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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녀가 있다.

그녀를 처음 만난 곳은 어두컴컴한 기숙사 지하의 코인 노래방이었다. 첫 만남에도 당당한 쌩얼로 노래하는 그녀의 모습이 이채로웠지만, 풋풋한 웃음기를 머금은 봄 햇살을 닮은 그녀의 관악기 같은 음색(오보에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에 좋은 사람이라는 근거 없는 확신이 들었다. 지금도, 호흡과 호흡 사이에서 흘러 나오는 그녀의 목소리라면 쉬이 얻을 수 없는 포근함이 느껴지곤 한다. 목소리만큼이나 성격도 역시 그러해서, 자그마한 때깔 조차도 견디지 못할 것 같은 마음씨를 견뎠다. 약간의 취기에도 알프스 산맥의 소녀처럼 발그레해진 볼과 눈으로 상대를 바라본다. 미소가 아름다운 까닭은 다만 그것이 취한 눈으로 바라본 것이 아니라, 그녀의 마음씨가 눈빛으로 전해지기 때문일 것이다. 

여리기만 할 것 같은 그녀의 말버릇과는 달리, 내면에는 한 줄기 강인한 기둥이 솟아있어, 견뎌내기 어려울 가혹한 고통이 밀려와도 어떻게든, 어떻게든 버텨낸다. 비극의 여주인공이 되어도 그 끝은 해피엔딩일 것이다. 그녀는 자신을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 자신을 사랑할 줄 알아서 타인에게 아낌없이 주는 법도 아는 사람. 그래서 동방에 흐르는 공기를 읽는 법을 안다. 자신의 울타리에 있는 사람이라면, 그래서 손을 건네기로 결심했다면, 있는 힘껏 시선을 던지고 손을 뻗어 작고 여린 손으로 강인하게 붙잡는다.

작은 코노에서 노래하다 울 뻔 하기도 하는 그 여린 마음씨지만, 결코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겠다는 곧고 따스한 마음을 가졌기에 오지랖 넓은 나로썬 때때로 걱정이 된다. 거칠고 야속한 세상 살이가 그저 그녀의 그 곧은 마음을 흐리게 하지 않길 바라마지만, 그녀의 내면 안에 있는 그 강인한 기둥이 결코 그녀를 심연 속으로 빠뜨리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그녀의 삶은 그래서 더 따스해질 것이다.

계절이 바뀌고 또 바뀌어 다음 가을이 오면, 나는 파아란 하늘 아래 한 줌씩 떨어지는 낙엽 사이로 걷는 그녀의 뒷모습을 어쩌면 보지 못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소소한 시간 틈새로 주고 받는 농담 안에서 그녀라는 사람의 농도를 마주할 때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적어도 나는, 그녀의 실수로 인해, 그 어떤 이보다 그녀에게 잘 맞을 봄의 그녀를 마주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소라의 Track-3을 좋아한다는 그녀에게 가장 어울리는 단어는, Lovely일 것이다. 이소라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치고 나쁜 사람은 아직 보지 못했다. 나의 첫인상처럼, 그녀는 좋은 사람이다.

 

#2

그가 있다.

그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를 살갑게 맞아 주었다. 10살이나 어린 아이들과 함께 동아리를 함께 한다는 것 자체가 모험이나 다름 없던 일이었는데, 그가 없었다면 나의 학교 생활은 어떻게 굴러 갔을지 잘 그려지지 않는다. 그가 가진 그 쾌활함, 친밀함, 타인의 입장을 고려하고자 노력하는 태도, 그리고 최대한 말을 골라 의도치 않게 전해질 수 있는 상처를 피하려 하는 모습은 뭇 사람들에게 그의 이름 석자가 주는 의미가 어떤 것일지 단박에 눈치채게 했다.

그의 곰 같은 푸근한 외모 - 불곰이나 북극곰은 아니고, 아마 지리산 반달곰 정도 되는 것 같다 - 는 상대가 어떤 이라도 마음을 열고 대화할 수 있을 것만 같은 편안함을 준다. 비단 외모 때문만은 아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상대의 대화 템포를 따라가려는, 그것이 심지어 자신의 생각과 완전히 다른 것이라 할지라도, 그의 화법이 그가 가진 가장 빛나는 부분이다. 나는 아직까지 그가 화를 내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때론 짜증을 내지만, 내가 내는 짜증에 비하면 투정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그가 겪은 최근의 고된 경험에 악영향을 끼친 것이 아닌가 하는 죄책감이 사라지지 않는다. 비록 한바탕 시원하게 울지도, 혹은 미친듯이 상대의 욕을 하지도 않는, 그저 아연한 표정으로 때론 침묵, 때론 말더듬을 반복하며 고통을 겪어내는 그의 모습은 아직 어른이 될 준비가 되지 않는 아이의 등을 떠민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들게 했다. 그러나 이내 곧, 기숙사 1층 소파에 나란히 앉아, 그답지 않게 쉴새없이 푸념하는 그의 새삼스러운 모습을 보곤, 한꺼풀 허물을 벗어내는 나비의 모습을 보았다. 비록 그는 고통스러웠을 것이나, 나는 받아내고 감내하고 이겨내려는 그의 모습이 잠깐 멋있게 보였다.

나는 이제 몇달 뒤면, 절망적일 정도로 시력이 좋지 않은 나조차도 100m 밖에서 알아볼 수 있는 그의 시그니처 뒷모습을 바라보지 못한다. 어쩌면 그를 다시 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걱정하지 않는다. 비록 때론 서툴고, 비록 때론 엉성하며, 때론 꼼꼼치 못하지만, 뭇 사람들과 함께 손과 손을 맞잡으며 그 어디에 있더라도 잘 헤쳐나갈 것을 의심할 수 없다. 그의 우직한 노래 스타일처럼, 그의 내일도 그렇게 흘러갈 것이다.

매번 힘들어 하지만 매번 재도전하는 멜로망스의 노래처럼, 그에게 가장 어울리는 단어는 Pure일 것이다. 잘난 듯 그에 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댔지만, 나보다 그가 훨씬 더 좋은 사람임을 부정할 수 없을 고백해야겠다.

 

#3

그녀가 있다.

그녀는 서운하다는 이야기를 때때로 듣게 되는 것 같다. 그녀는 동의하지 않겠지만, 나는 동의한다. 그녀가 없는 공간, 그녀가 없는 모임은 그 공간과 모임의 의미를 반쯤은 잃어버리게 되는 것만 같다. 그녀가 내뿜는 색이 너무나 강렬해서, 그 자리에 함께하는 모든 이를 웃고 울리게 만들 수 있는 마법 같은 힘을 지녔다. 현실세계의 헤르미온느, 그런 느낌이라 해도 좋다. 그 티 한점 없는 꾸밈 없는 성격이, 우물쭈물 쩌리 같이 찌그러져 있는 나에게 거침없이 이것저것 물어봤던 그녀와 나 사이의 첫 연락을 가능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넘모'라는 말을 썼다고 웃는 그녀의 답장을 보며 생각했다. 그동안 왜 나는 이런 사람과 친해지지 못했던 걸까, 하고. 

그 때는 이름 석자 정도 밖에 모르던 사이였으나, 나의 예감은 몇가지 적중했다. 첫 번째는, 걸어 다니는, 아니, 뛰어 다니는 호기심 덩어리일 것이라는 예감. 그럴 일은 없겠으나, 또 그럴 일이 없길 간절히 바라지만, 먼 훗날 그녀의 얼굴을 다시 보게 됐을 때 그 반짝이는 눈빛에서 호기심이 사라져 있다면, 나는 더없이 서글퍼질 것 같다. 자그마한 몸으로 이리저리 바쁘게 다니느라 발에 뭐가 채이는 지도 제대로 모르는, 그래서 책상에, 계단에, 돌부리에 부딪히고 찍히고 꺾이는 일이 빈번히 발생하지만, 예의 그 꾸밈없는 털털한 웃음으로 날려버리는 그녀의 성격은 아마도 반쯤은 그 눈부시게 반짝거리는 호기심이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 면에서 그녀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수려한 외모 보다 빛나는 내면에 있다.

두 번째는, 분명 노래를 잘 할 것이라는 생각. 회의 테이블 끝과 끝에 앉아 있었지만, 나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예감했다. 당연히 적중했다. 넷이서 함께 코노를 갔을 때 그녀의 노래를 듣고 생각했다. 얼마나 많은 친구들이 그녀와 함께 하는 코노를 기다리고 있을까. 시원하게 지르며 그녀와 타인의 속을 뻥 뚫어 놓을 뿐 아니라, 순간의 분위기와 타인의 기분을 고려하는 선곡 스타일이 그녀라는 사람이 가진 매력을 단적으로 드러냈다. 그녀가 두 번째로 아름다운 순간은, 그 청아한 음색으로 부르는 음표 사이에 있다.

이제 저 넓은 세상 밖으로 날개를 펼칠 준비를 조금씩 해 나가는 그녀에 대한 걱정은, 미안하지만 1도 없다. 도망치거나 혹은 잠시 외면하고 쉬고 싶은 약한 마음이 들 법한데도, 애초에 그러한 선택지는 고려하지도 않았다는 듯이 꿈을 설계해나가는 그녀의 야무진 태도를 보면 나도 모르게 펭수 웃음을 지을 때가 있다. 그러고보니, 아직 친해지기 전에 '야무질 것 같았다'는 카톡을 보냈던 것 같다. 그 예감은 틀렸음을 인정해야겠다.

그러면 어떠랴. 그녀에게 어울리는 가장 적절한 단어가 Positive인 것을. 그 어느 곳에, 그 어디에 있더라도 그녀라는 존재가 내뿜는 반짝거림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묘한 확신이 든다.

 

#4

그리고, 그가 있다.

한참을 고민해도 그다지 쓸만한 점이 없는 그로썬, 그나마 없는 것 가운데 그럭저럭 사람 구실을 하는 글로써 그들에 대한 감사함을 기록해 둔다. 그는 그들을 오래도록 기억할 것 같다. 그녀와 그와 그녀도, 먼 훗날, '아 그런 사람이 있었지', 정도로 그를 기억해준다면 그걸로도 충분히 감사할 따름이다.

그녀와 그와 그녀가 그와 함께하는 시간만이라도 편안하고, 따스하고, 내려놓을 수 있도록, 못난 것들은 잠시 접어두고 있어 보이는 척이라도 좀 해보려 한다.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으나, 요즘의 그의 삶에선 그들이 의미가 되어주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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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빵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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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떤 노래가 있었다. 

그가 그녀에게 그 노래를 들려주었을 때, 며칠 뒤 그는 말했다.

"퇴근하는 지하철에서 내내 이 노래만 들었어"

그녀는, 사랑한다는 말대신, 그렇게 마음을 전하는 사람이었다.

그와 그녀는, 갓 포장된 아스팔트 도로를 양 옆으로 가로지르는 희뿌연 바다를 바라보며, 그 노래에 함께 취했다. 함께 돌 수 있다고. 영원히 함께 할 수 있다고. 서로 간에 벌어지는 힘의 차이, 살아온 궤적이 만든 세상의 차이는, 어려운 조율 과정을 거치기만 하면 언젠가 안정화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갓 사랑에 빠진 모든 청춘이 하는 착각처럼, 공전하는 것은 서서히 파멸하고 있음을 간과하는 것처럼, 조율과정의 그 지난함을 과소 평가했던 그는 한 음조차 놓치지 않겠다며 함께 듣던 그 노래가 주례 선생의 백년가약 인증보다 훨씬 더 굳건한 약속이라 생각했다. 그는 그에 대해 너무나 잘 알았다. 그가 좋아하는 모든 음악을 4분 동안 모조리 쓸어담은 듯한 선율을 들으며, 그는 결코 이 노래를 트랙리스트에서 지우는 일은 없을 것이라 여겼다.

