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개의 달 중에서 하나가 휘리릭 지나는 시간동안, 동호회를 빙자한 그녀와의 거리는 조금도 좁혀지지 않았다. 그녀의 머리칼 만큼이나 늘어가는 것은 비루한 기타실력 뿐, 처음 그녀를 대할 때 느꼈던 어색함과 어려움은 상호 간에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오로지 순수한 음악에의 열정으로 가입한 동호회의 참 뜻을 구현하고 있는 이, 나뿐이리라. 삿되고 어리석은 욕심이 끼어들어 늘 그래왔듯 구렁텅이로 나자빠지기를 바랬을 봉투 녀석의 계략을 능히 파쇄할만큼, 정말로 기타만 열심히 치고 있었다. 

그게 나쁘다는 것은 아니고. 아무튼 뭐 그렇다.

한 달이면 사랑이 익기에 충분한 시간이라는 듯, 신촌 버뮤다 삼각지대로 사라지는 두 명의 사람들처럼, 생업보다 취미를 더 중히 여겨 커트 코베인보다 더 음악에 미쳐 있는 듯한 열정맨들조차도, '원래 거기에 있었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소리소문없이 사라졌다. 남성회원 한 명이 사라지면, 항상 그 다음주엔 여성회원이 사라졌다. 

고작 한 달이 지났을 뿐이다. 잉크로 사랑이란 단어를 쓰면 적어도 석 달은 지나야 제대로 마르지 않겠나. 도대체 사람 마음이란 것이 어쩌다가 이토록 가벼운 구름같이 되었나! 요즘 세태에 통탄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녀와 함께 정말로 기타만 쳐대는 무사수행 중이었으므로, 지조없는 사람들의 갈지자 행보에 흔들리지 않았었다. 적어도 그저께까지는.

그저께, 또 한 명의 남성회원이 사라졌다. 충격에 충격을 금할 수 없게도. 회식자리에서 되도 않는 아재개그를 남발하며 처음 보는 이성으로부터 야유를 얻어 먹은 그 남성회원이 사라졌다. 나는 감기이길 빌었다. 지독한 독감에 걸려 불참하게 된 것이기를...! 빨리 완쾌되어 웃는 낯으로 다시 나와 자리를 빛내주기를...! 봉투 녀석에게 이 얘기를 하자, 녀석은 그 지조없는 사내를 비난하기는 커녕 오히려 내게 

"병 주고 약 주는 기도네. 인성이 그 모양이니 너만 남는게지."

라며 '가장 위험한 적은 언제나 내부에 있다.'는 말을 증명했다. 그 남성회원의 기타실력이 일취월장하여 모든 회원들의 선망을 받게 되고, 그리하여 나조차도 떠난 동호회를 끝까지 지키는 존재로써 우뚝 서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우러난 기도를 그런식으로 매도하는 것은 옳지 못하나, 오늘에 이르러서는 다소간 생각이 바뀌었다. 왜냐하면, 그 남성회원은 물론, 한 여성회원조차 불참했기 때문이다.

나는, 외계인들이 지구인을 납치하고 돌아다닌다는 음모론을 진지하게 믿어보기로 결심했다. 이 편이 아니면 눈 앞에서 벌어진 기이한 상황을 설명할 수가 없다. 여성회원들이 내게 이성적인 관심이 눈꼽만큼도 없는 것은 지극히 이해한다. 내가 여성이었어도 이런 닝겐, 퍽 가까이하고 싶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그 충격적인 아재개그 사내를, 왜, 도대체, 어찌하여...!

젖어드는 황망함에 나는, 피크를 집었던 손을 내리고 리미트가 풀린 멍때림을 시전했다.



"흠,흠."

"..."

"뭐하세요?"

"아,네?"

늘 그렇듯, 가장 늦게 모임에 온 그녀는 내 앞에 섰다. 그동안 그녀와의 대화는 지극히 필요한 수준에서만 이뤄졌다. 만나고, 연습한 것을 서로 확인하고, 약간의 평과 함께, 빠이 빠이. 사람들이 회식을 하건 노래방을 가건, 그런 건 그녀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때로는 참석할 때도 있었지만, 조용히 술만 스트레이트로 넘긴다든가, 뮤비가 흘러나오는 노래방 화면을 응시하며 가사를 곱씹는듯한 모습으로 일관하기만 했다. 

그녀가 오기만을 목 빼들고 기다리던 내가, 막상 그녀가 들어서는 순간 모른 척하며 기타를 치고 있으면, 다가와 "안녕하세요?"란 인사와 함께 검은 머리칼을 다시금 흩뿌리며 자리에 앉는 것이 한 달간의 반복이었다. "뭐하세요?"란 인사가 다분히 낯설었다.

"어, 음. 사람이 많이 줄어서요."

"어디요? 거리에?"

"아뇨. 동호회에요."

"...그런가?"

그런가?가 아니다. 자리마다 가득했던 첫 모임에 비해 드문드문 보이는 이 여백은, 자신이 탈모임을 확인 한 후 매일 매일 머리숱을 확인할 때마다 드는 황량함, 아마 그것에 가까울 것이다.

