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파낭비잡문기/요괴봉투'에 해당하는 글 13건






12개의 달 중에서 하나가 휘리릭 지나는 시간동안, 동호회를 빙자한 그녀와의 거리는 조금도 좁혀지지 않았다. 그녀의 머리칼 만큼이나 늘어가는 것은 비루한 기타실력 뿐, 처음 그녀를 대할 때 느꼈던 어색함과 어려움은 상호 간에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오로지 순수한 음악에의 열정으로 가입한 동호회의 참 뜻을 구현하고 있는 이, 나뿐이리라. 삿되고 어리석은 욕심이 끼어들어 늘 그래왔듯 구렁텅이로 나자빠지기를 바랬을 봉투 녀석의 계략을 능히 파쇄할만큼, 정말로 기타만 열심히 치고 있었다. 

그게 나쁘다는 것은 아니고. 아무튼 뭐 그렇다.

한 달이면 사랑이 익기에 충분한 시간이라는 듯, 신촌 버뮤다 삼각지대로 사라지는 두 명의 사람들처럼, 생업보다 취미를 더 중히 여겨 커트 코베인보다 더 음악에 미쳐 있는 듯한 열정맨들조차도, '원래 거기에 있었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소리소문없이 사라졌다. 남성회원 한 명이 사라지면, 항상 그 다음주엔 여성회원이 사라졌다. 

고작 한 달이 지났을 뿐이다. 잉크로 사랑이란 단어를 쓰면 적어도 석 달은 지나야 제대로 마르지 않겠나. 도대체 사람 마음이란 것이 어쩌다가 이토록 가벼운 구름같이 되었나! 요즘 세태에 통탄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녀와 함께 정말로 기타만 쳐대는 무사수행 중이었으므로, 지조없는 사람들의 갈지자 행보에 흔들리지 않았었다. 적어도 그저께까지는.

그저께, 또 한 명의 남성회원이 사라졌다. 충격에 충격을 금할 수 없게도. 회식자리에서 되도 않는 아재개그를 남발하며 처음 보는 이성으로부터 야유를 얻어 먹은 그 남성회원이 사라졌다. 나는 감기이길 빌었다. 지독한 독감에 걸려 불참하게 된 것이기를...! 빨리 완쾌되어 웃는 낯으로 다시 나와 자리를 빛내주기를...! 봉투 녀석에게 이 얘기를 하자, 녀석은 그 지조없는 사내를 비난하기는 커녕 오히려 내게 

"병 주고 약 주는 기도네. 인성이 그 모양이니 너만 남는게지."

라며 '가장 위험한 적은 언제나 내부에 있다.'는 말을 증명했다. 그 남성회원의 기타실력이 일취월장하여 모든 회원들의 선망을 받게 되고, 그리하여 나조차도 떠난 동호회를 끝까지 지키는 존재로써 우뚝 서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우러난 기도를 그런식으로 매도하는 것은 옳지 못하나, 오늘에 이르러서는 다소간 생각이 바뀌었다. 왜냐하면, 그 남성회원은 물론, 한 여성회원조차 불참했기 때문이다.

나는, 외계인들이 지구인을 납치하고 돌아다닌다는 음모론을 진지하게 믿어보기로 결심했다. 이 편이 아니면 눈 앞에서 벌어진 기이한 상황을 설명할 수가 없다. 여성회원들이 내게 이성적인 관심이 눈꼽만큼도 없는 것은 지극히 이해한다. 내가 여성이었어도 이런 닝겐, 퍽 가까이하고 싶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그 충격적인 아재개그 사내를, 왜, 도대체, 어찌하여...!

젖어드는 황망함에 나는, 피크를 집었던 손을 내리고 리미트가 풀린 멍때림을 시전했다.



"흠,흠."

"..."

"뭐하세요?"

"아,네?"

늘 그렇듯, 가장 늦게 모임에 온 그녀는 내 앞에 섰다. 그동안 그녀와의 대화는 지극히 필요한 수준에서만 이뤄졌다. 만나고, 연습한 것을 서로 확인하고, 약간의 평과 함께, 빠이 빠이. 사람들이 회식을 하건 노래방을 가건, 그런 건 그녀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때로는 참석할 때도 있었지만, 조용히 술만 스트레이트로 넘긴다든가, 뮤비가 흘러나오는 노래방 화면을 응시하며 가사를 곱씹는듯한 모습으로 일관하기만 했다. 

그녀가 오기만을 목 빼들고 기다리던 내가, 막상 그녀가 들어서는 순간 모른 척하며 기타를 치고 있으면, 다가와 "안녕하세요?"란 인사와 함께 검은 머리칼을 다시금 흩뿌리며 자리에 앉는 것이 한 달간의 반복이었다. "뭐하세요?"란 인사가 다분히 낯설었다.