멀리서 보기엔 그저 두 행성이 자신의 길 따라 돌고 있을 뿐이나, 서로가 발을 딛고 있는 세계는 삶과 죽음의 거리만큼이나 다르다. 발을 닿지 않았을 때는 오직 반짝임만이 날에 따라 수줍음을 가르고 비출 뿐이었으나, 발을 딛고 난 뒤의 저 곳은 온갖 상처와 흉터와 공포스러운 환경이 펼쳐져 있다. 그는 그것을 몰랐다. 알았다고 자신했으나, 알았음을 증명하기엔 그는 무력한 모습만을 보였다.

그가 몰랐던 것은 하나 더 있다. 그 노래를 먼저 듣지 않게 된 쪽은 그가 아니라, 그녀일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에게는 공포였던 그녀의 강력한 중력은, 사실 그보다 그녀 자신에게 더 힘든 것이었음을.


#2

안개인지 먼지인지 모를 뿌연 것들이 모든 산봉우리를 숨기고 있던 날, 도로를 달리던 그는 라디오에서 어떤 낯선 노래를 듣게 되었다.

그 노래였다.

그의 세계 안에서 그 노래는 완전히 사라진 것에 가까웠다. 그 가수의 이름자만 보아도 귀를 막았고, 한 음절의 목소리만 들어도 눈을 감았다. 감각을 차단해 나가는 연습을 통해 무덤이 되는 법을 연습했다. 시간이 지나자 그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이제, 어지간한 일이 닥쳐와도 결코 수렁으로 빨려 들어가지 않아"

자기 안에 있는 커다란 구멍을 메우기 위해 하루도 쉬지 않고 부어놓은 콘크리트의 단단함에 자신이 있었다. 백 년 정도 지나면야 물론 여기저기 균열이 가겠지만, 적어도 죽는 날까지 이 콘크리트에 금이 갈 일은 없을 것이라고. 모든 시간이 흐르는 동안에도 견고하게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고. 

그의 착각은 계속된 셈이었다. 그 견고해보이던 철옹성은 단 2초의 시간 동안 종잇장처럼 무너져 내렸고, 속절없이 뛰쳐 나오는 무력했던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자신도 모르게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흥얼거리면서 그는 또렷해진 기억에 황망해졌다. 마침, 한적했던 쉼터에 정차한 그는, 자신과 자신과 자신이 내뿜는 비아냥의 소리들을 통제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그래요. 지나고 보니까 알겠어요. 당신도 참 힘들었겠네요."

죽음 이후에 건네는 인사보다 더 무효한 읊조림을 마치자 곡이 끝났고, 그는 다시 악셀을 밟았다. 속도 계기판이 한 칸 올라올때마다 뛰쳐나오는 자신들이, 불쾌한 손짓으로 눌려진 정지버튼 탓에 침묵하는 라디오를 대신해, 영원함이란 것이 무엇인지 희미하게 알게 했던 과거의 몇몇 노래들을 하나씩 들려주었다. 어떤 곡은 세상의 종말처럼 슬펐고, 어떤 곡은 생명의 탄생처럼 찬란했으며, 어떤 곡은 세상의 모든 설탕을 녹여만든 것처럼 달콤했다. 

참으로 많은 노래들이, 그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아득히 넘어선 수의 노래들이, 그의 귓 속에서 거미집을 짓고 있었다.


#3

그는 참으로 서툰 방법으로, 그에게는 가장 세련된 것이라 믿고 있던 방법으로, 사랑을 고했다. 사랑한다고. 당신을 위해서라면 나의 모든 것들을 버릴 수도 있고, 바꿀 수도 있다고. 당신에게 사랑받는 날을 꿈꾸며, 그 날이 완전히 오게 되기까지 한 순간도 멈추지 않겠다고.

그녀는, 모든 것에 냉소했던 자신을 비웃을 정도로 그 말을 믿었다. 의심의 눈초리를 완전히 지우지 못했으나, 그와 같은 사람을 단 한번도 만나본 적이 없었다. 그의 이야기는 달콤하지 않았으나 깊이가 있었고, 그의 목소리는 매력적이지 않았으나 진심처럼 떨렸었다. 그의 손짓은 능숙하지 않았으나 뜨거웠고, 그의 웃음은 멋있음과는 거리가 멀었으나 섹시함이 있었다. 그녀에겐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처음이었기에 더욱 믿을 수 없었으나, 점차 믿고 있는 자신이 낯설기만 했다.

그러나 그녀는, 차츰 시일이 지날수록 달콤했던 약속과 멀어지는 그를 보았다. 모든 것을 할 수 있겠노라 다짐했던 그의 입에선 어느새 피곤함이 자주 등장했고,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신경쓰며 조심했던 그의 몸짓은 점차 합의없는 독단을 보이고 있었다. 그는 한번도 말하지 않았지만, 자신이 모든 것을 감내하고 있다고 온 몸으로 외치고 있었다. 그녀가 문제라고. 그래서 내가 이렇게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고. 오직 홀로.

그녀는 원망하기 시작했다. 그가 아니라 자신을. 그 달콤하고 허술한 약속의 진의를 단번에 파악하지 못했던 자신을. 자신이 더 인내하고 노력하면 결국엔 그 역시 그가 한 말을 실현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자신을. 또한, 세심하고 깊은 그라면, 당연히 그녀가 하고 있는 모든 노력을 알아채릴 것이라 믿었던 자신을.

어둠이 서툴게 가라앉기 시작한 어느 날 어느 때에, 그는,

"나 너무 피곤한데, 미안한데 내일로 미루면 안될까?"

그 말이 끝나는 순간, 그녀가 자신을 버려가며 세웠던 모든 세상은 무너졌다. 그에게서 의심의 그림자가 드리워질 때마다 세뇌하듯 듣던 그 노래 역시, 집으로 돌아가는 그 길에서 영원히 삭제해버렸다. 


#4

모든 것이 조화로워 보이던 어느 날, 그녀가 자신을, 또한 그를 의심하게 된 계기는 아주 사소한 대화 때문이었다.

"예전에 너, 나랑은 모든 것이 잘 맞아 아무 것도 참지 않고도 사랑할 수 있을거라고 확신한다고 했잖아? 지금도 그렇니? 아무 것도 참지 않고 있니?"

가볍게 던진 질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멈칫했다. 긍정의 대답은 나왔으나, 그 대답은 짧았고 한 박자가 느렸다. 그녀의 표정은 느리게 변했고, 그것을 바라본 그는 연극을 시작했다. 5초 전까지 침묵을 유지하던 그의 입은 가볍고 편안한 일상적인 이야기를 쉴틈없이 토했고, 과거의 그와 그녀가 함께 웃었던 무언가를 꺼내며 따스함을 찬미했다. 또한, 그녀가 너무나 사랑했던, 그녀를 부서지듯 꼬옥 껴안으며 사랑을 고했다. 그는 생각했다. 자신의 연극을 보며 진심어린 맞장구를 치는 그녀의 모습에서 자신의 진심이 노출되지 않았다고. 아마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 광경을 보았다면, 형편없는 연기 실력을 가진 배우가 극을 망치는 모습에서 굉장한 불편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보다 더한 불편함이 그녀를 덮쳤음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도로에 멈춰선 그는 그 표정을 떠올릴 수 있었다. 한없이 무너지는 내면과, 어떻게든 서 있으려 노력하는 외면이 충돌하던 그녀의 표정을. 그제서야 알아차린 것은 아니었을테지만, 묻어둔 까닭에 아무 의미 없는 것이었들이라 여겼다. 묻어둔 것 위에 세웠던, 자신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선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다고 믿었던 것 역시, 마지막 남은 성냥개비처럼 부러져버렸다. 

실은, 그가 악셀을 다시 밟게 되기 까지엔 제법 긴 시간이 흘렀다. 거짓으로 점칠된 과거로 유턴할 수는 없는 일이었으나, 직진을 한다고 해도 거짓으로 점칠된 자신을 마주할 수 밖에 없었다.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그는 멈춰 있었다. 


모든 모순이 사라진 세계가 있다면,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던져버리고, 기름이 떨어지는 그 때까지 달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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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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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름다움을 더하기와 빼기로 책정한다고 가정하면, 나는 일관되게 빼기파에 속한다. 화려한 색감과 복잡한 기교가 가득한 예술보다, 여백과 본연의 모습을 살린 예술에 더 마음을 뺏기는 쪽이다. 사람을 바라볼 때에도 그렇다. 나는 화려한 웨이브와 트렌드를 쫓은 컬러의 헤어를 가진 사람보다 몇가지의 꾸밈으로 충분한 사람을 더 원해왔다. 

'검은단발머리'란 빼기파로 따지자면 가장 최고봉의 위치라 할 수 있다. 숏컷이든 단발이든 그것은 관계가 없다. 심지어 마구 헝클어져도 좋다. 머릿결이 좋지 않아도 괜찮다. 나는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구경하는 것도 좋아하지만, 사실은 머리카락 사이에서 오롯이 솟아난 두 개의 귀와, 뚜렷하게 본모습이 보이는 목선과, 또한 가려지지 않고 쭈욱 뻗어진 어깨선을 보는 것이 더 좋다.

아마 그래서 검은색 머리를 고집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가벼운 염색이면 괜찮지만, 아무리 단발이라 할지라도 색감이 화려하면, 내가 보고 싶은 귀나 목선, 어깨에 아무래도 시선이 덜 가게 된다. 마우스 커서를 아무리 옮기려해도, 나도 모르게 19금 광고를 클릭하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 

그런데, 모든 남성들에게 긴 머리가 어울리는 것이 아니듯, 모든 여성들이 또 '검은단발머리'를 잘 소화하는 것은 아니다. 꽤나 운 좋게도, 나는 꽤 오래 전에 그런 사람을 알게 되었다.


#2


나는 그녀의 단발머리를 관찰하는 것을 좋아한다. 시도 때도 없는 단발타령이 본인을 향한 것임을 그녀도 일찌감치 알고 있듯, 항상 멍을 때리는 척을 하며 그녀의 얼굴을 오래 훔쳐보는 것 또한 알면서 모른 척 지나가는 일이다. 한 해가 다르게 주름이 깊어지는 나의 얼굴과는 달리, 그녀의 얼굴은 10년 가까운 시간에도 그다지 달라진 것이 없다. 가끔은 그녀의 머리도 제법 길었던 때가 있으나, 때때로 쿨병에 걸리는 것인지 아니면 이제 아예 남극 같은 사람이 된 것인지 몰라도, 시원히 머리를 쳐내며 내 기억 속에 '그러한' 모습으로 되돌아오곤 했다. 

되돌아오는 것은 나 역시 그러했다. 외로움은 언제나 우리를 집어 삼키기 위해 입을 벌리고 있고, 이상적인 만남은 한 5만 번 윤회를 거듭한다 해도 쉬이 이뤄지지 않는다. 그러니 적당 적당히 맞춰가며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그것이 이성적인 관계이든, 적당한 인간관계에 속하는 만남이든, 혹은 그저 서로를 향해 외로움을 쏟아내기 위한 만남이든, 모든 관계에서 적당주의적인 태도를 취할 수 밖에 없어진다. "이제는 다른 스타일의 머리가 좋아"라며 섣부른 결론을 낸 채 이제 다시는 검은단발머리의 그녀를 보지 않아도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며 자신만만해 하다가도, 결국은 "아무래도 역시 검은단발머리가 최고야."라며 그녀의 얼굴을 되새기는 좌절을 반복하게 되었다.

