오는 기억에 몸서리치고, 고개를 뒤흔들다가, 그래도 안 되면 "연락 좀 해!"라며 소리치던, 마지막 인사로는 정말 최악이었던 그날 바로 다시 담배를 물었던 때처럼 라이터를 들고 바깥으로 나선다. 그러나 하루에 반갑 이상은 안 피겠다던 쓸모없는 다짐 때문인지, 기억이 제멋대로 뛰쳐나오는 횟수에 비해 열 개비는 턱없이 부족하기에 다소 애로사항이 꽃핀다. 

익숙하지 패턴이지만 다양한 공간에서 튀어나오는 애로사항이기에 처음엔 적응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무던해지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던 치졸한 신조는 어디갔는지 조소만 흘러나온다. 그럼에도, 김윤아의 <비밀의 정원>은 참 받아들이기 어렵다.

어느날 그녀는, 그녀 답지 않게 "자우림 노래 중에 어떤 게 젤 좋아?"라고 물어왔다. 참 소중한 질문이었는데, 나는 "<미안해 널 미워해>도 좋고, <스물 다섯, 스물 하나>도 좋고. 근데 김윤아 솔로 앨범이 더 취향에 맞는 것 같아"라는, 번뜩임이라곤 1g도 없는 시시한 답변을 내놓고야 말았다. 말을 뱉자 마자 순간 당황했던 것 같다. 그러나 바로 떠오르는 노래가 없었다. 나는, 그녀와 자우림과 김윤아에 대한 이야기를 그토록 많이 나눴음에도 불구, 김동률 노래를 줄줄이 읊을 때처럼 답변하지 못했다. 당황했다. 

<비밀의 정원>은, 조예는 깊지 않으나 10초 정도의 멜로디에도 가슴 속에서 바닷바람이 불어오며 가보지 않은 곳에 아이러니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아이리쉬 풍 노래다. 이 곡을 얘기했어야 했다. 바로 나왔어야 했다. 그러나 그때 내 머릿속에 이 노래는 까마득히 지워져있었다. 

그 대화는 지극히 상징적이었다. 나는 딱, 거기까지였다. 나라는 개인이 가진 내면의 완성도도, 좋아하는 것을 위한 책임도, 사랑을 이야기할 만한 그릇도, 딱 거기까지였다. 그녀가 "잘 안 맞을 뿐이야."라며 호의적으로 해석해준 이유를 뜯어보면, 감정적 자해를 수백번 저질러도 지워지지 않을, 거기까지에 그쳐버린 나의 최대치에 맞닿아있다. 

고작, 고작이라고 밖에 표현하지 못한다는 것이 퍽 슬프다. 조금 더 나은 인간이 되지 못한, 되지 않은 사실이 퍽 애닳다.


#3


며칠전인가, 핸드폰 일정에 그녀의 생일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삭제하는 것조차 귀찮은, 아니, 확인하는 것이 두려워 미뤄두기만 했는데, 오늘 낮 12시에 그녀의 생일이 화면에 가득차 요란한 알람을 울린다. 그렇게 강조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는 것인데, 이것을 설정해놓은 자식을 찾아서 흠씬 두들겨패주고 싶다. 그 녀석이 과거의 나라는 것이 안타깝지만.

고민했다. '생일 축하한다는 말 정도는 할 수 있지도 않을까?' 생일을 진심으로 챙기고 싶었던 과거의 나는 이미 역사가 되어버렸지만, 역사와 완전히 분리하는 것은 성공하지 못했기에 옅은 설레임의 감정이 주책맞게 알싸히 퍼졌다. 하지만 그녀는 분명히 말했다. "헤어진 사이에 다시 연락하고 그러는 건 좀 아니지 않을까?" 차분하지만, 단호하게. 이리도 생생히 기억이 나는데, 모른 척 하고 멍청한 짓을 저지를 수는 없는 일이다.