"어, 음. 사람이 많이 줄어서요."

"어디요? 거리에?"

"아뇨. 동호회에요."

"...그런가?"

그런가?가 아니다. 자리마다 가득했던 첫 모임에 비해 드문드문 보이는 이 여백은, 자신이 탈모임을 확인 한 후 매일 매일 머리숱을 확인할 때마다 드는 황량함, 아마 그것에 가까울 것이다.

"뭐, 다들 사정이 있나보죠."

그녀는 무심한 듯 짧은 논평과 함께, 자리에 앉아 기타를 꺼낸 뒤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리곤 나를 지긋이 바라봤다.

"...뭐하세요?"

두 번째 뭐하세요. 질책의 뉘앙스가 살짝 담겨 있는 뭐하세요였다.

"아, 맞다. 잠시만요."

내려두었던 피크를 집어들고 인트로를 연주하기 위해 손을 가다듬었다. 그러나, 수면마취상태에서 깨어날 때 저 멀리에서 의식이 성큼 돌아오는 때처럼, 빅뱅의 흔적을 담은 우주배경복사가 티비 안테나에까지 흘러들어와 치지직 소리를 낼 때처럼, 며칠간 강행연습에 매진했던 코드도 주법도 새까매졌다.

더듬더듬, 애꿏은 am 코드만 쥐어뜯고 있는 내 모습을 계속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녀는, 기타를 내려놓더니 다시금 말했다.

"뭐. 하. 세. 요?"

약간의 질책에서 완벽한 힐난으로 변한 어조에 식은 땀이 솟아났다.

"아, 저, 그...갑자기, 생각이 안 나네요. 왜 이러지? 아이 참,"

"흠"

"아니, 연습 엄청 열심히 했는데. 왜 이럴까요? 왜 이러죠?"

"글쎄요 저한테 물어보시면."

"아, 그렇죠. 왜 생각이 안 나지."

쩔쩔대는 나를 관찰하던 그녀는, 기타를 가방에 넣기 시작하며 말했다.

"생각 안 나시면, 다음에 하죠 뭐"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기타를 챙겨넣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갑자기 초조함이란 녀석이 저 옛날 폼페이를 뒤덮기 위해 육중하면서도 매서운 속도로 강림하시는 화산재처럼, 혹은 어린 날 서해바다에서 신나게 놀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밀물을 가득찼을 때처럼, 나에게 밀려 들어왔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서로를 공전하던 두 행성 사이에 문과는 모를 힘의 변화 탓에 한 쪽 행성이 이탈, 두 행성은 다시는 함께 할 수 없었단다. 라며 어느 쌍성의 변천과정을 설명해주는 지구과학 시간때처럼 나와 그녀의 관계도 그리될지 모르겠다는 순간적인 위기감이 마구 쏟아져내렸다.

무슨 말을 하지. 어떤 말을 하지. 뭐라도 입 밖에 내야 하겠는데. 뭐라고 하지.

그러나 내 입에서 불쑥 튀어나온 말은, 결국 그녀에게서 비롯된 것 뿐이었다.

"저기, 주말엔 보통 뭐하세요?"

아아, 봉투 녀석이 이 광경을 보았다면, 삼일 간 먹지도 마시지도 않은 채 배를 치며 웃었을 것이다. 너무 웃어제끼다 못해 봉투가 찢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뭐하세요라고 물은 그녀에게 뭐하세요로 답하다니, 자신의 멍청함을 새삼스럽게 마주하는 것은 퍽 괴로운 일이다.

하지만 그녀는 잠시간 생각해보더니, 말을 이었다.

"별 일 없어요."

"아 그래요?"

또다시 정적.

"그러면, 저기, 영화라도 보실래요?"

아아, 멍청함이 된장처럼 푹 익어간다. 통제권을 잃어버린 입이 난을 일으키는데, 조정이 자리잡은 뇌는 초조함이란 녀석이 국정농단을 펼치고 있다. 익숙한 결말과 응답이 예상되었다. 오랜 단골 손님인 패배감이란 분이 저 멀리서 손짓하며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 때. 그녀는

"그러죠."

라더니,

"연습한 건 이제 생각나요?"

라는 것이었다.

대오각성이란 것이 이런 느낌에 닿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녀가 내쉰 물음표 음절이 끝나는 순간, 환하게 세상이 밝아지며 지워졌던 음표들이 머릿속에서 춤췄다. 신기한 일이었다. 기이한 일이었다. 