여러 문제에 있어 상호간의 입장차는 쉬이 좁혀지지 않았지만, 그녀에게 검은단발머리가 가장 어울린다는 사실은 그녀도 나도 모두 동의하는 바가 틀림이 없다. 나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머리에 대해선 여전히 견해의 차이가 꽤 벌어져있는 것은 썩 만족스럽지 않지만, 정작 그녀가 잘 어울린다고 평한 머리를 하고 다녔을 때의 기억들은 썩 좋지 않아서 영 손이 가지 않는다.

최근에 나는, 꽤 오랜 시간동안 그녀의 얼굴(과 단발머리를) 관찰할 수 있었다.


#3


서로 '누가 누가 더 피곤한가'를 겨루는 듯한 피로한 모습은 차치하더라도, 매번 조금씩 달라지는 그녀의 연한 화장법 역시 논외로 두더라도, 그녀의 모습에서 지난 번과는 다른 무언가를 찾아내는 일은 꽤 즐겁다. 억지로, 매우 억지로 달라진 요소를 찾아낸 다음, 그녀에게 찾아낸 바를 부풀려 통보하며 "역시 넌 자꾸만 변하는구나?"라는 말을 아무렇지 하는 일은, 영 몹쓸일이지만 꽤 즐거운 일이었다. 

사실은, 그다지 변한 것이 없다. 그녀의 귀(딱히 이유는 없지만, 나는 그녀의 왼쪽 귀를 더 선호한다.)는 여전히 시크하게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그녀의 귀가 빨개지는 상황은 흔치 않아서 나는 그녀가 화를 낸다거나, 아니면 화를 낸다거나, 그것도 아니면 또 화를 낸다거나 할 때 그녀의 눈을 보는 척하며 사실은 귀를 보고 있을 때가 많았다. 머리칼이 스쳐지나며 귀는 여전히 시크하며 뾰로퉁한 표정으로 그곳에 있었다. 그녀가 사는 동네의 악명높은 칼바람이 싫은 이유는, 물론 춥다는 것인 첫번째 이유겠지만, 몹쓸 바람들탓에 그녀의 머리칼이 흐트러져 하얗고 혹은 빨갛던(빨갛던 때가 더 좋았다는 것은 조심스레 밝혀둔다.) 그녀의 두 귀를 가린다는 것이 두번째 이유라 할 수 있다. 

놀라울만큼이나 주름이 깊어지지도, 줄어들지도 않는 그녀의 목 또한 관찰하기에 좋은 포인트다. 언제나 아주 심플한 디자인의 목걸이가 감싸고 있는 그녀의 목은, 그녀의 작은 얼굴에 비해 다소간 튼튼해보이나, 그래서인지 시선을 자꾸 뺏어간다. 그녀의 목이 가장 돋보일 때는, 아무래도 브이넥 회색 면티를 입었을 때였던 듯 싶다. 집으로 돌아와 나는, 그녀의 회색 면티를 집안에서 볼 수 있을 그 때 그녀의 남자를 꽤 저주했었다. 어쨌든 그녀의 목은 그 외적인 요소보다도, 이제는 쉬이 들을 수 없는 그녀의 '여자여자한' 목소리가 저 곳에서 나온다고 생각할 때 더 빛이 난다. 그녀가 우효의 노래를 부를 때, 기억 속에서 알싸히 퍼지는 목소리가 들렸으니, 앞으로는 자주 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분에 따라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동그라졌다, 가늘어졌다하는 눈 모양새도, 건조한 공기 때문에 삐쭉삐쭉 갈라진 입술도, 동그란 선을 그리며 언제나 손가락으로 꾸욱 눌러보고 싶지만 실제로 그랬다간 온갖 욕을 바가지로 먹을 게 분명하기에 매번 참아야 하는 그녀의 양 볼도, 사실은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 눈으로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은, 아름답다고 말하기에 부끄럽던 때처럼 언제나 아름다웠다. 

아름답다고 말할 때의 그녀가 항상 그랬듯, 어떠한 칭찬에도 그녀는 모른 척 할 게 분명하기에, 나는 "눈 밑에 피로한 자국이 완전히 굳었구만?"하며 또 실없는 소리를 하고야 말았다. 

나란 닝겐, 잘했다. 하하. 이번에도 또 질 수는 없는 법이다. 추악하고도 미련한 본성에 지지 않는 스스로의 이성에 치얼스다.


#4


변한 것이 있다면, 아무래도 그녀가 아니라 그녀를 바라보는 내 눈이 문제일 것이다. 나의 뇌나 마음은 상관없다. 오로지 제 멋대로 세상을 판별하는 눈의 잘못이 분명하다. 보통은 잘쌩기기 위해서 안경을 쓰는 존잘남들의 상황과는 달리, 어떤 안경을 써도 못생김이 더해지는, 그렇다고 안경을 벗으면 오히려 상황이 안 좋아지는, 이도저도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존못으로 태어남을 받아들여야 하는 내 사정 상 안경을 벗을 수는 없다. 어떤 사람과의 관계가 끝이나면, 나는 안경을 바꾼다. 그동안 바꾼 안경 갯수야 당연히 묵비권을 행사하겠지만, 중요한 것은 안경을 바꾸는 가운데에도 그녀는 거기에 늘 그대로 있었다.

재밌었다. "나는 여기에 서서 항상 그대로 있을게,"라며, 소름이 돋는 말을 아무렇지도 하던 나는 아무래도 북한이나 ISIS에 납치되어 버린 채, 금방이라도 아스라히 사라지거나, 홀연히 멀어질 것 같았던 그녀는 항상 그곳에 있었다는 사실이.

물론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실은 그녀 역시 꽤 많은 것들이 변했다. 나는 썩 그것이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내가 만족스러운 것이 어디 몇가지 되기나 하던가. 아주 특수한 상황이나 짧은 순간만을 만족스러워하는 고약한 심보탓인지, 웬만한 일에 모두 툴툴대며 쿨병걸린 중학생 같은 태도로 일관하던 내가 아닌가. 어라, 혹시 이 문장, 그녀의 모습이기도 한건가?

제멋대로 변하는 그녀의 내면도, 쉽게 변하지 않는 그녀의 외면도, 밝힐 수 없는 애로사항으로 인해 애타던 내 기억도, 썩어가는 나의 피부도, 모두 그녀의, '아름답다'라고 쉬이 말할 수 없으나, 예쁘다고 하기에도 다소간 민망하나, 내가 애타게 부르짖는 단발찬양론의 가장 이상적인 모델임은 아마 오래도록 불변할 것 같다.

이미 변해버린 것들이야 어쩔 도리가 없지만, 검은단발머리여, 영원할지어다. 



WRITTEN BY
빵꾼

,





#1


어찌하여 내가 이 곳까지 이르게 된 것인지 모르겠다. 뾰족한 나무들이 한 데 뭉쳐 뾰족한 산을 이루고, 그 중턱에 선뜻 뾰족하게 자리한 산장의 입구에 다다른 지금, 지금까지의 행보에 어떤 원인이 깔려있는지 되새기지 아니 할 수 없었다. 산행은 물론이요, 익숙치 않는 잠자리와 낯선 사람들, 세 요소 모두 내가 되도록이면 멀리하며 살아왔던 것들인데, 그 세 요소가 모두 포함된 이 곳을 홀로 오른 까닭이 위화감을 불러왔다.

말이 산장이지, 산장을 운영하는 가족들과 분리되지도 않은 건물에 방 하나를 얻어 지내는 형태였다. 요즘 세상에 인터넷 홈페이지나 카페도 운영하지 않는 숙박업체를 쉽게 신뢰할 수 없겠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며칠동안 집요하게 이 곳을 찾아 헤메었다. 아니, 집요하게 찾았다는 말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집요하게 나를 숨겨가며 찾아야 했기에, 여러 애로사항이 발생했다고 하는 것이 옳은 표현이다.

철저히 단골고객과 단골고객들의 입소문으로만 운영한다는 산장의 주인은, "어떤 분께 소개 받으셨어요?"란 질문을 던져왔다. 나는 그녀의 회사인 M업체를 댔다. "M업체랑 프로젝트하다가 그 분들이 회사 MT로 거기서 지내셨는데, 좋았다는 얘기를 들어서요."

"...그렇군요?"

주인은 이상한 침묵과 이상한 물음표를 붙이며 말을 받았다. 딱히 손님이 반가워하지 기색이 역력했는데, 도착해서보니 이렇게 분리되지 않은 공간에서 타인과 생활한다면, 아무리 산장주인이라도 썩 반갑고 좋은 일만은 아닐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손님은 반가우면서도 귀찮은 존재다.

하지만 일련의 행동들에 기저에 무언가 확신을 갖고 행동한 것은 아니었다. 안개를 헤쳐나가며 산을 오르던 바로 직전까지의 나는, 무언가의 뒤꽁무니는 쫓는 심정으로 거슬러왔다. 불안한 정신상태는 평소와는 다른 이상행동을 유발한다. 고작화된 패턴과는 다른 반응이 튀어나오는 것이다. 싫어하는 3요소를 모두 감수하고 이 곳에 오른 것이, 지금의 나와 평소의 나는 그녀를 처음 만날 때와 헤어지던 날의 나 만큼이나 꽤 긴 거리를 두고 멀어져있었다.

그 모든 '나'들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인지 모르겠지만.



#2


먼저, 약간의 고해성사를 해야겠다. 이 산장을 알게 된 경위에 대한 이야기다. 

지난 여름이 가기전에 그녀와 이별한 것은 벌써 반 년이 다 되어가는 이야기다. "어쩐지 너와 가을을 함께 할 수 없을 것만 같아."라며 두려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던 그녀는, 본인이 한 말을 지키면서 완벽한 합리주의자의 면모를 다시금 보여줬다. 나라는 균열이 그녀를 헤집다가 다시 틈을 메우며 완벽한 안녕-. 우리의 이별은 그토록 평온하고 제법 깔끔했다. 아마 이별의 본보기로 삼아도 좋을 것 같다. 

물론 어디까지나 표면적으로 그렇다.

함께 밤을 지새우던 어느 날, 꽤 격렬한 잠을 자는 그녀를 훔쳐보던 나는, 문득 못된 생각이 샘솟았다. 그녀에게 '꽤 괜찮은 인간'임을 어필하기 위해 여러모로 노력하던 나는, 들인 수고가 그녀에게 닿기에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꽤나 좌절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어쩌면 이 모든 것들이 전지적 그녀 시점에선 유치하고 촌스러운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염려가 생각의 지평을 까마득히 뒤덮고 있었다. 나는 전전긍긍했고, 그녀는 점점실망했다.

새벽이 깊어가던 그 시간, 찰나의 순간을 비집고 들어온 못된 생각의 속삭임은 이러했다. 

'만약 그녀랑 헤어지면 아마 그녀는 다시는 너와 연락을 하지 않을거야. 너도 알고 있잖아?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아마 그녀는 블로그도 없애고 번호도 바꿀거야. 그러기 전에 그녀의 핸드폰을 해킹해놓는 것이 어때?'