그깟 연락이 뭐 대수라 할 수도 있지만, 어쩌면 나는 그녀에게 있어 '착오'나 '오류'였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오래전부터 들었다. 그렇다. 그녀가 내게 '오만하다'고 표현했던, 겸손하지 못한 자의식 과잉이 분명하다. 하지만 일말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는 일이다. 사소한 연락에 그녀의 평온함에 아주 자그마한 생채기, 아니, 불결함이라도 묻는다면 옳지 않은 일이다.

이것 저것 다 따지다가 모든 것을 놓쳐버린 것에서, 나는 어떠한 생산적인 결론도 얻지 못했다. 무신론과 다신론 사이에서 부정합한 줄타기를 하는 나는, 그래왔듯 속으로 그녀의 생일을 축하했다. 그 외 기타 조잡하고 쓰잘 데 없는 기원들과 함께. 어둠이 짙게 내린 이 시간 그 행위를 되새겨보니, 찌질함으로 점칠된 수많은 에피소드 중에서도 제법 손가락에 꼽을만한 짓거리임이 분명하다.

그래도 축하하고 싶은 걸 낸들 어쩌라고. 태어나 스쳐지났다 하더라도 이렇게 값진 기억을 남겨준 것에 감사한 것을 어찌하냐고.

하여, 그것 밖에 안 되는 인간인 것을 어찌하리오.


#4

괴롭지 않다고 얘기하기엔 다소간 참작의 여지는 있다고 생각한다. 잊었다고 말 하기엔 거짓의 비율이 크다. 일상엔 여러모로 타격이 생겼고, 독자를 잃어버린 글쓰기 역시 생기가 부족하다. <요괴봉투>는 내년 하반기에나 다시 쓰게 되지 않을까 싶다. 어차피 망한 글인데 놓지는 못한다. 머리를 잘라볼까 했다. 그러나 또 그럴만한 결기도 없다. <사랑, 지나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닐 마음의 사치>라지만, 사치스러운 기억을 도저히 놓지 못하겠다. 

그래. 퍽 괴롭다. 꽤 힘들다. 썩 괜찮지 않다. 일상에 그녀가 다시 들어오는 머저리같은 상상을 때론 하기도 한다. 괴롭고 그리워하는 것이야 나의 자유아니겠는가. 그 정도야 허용될 만한 찌질함이지 않은가.

하지만 추잡함만을 야기할 그 모든 행동을 절제하고 있다는 것을 보면, 그나마 최소한의 양심은 있는 인간은 되는 듯하다. 



0.

다시 읽어보니, 그녀의 입장을 고려하는 구석이라곤 눈꼽만큼도 보이지 않는 이 글에서, 최소한의 양심을 찾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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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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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꿈을 묻고 온 지 벌써 1년이 되었다. 자신의 마음조차 헤아릴 줄 모르던 나는, 저들에게 우문을 던지며 답을 구했다. 돌이켜보면, 그랬다. 나는 사소한 수학 문제를 풀 때에도 어떻게든 답을 스스로 찾아내려는 끈질긴 시도를 도외시한 채, 답지가 나오는 챕터에 손가락을 넣고 문제와 답지의 페이지를 와리가리하며 열심히 풀이를 외웠다. 그렇게 숙제는 대충 떼웠는데, 이름이 불러져 칠판에 풀이를 써갈 때엔 영락없이 답지를 봤다는 사실이 대뽀록, 천인공노할 짓거리를 저지른 학생으로 낙인받고 모두의 비웃음을 사곤 했다. 그 끝은 항상 나머지 공부로 귀결되곤 했으니, 모두가 떠난 교실, 창문을 파고드는 석양의 잔인한 조롱이 나를 비웃곤 했다. 

벌써 십여 년이 훨씬 지난 일이나, 인간이 대게 그렇듯 습관이란건 쉬이 바뀌지 않는 법이다. 롤러코스터 같은 인생사에도 늘 습관만이 자리하니, '습관이란 게 무서운거더군'이라 노래하던 롤러코스터의 목소리가 놀림처럼 들리는 것은 오로지 자격지심의 때문이 아니라, 세상이 애초부터 글러먹었기 때문이라며 우격다짐하고 있다.