"어, 그..러네요? 이제 생각나요."

그제서야 나는, 연습했던 그 곡을 연주할 수 있었다. 1절이 끝나기 전에 그녀는 다시 자리에 앉았고, 나는 처음으로 한번도 틀리지 않고 완곡을 해냈다. 물론 그녀 역시 항상 그래왔듯, 나보다 훨씬 훌륭한 연주를 뽐냈고, 나는 다시 좌절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주말의 약속을 위해 연락처를 받아온 것이 평소와는 다른 점이었다.

첨언하자면, "한번도 틀리지 않고 완곡을 해냈다."라는 논평을 듣자마자 봉투 녀석은 "구라치지마"란 말로 받아쳐냈다. 그렇다해도 썩 괜찮은 하루여서 굳이 토달지 않았다.

사라졌던 아재 개그가 제발 다시 돌아오길 바랬던 그 순간을 생각하자면, 참으로 썩 괜찮은 하루가 아닐 수 없었다.


'전파낭비잡문기 > 요괴봉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괴 봉투 (12)  (0) 2017.10.19
요괴 봉투 (11)  (0) 2017.09.18
요괴 봉투 (10)  (0) 2017.09.11
요괴 봉투 (9)  (0) 2017.07.14
요괴 봉투 (8)  (2) 2017.07.11

WRITTEN BY
빵꾼

,




그러나 나의 섣부른 기쁨은 곧 고난의 행군을 불러왔다. 옥수수와 조만으로 1주일을 사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을 수도 있으나, 가진 능력의 배를 요구하는 혁명 과업의 완수는 소크라테스의 이름빨을 받은 덕에 널리 알려진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의 참 뜻이 무엇인가에 대해 본질적이고 심도있는 고찰을 할 수 있었다. 불세출의 명곡인 만큼 <여름날>의 주법을 알려주는 기타 강의는 많았으나, 유감스럽게도 미묘하고 섬세하며 가련한 감성을 불세출이 아닌 손 끝 탓에 더이상 따라갈 수 없었던 것이다. 손 끝의 태업에 적잖이 당황했으나, 그보다 문제는 한없이 문디스러워지는 뇌에 있었다. <여름날>이란 제목을 떠오를때마다 '애시당초는 여름장이란 글러버려서...'로 시작되는 명소설의 문장이 떠올라, <여름날>도 여름장도 나의 여름도 모조리 글러버린 것은 아닌가 싶은 강한 사념이 뉴런들을 휩쓸고 다니며 각개격파, 오늘도 누군가의 뇌세포는 노벨 물리학상에 한걸음 다가서는 연구를 위해, 혹은 인류의 지적 자산에 당당히 그 이름을 올릴 중대한 철학적 고찰을 위해 그 값어치를 톡톡히 해내고 장렬히 전사하고 있지만, 주인을 잘못만난 나의 뇌세포는 안타깝게도 물 건너온 예술 영상과 출연하는 아리따운 배우들의 이름을 고이 간직하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자니, 어쩌면 천방지축으로 뛰어다니는 여름의 난동에 뇌가 익어버린 것은 아닌가 싶기도 했다. 어쨌든, 사태수습의 책임은 나에게 달려있으므로 나태한 손 끝과 혼란한 뇌 속에 통제명령을 내렸지만, 도저히 협상의 기미가 보이지 않아 이들의 연대투쟁에 백기투항을 선언하기 직전까지 몰려있었다.

이 난국을 타개하는 데 있어 평소 나의 아름다운 인생에는 1그램도 협조하지 않던 봉투 녀석의 기여가 일정부분, 으흠, 쿼크의 무게만큼은 기여했다는 것은 썩 기분 좋지는 않지만 나는 도덕적인 사람이므로 조금이나마 인정하는 바이다.

"거, 안 되는거 어거지로 하려고 들지 말고 야매로 해라 야매로"

"무사수행의 길에 포기란 없느니"

"포기는 둘째치고, 약속의 그날이 다가오는데 반절도 못치면 개망신 아니겠냐?"

"이 부분만 넘기면 웬만큼 할 수 있다!"

"4일 내내 인트로만 붙잡고 삑사리나는 걸 어쩔 수 없이 들어야 하는 내 신세도 좀 고려하는 게 어때"

"싫으면 나가시든가."

"동거인의 계약이라곤 쥐뿔만큼도 고려하지 않은 놈이로고."

"애시당초 네 놈의 무단침입으로 시작된 것이거늘"

"그건 됐고, 아무튼 그 인트로, 어차피 코드 변주 안 되잖아?"

"할 수 있.."