강하게 저항했다. 그러나,

'생각해봐. 분명 너는 헤어진 후에 늘 그래왔듯, 지난 사랑에 괴로워하고 그리워하게 될 거야. 게다가, 그녀는 지난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특별함을 지녔잖아? 더 힘들어질지도 모른다고. 완벽하게 궁금해하지 않고 찾지도 않을 수 있다고 다짐할 수 있어?'

다짐할 수 없었다. 물론 그 날, 그녀에겐 "걱정하지마. 찌질한 짓은 이제 하지 않을거야" 라며 웃으며 말했으나, 다짐하는 것과는 또다른 문제였다. 헤어진 후에 나의 모습은, VR 영상을 볼 때처럼 지나치게 생생했다. 어쩌면 이런 게 미래를 보는 능력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생생했다.

결국, 나는 자는 그녀의 핸드폰에 해킹 툴을 하나 심어놨다. 일주일에도 몇번이나 클리너 앱을 돌리는 그녀의 결벽증에도 해킹 툴은 잘 살아남았다. 아무래도 파일명을 '치코리타' 어쩌구로 해놓았던 덕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고 해서 매일 그녀의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세상이 끝난 것처럼 이별을 겪던 중2병 시절은 이미 겪고 난 터였다. 나는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나름대로 기준을 다져가며 보냈다. 운전하다가, 글을 쓰다가, 일을 하다가, 걸어가다가, 노래를 듣다가 스며드는 그녀에 대한 기억에도, 그녀에게 말했던 "찌질한 짓은 하지 않을거야"란 약속은 지켜가며 지냈다.

그럼에도, 회색 빗물이 고요를 삼켜버린 날이나, 완전히 차지 않은 달이 별무리를 이끌고 있는 밤은, 도저히 견디기가 힘들었다. 그런 날에만 들여다 봤다. 이런 야무지지 않은 다짐이 결국 그녀와의 거리를 벌어지게 만든 제1의 원인이었지만, '다시 돌아가/네 앞에 선대도/어쩌면 나는/ 그대로일지 몰라.'라는 가사말을 가진 요즘 자주 듣는 노래처럼 나는 그대로인 것이다. 만약 운이 좋아 다시 만난다 하더라도, 똑같은 결말만이 머지 않은 미래에 도래하리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안다.'는 것에 대한 참 뜻이 무엇인지에 대해선 이견의 여지가 있다고 본다.

일주일 전, 소복히 쌓인 눈 속에서 한걸음도 내딛지 않는 방 안에서, 나는 눈 내리는 배경에 몽상을 그리고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찰랑이는 흑단발과 심연을 담은 눈동자로 날 응시하고 있었다. 몽상의 끝에서 결국 그녀의 핸드폰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녀는, 누군가와 카톡을 주고 받고 있었다.

회사의 동료인 듯한 남자와 그녀는 여행 사진을 주고 받고 있었다. 이 산장을 알게 된 경위는 바로 여기에서였다. 붉은 색의 작은 등빛이 간신히 어둠과 다투고 있는 방, 울퉁불퉁한 나무기둥들과 잘 깎은 나무로 만든 침대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와 그는 즐거운 표정으로 순간에 남아있었다. 사진이 말하는 바는 행복과 맥이 닿아 있었다. 그녀는, 날 위해 자르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결국 그녀를 좋아한다고 말하게 만든 흑단발이 아니었다. 허리깨까지 내려오던 장발을 싹둑 자른 그녀였으나, 벌써 그녀의 머리는 어깨선을 지나고 있었다.

그것을 보자, 혼란함을 가둬놓은 둑에 약간의 금이 가기 시작했다. 단 한 순간도 나의 것이라는 생각 따위는 가지지 않았다고 자신있게(내가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정말 얼마 되지 않는다.) 말할 수 있으나, 그럼에도 길어진 머리는 나의 세계와 완전히 끊어졌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거기서 멈췄어야 했으나, 모든 안 좋은 일은 멈추지 않음에서 벌어지는 법이다. 다음에 이어진 대화 속에서 그녀가 이름모를 남자에게 건넨 말들은 가슴이 두근대고 흥미가 진진한 것들이었다.

"너를 만나서 참 다행이야. 네 덕에 머리도 기를 수 있고."

"너 같은 사람은 내 인생에서 처음이야. 고마워."

나는, 그녀에게서 영영 그런 말들을 들을 수 없으리라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랬다. 그러나 그녀는, 태연히도, 명징하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그녀를 처음 볼 때의 나와 헤어질 때의 나 사이의 거리보다, 나와 헤어질 때의 그녀와 지금의 그녀의 거리가 태양계를 아득히 넘을 만큼 멀게 느껴졌다. 언뜻 훔쳐본 것만으로도 둘 사이엔 잔망스러운 것들로는 전혀, 아니, 행여나 감당하기 힘든 무거운 사건에도 흐트러짐이 없을 견고함이 굳어져 있었다. 나는 그 남자를 전혀 알지 못하나, 그가 그녀에게 건네는 말들은 내가 전혀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채우며 함께할 수 있다는 것, 다름 사이에서도 온전한 균형을 유지하는 것.

그녀가 말했던 이상이면서, 나는 결코 다다르지 못했던 환상이 거기에 있었다.



#3


이 역시 진심이지만, 나는 정말로 그녀가 다른 좋은 사람을 만나 잘 지내기를 바랬다. 이 얼마나 진부하고도 주제넘은 생각이냐 하겠지만, 나름의 선의이면서 동시에 불온전한 나의 행위에 대한 합리화였다. 어떤 식으로든 실패를 상쇄하기 위해, 혹은, 아주 자그마한 자욱이라도 그녀에게 남겨지기 위해, 애써 친 몸부림이었다. '제발 괴롭고 힘들어졌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없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비율로 따지지만 2:8 정도로 선의가 앞섰다. 

'제발 나와 함께 한 시간이 어떠한 의미도 남지 않는 무익한 시간이 아니게 되길'

사실은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솔직하겠다. 이 저열한 이기심이란, 

그러나 제법 바라마지 않았던 현실을 목도하는 순간, 내 마음의 엘리베이터는 갑자기 전력이 끊어져 지하 30층까지 자유낙하하는 기분을 느꼈다. 모공이 송연해지고 머리끝이 쭈뼛서는 파리함에 흥미진진했던 것들은 무너지는 존재를 위해 자리를 비워주었다. 심연을 담고 있던 눈동자에서 피어나는 생명의 아름다움은, 그녀를 닮은 색이 이젠 보라가 아닌, 샛노랑과 새빨강 사이 어딘가로 보였다.


'그것'을 본 뒤로부터의 나의 일상은, 산장을 찾아야겠다는 마음 뿐이었다. 일상을 영위했던 균형감은 무너지고 오직 그 산장, 아니, 그들이 웃음꽃을 피우며 대화를 나눴던 그 방을 찾아가야겠다는 마음만이 남아 하루를 무너뜨렸다. 최대한의 노력을 다해 스스로 그 정보를 지우려한 산장 때문에 다소 시간이 걸렸고, 갈증은 더해갔다.

비로소 이곳에 도래한 것이다.


"어느 방을 쓰시겠어요?"

수염이 송송 난 아저씨의 물음에 나는 잠시 당황했다. 얇은 복도가 가로지르는 내 눈 앞에서 방 세개가 나란히 있었다. 나는 사진 속 배경이 어떤 방인지 전혀 몰랐다. 

"음..."

아저씨는 갈등하는 나를 보며 다소 찡그렸다. '귀찮으니까 빨리 고르라고!'

"방이 모두 똑같은가요?"

"아니요. 일단 오른쪽 방은 장기 투숙객이 계시고, 맨 왼쪽 방은 원래 우리 아이들 자는 방이라 디지몬 인형도 있고 장난감도 있어서 정신이 좀 사납습니다."

명백하게 왼쪽 방을 고르지 말라는 압박이나 다름없었다. 처음부터 답은 가운데 방으로 정해져있었다. 그가 얼굴을 찡그린 까닭을 이해했다. 답은 정해져있으니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았으니. 그러나 나는 고민했다. 디지몬을 미친듯이 좋아하는 그녀는 분명 왼쪽 방을 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저씨가 내게 했던 말과 똑같은 말을 했다면? 타인에게 불편을 끼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그녀라면 당연히 가운데 방을 택했을 수도 있다. 나 역시 왼쪽 방은 안 된다는 주인장의 말을 듣고 기어코 왼쪽 방을 택하는 타입은 아니었으나, 포켓몬 인형은 선택지의 확률을 확 높여주었다.

하지만 주인은 한 마디를 더 붙이며, 선택지를 고민할 자유를 박탈했다.

"아, 왼쪽 방은 그냥 일반 방이라서 조명이 별론데, 가운데 방은 손님용으로 만든 거라 그래도 조명이 꽤 괜찮습니다."

절대로 방을 열어 보여줄 기미는 보이지 않으면서 설명으로 일관하는 태도의 주인장은 설명을 덧붙였고, 나는 사진 속에 가득한 붉은 빛의 조명을 떠올렸다. 어둠을 간신히, 간신히 이겨내고 있는 그 붉은 빛. 가운데 방이 확실했다. 

문풍지가 두꺼운 방문이 힘껏 삐걱대며 열렸다.

문을 열고 들어오자, 깊은 산 속의 고요가 바람과 함께 한없이 밀려들어왔다. 문을 닫자, 바람은 도로 나갔는데 고요만 여전히 남아있었다. 나는 방 한 가운데 우두커니 서서 그림을 그렸다. 그녀와 그가 마주 앉아 말을 나누던 바닥, 그녀와 그가 아침 안개가 더럭마다 묻어있는 풍광을 구경했을 문턱, 그리고, 그녀와 그가 사랑을 나누고 또 확인하며 다시 피워냈을 작고 하얀 침대를 응시했다. 망막에는 잠시 침대가 불에 타는 잔상이 맺혔다가 사라졌다. 잔상에는 휘발유 통을 들고 있는 나의 뒷모습도 잠시 나타났었다.

그러나 현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째깍대는 초침소리만 아득하게 남아있었다.


화려한 조명과 웅장한 음악, 그리고 수많은 배우들의 역동적인 연기가 펼쳐진 뮤지컬이 끝난 뒤의 무대는 사람을 시니컬하게 만든다. 모든 게 한바탕 꿈같이 느껴지며 삼라만상이 사실은 허상같은 것 아니었나 회의하게 한다. 새로운 무대를 준비하는 와중에도, 뒤돌아보는 것을 멈추지 않는 것이 인간, 아니다. 나의 습성이다.

그들의 사랑이 멀찌감치 떠난 방을 찾아와 뭘 어쩌겠단거였지.

그렇다고 갓 대금을 지불한 지금, "이제 가볼게요."라고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떠나는 일도 영 자연스럽지 않았다. 이 곳에 올라오는 일 역시 만만치 않았다. 한편으로 이 곳에서 하룻밤을 지내는 것도 영 내키지가 않았다. 타인의 사랑은 언제나 불편하고 고약스럽다. 침대에 조심스레 누워봤으나, 고약스러운 마음과는 달리 불편해지는 바짓자락에서 최하의 인간이 여기있음을 고하고 있었다. 나는 불현듯 몸을 움직여 바닥으로 향했다. 이곳도 썩 편치는 않았지만, 침대에서 자는 것 보다야 훨씬 낫겠지.

잠시 뒤, 문이 열리며 산장 주인이 들어왔다.

"어떠세요? 맘에 드세요?"

"네. 깔끔하고 좋네요."