#2


시간은 흐르고 섬도 매년 모습이 변한다. 한 때 찰랑이는 단발을 휘날리며 눈가를 찌르는 머리칼이 성가셔 "이까짓 머리카락, 확 잘라 버릴까" 고민하던 한 청년이, 그러나 사실은 그닥 멋잇게 보이지도 않지만 나름의 가오를 유지하기 위해 끝끝내 자신의 헤어스타일을 고수하지만, 어느세 세월의 풍파를 정면으로 맞아버려 빼곡히 덮여있던 머리카락이 수줍은 살색을 드러내며 훤해지듯, 섬도 매년 억새의 자리를 잃고 앙상한 대지를 드러내고 있다. 

자연현상을 보고 점을 치는 것은 아주 오래된 행위이다. 문명이라 부를 만한 것이 출현한 것보다 훨씬 오래전 일이며, 어쩌면 집단을 이루고 농사지를 짓던 것보다 더 오래된 일이라는 근거도 얼핏 눈에 띈다. 대체로 신의 행위라 여겨졌던 자연의 변화를 통해 자신의 삶을 가늠하곤 하던 닝겐의 모습은, 알파고 성님이 곧 세계를 지배할 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확산되는 이 때, 한쪽으로는 알파고에 충성충성 댓글을 쓰면서도, 다른 한 쪽으로는 역시 그와 유사한 행위를 하고 있다. 어쩌면, 한 3백년 쯤 지난 뒤 지금의 이 시기를 인공지능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라 지칭할 지도 모른다.

만약 섬의 변화를 통해 나의 미래를 예견할 수 있다면, 풍부했던 감성과 모두를 품을 수 있을 듯한 넉넉한 품을 가진 한 소년이 현대 사회의 쓰라림과 이별의 상처 끝에 점차 헐벗은 마음을 지니게 되는 것이라는 해석을 하나 할 수 있고, 또다른 해석으로는 곧 탈모인의 대열에 합류할 지도 모르겠다는 것도 가능하다.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내가 애타게 유전자를 추적한 결과로는 탈모인은 없다는 것이 밝혀졌으므로 조금이나마 위안을 삼아본다. 술에 취한 가족분들 중 한 분이 선조 중에 대머리, 그것도 대머리 동아리가 있다면 회장을 넘어 고문급의 명성을 지닐 수 있을 만큼의 대머리였다는 기절초풍할 사실을 살짝 흘린 것도 같으나, 기분탓이라 흘러넘겼기에 그 사소한 말은 고려하지 않기로 했다.

좌우지간, 모든 것이 메말라 가고 있다는 말씀 되시겠다. 아, 딱 하나, 눈치없이 늘어나는 몹쓸 뱃살 빼고.




#3

엄혹한 시대를 살았던 한 시인은,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단다. 사람은 자기 주제를 잘 알아야 한다는, 초등학교 시절 칠판에 학습주제를 적어놓다가 갑자기 일장연설을 하시던 어떤 쌤의 말씀에서 배웠듯, 나는 내 주제를 잘 아는 사람이므로 시인은 커녕 글 쓰는 사람이라 소개하기에도 마음 한 켠에서 일어나는 감정을 지울 수가 없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난데없지만 면목동을 한 큐에 날려버릴 수 있을만큼의 파괴력을 지닌 면목없음과, 맹자가 다시 태어나 인간의 모든 감정은 사실 수오지심에서 비롯된다며 자신의 사상을 재편할 만큼의 부끄러움이 있다. 하지만 윤동주도 맹자도 면목동 사람들도 다 닝겐이듯, 나 역시 잎새 대신 억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운 것은 사실이다. 괴로운 나머지 괴력몬이 되어 이 드넓은 억새밭을 다 갈아 엎고 싶어지기도 한다. 그녀를 괴롭혔던 죄, 여기에서 받는 것인가.