"아니 할 수는 있는데, 지금은 안 되잖아?"

잠시간 나는 떨리는 손 끝을 바라보았다. 손 끝에 얼굴이 달려있다면, 기타줄에 눌려 얼굴에 기스가 잔뜩 간채로 눈물을 흘리며 내게 "제발 죽여줘..."라는 호소를 하고 있을 것이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두 손을 들 수 밖에 없었다.

"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여러가지 불가항적인 환경 때문에 기한까지 과업 완수의 가능성이 다소 불투명할 수도 있는 것일 수도 있지."

"아휴, 아무튼, 어쨌든, 그러니까 좀 머리를 쓰라고"

"흐음, 계책을 짜내보거라."

"안 되는 인트로 어거지로 맞추지말고, 그냥 코드로 쑥 쳐버려"

"아니 그래도 가오가 있거늘"

"가오같은 소리하네. 백날 인트로 붙잡고 있다가 본전도 못 건질 뽄새구만."

"흐음"

그런 연유로 나는, 지금까지 그래왔듯 '야매'로 이 곡을 때우기 시작했다. 무사수행에도 때때론 실용주의적인 태도가 필요한 것이라는 훌륭한 결론을 낸 채로. 


"안녕하세요."

나긋하게 허리를 숙이며 내게 인사하는 그녀. 그녀의 앞머리가 생긋한 이마를 감추고 합쳐졌다가, 다시 홍해처럼 갈라지며 제자리로 돌아간다. 

"아, 네. 안녕하세요."

그에 반해 나의 앞머리는 강풍에 흩날리는 민들레 씨앗처럼 흩뿌려졌다가, 본모습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헝클어져 괴상한 몰골이 되어 버렸다. 나는 머리에 손을 가져갔다.

"이번엔 갑자기 다른 곡을 부탁하거나 하지 않아요."

그녀의 농담에 머리를 만지던 손 끝이 갑자기 저리기 시작했다. 앞머리는 당최 돌아올 기세가 없었다. 손 끝의 태업은 다시 시작인가.

"나름, 어, 연습을 좀 하긴 했는데, 굉장히 어려워서 어설퍼요."

"어려운 거 알고 있어요. 그래서 부탁드린거니까요."

"그래도 기대는 안 하시는게"

"그런 말은 좀 늦은 것 같은데요."

알싸한 개망신의 기운이 카페 안을 잔뜩 메웠다. 대대적으로 망할 느낌이 손 끝에 잔뜩 몰렸다. 초나라 노래가 사방에서 울려 퍼지던 때 항우의 심정이 바로 이런 것일까.

"그럼, 어쨌든, 해볼게요."

만취한 친구녀석마냥 비오는 날이면 쿡쿡 쑤시는 허리위에 널부러진듯 얹어져 있던 기타를 꺼냈다. 영 시원치 않은, 골골대는 소리를 내며 기타 녀석이 잠에서 깨어났다. 기타야, 이번만큼은 좀 힘내주면 안되겠니. 이제 잘 관리해줄게. 나는 녀석에게 간절한 속마음을 건네며, 조심스레 기타에 스트로크를 던졌다.


눈부시게 반짝거리는

파란 미소의 너의 얼굴 손 흔들며

예전 그대로의 모습으로

내게 달려오고 있어.

그토록 내가 좋아했던

상냥한 너의 목소리 내 귓가에서

안녕 잘지냈니 인사하며

여전히 나를 지켜주고 있어.


"짝, 짝, 짝"

그녀는 여백을 삽입한 박수를 세번 치고 말했다.

"XX씨는 노래를 잘 하시네요"

땀을 삐질삐질 흘리던 나는 그 말을 듣자 뒷머리가 간지럽기 시작했다. 이것은 마치 누군가 칭찬을 할 때 의례적으로 뒷머리를 긁으며 "아니에요~ 그정도는~"하는 말을 하곤, 속으로 '역시 해냈구나'하는 만족이 차오르는 것을 기쁘게 즐겨야 할 때임을 알리는 신호다. 나는 조심스레 손을 뒷머리로 올렸다.

그런데 그녀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

"기타에 비하면 훨씬요."

간지러웠던 뒷머리에 누군가 함마로 후려친 듯한 충격이 들었다. 의식을 깨우친 봉투에게 이제 드디어 손 발이 달린걸까. 사실이라면 태초에 의식이 먼저 발현되었고 뒤이어 진화가 따랐다는 학설을 발표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돌아봐도 머리 뒤에는 허공 뿐, 머리를 후려친 것은 물체가 아니라 목소리라는 것은 고개를 다시 되돌려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야 깨달았다.