이부자리와 여러 용품들을 갖고 들어온 그에게서 여전히 귀찮은 태도가 역력했지만, 그래도 할 껀 다 해야한다는 의무감도 동시에 보였다. 그는 이토록 귀찮아하면서 왜 산장을 운영하는 것일까. 궁금했다.

"저기, 사장님."

"예?"

"왜 인터넷으로 홍보를 안 하시는 건가요?"

자주 받는 질문인듯, 그는 식상함에 물든 표정으로 대답했다.

"사람이 많은 게 싫어서요."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의외다. 사람이 싫은 데 산장을 운영하는 이 아이러니, "나는 널 갖고 싶지만, 갖고 싶지 않아."라 말하던 기시감이 흠뻑 젖어들었다. 

"그럼 다른 일도 같이 하시나봐요?"

"아 예, 뭐 산이니까 약초캐고 뭐 그런 일 하지요."

"산삼도 캐고 그러신가요?"

"예 뭐."

점점 대답이 짧아지는 걸 보니 슬슬 대화를 알아서 끊어줘야 하는 타이밍임을 알았지만, 첩첩산중, 인간이라곤 눈 앞에 서 있는 수염 송송난 아저씨 밖에 없어서인지, 자꾸만 말을 붙이게 되었다. 

"그럼 아이들도 같이 사는 건가요?"

"예. 방학이라 어디 갔어요."

"아~ 어ㄷ.."

"그럼,편히쉬시고, 저녁식사는6시인데그때나오시면됩니다. 주변에산밖에없는데, 오늘날씨가영심상치않으니너무멀리가지는마세요."

더이상은 못 참겠는지, 주인은 '아이들은 어디갔나요?'란 내 질문을 매몰차게 끊고, 꼭 해야하는 말을 순식간에 내뱉고 홀연히 사라졌다. 모든 일이 순식간이라 어쩌면 산 속에서 도사님을 만났는지 착각할 만도 했다. 

주책이 아닐 수 없었다. 싫다는 사람 붙잡고 뭔 짓이었던가. 민폐도 적당해야 하거늘.


안개가 자욱한 숲으로 발을 옮겼다. 방 안에 누워있어봐야, 순백색의 침대가 자꾸만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 영 불편했다. 시골집 냄새라도 가득하면 위아래가 모두 불편한 상황을 이질감으로 덮어버릴텐데, 모텔을 들어설 때 나는 락스 냄새 비슷한 것이 방 안에 가득했다. '모텔 냄새'라는 것을 인식하자마자, 수많은 사랑이 피어나고 사라졌을 모텔 침대에 대한 거부감은 단 한 번도 없었던 것이 떠올랐다. 이름 모를 타인들이야 어떤 사랑을 나누든 알 바가 아니다. 그러나 그녀의 몸짓과 표정은 여전히 내 뇌 속에서 생생하다. 문제는 저 순백색의 침대에 그녀를 그려넣고 자연스레 이름모를 다른 남자 역시도 그려진다는 점이다. 그 둘의 몸짓을, 문에 구멍을 뚫어 훔쳐보는 나까지.

고개를 저었다. 짙은 안개는 수미터 앞도 가늠할 수 없게끔 세계를 축소시켰다. 좁은 시야가 불편해 나왔더니, 자그마한 물 알갱이들이 이젠 망상의 나래를 이루는 원자가 되어준다. 산세는 험한 편이었지만 주인 아저씨가 자주 다니는 길인지, 등산로는 제법 인간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었다. 그래도 망상과 함께 걷다보면 영원한 망상의 세계로 훌쩍 넘어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약간의 긴장감이야 말로 일상의 균형을 유지하는데 가장 필요한 것 아니던가. 그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똑같이 적용됐다.

그러나 좁은 등산로도, 궃은 날씨도 망상만큼은 막지 못했다. 죄의식에 젖었던 훔쳐보기는 어느새 스릴넘치는 포르노 시청이 되어버렸다. 나의 뇌가 이토록 형형색색하며 스무스하게 전개되는 훌륭한 상상을 자아낼 수 있었는지 놀라웠다. 괜찮아. 내 모든 죄악은 안개가 가려줄테야. 망상과 착각은 자유라는 오랜 말도 있잖아. 걸음이 빨라지고, 심박수가 올라가며, 눈엔 힘이 들어갔다. 몇시간이고, 몇시간이고 더 표류할 수 있음에 즐거웠다. 마치 일찌감치 같은 배게를 배고 누우며, 몇시간이고 더 함께 있을 수 있어 즐거워하던 그 때처럼. 그 안락함과 배려에 너무 빨리도 젖어버려, 그녀가 원한 최소한의 약속까지도 수면 부족을 핑계로 어영부영 넘어가려 하던, 나태함으로 점칠된 본연의 모습은 아마 오늘 내앤 나오지 않을 것이다. 고작 오늘이므로, 고작 오늘이니까.

"돌아갑시다."

정신이 들었다. 눈 앞엔 산장 주인이 서 있었다.

"너무 멀리 가지는 마시라고 분명히 말씀드렸는데..."

나는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딴 생각을 좀 하다보니."

그는 시야를 돌리며, 말을 붙였다.

"예. 뭐. 갑시다."

그가 시야를 돌린 이유가 바지의 모양새를 부자연스럽게 만든 그 '몹쓸 놈' 때문은 아니기를 바랬다. 아니, 촛불에 후 바람을 불어 꺼버리듯, 망상을 강제 종료시킨 그가 바로 몹쓸 놈인지도 모르겠다. 두 몹쓸 놈에 대한 원망스러움과 함께, 어색함을 애써 감추고 돌아왔다.

방으로 돌아와마자, 난 순백색의 침대에 누워 자위를 했다. 순백색의 침대는 지나치게 더러워졌고, 나는 마음 편히 바닥에 누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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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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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빈은 잘 쌩겼다. 하지만 우리 률형이 더 잘쌩겼다.

 

 

 

 

나왔다. 미니앨범 [답장]. 데뷔 25년 차. 자신이 걸어온 길에 시그니쳐가 철철 흘러넘쳐, 그 이름 석 자만 듣더라도 모든 이들이 "아! 그 양반!"이라며 그가 하는 예술이 어떤 색인지, 어떤 소리인지, 어떤 느낌인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공감할 수 있는 것은, 모든 예술인이 바라마지 않는 경지가 아닐까 싶다. 김동률은 수많은 브랜드 중에서도 압도적인 경향성을 가졌다. 경향성은 하나의 장르가 되고, 곧 정합성을 낳는다. 세대를 초월하는 률덕의 스펙트럼 속에서 '찌질한 2030 남자닝겐' 포지션에 담긴 본 률덕, 이번 미니앨범의 수록곡들과 같이 듣기 좋은 이전의 곡들을 정리하며 신입 률덕 영업을 뛰어본다. 누구 맘대로 분류하냐고? 엿장수 맘대로다.

 

 

동률.jpg

 

두번머겅

 

 

1. 다시류 - <답장>

 

타이틀곡 <답장>은 김동률 이별 노래의 주된 감성인 '다시' 류로 분리하겠다. 일찍이 <기억의 습작>에서 '많은 날이 지나고 너의 마음 지쳐갈 때'라 노래했던 그 감성은, 25년의 세월 동안 조금씩 변화하며 '다시 돌아가 널 볼 수 있대도, 어쩌면 나는 그대로일지 몰라'로 되돌아왔다. '다시'라는 단어는 김동률 음악에서 매우 중요하다.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 - <다시 떠나보내다.> - <다시 시작해보자> 3연타로 이어지는 '다시' 시리즈에서 읽을 수 있듯, 만남과 이별, 후회와 재회가 거듭되는 한편의 모노드라마를 떠올리게 한다. 2011년, EP앨범의 타이틀곡이었던 <replay>에서 '너 머물렀던 그때로 거슬러, 멈춰있는 어리석은 내가 있지'의 가사는 '다시류' 음악을 한 줄 정리해준다. '닝겐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물론 각각의 곡이 그려내는 상황과 화자의 감성은 모두 제각각이지만, '다시류'는 '이별 이후의 치명적인 감정에 휘둘리지만, 그래도 삶은 이어나가는' 사람들에게 충분한 위로(라 쓰고 구여친에게 새벽 2시에 '자니?'라 보낼 수 있는 용기)를 건네준다. 사실 2집 앨범에 <편지>라는 곡이 있는데, 시종일관 g minor로 후려치는 곡이라 듣기에 쉽진 않다. 다만 노래에 깔린 감정이 얼마나 성숙해졌는지 비교하기에 참 좋다.

 

여기서 쬐끔 더 나가면, <그건 말야>나 <오래된 노래>, <그 노래>, 혹은 <오늘> 같은, 조금 더 묵은 감정을 이야기하는 노래가 등장한다. 회한이나 체념의 자세는 잃지 않지만, 완전히 마음속에서 지워지지 않을 그녀의 기억은 삶의 순간순간마다 깜빡이도 안 켜고 훅 들어온다. 스무 살, 서른 살, 마흔 살에도 기억은 쉬이 지워지지 않는다. <답장>은 '묵은 감정'으로 나아가기 이전, '되돌아가고 싶다.'라는 아주 약간의 희망이라도 품게 되는 감정의 한복판에 서 있는 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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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시절. 잘쌩겼다. 리얼루다가.

 

 

2. 쓰담류 - <Moonlight>

 

토이의 <나는 달>과 유사한 설정의 노래다. '당신이 해를 만나는 동안, 난 무엇도 할 수가 없답니다.' 달을 노래할 때 클리셰 같이 쓰이는 문장이지만, 일렁이는 선율에 얹으니 이대로 접싯물에 코 박고 코 잘 수 있을 것만 같은 노래가 되었다. ASMR와 수면다큐가 유튜브에서 입소문을 타는 시대, 고된 하루에 위로를 보내주는 '쓰담류' 음악은 여전히 가치 있다. 선율의 흐름과 곡의 분위기는 <크리스마스잖아요>나 <한 겨울밤의 꿈>과 닮았고, 곡의 메시지는 <괜찮아>나 지난 앨범의 <동행>과 궤가 닿아있다. 얄궂게도 위로는 "잘 될 거야"란 말을 들을 때 보다, 다른 이야기를 들을 때 뜬금없이 뚝 떨어지듯 내려올 때가 있다. 그런 점에서, 포근한 선율로 불쑥 솟구치는 외로움을 지우는 노래든, '괜찮아. 우리 같이 해보자.'라는 말을 건네는 노래든, 모로 가도 위로로만 가면 그만이라는 점에서 쓰담류로 분류하겠다. 특히, 언제든지 돌아갈 수 있는 존재를 오래도록 자처했던 경험을 통해보자면, 그런 존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된다 카더라.

 

사실 쓰담쓰담 같은 거 익숙하지 않아서 분량이 짧다. 아참, 이미 <자장가>란 노래가 있는데, 이 노랜 정말로 아기에게 자장자장 하는 노래라(...) 뭐 어쨌든 이 노래도 쓰담류의 일종이긴 하다. 데헷

 

 

3. 끝장류 - <사랑한다 말해도> (feat. 갓소라)

 

언제나 이별은 도래하기 마련이다. 예감하든 예감하지 못했든, 언제나 다가올 수밖에 없다. 단순히 예감이 아닌, 사랑이 끝장나고 있음을 온몸으로 느끼는 기간도 때론 있다. 이때를 담은 김동률의 노래들을 '끝장류'로 분리해본다. 