"뭐, 다들 사정이 있나보죠."

그녀는 무심한 듯 짧은 논평과 함께, 자리에 앉아 기타를 꺼낸 뒤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리곤 나를 지긋이 바라봤다.

"...뭐하세요?"

두 번째 뭐하세요. 질책의 뉘앙스가 살짝 담겨 있는 뭐하세요였다.

"아, 맞다. 잠시만요."

내려두었던 피크를 집어들고 인트로를 연주하기 위해 손을 가다듬었다. 그러나, 수면마취상태에서 깨어날 때 저 멀리에서 의식이 성큼 돌아오는 때처럼, 빅뱅의 흔적을 담은 우주배경복사가 티비 안테나에까지 흘러들어와 치지직 소리를 낼 때처럼, 며칠간 강행연습에 매진했던 코드도 주법도 새까매졌다.

더듬더듬, 애꿏은 am 코드만 쥐어뜯고 있는 내 모습을 계속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녀는, 기타를 내려놓더니 다시금 말했다.

"뭐. 하. 세. 요?"

약간의 질책에서 완벽한 힐난으로 변한 어조에 식은 땀이 솟아났다.

"아, 저, 그...갑자기, 생각이 안 나네요. 왜 이러지? 아이 참,"

"흠"

"아니, 연습 엄청 열심히 했는데. 왜 이럴까요? 왜 이러죠?"

"글쎄요 저한테 물어보시면."

"아, 그렇죠. 왜 생각이 안 나지."

쩔쩔대는 나를 관찰하던 그녀는, 기타를 가방에 넣기 시작하며 말했다.

"생각 안 나시면, 다음에 하죠 뭐"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기타를 챙겨넣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갑자기 초조함이란 녀석이 저 옛날 폼페이를 뒤덮기 위해 육중하면서도 매서운 속도로 강림하시는 화산재처럼, 혹은 어린 날 서해바다에서 신나게 놀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밀물을 가득찼을 때처럼, 나에게 밀려 들어왔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서로를 공전하던 두 행성 사이에 문과는 모를 힘의 변화 탓에 한 쪽 행성이 이탈, 두 행성은 다시는 함께 할 수 없었단다. 라며 어느 쌍성의 변천과정을 설명해주는 지구과학 시간때처럼 나와 그녀의 관계도 그리될지 모르겠다는 순간적인 위기감이 마구 쏟아져내렸다.

무슨 말을 하지. 어떤 말을 하지. 뭐라도 입 밖에 내야 하겠는데. 뭐라고 하지.

그러나 내 입에서 불쑥 튀어나온 말은, 결국 그녀에게서 비롯된 것 뿐이었다.

"저기, 주말엔 보통 뭐하세요?"

아아, 봉투 녀석이 이 광경을 보았다면, 삼일 간 먹지도 마시지도 않은 채 배를 치며 웃었을 것이다. 너무 웃어제끼다 못해 봉투가 찢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뭐하세요라고 물은 그녀에게 뭐하세요로 답하다니, 자신의 멍청함을 새삼스럽게 마주하는 것은 퍽 괴로운 일이다.

하지만 그녀는 잠시간 생각해보더니, 말을 이었다.

"별 일 없어요."

"아 그래요?"

또다시 정적.

"그러면, 저기, 영화라도 보실래요?"

아아, 멍청함이 된장처럼 푹 익어간다. 통제권을 잃어버린 입이 난을 일으키는데, 조정이 자리잡은 뇌는 초조함이란 녀석이 국정농단을 펼치고 있다. 익숙한 결말과 응답이 예상되었다. 오랜 단골 손님인 패배감이란 분이 저 멀리서 손짓하며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 때. 그녀는

"그러죠."

라더니,

"연습한 건 이제 생각나요?"

라는 것이었다.

대오각성이란 것이 이런 느낌에 닿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녀가 내쉰 물음표 음절이 끝나는 순간, 환하게 세상이 밝아지며 지워졌던 음표들이 머릿속에서 춤췄다. 신기한 일이었다. 기이한 일이었다. 

"어, 그..러네요? 이제 생각나요."

그제서야 나는, 연습했던 그 곡을 연주할 수 있었다. 1절이 끝나기 전에 그녀는 다시 자리에 앉았고, 나는 처음으로 한번도 틀리지 않고 완곡을 해냈다. 물론 그녀 역시 항상 그래왔듯, 나보다 훨씬 훌륭한 연주를 뽐냈고, 나는 다시 좌절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주말의 약속을 위해 연락처를 받아온 것이 평소와는 다른 점이었다.

첨언하자면, "한번도 틀리지 않고 완곡을 해냈다."라는 논평을 듣자마자 봉투 녀석은 "구라치지마"란 말로 받아쳐냈다. 그렇다해도 썩 괜찮은 하루여서 굳이 토달지 않았다.

사라졌던 아재 개그가 제발 다시 돌아오길 바랬던 그 순간을 생각하자면, 참으로 썩 괜찮은 하루가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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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빵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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