"역시 야매가 맞네요. 순전히 노래하실려고 배운거지요?"

내 단 한번도 야매기타가 아님을 부정한 적이, 아니, 기타친다는 것을 알릴때에는 꼭 야매 기타라는 말을 덧붙여 불필요한 오해나 기대를 줄이기 위해 최선을 다해왔으나, 그것을 타인의 입에서 듣는 것은 그다지 환영할 만한 일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서슴치않았다.

"코드변주할 때 운지법, 하이코드 운지법, 스트로크, 아르페지오 주법. 모두 엉망이에요."

"네, 네, 맞, 맞습니다. 그렇지요."

"리듬도 중간에 늘어지고, 삑사리도 네 번이나 났어요."

"네 번이나? 아니 그와중에 그걸 세고 계셨..."

"무엇보다, 인트로를 그렇게 하는 건 반칙이에요 반칙. 이 노래에 인트로가 얼마나 중요한지 아시죠?"

"...면목없습니다."

뒷머리를 긁적이려 했던 내 손은 어느새 곱게 뒤로 모아, 컴플레인을 제기하는 고객님을 응대할때처럼, 그보다 전에 방학숙제를 검사하는 담임선생님께 혼날때처럼, 그보다 전에 방 청소를 안 해놓고 띵가띵가 놀다가 아버지께 털릴때처럼, 양쪽 손에서 샘솟는 땀을 옷에 닦아대고 있었다. 고개는 점차 수그러져 어느새 신발 앞꿈치에 묻은, 이전에는 안보였던 얼룩들이 생생히 보이기 시작했고,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격언을 증명하듯 낯뜨꺼움에 뇌가 뜨겁게 익는 듯 했다. 아아, 망했구나. 망했구나.

"그래도 노래 부른 게 좋아서, 꽤 괜찮았지만,"

라는 말도 한 것 같은데 익은 뇌 때문에 고막도 전골이 됐는지 잘 들리지 않았다.

"그러면, 제 차례인가요?"

"아, 네, 네. 그렇죠."

그렇다. 잠시 잊고 있었지만, 그녀도 곡을 연습해오기로 했던 것이다. 웬만해서는 타인의 결점을 굳이 찾아보려 하지 않는 관대하고도 너그러운 성품을 지녔지만, 뜨겁게 익은 뇌는 평소대로의 자제력을 지니지 못하고 평론가 모드로 접속해버렸다. 그녀가 혹평을 쏟은 까닭의 근본 원인은 대책없이 야매인, 허접하디 허접한 나의 기타 솜씨 때문이지만, 나의 결점을 뒤돌아보기 전에 일단 화부터 내는 어느 연예인의 전략을 써야할 때가 비로소 지금이라는 옳지 못한 결론이 샘솟았다. 폭주하는 뇌여, 제발 멈춰다오. 그것만은 아니되오.

"그러면, <옛사랑>입니다. 잘 들어주세요."

"아, 네. 부탁드립니다."


이제 그리운 것은 

그리운대로

내 맘에 둘거야.

그대 생각이 나면

생각난대로

내버려 두듯이.


일찍이 이데아론을 꺼내들으며 보편 절대적 상태에 대한 스스로의 확신과 동시에 독자에게는 불확실함을 선사했던 플라톤은 "음악과 리듬은 영혼의 비밀 장소로 파고든다."는 말을 했었다. 플라톤의 경우에는 아마도 그 마음속에 있을 동굴에 파고 들었었겠지. 영국의 왕정복고기 이름난 극작가였던 윌리엄 콩그리브는 "음악은 야만인의 가슴을 어루만져 주는 희한한 힘이 있다."고 말했다. 유래없이 많은 식민지를 건설하며 야만인들을 교화해왔던 영국인들의 눈에도 음악의 능력은 대단해 보였나보다.한편, "신은 죽었다"면서 후대에 수없이 많은 중2병들을 양산한 니체는 "간단히 말해서, 음악이 없는 삶은 잘못된 삶이며, 유배당한 삶이기도 하다."고 말했고, 또 젊은 남자와 유부녀의 불륜을 사무치게 그린 <젊은 베르터의 고뇌>를 쓴 괴테는 "음악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사람이라고 말할 자격도 없다.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때서야 비로소 반쪽 인간이 된다. 그러나 음악 활동을 하는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라는 말을 하며 글 쓰는 이 특유의 긴 혓바닥을 자랑하기도 했다. 아무튼 '옳은 인간'이 되기 위해 고민했던 독일의 전통이 베어나온 음악찬사라 할 수 있겠지 뭐. 또 누군지도 몰랐던, 지금도 잘 모르는 칼릴 지브란이란 사람은 "노래의 비밀은 노래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지닌 진동과 듣는 사람의 마음의 떨림 사이에서 발견된다."는 말을 했다. 아직 여기에 적어낼, 음악에 대한 찬사를 붙인 명사들의 수많은 말들이 남아있으나, 그녀의 노래를 듣던 나의 상태를 표현할 만할 꽤 쓸만한 글이 이미 이것들 중 하나로 표현됐으니 이만 쓰도록 하겠다.