 

먼저, 4집 마지막 곡 <고별>이 있다. 우주로 떠나버릴 듯한 사운드에 무게감 있는 가사로 끝장남을 야무지게 노래하는 곡이다. '그 어떤 목숨에도 끝이 있는 법 / 길 위를 구르는 저 잎새들처럼'과 '우리의 만남에도 생명이 있어 / 어느새 조용히 숨 거두려 하네' 라는 가사들이 언뜻 들으면 뭔소리하나 싶겠지만, 꼭꼭 씹듯 들으면 우주적인 사운드가 끝을 향해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준다. 앨범의 마지막 곡으로 담기에 교과서 같은 곡이랄까. 또 5집 수록곡 <뒷모습>이 있다. 담백하면서도 기본에 충실한 탱고 선율에 운율감을 매우 잘 살린 곡이다. '사랑은 이미 우리를 떠나가고 있었네, 당신이 나의 곁에서 떠나버리기 전부터'이란 가사는, <사랑한다 말해도>의 '사랑'과 유사한 놈이다. 몹쓸 놈 이란 얘기다. 두 곡이 한 명의 당혹감, 체념, 각오, 후회를 담는다면, <사랑한다 말해도>는 갓소라의 음색이 더해지며 아름답게 끝장나는 노래가 되었다.

 

또한, 이 곡은 당연히 김동률이 만들고 이소라가 부른 <사랑이 아니라 말하지 말아요>를 다시 듣게 한다. 두 곡 다 '사랑'이란 단어가 지닌 사전적 의미를 해체하는 곡이다. 이런 사랑타령이라면 아무리 해도 지겹지 않다. 4집 앨범 수록곡, <사랑하지 않으니까요>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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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는 모습도 잘 쌩긴 우리 률형..

 

4. 하오류 - <연극>

 

사실 <연극>이란 곡은 김동률의 디스코그라피에서 독특한 곡이다. 언뜻 들어도 고상지의 존재감이 뿜뿜 쏟아져 나오는 곡이라서일까. 그래도 완성도는 훌륭해서 귀가 은혜로워지는 기분이다. 그래도 영업은 해야 하니까, <연극>의 마지막 가사 '이봐요 당신 이미 오래전 / 연극은 벌써 끝이 났다오'를 어거지로 끄집어내 '하오류'로 묶어본다. 원래 덕질 영업은 철판을 깔아야 한다카더라.

 

'하오체'의 계보를 잇는 명곡들이 있다. <그림자>, <동반자>, <잔향>. 하오체로 쓰였으며, 김동률 최고의 곡으로 꼽을 만하다. 팁을 좀 드리자면, 김동률의 보컬은 과거보다 현재가 더 나은 것 같다. 때문에 라이브 앨범에 수록된 <그림자>와 <동반자>가 듣기에 훨씬 좋다. 아님 말고 좌우간, '하오류'의 음악들은 '다시류'에서 노래했던 후회와 체념의 감정이 훨씬 더 농익고 푹 익어 고이 우려낸 듯한 곡들로 정의해본다. 김동률 본인이 밝혔듯, 김동률이 하오체를 선호해서가 아닌, 곡의 무게가 하오체를 부르는 격이라 그 안에 담긴 감정에 더 집중할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2집의 <희망>이나 3집의 <귀향>도 하오류로 분류해 본다. 재밌는 것은, 20대 시절엔 하오체로 곡을 썼었는데, 정작 나이 먹으니 하오체가 잘 안 나온다. 

 

이 중에서도 특히 <동반자>는 윤도현의 러브레터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곡으로 밝혔다. 워낙 깨알 같은 에피소드를 듣기 어려운 사람이라 러브레터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동반자>는 본인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담겨있으며, 상대방의 양해를 얻고 쓴 가사라 한다. 정재형과 국밥집에서 국밥 먹다가 '다시는 이런 가사를 쓸 수 없을 것 같다.'며 <동반자>의 가사를 보여줬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아무튼, 이 세 곡은 김동률이란 아티스트가 표현할 수 있는 가장 깊은 감정을 그려내고 있다.  대중음악에서 쉬이 들을 수 없는 편곡과 가사를 가진 곡들인데, 김동률의 최근 앨범엔 하오체 곡이 없어 몹시 아쉽다.  현기증나니까 다음 앨범엔 꼭 하오체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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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률형은 피아노위에 있을 때 제일 잘쌩겼다

 

5. 뜬금류 - <Contact>

 

덕질에 심취하다 보면 고정관념에 젖게 된다. '김동률이니까 당연히 이런 곡이겠지?'라는 생각을 갖기 마련이다. 그러다 보니 앨범마다 가장 이질적인 느낌을 주는 노래들이 있다. '이것도 김동률' 류의 노래들을 뜬금류로 분류해본다.

 

박새별과 함께 부른 <새로운 시작>의 분위기와 흡사한 곡, 동명의 영화에서 영감을 얻었을 것으로 심히 추측되는 <Contact>는, 여기저기서 힘을 준 편곡으로 듣는 이의 정신을 무한한 공간 저 너머로 보낸다. 가사는 안정적인데 노래는 혼란하다. 펫 메시니 아재의 전조로 꽉 찬 곡을 듣는 듯한 느낌이다. 6집에선 <퍼즐>, EP앨범의 <크리스마스 선물>, 3집의 <구애가>, 그리고 본인이 트로트 풍으로 걸쭉하게 편곡해 부른 2집의 <님> 같은 곡들은 각각의 분위기나 메시지가 모두 다르지만, 기존의 김동률이 해오던 노선에서 약간 삐딱선을 탄 듯한 노래다. 이질감을 주는 곡 중에서 단연 탑은, 마이언트메리 정순용과 함께 부른 5집의 <Jump>가 아닐까 싶다. 저어기 불란서 빠리의 샹젤리제 거리 카페에서 쓰디쓴 에소를 홀짝이며 열심히 악보를 들여다볼 것만 같은 김동률도 '우리네랑 같은 사람이구나'라는 새삼스러운 생각을 들게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물론 <Contact>는 이런 곡들보다 그 이질감이 확 낮다. 아무래도 수록곡이 5곡밖에 안 되는 미니앨범이라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김동률답지 않게 수록곡이 적은데, 날이 갈수록 달라지는 음악 시장에 대한 고민이 얼핏 느껴진다. 사실 싱글 몇 개 던져도 뭐라 할 사람 없는데, 장인처럼 꿋꿋이 '앨범'의 형태 고집하는 바보스러움이 보인다. 수록곡은 적지만, 앨범이기에 새로운 시도도 해보고 싶은 마음이 <Contact>의 편곡에 힘이 실린 원동력이 아닐까. 아님 말고 222

 

 

6. 오글류

 

천 번 만 번 다행스럽게도 이번 앨범엔 오글류 곡이 없다. <아이처럼>이나 <욕심쟁이>, 그리고 결혼식 축가로 유명한 <감사>, 지난 앨범의 <내 사람>같은 곡이 그렇다. 이런 노래는 그만하시고 우울우울열매를 만 개쯤 절인듯한 곡만 써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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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딩은 절대 입지 마셨으면 해요 형 (왼쪽은 정재형)

 

 

 

뜬금없는 얘기인데, JTBC의 <비긴어게인>을 즐겨봤었다. 각자의 위치에서 최정점에 선 뮤지션들이 버스킹을 떠나는 이야기도 흥미로웠지만, 세 사람이 음악을 대하는 태도가 더 눈 여겨졌다. 윤도현에게선 정말로 음악을 즐기면서 하는 모습을, 이소라에게선 음악을 마주할 때 뮤지션이 가져야 하는 자세를, 유희열에게선 모든 사람들을 잘 버무려서 좋은 결과물을 내려는 노력이 보였다. 

 

김동률의 음악을 들을 때마다 이소라의 모습이 떠오른다. 두 사람이 곡 작업을 해서가 아니라, 프로불편러의 자세로 깐깐하게 음악을 대하지만, 그 모든 것이 청자를 향해 있다는 진심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콘서트 영상에서 뮤직팜 이사님이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김동률을 대하기 어려웠다고 토로했을까. 물론 그것이 꼭 정답이란 법은 없다. 윤종신처럼 뻔뻔해도, 김동률처럼 깐깐해도, 유희열처럼 능글맞아도 결국 창작자로서 고민과 진심이 담겨 있다면 반드시 청자도 선율과 가사 속에서 그것을 느낄 수 있다.

 

바로 그, 섬세한 고집스러움이 오매불망 김동률의 신보를 기다리게 한다. 한 아티스트가 25년을 버텨오기란 참 쉽지 않다. 단순히 재능러으로만 보기엔, 미니앨범을 내놓는데 들인 1년의 시간이 부정하고 있다. 전성기가 어디인지 쉬이 꼽을 수 없이 앨범마다 각각의 가치를 뽐내는 그에게, 여러모로 워너비인 나는 그저 감지덕지할 뿐이다. 앞으로 몇 장의 앨범이 더 나올진 모르겠지만, 방송 활동 따위 앞으로도 안 하셔도 되니 제발 음악 좀 많이 쏟아내 주셨으면 한다. 조금 덜 깐깐해도 되니까요 박리다매좀

 

김동률 페이스북에 신보 발표를 앞두고 이런 글이 올라왔다. 이곳으로 모인 률덕들, 숨은 팬 여기 있다고 손들어보자.

 

마지막으로, 조금 뒤에 설레는 맘으로 음악을 들어 주실 곳곳의 숨은 팬 여러분들. 

길거리에서 알아봐 주는 사람들이 없어도, 이제 생일 선물이나 초콜릿 선물 같은 건 들어오지 않아도, 조용히 각자의 삶 속에서 제 음악을 듣고 계신 분들이 많다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모쪼록 제 음악이 추운 겨울 조금이나마 위로와 힘이 되었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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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하고 다니니 누가 알아봅니까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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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에도, 역시 틀렸다.

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큼은 확실히 알겠다.


목표를 향해 시속 200km/h로 돌진하는 기차같은 인생이 어딘가엔 꼭 있다. 지도 한 구석에 빨간 스티커를 따악 붙여놓고 오로지 그곳만을 향해, 그 여정에 걸리적거리는 잡초와 추위와 배고픔과 괴로움과 귀찮음과 포기하고싶은 마음과 집어치자는 유혹과 분탕질과 반동질과 엄마보고시픔과 외로움, 기타 등등의 모든 고난이 도래하더라도 그 모든 것을 한 큐에 날려버리고 꿋꿋이 걷는 사람들이 어딘가엔 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아쉽게도 나는 아니었다. 지금껏 나는 귀찮으면 집어치고, 될 대로 되라며 미뤄두고, 오늘 할 일은 다음주로 미루며, 옷깃을 스미는 봄바람에도 시리다며 투덜대고, 떡볶이나 초콜릿을 무사의 마음으로 참아내는 인내 따위도 없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났으면 단 10분 만에 3등 신민으로 분류되어 징병조차도 못 당했을 터다. 뜻밖의 개이득이랄까.


'성실'이라는 단어와 나의 거리는, 교차 편집으로 반전을 낚시한 <너의 이름은>의 마코토 감독이 야무지게 포장하더라도 마리아나 해구의 최저점과 카일라스 산의 최고점의 거리보다 멀다. 아니, 이것으론 부족한 표현이다. '성실'과 나의 거리는, 그 사이에 수금지화목토천해왕성을 다 집어넣어도 넉넉할 만큼의 거리를 지녔다.