메말라 가는 것 중에서 누가 쫓아오지도 않는데 헐레벌떡 스스로 다 벗어제끼며 도망가는 것들 중에 선두를 이루는 것이 두 가지 있는데, 그 중 두번째가 글솜씨이다. 항의하지 않아도 좋다. 나의 글솜씨는 단 한번도 공인을 받아본 적이 없다. 만약 글솜씨를 자격시험으로 측정할 수 있다면, 낙방에 낙방을 거듭해 한 60년 쯤 지나면 '최고령 응시자'로 신문에 이름을 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저 게임이나 즐길 줄 아는 친구들중에서 좀 쓰는 편에 속했던, 그러나 백일장만 나가면 번번히 지도 선생의 '염세적이다.', '우울하다.'는 평을 받고 억지로 수정, 결국 이도 저도 아닌 작품을 내곤 주최측에게서 표절 의심을 받곤 하던 글솜씨로는 아무래도 세상에 이름을 내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렇다고 꼭 세상에 이름을 낼 만한 솜씨를 지닌 사람만 글을 쓰라는 법은 없지 않는가. 니체와 모짜르트는 인류가 절멸할 때까지도 이름을 남길 만한 업적을 쌓았다지만, 그 둘에 미치지 못한 2인자들의 작품 따위 아무래도 알 게 뭐냐라지만,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2인자의 자리까지도 미치지 못하지만, 모든 인생엔 나름의 지옥이 있는 법이며 그래서 또 아름답기도 한 법이다. 

아아, 완연한 아름다움을 피우고 싶어라! 묵직한 침묵 속에서 강려크한 절규를 내뱉으니, 저 비루한 억새들, 날 두고 이래라 저래라 가르칠 때는 언제고 죄다 쫄아서 몸을 뉘인다. 하늘거리며 풀썩 눕는 꼴이 꼭 격렬히 아무 것도 안 하고 싶어하는 고양이, 혹은 그런 내 모습 같다. 하늘거리며 아무 것도 하기 싫지만, 그러나 하늘거릴 수 밖에 없는 세파에 어리둥절, 우왕좌왕, 좌충우돌하는 것 마저 꼭 닮았다. 어찌하여 너희들은, 내가 멍청할 때엔 현명하고, 내가 현명해지는 척 할 때엔 멍청해지는 것이더냐. 스핑크스 앞에서도 툭툭 묘답을 내뱉을 것만 같던 지난 날의 녀석들은 자식 농사를 망쳤는지, 아무런 답이 없다.

답을 내지 못하는 것도, 답이 없는 것도, 이것도 저것도 다 맞는 답을 내어 답답해지는 것도, 뭐든지 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괘씸한 녀석들이로고.





#4


사건은 항상 생활의 불편을 불러온다. 편안한 생활이란 건 무사안일한 일과를 전제로 놓고 있기에, 사건이 성격이 즐거움이든 우울함이든 간에 편안한 생활을 담보해 주지 못한다. 아주 높은 비율로 후자의 가능성이 높은 것은 썩 반갑지만은 않은 소식이나, 어찌하여 닝겐은 이 모양 이 꼴로 진화 되어온 것인지 아프리카에서 발굴된 이브 유골을 마주해 욕을 퍼붓고 싶다. 도대체, 뭐 때문에, 어찌하여, 닝겐은 기쁨에는 그다지도 빠르게 시무룩해지거늘, 우울함의 총량은 감정의 골짜기에 쌓이고 쌓여 도저히 손도 못 댈 지경에 이르러서도, 당최 익숙해지지도 무감각해지지도 식지도 않는 것일쏘냐! 이브 할머니께선 길 가다 뺨 맞은 것처럼 어처구니 없어하실 지도 모르겠지만, 할머니는 할머니 대로 나름의 조상님들에게 항의하시면 될 것이다. 억울함을 해소하는 것으로는 자고로 남 탓이 제일이다.