고백하건대, 사실 그녀의 입과 손에서 멜로디가 울려 퍼질 때의 나는, 부루마블을 하다가 잠시 정신을 놓은 그 때처럼 어딘가로 유영을 떠나온 듯 해서, 나중에 인터넷을 뒤져 명언으로 대체했음을 밝히는 바이다. 저 양반들이 했던 말 따위 내가 평소에 알게 뭐냐. 

아무튼 그런 관계로, 불을 키고 스스로 익어가며 결점을 찾으려했던 나의 뇌는, 그 열기를 온전히 가슴에게 내준 채 차갑게 식어있었다. 눈과 귀가 그녀에게 인식을 뺏긴 채 넋을 잃었고, 아무 말 대잔치를 벌이려는 볼썽사나운 주둥이에게 몇번이나 되새김질을 시킨 뒤에야 감상이라고 말하기에 조악한 평을 내놓을 수 있었다.

"참, 훌륭하시네요."

"그래요? 흐음, 저는 별론데 말이죠."

"틀린 것도 없고, 너무 잘하시는데요?"

"글쎄요. 아직 썩 성에 차지가 않네요."

그녀의 고집스러운 불만족과 합의하는 것은 미뤄두기로 했다. 어쨌든 그녀가 나보다 훨씬 훌륭한 연주자라는 것을 안 이상, 감놔라 배놔라하면서 이러쿵저러쿵 비평을 달 자격이 없게 된 것이다. 심지어 그 기타실력이 빛이 바랠 정도로 훌륭한 음색의 소유자라는 것을 안 이상, 귀를 씻지 않는 것으로 목소리를 다시 재생할 수 있는 조건이라면 한 50년 쯤 귀는 커녕 귓볼 언저리 조차도 물이 닿지 않게끔 아예 싸매고 돌아다닐 수 있을 정도의 호강한 경험을 했기에, 가타부타 말을 꺼냄으로써 걸쭉한 내 음성이 내 귀로 흘러들어오는 자해행위를 할 맘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영영 아무말도 안 할 수가 없는 법, 나는 말을 꺼냈다.

"감사히 잘 들었습니다."

그녀가 답했다.

"아, 저도."

왠지 거기서 말을 끝내기엔 다소간, 피차간, 상호간, 뭔가 끈적지근함이 있어, 창피해 죽으려고 하던 뇌는 벌써 방관자 모드가 된 채 나는 이 말을 내뱉고야 말았다.

"다음엔 또 어떤 곡을 연습해올까요."

 




'전파낭비잡문기 > 요괴봉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괴 봉투 (13)  (0) 2018.01.29
요괴 봉투 (11)  (0) 2017.09.18
요괴 봉투 (10)  (0) 2017.09.11
요괴 봉투 (9)  (0) 2017.07.14
요괴 봉투 (8)  (2) 2017.07.11

WRITTEN BY
빵꾼

,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돈을 벌어야 살 수 있다는 것이다. 하물며 노숙자일지라도 거리에 떨어진 동전 몇 개를 주우는 노동이 필요하다. 노동이야 말로 삶을 영위해가는 근본 요소임이 확실하다. 노동이 우리를 자유케 하리라!

그러나 작금의 나는 노동자가 지녀야 하는 최소한의 태도, 즉, 월급 통장에 찍히는 액수에 대한 더없이 소극적인 주관적 평가를 바탕으로, 국가가 보장한 실업급여 대상자의 자격을 지니지 않기 위해 최대한의 몸부림을 최경량으로 부리는 중이었다. 봉투 녀석은 태업 운운했지만, 확실하게 태업은 아니었다. 다만 태업과 근로 그 사이 어딘가의 지점에서 자신만의 외로운 싸움을 계속했을 따름이다. 철저히 그것을 위장했다고 여겼지만 몇 번정도 탄로날 뻔 했던 위기 - 단골 손님에게 어디 아파보인다는 얘기를 듣거나 - 를 몽실몽실 자연스럽게 극복하면서까지 그래야만 했던 이유는, 칼퇴 후에 이어진 '기타수행 폐관수련'에 있다. 노동이 우리를 자유케 하리라, 나는 그 명제를 믿는다. 폐관수련도 일종의 노동인 만큼, 완전한 자유까진 아니더라도 그에 준하는 보상이 있을 것이라 믿으며. 아니, 냉혹한 자본주의의 섭리에 견주어도 그것은 마땅히 그정도는 받을만하다. 그 보상이 무엇인지는, 에헴, 묵비권을 행사하겠다.


