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과 사람이 친해지려면 모종의 계기가 필요하다. 어떤 이는 모종의 계기를 억지로라도 만들며 다가가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런 그릇이 못되었다. 한순간이었다. 짧은 대화, 몇번의 마주침, 번호를 주고 받고, 수없이 문자를 보내다가, 어느순간 몇시간이고 귀가 뜨거워질 때까지 전화를 하는 사이로 나아가는 것은. 그 짧은 시간이 지금의 내게 준 영향을 생각하면, 인생이란 찰나에 결정되는 것이 아닌가 무력해질 때도 있다. 어쩌면 찰나를 만드는 것이 인생을 살아가는 이유인가 싶기도 하고.


각설하고, 그 짧은 순간에 우리가 주고 받았던 대화의 주제는, 음악이었다. 아마 그때 듣던 힙합이나 넬 같은 음악에 대한 얘기로 기억한다. 식상하고 식상해서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고 여겼던 지난 날의 나를 비웃게 될 지경이다. 아무튼, 그녀와 나의 별 볼일 없는 시간을 정리하려면 음악에 대한 얘기를 할 수 밖에 없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사랑을 이루는 것에 특별한 계기를 기대하는 어리석음을 버린 좋은 경험이라 할 수 있겠다.



#2


그 뒤로 꽤 몇 년간, 나는 그녀에게 새로운 음악을 접하고 그것을 그녀에게 전해주는 일을 사명처럼 여겼다. 새로운 음악을 접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한층 그것이 절정에 이르던 때에는, 새로운 음악을 놓친 것을 발견할때마다 죄책감과 자괴감에 빠지기도 했다. 나는 음악을 듣고, 깊은 밤 전화통화를 하면서 그 얘기를 하고, 주말이면 네이트온으로 음악을 전송해주었다. 당연하지만, 죄다 불법 다운로드한 음악이다. 


그 때 우리가 좋아하던 뮤지션 중에서 단 세 팀만 꼽자면, 넬과 에픽하이, 그리고 내귀에도청장치 정도다. 다시금 식상하다는 얘기를 할 수 밖에 없을 정도의 선곡이다. 팻 메스니나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의 음악으로 친해졌다면 좀 더 특별하다는 평을 내릴 순 있겠지만, 아무래도 고등학생이 그런 음악을 접하기는 쉽지도 않고 그녀의 취향도 아니었다. 지금은 내 취향이 되었고, 그녀의 취향에는 여전히 안 맞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의 음악 취향은 변해갔다. 힙합에서 락으로, 락에서 발라드로, 발라드에서 인디음악으로. 지금은 거의 힙합을 듣지 않는다. 올드스쿨의 노래들은 가끔 듣지만, 요즘 나오는 힙합음악들은 귀에 잘 익지가 않는다. 나도 늙은 것이겠지. 그렇게 그녀 역시 조금씩 내 취향에 맞춰 변화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이 변하기 시작한 것은, 불법 다운로드에 대한 정부의 강한 시책과 그녀의 일상에 커다란 변화가 생긴 것.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



#3


고심을 거듭해 고른 선곡으로 나의 마음을 전하려 했다. 너무 많이 전해서 별다른 감흥이 없어질 정도로 미련하게 전했다. 전하는 것을 넘어, 나는 나의 음악으로 그녀의 취향을 소유하려 했다. 그녀가 다른 이와 음악얘기를 나눈다는 것은 나의 존재를 희석시키는 일이었다. 그것은 솔직히 귀찮고 고단한 일이었다. 그러나, 전송된 음악을 듣고 난 그녀의 "역시 난 너 없으면 못 산다니까" 류의 농담들은, 나를 집착속으로 빠져들게 했다. 존재의 이유는 필요에 의해 성립한다. 그 필요를 만드는 것이 나의 일이다. 나는 어느 순간, 사랑이라는 감정보다도 어떤 의무감이나 책임감을 더 큰 가치로 두고 그녀를 대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녀의 책임을 규탄하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그녀의 호의와 선의에는 감사한다. 