그러나 완벽한 타원형 궤도란 것은 없듯, 나와 '성실'이란 녀석이 견우와 직녀처럼 아주 오랜만에 짧은 만남을 가지게 될 때가 있다. 다른 이들이라면 아마 이때가 성장의 타이밍, 채사장이 말한 <열한계단>의 한 계단쯤은 될 수도 있으나, 유감스러운 것은 '나'라는 단어를 리꼬르하자면, '무능'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 '무능'과 '성실'의 조합, 이 치명적인 졷망행 로맨스가 고비마다 폭풍 역주행이란 아름다운 결과로 도출되곤 했었다.


요즘은 그래서, 아주 잠깐 성실과 부비부비하며 항상 아쉬운 이별과 애타는 마음을 가지고 살 바엔, 그냥 불성실하는 건 어떨까 싶다. 초지일관으로 불성실하면 민폐라도 끼치지 않게 될 수도 있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프로계약도 맺지 못하고 방출당한 에펨 생성선수같은 처지에 놓이게 되겠지만, 생성선수도 게임에서 더이상 그려지지 않는 또다른 스토리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따위 스토리 따위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는다. 내가 그린 스물 여덟이 겨우 이토록 노잼의 연속일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듯, 모든 사람들의 시시콜콜한 스토리를 통틀어 꿀잼과 노잼의 비율이 9:1만 되더라도 꽤 괜찮은 나날이라 불릴 것 같다.


결말을 알고도 재밌는 영화가 진짜배기듯, 대기만성이나 로또당첨 따위의 대박역전은 애초에 성립할 수 없는 세계관에 산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스토리는 이어진다. 재미없어도 어쩔 수 없다. 요즘 쓰고 있는 아이템도 졸라게 재미없지만, 근대에서 넘어온 지 100년은 됐기에 모든 사람들이 스토리를 쓸 자유는 이미 보편화됐다.


자, 그럼, 늘 그렇듯 무한한 일상의 궤도를 잇는 스토리를 쓰러 가볼까. 댁도, 나도, 우리집 고양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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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독자를 잃어버린 블로그에 글을 쓴다는 것은 참 버거운 일이다. 항상 타인의 시선에서 자신의 가치를 찾아다니는 못된 습성 탓이다. 오롯이 자신의 의지로 가득찬 그녀의 모습에서 나는, 영원히 다다를 수 없는 아득함을 느꼈다. 때때로 순간을 착각하고 문득 그때의 아득함이 불쑥 일어날 때가 있다. 

음, 독자를 잃어버렸기에 이런 글도 쓸 수 있는 거겠지.



#2


태생적인 게으름이 내면과 외면 구석구석을 가득채운 나는, 어지간해선 플레이리스트를 확 뒤집지 않는다. 1년에 한 두번, 그것도 플레이리스트가 꽉 차 기존의 곡들이 삭제됐다는 메시지가 뜰 때, 그제서야 무거운 손가락을 옮기곤 한다.

지난 가을에 플레이리스트를 정리했다. 무의식적으로 다음 곡 버튼을 누르며 운전하는 습관을 지닌 나는, "비오는 날엔, 모르는 노랜 듣고 싶지 않아"라는 가을방학의 <종이우산>처럼, 비 오는 날이 아니라 특별한 날과 특별하지 않은 날과 특별함과 특별하지 않음 그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 대부분의 나날 모두 모르는 노래가 흘러나오는 것이 영 거북하다. 따라 부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습관이란 게 무서운 거더군." 그래서 유감, 또 유감이다. 일주일에 세 번 이상은 듣는 듯한 김동률의 <동반자>를 들으면, 곡이 끝나고 몇 초 뒤 곱씹는 듯한 표정으로 "가사가 참 좋아."라는 말을 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오른다. 취향이 아니기에 전주가 나오자마자 다음 곡으로 돌리는 자우림의 <파애>는, 힘들 게 대관령 길을 오르던 때 노래에 담긴 배경을 설명해주던 목소리가 떠오른다. 지드래곤의 목소리가 나오기 전에 돌려버리는 아이유의 <팔레트>에선, 그 날 내가 저질렀던 망언과 그녀의 화난 목소리가 떠오른다. 플레이리스트 중에서 가장 이질적인 아티스트인 샘 옥의 <love>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관계로 접어들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찌질함의 나락으로 빠져들던 내가 떠오른다. 우리 가족 모두가 좋아하게 된 넬의 <Standing in the rain>에선, "우울한 날엔 어떤 노래를 들어?"라며 이미 수차례 물었던 질문을 아무 생각없이 다시 건네던 끔찍한 광경이 떠오른다. 윤종신에 대한 기사를 쓰면서 내내 듣던 <좋니>는, 마지막 스캣 부분을 왜 마저 부르지 않냐며 농담을 건네던 그녀의 말과 함께, 또 역시 고속도로 안에서 윤종신의 찌질한 노래들이 흘러나오자 "넌 항상 이렇게 짝사랑하는 노래만 듣네?"라는 그녀의 예리한 지적에 대책없이 바보같은 대응으로 일삼던 때가 떠오른다. 듣기가 두려워진 짙은의 <안개>는, 희뿌연 바다에서 나즈막히 읊조리던 나와, "적절한 선곡이군."이라며 최대한의 칭찬을 하던 그녀가 떠오른다. 

조각조각 흩어진 기억들이 깜빡이도 안 켜고 불쑥 튀어나오며 나를 놀래킬 때가 있다. 정적에 가까웠던 일상에 균열이 생기고 익숙한 자괴감이 새어 들어온다. 그때에나 잘 기억하면서 살았을 것이지, 무의미하다는 표현을 붙이기에 그 잉크가 아까울 무게의 무의미한 되새김질. 그러나 항상 쓰는 성찰의 글은 진정성을 잃고 동어의 반복에 빠졌고, 그 인지부조화로 인해 결국 파국을 맞았던 것 모르지 않으나, 모르지 않으나, 모르지 않으나, 

다음 문장이 떠오르지 않을 만큼 할 말이 없다.


#3


익숙한 곡에서 튀어나오는 기억에 몸서리치고, 고개를 뒤흔들다가, 그래도 안 되면 "연락 좀 해!"라며 소리치던, 마지막 인사로는 정말 최악이었던 그날 바로 다시 담배를 물었던 때처럼 라이터를 들고 바깥으로 나선다. 그러나 하루에 반갑 이상은 안 피겠다던 쓸모없는 다짐 때문인지, 기억이 제멋대로 뛰쳐나오는 횟수에 비해 열 개비는 턱없이 부족하기에 다소 애로사항이 꽃핀다. 

익숙하지 패턴이지만 다양한 공간에서 튀어나오는 애로사항이기에 처음엔 적응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무던해지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던 치졸한 신조는 어디갔는지 조소만 흘러나온다. 그럼에도, 김윤아의 <비밀의 정원>은 참 받아들이기 어렵다.

어느날 그녀는, 그녀 답지 않게 "자우림 노래 중에 어떤 게 젤 좋아?"라고 물어왔다. 참 소중한 질문이었는데, 나는 "<미안해 널 미워해>도 좋고, <스물 다섯, 스물 하나>도 좋고. 근데 김윤아 솔로 앨범이 더 취향에 맞는 것 같아"라는, 번뜩임이라곤 1g도 없는 시시한 답변을 내놓고야 말았다. 말을 뱉자 마자 순간 당황했던 것 같다. 그러나 바로 떠오르는 노래가 없었다. 나는, 그녀와 자우림과 김윤아에 대한 이야기를 그토록 많이 나눴음에도 불구, 김동률 노래를 줄줄이 읊을 때처럼 답변하지 못했다. 당황했다. 

<비밀의 정원>은, 조예는 깊지 않으나 10초 정도의 멜로디에도 가슴 속에서 바닷바람이 불어오며 가보지 않은 곳에 아이러니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아이리쉬 풍 노래다. 이 곡을 얘기했어야 했다. 바로 나왔어야 했다. 그러나 그때 내 머릿속에 이 노래는 까마득히 지워져있었다. 

그 대화는 지극히 상징적이었다. 나는 딱, 거기까지였다. 나라는 개인이 가진 내면의 완성도도, 좋아하는 것을 위한 책임도, 사랑을 이야기할 만한 그릇도, 딱 거기까지였다. 그녀가 "잘 안 맞을 뿐이야."라며 호의적으로 해석해준 이유를 뜯어보면, 감정적 자해를 수백번 저질러도 지워지지 않을, 거기까지에 그쳐버린 나의 최대치에 맞닿아있다. 

고작, 고작이라고 밖에 표현하지 못한다는 것이 퍽 슬프다. 조금 더 나은 인간이 되지 못한, 되지 않은 사실이 퍽 애닳다.


#3


며칠전인가, 핸드폰 일정에 그녀의 생일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삭제하는 것조차 귀찮은, 아니, 확인하는 것이 두려워 미뤄두기만 했는데, 오늘 낮 12시에 그녀의 생일이 화면에 가득차 요란한 알람을 울린다. 그렇게 강조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는 것인데, 이것을 설정해놓은 자식을 찾아서 흠씬 두들겨패주고 싶다. 그 녀석이 과거의 나라는 것이 안타깝지만.

고민했다. '생일 축하한다는 말 정도는 할 수 있지도 않을까?' 생일을 진심으로 챙기고 싶었던 과거의 나는 이미 역사가 되어버렸지만, 역사와 완전히 분리하는 것은 성공하지 못했기에 옅은 설레임의 감정이 주책맞게 알싸히 퍼졌다. 하지만 그녀는 분명히 말했다. "헤어진 사이에 다시 연락하고 그러는 건 좀 아니지 않을까?" 차분하지만, 단호하게. 이리도 생생히 기억이 나는데, 모른 척 하고 멍청한 짓을 저지를 수는 없는 일이다.

그깟 연락이 뭐 대수라 할 수도 있지만, 어쩌면 나는 그녀에게 있어 '착오'나 '오류'였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오래전부터 들었다. 그렇다. 그녀가 내게 '오만하다'고 표현했던, 겸손하지 못한 자의식 과잉이 분명하다. 하지만 일말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는 일이다. 사소한 연락에 그녀의 평온함에 아주 자그마한 생채기, 아니, 불결함이라도 묻는다면 옳지 않은 일이다.

이것 저것 다 따지다가 모든 것을 놓쳐버린 것에서, 나는 어떠한 생산적인 결론도 얻지 못했다. 무신론과 다신론 사이에서 부정합한 줄타기를 하는 나는, 그래왔듯 속으로 그녀의 생일을 축하했다. 그 외 기타 조잡하고 쓰잘 데 없는 기원들과 함께. 어둠이 짙게 내린 이 시간 그 행위를 되새겨보니, 찌질함으로 점칠된 수많은 에피소드 중에서도 제법 손가락에 꼽을만한 짓거리임이 분명하다.

그래도 축하하고 싶은 걸 낸들 어쩌라고. 태어나 스쳐지났다 하더라도 이렇게 값진 기억을 남겨준 것에 감사한 것을 어찌하냐고.

하여, 그것 밖에 안 되는 인간인 것을 어찌하리오.


#4

괴롭지 않다고 얘기하기엔 다소간 참작의 여지는 있다고 생각한다. 잊었다고 말 하기엔 거짓의 비율이 크다. 일상엔 여러모로 타격이 생겼고, 독자를 잃어버린 글쓰기 역시 생기가 부족하다. <요괴봉투>는 내년 하반기에나 다시 쓰게 되지 않을까 싶다. 어차피 망한 글인데 놓지는 못한다. 머리를 잘라볼까 했다. 그러나 또 그럴만한 결기도 없다. <사랑, 지나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닐 마음의 사치>라지만, 사치스러운 기억을 도저히 놓지 못하겠다. 