그리고 드디어 동호회 모임 날이 도래했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세탁을 잘못하지도 않았건만 흰 샤쓰가 노란 샤쓰로 변하는 마법이 펼쳐질 시간, 나는 결전에 임하는 무사의 자세로 칼을 차듯 기타를 멨다. 오늘따라 유난히 거울이 예뻐보여 깊은 관찰의 시간을 갖자, 봉투 녀석이 여지없이 초를 쳤다.

"죄없는 거울 그만 고문하고 어여 가라."

"자식아. 잘 좀 들여다 봐라. 승리의 깃발을 휘두르는 장군의 풍모가 보이지 않더냐."

"오, 그렇구만. 보이네 보여."

녀석은 거울을 뚫어지게(봉투가 다소 앞으로 기울여서 휴지가 하나 튀어나왔다.) 쳐다보더니 말을 덧붙였다.

"머리는 산발되고 갑옷은 다 떨어진 채 피투성이로 패전의 소식을 전하는 패잔병이 보이는구만."

"어허, 또 초를 치는군."

"네 놈의 패전이 곧 나의 승리로 이어지는 것을 어쩐다냐"

"애초에 동호회를 시작하라고 한 놈은 너라고"

"그게 꼭 너 잘 되라고 한 얘기라는 보장이 있냐."

어라? 어쩐지 뒤통수에 급격한 빙하기가 찾아와 생의 끝자락에서 공룡이 내뱉는 최후의 숨결같은 한기가 불어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일주일간의 폐관수련은 어지러이 나의 길을 방해하는 그릇된 자들을 단호히 처단할 수 있는 지조를 주었으니, 이번만큼은 녀석의 함정에 빠지기엔 마음이 난공불락의 성채 같았다.

"자, 이제 네 놈의 장단을 맞춰줄 시간이 끝났다. 나는 가노라."

끝까지 비웃음으로 일관하는 녀석에게 나는 문을 열며 덧붙였다.

"이따 두고 보시게. 나의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를 듣게 될 것이니"

육중한 철문이 닫혔다. 닫히는 문틈 사이로 모든 것을 노랗게 만드는 마법의 빛이 어둠속으로 끌려들어갔다.


그녀는 소담소담한 치마를 입고 구석자리에 있었다. 북적이는 카페 안에서 사람들은 북적이는 만큼이나 나름대로의 즐거움을 한껏 연출하고 있었다. 저 무더기 안에서 쏟아지는 말 한마디마다 어리석은 중생들의 일진일퇴가 반복되고 있을 것으로 생각하니, 출입문을 들어서는 나의 발걸음은 흡사 해골물을 만나기 전의 원효의 발걸음에 비할 법 했다. 아아, 세상이 아름답다고 믿는 철부지들은 도대체 어떻게 구제해야 하는가.

그런 와중에도 독야청청, 사방 1m 밖에 AT필드를 친 채 아우라만으로 어리석은 중생 중에서도 아귀도에 떨어질 법한 중생들의 침공을 오늘도 무사 격퇴해내는 수성의 대가, 그녀가 있었다. 머리를 긁적이며 퇴각하는 어리석은 중생들을 한 명으로 합쳐놓는다면, 아마 그의 뒷머리는 부분탈모가 생기리라. 칭찬하지 않을 수 없는 태도이다. 마땅히 그녀의 기세가 영원까지 이어지기를 잠시 기도했으나, 뭐라 말 할 수 없는 흉측스러운 마음이 기도장을 깽판쳐놨다. 몹쓸 녀석들이 현실의 방에도, 마음의 방에도 너무나 많다. 흉측한 마음의 깽판은 어느새 두 다리를 조종해 무량한 만용을 부리며 모든 어리석음을 튕겨내는 AT필드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AT필드를 딱 걸쳐있는 상태로 흉측한 마음이 말을 걸었다. 

"아, 네"

"저번에..."

"그, '나를 사랑하지 않는 그대에게' 쳐주시기로 했죠?"

흉측한 마음이 킬킬 거리고는 속삭였다. '거봐, 팔로미라고 ?'

"네, 네. 그래서 연습을 좀 해와..."

"엄청 고민해봤는데, 그 노래보다 더 좋아하는 노래가 떠올랐어요."