고로, 내가 요즘에 조악하고, 한심하고, 엉망이며, 낙서같고, 비루하며, 고루하고, 졸렬하고, 낙서 수준의 글들만 써 제끼고 있는 것은 오로지 그녀 탓이라는 훌륭한 결론에 도달했다. 억새들에게 동의를 구하자, 사정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보검을 꺼낸다. 으음, 만사가 편안해졌다. 삼라만상에 피어나는 찰나의 감정들이란 모조리 호로몬의 작용이라는 방식으로 설명해버리면, 혹은, 우주구급, 혹은 육도윤회와 일만 번 전의 전생 을 들고 나오면 이 생에 피어나는 괴로움 따위 모조리 한 조각 티끌에 지나지 않다는 사실에 도달한다. 그 드넓은 국부 은하군조차 라니아케아 초은하단의 한 조각 줄기에 지나지 않으며, 라니아케아 초은하단은 아예 관측가능한 영역을 홀라당 벗어나 버리지 않던가.

그렇게 시야를 무제한으로 넓혀보지만, 불변하는 사실이 단 하나 있다. 나는 바늘로 살짝 찔러도 일본도를 맞은 조선의 갑사처럼 비통한 마음을 못 이겨 떼굴떼굴 그르는 강직한 마음의 소유자라는 것이다. 그런 정상을 참작할 만한 사유로 인해, 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정상의 궤도에 오르지 못하고 여전히 어느 중력에 메여야 할 지 알지 못한 채, 불규칙한 궤도를 그리며 언제 또다시 태양을 찾아 뵐 수 있을런지 기약없는 여행을 떠나는, 기약없이 떠나다가 어느 단단한 행성에 부딪히거나, 혹은 조금씩 자신의 존재를 태양풍에게 빼앗겨 소멸할지 모르는 혜성처럼 되버린 삶이여, 아아, 훌륭하다. 마땅한 단골집을 잃어 떡볶이를 먹지 못하는 요즈음의 나이므로, 바늘로 찌른 듯한 통증에 다소간의 에로도 겪지 못하고 애로를 겪는 것을 감싸주어야 한다. 답을 내지 못한다 하여도 감싸주어야 하는 것이다. 

양심이 있는 존재라면 피어오르는 한심함 따위, 만인에 대해 투쟁하듯 뿌리채 뽑아버리면 그만인 것이다.



#5

그러나 모든 것을 뿌리채 뽑는다 하여도 달라지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안다. 달라지지 않았기에 머무르고만 있단 것도 안다. 놓친 까닭엔 다 이유가 있다. 걷지 않으면 나아갈 수 없다는 것도 안다. 아는 것에서 나아가지 못해 머무르지 있는 것도 안다. 안다. 다 안다. 알기만 하고 모르기만 하니 매년 이곳에 되돌아 온다는 것도 안다. 아는 것들이라곤 아무렇지 않게 엄청난 것을 해내버리는 책 속의 사람들이지만, 나는 그것에서 아무 것도 제대로 알지 못한다. 필부와 영웅을 가르는 것은 한 끗 차이지만, 각자의 앎은 그리 큰 차이가 없다는 것도 안다. 

그리나 아는 것만으로는 답을 낼 수도, 구할 자격도 없었다. 녀석들이 고개를 푹 숙이며 모르쇠로 일관했던 것도 알았다. 알았으나, 나는 항변할 수 밖에 없었다. 이치에, 논리에 모두 맞는 것이라고 다 납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블랙컨슈머에게도 나름의 사정이 있다. 그리하여 나는, 타인을 비판할 처지가 되지 못함을 선택했다.

올해의 섬은, 그 낯빛이 유난히 흙색이었다. 다시금 꿈을 묻다가, 꿈을 묻었다. 


돌아오는 길은 평온한 일상에서 한 치도 벗어남이 없는 마음이었다. 허전한 곳은 다시금 떡볶이로 채워야 겠다. 당장은 찾지 못한 단골이 될 집을 어서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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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빵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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