실제로 그녀가 나의 음악에서 떠나기 시작했을 때, 그러니까 자신이 직접 결제한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음악을 골라 듣고, 나의 취향과는 점점 멀어지기 시작한 순간, 그녀의 삶에서 나의 존재가 탈락되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토이스토리3에 나오는 잊혀진 장난감들처럼, 그것을 받아들이고 저항하는 일을 반복했다. 억지로라도 내가 좋아하던 음악을 전해주려했지만, 그녀는 더 이상 나의 음악을 듣지 않게 되었다. 어쩌다 들어보아도, 평은 결국 안 좋았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엮어주는 음악이 더럿 있기는 했다. 단지 그것들은 나를 통해 얻어가는 것이 아니었기에, 내가 느끼는 만족감은 그 전같지 않았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네가 추천해주는 건 너무 우울해." 내 딴에는 그다지 우울하지 않은 편의 노래들이었는데도 그런 평을 내렸다. 물론 이소라나 윤상의 음악은 납득을 하겠지만. 그 뒤로는 이소라나 윤상의 음악은 절대 추천하지 않게 되었다. 나는 꼭, 전하고 싶은 말을 전할 수 없는 벙어리가 된 것 같았다. 그녀가 우울한 음악을 듣지 않는 이유는, 일 할 때 템포가 처지기 싫어서, 아니, 처질 수 없어서' 였다. 자신도 우울의 수렁에 빠져들 수 없다고.

나는 그녀를 이해할 수 밖에 없었다. 그녀가 또다시 우울의 수렁에 빠져들게 되면, 그러면야 다시 내게 여린 목소리를 털어놓을테니 기쁘겠지만, 그녀의 삶은 다시 정체될 수 밖에 없으니까.



#4


지금은, 완전히 취향이 갈리고 아예 음악얘기를 거의 하지 않는 수준에 이르렀다. 지난 여름, 내가 처음 운전하는 차를 탄 그녀는, 맘에 드는 음악이 없다며 결국 본인의 핸드폰으로 블루투스를 연결하기에 이르렀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이해가 완전히 된 줄 알았던 내 자신에 대한 실망을 불러일으켰다. 이해하는 것과 느끼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라는 새삼의 깨달음과 함께. 

그것은 일종의, 그때와 지금은, 그때의 그녀와 지금의 그녀는, 그때와 지금의 우리 관계는, 완전히 달라졌다고 선고하는 듯 했다. 당연히 그 이후의 여정을 마냥 상쾌한 기분으로 임하기엔 쉽지 않았고, 결국 엉망진창으로 끝났다.


한번은 그런 적이 있었다. 어느날, 그녀는

"어떤 노래를 들을 때 내 생각해?"

라는, 그녀 답지 않은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의 상황이 워낙 평범하지 않은, 그녀와 나 사이에 있던 수년간의 기억을 끄집어 봐도 몇 없는 순간이기 때문에, 그런 말이 나왔던 것이다.

나는 거의 모든 노래가 그렇다는 뻔한 대답을(그러나 진심이기도 했다.) 하고, 그것이 부족함을 느껴 이런 저런 노래를 대었다. 넬의 지구는 태양을 네번이라든가, 윤상의 사랑이란이라든가, 토이의 나는 달이라든가.

그러더니 그녀는, 윤상의 <나를 친구라고 말하는 너에게>를 꺼냈다. 그녀가 그 음악을 꺼내는 순간, 나는 발가벗겨진 기분에 몸서리쳤다. 그녀는 한번도, 거들떠도 보지 않던 그 음악을 내게 꺼냈다. 나는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두었던 감정을, 어느 순간 강제로 꺼내어진 느낌에 젖어야 했다. 뒤이어, 


그녀 역시 알고 있었구나. 그래서 싫어한 것이었구나. 라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었다. 

큰 진보였다. 나는 내가 심혈을 기울여 참여했던 라디오 방송의 첫 곡으로 토이의 <좋은사람>이 흘러나오자, 정색을 하며 싫어하던 그녀의 모습을 보았다. 그것은 확신을 주었다.


톱니가 맞지 않기 시작하면 전체가 굴러가지 않는다. 내가 그 사실을 납득하기까지에는 상당한 시간을 요했지만, 그럭저럭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요란하지 않은 슬픔과 개운하지 않은 기쁨을 준다. 

물론, 이런 시행착오를 겪고도 나는 소중한 사람들에게 음악을 추천하는 일을 멈추지 않으니,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는 말은 참으로 세기의 남을 명언이라 하겠다. 어쩌랴. 마음을 전하는 일에 이것 보다 더 좋은 방법이 생각나지 않는 것을.



'전파낭비잡문기 > 왈왈!' 카테고리의 다른 글

플레이리스트  (0) 2017.12.22
잡문록 (1)  (0) 2017.05.25
실패한 사랑에 대하여 (5)  (0) 2017.03.01
실패한 사랑에 대하여(4)  (0) 2017.02.20
실패한 사랑에 대하여(3)  (0) 2017.01.22

WRITTEN BY
빵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