그래. 퍽 괴롭다. 꽤 힘들다. 썩 괜찮지 않다. 일상에 그녀가 다시 들어오는 머저리같은 상상을 때론 하기도 한다. 괴롭고 그리워하는 것이야 나의 자유아니겠는가. 그 정도야 허용될 만한 찌질함이지 않은가.

하지만 추잡함만을 야기할 그 모든 행동을 절제하고 있다는 것을 보면, 그나마 최소한의 양심은 있는 인간은 되는 듯하다. 



0.

다시 읽어보니, 그녀의 입장을 고려하는 구석이라곤 눈꼽만큼도 보이지 않는 이 글에서, 최소한의 양심을 찾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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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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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성장, 혹은 변화하는 양상이 어떤 형태인지 확신하지 못한다. 작은 경험들이 차곡차곡 쌓여가며 계단을 오르듯 변화할 수도, 혹은 특정한 계기를 기점으로 엘리베이터를 타듯 쑥 변화할 수도 있다. 항상 성장하지는 않는다. 때때로 아래층으로 내려갈 때도 있다. 대게 이것을 역행으로 규정하게 되는데, 좀 더 넓게 보자면 그것 역시 필요했다고 생각하게 되기도 한다. 시야를 넓게 가지면 모든 일에 대범해지지만,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질 때는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여 일을 그르칠때도 있다.

 

5월 첫째 주는 모두에게 그렇겠지만, 나에게는 매우 특별한 한 주였다. '문재인 대통령 시대'의 의미를 고작 내가 짚을 필요도, 그럴 때도 없을 것이다. 역사책의 많은 페이지에는 평화로울 때보다 격변의 시대를 담고 있었는데, 이 시기를 기점으로 전후 1년간은 분명 역사책에 비중 있게 그려질 것이다. 그리고, 쏟아져 내리는 시대의 변화에 각각의 개인들은 그 나름대로 변화할 것이다. 혹자는 오르고, 혹자는 내려가고. 

 

내게는 또 하나의 변곡점이 있었다. 느닷없이 맞은 부친상이 그것이었다. 부친은 승려였다. 승려를 부친으로 부르는 것에 많은 이들은 거부감이 들겠지만, IMF라는 격동의 파도를 정신없이 헤엄치다 보니 어느새 승려를 부친으로 두게 된 나만큼 거부감이 들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한 번도 부친이라 부른 적은 없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갈 때마다 야간자율학습에 참석하는 기분이 들었다. 

 

석가탄신일을 준비하기 위해 목욕하러 가던 부친은 교통사고로 생을 마감했다. 사고 소식을 듣고 부리나케 달려간, 이미 수없이 드나든 익숙한 대학병원 입구에서 여느 때와는 달리, 지하 장례식장에서 울려 퍼지는 곡소리를 들었다. 불길했다. 응급실로 들어선 순간, 그러나 너무나 멀쩡했던 부친의 상태에 안도했다. 또 한 번의 해프닝으로 끝날 일인 줄만 알았다.

 

그러나 귀가 후, 급격히 호흡곤란을 호소하던 부친과 "업보가 많다."는 유언, 다시 방문한 응급실에서 시행된 심폐소생술까지 겪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깨달았다. 부친과 나의 인연이 끊어져 가고 있음을. 후회했다. 떠나려는 부친의 생을 바짓가랑이 잡듯 붙잡을 수 있었던, 몇 시간 전 내가 선택한 결정들을. 그것만으로 끝이 아니었다. 부친은 중환자실에서 24시간을 넘겼고, 사망진단서는 '병사'로 찍혔다. 나를 비롯한 유족은 납득할 수 없었기에 부검을 신청했다. 

 

국과수로 향하는 운구차 안에서, 나는 과거를 부여잡았다. 슬픔을 마주하기에 모든 것은 너무나 갑작스러웠고, 슬퍼지려 할 때마다 부친과 내가 마주한 다른 이의 죽음들을 떠올렸다. 어린 날, 부친을 돕기 위해 따라다녔던 많은 장례식장과, 입회할 때마다 무섭기만 했던 입관식과, 유족의 울음소리가 섞이던 49재들을 떠올렸다. 나는 어쩐지 슬플 수 없었다. 그럴 때마다 부친께서 유족에게 말씀하시던,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부검을 마친 뒤 다시 영구차로 오르는 부친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은, 한낱 어리석은 인간이기에 쉬운 일이 아니었다고 변명해본다.

 

요상하게도 부친은 작년 어느 때부터 종종 밥을 먹을 때, '죽으면 다비장을 해다오'라는 말을 하셨다. 밥을 먹는다는 것은 항상은 아니라도, 대체로 즐겁고 또 필요한 행위다. 밥을 먹기가 너무나 귀찮을 때에도 위는 내게 투쟁한다. 장례식장에서 많은 분들은 내게, '산 사람은 먹어야지.' 라며 식사를 권했다. 마치 산 자들이 살기 위해 필수적으로 끊어야 하는 연장티켓 같은 느낌이었다. 부친은 연장티켓을 끊으면서, 더 이상 티켓을 끊지 않아도 될 때를 생각했나보다.

 

불교계도 사람 사는 곳이라,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전통적인 장례의식인 다비장 역시 돈이 없으면 할 수없는 일이기에, 졸렬하게도 쉬이 엄두가 나지 않았다. 부검 후 검시관이 형사에게 하는 말을 훔쳐 들으니 '병사가 맞다'는 이야기가 아니었다면 과연 다비장을 치뤘을까. 확신할 수 없다. 나는 고인의 마지막을 편히 보내드리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다비장을 치렀다.

 

켜켜이 쌓인 나무조각들에 불을 들였다. 고인은 한 줌 재로 화했다. 유족들이 직접 불을 놓고, 직접 습골하며, 쇄골까지 모든 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다. 뼛조각이 잘게 아스러지는, 육중한 쇠공이가 떨어지는 소리가 날 때마다 엊그제까지 생생했던, 때론 카톡으로 이모티콘을 붙여 농담도 하던 고인의 기억이 과거 속으로 아스라이 멀어져갔다. 석가탄신일인 덕에 작은 절이지만 많은 분들이 함께할 수 있었다. 얄궂지만 감사한 일이다.

 

승려의 마지막처럼 허망하고 쓸쓸한 것이 없다는 것을 많이 지켜봐 왔다. 뒷방에서 잊혀진 노스님들이 어떤 마지막을 맞게 되는지 보게 된 것은, 어린 내게도 더없이 허망한 마음만을 낳게 하였다. 어차피 떠난 자의 마지막이 어떤 의미인가 따지는 것, 붓다의 가르침에는 정면으로 위배할지도 모르겠지만, 어쩔 수 없이 집착하게 되는 것이 또 중생 아니던가. 그런 의미에서 고인의 마지막은, 적어도 산 자들에겐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던 것 같다. 나는 위로가 되는 건지 아무 의미 없는 건지 확신할 수 없는 채로 생각을 뒤로 미뤘다. 내가 고인의 나이즈음이 되는 때로.

 

뒤로 미룬 이유는 또 있었다. 돌이켜보면, 법도 모르고 의학지식도 없어 일 처리가 너무나 어설펐다. 아직 부검 결과서는 날아오지 않았지만, 부검 결과서를 받아들면 마치 나의 무능함을 지적하는 징계사유서처럼 읽힐 것 같다. 조금 남은 일이 있기에, 의미를 따지는 생각은 애써 지우려 했다.

 

 

 

딴지일보에서 첫 기사를 내준 것이, 재밌게도 작년 석가탄신일 관련 기사였다. 부친의 다리를 주무르는, 너무나 고달팠던 2시간 동안 주워들은 것들을 토대로 쓴 글이 감사하게도 메인으로 올랐다. 부친의 사고 소식을 듣기 전날, 나는 올해 석가탄신일 관련 글을 쓰고 있었다. 딱히 대단치도 않은 인연이지만, 원래 인연이란 것은 의미를 부여할수록 단단해지는 법이다. (편집장님은 조화를 보내주셨다. 김어준의 이름을 보자 슬픔에 차 있던 몇몇 사람들이 웃었다. 다시 한번 감사하다는 말 남긴다.)

 

촛불집회가 한창 이어질 무렵, 나는 의문형이라는 형식을 빌려 사실상 답정너를 시전한(그러나 도비공님의 날카로운 눈은 피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굳이 답해주셨으니, 진실로 감사한 일이다.), 비겁한 글을 한편 쓴적이 있다. 부친의 동의 없이 부친의 생을 담았기에 알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는데, 유감스럽게도 주변인의 깨방정 덕에 읽으셨다. 아니, 기본적으론 보안을 철저히 하지 못한 내 탓이지만. 다행히도 부친께서는 언짢게 읽으시진 않은 것 같다. 그랬다면 분명 불호령이 떨어졌을테고, 나는 편짱에게 기사 삭제를 요청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겠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어느 날 부친은 내게 이런 카톡을 보내셨다.

 

"자등하며 법등 하라. 용기를 내어 살아가라. 마음을 단단하게 가져야 한다. (이모티콘)"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은 붓다의 유훈이다. '이제 저희는 누구를 의지하며 살아야합니까?' 라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붓다의 답이었다. '스스로를 등불로 삼아 의지하라' 집에 돌아와 피씨를 켜보니, 내가 쓰고 있던 석가탄신일 관련 기사에도 똑같은 말이 쓰여 있었다. 문재인 시대를 열게 한 촛불을 조잡하게 엮은 글이었다. 지나치게 조악해서 안올린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원체 변변치 못한 성품 때문에 살아갈 용기를 잃을 때가 있었다. 그 때에 내가 돌아갈 곳은 그분의 잔소리를 듣는 마룻바닥이었다. 도움이 될 때도, 안 될 때도 있었지만, 어쨌거나 한바탕 이야기를 듣고 잔치국수를 먹고 나오면 용기가 샘솟는 것은 둘째치고 일단 머리는 맑아지곤 했다. 

 

변화를 맞이할 때 대부분은 과거의 경험을 토대로 미래를 예측한다. 그것이 한계를 맞을 때서야, 스스로 새로운 경험을 창조해내는 법을 터득한다. 나는 앞으로도 쉴 새 없이 닥쳐오는 걱정거리를 마주할때 마다, 부친의 삶을 회고하거나 실수의 연속이던 과거의 경험들을 토대로 어리석음의 연장전을 이어갈 것이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는 말의 통찰력에 감탄하면서도 쳇바퀴처럼 돌아갈 것이다.

 

이윽고 모든 것이 깜깜한 어둠 속으로 저물어 갈 때, 그제서야 타인의 손에 들려진 등불 대신, 스스로 불을 내어 길을 걸어갈 생각을 하게 될 것 같다. 그때는 이미 늦은 감이 좀 있겠지만, 그때라도 깨닫게 된다면 다행이다. 스스로 불을 내고 어둠을 헤쳐나가는 일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기왕이면 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하게 될 것이다. 이 시대를 관통하는 내가 어렴풋이 느끼는 것과 부친의 유언이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기에. 아니, 어쩌면 걷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다행이련만. 어쨌든, 삶과 죽음의 경계는 그리 두텁지 않다. 부친의 삶이 내게 남긴 것이 의미가 있는지 없는지는, 다 내가 하기 나름일것이다.

 

갑자기 좀 부담스럽지만, 어쩌랴. 걸어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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