"아, 네."

흉측한 마음의 아가리가 상암월드컵경기장처럼 주우우우우우우우우욱 넓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네?"

"좋아하긴 하는데, 완전 좋아하지는 않아요. 그래서 다른 노래를 생각해왔어요."

"어떤....어떤 노래인가요?"

"유희열의 '여름날'이에요."

"아!"

"아세요?"

"저도 제법 맘에 품고 있습니다만"

"그럼, 그걸로 부탁드릴게요"

"예?"

"안 돼요?"

'안 돼요?'라는 그녀의 물음이 마음의 방 안으로 도달하자, 흉측한 마음이 침을 질질 흘리면서 공허한 마음의 동굴을 타액으로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그 노래가 훌륭하다는 것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으나, 문제는 나의 비루한 기타 실력이 그 노래를 연주하기에 썩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생각지도 못한 그녀의 말이 고막을 때리자, 순간 내 몸의 모든 땀샘이 햇빛 좋은 날 빨래를 널기 위해 활짝 열어제낀 창문처럼 무제한적인 개방정책을 실시했고, 덕분에 잠들어있던 땀들이 삐질대며 자유로운 해방전선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나는 대답을 찾아야만 했다.

"그게...그게 말이지요."

"왜요?"

'왜요?'라고 되묻는 그녀의 눈망울이 겨울날의 시리우스처럼 빛났다. 

"그 뭐시기...그 노래는 한번도 연습해보질 않아서요."

"그런가"

빛나던 시리우스가 순식간에 백색왜성으로 변했다. 수십억년의 시간을 넘나드는 그녀의 눈방울은 참으로 신묘하기 그지없다.

그녀가 입술을 빼쭉 내밀더니 아랫입술로 윗입술을 왼쪽으로 물고, 다음엔 오른쪽으로 물었다. 나 역시 어린 날, 동네 아이들 중에 가장 똑똑하다며 어르신들의 만장일치 판정을 받은 그 시절(동네에 아이들이라고는 동생과 나 밖에 없었다는 점은 간과해도 좋다.)의 얼굴에는 미약하게나마 지금 그녀의 얼굴과 비스무리한 무언가가 남아있긴 했다. 입술을 좌우로 삐쭉거리는 것은 과자가 먹고 싶다며 툴툴대던 말과 동시에 시행하는 일종의 안면근육 시위였는데, 유감스럽게도 엄한 부친께서는 시위에 몽둥이로 응징, 강력 진압 해버리셨다. 하지만 그 엄한 부친께서도 지금의 그녀와 마주하신다면, 몽둥이를 집어던지고 함께 시위대열에 합류하실 것이 분명하다.

말없이 관찰하던 내가 이상해진건지, 아니면 용건이 끝난것인지, 그녀는 천천히 몸을 돌리고 있었다. 공기가 회전문처럼 그녀를 감싸고 돌았다. 어쩐지 이 회전문은 그녀를 태우고 돌면 작동이 영영 멈춰버릴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니, 일종의 확신에 가까웠다. 흉측한 마음이 락페스티벌이라도 온 것 마냥 미친놈처럼 뛰댕기며 부실공사를 간신히 지탱하고 있는 마음의 방을 곧 무너뜨릴 것 같았으니까.

"다, 다음 주까지!"

나는 애타게 외쳤다. 그녀가 천천히 돌아보자, 백색왜생으로 변했던 그녀의 눈망울엔 어느새 어떤 일이 펼쳐질지 알 수 없어 궁금해하는 성운의 어둠이 깔려있었다.

"다음주모임에어떠세요?그때까지연습해보지요."

"음"

음절을 반 이상 갉아먹으며 숨을 토하듯 부리나케 뱉은 나의 대답에 그녀는 잠시 골똘한 표정을 지었다. 성운의 구름은 점점 퍼졌고, 시간이 꽤나 흐른 것 같은데 여전히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어쩌면 나는 그녀에게 '이상한 놈'이라 여겨지는 걸까. 아니, 그것만은 아니되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못 한다고 하고 다른 말이나 좀 붙일 것을. 아아, 어찌하면 좋으리오.

자책이 무럭무럭 자가번식하기 시작할 무렵, 그녀가 말했다.

"그러고보니,"

한 마디를 던져놓은 그녀가, 말을 이었다.

"이번 주에 들려주시기로 한 것은 죄송합니다."

그러고는 싱그러운 단발이 찰랑이며 쏟아지면서 고개를 숙였다. 

나는 당황했다.

"아니, 아니 그러실 것 까지는"

"아니요. '좋은' 노래를 내내 생각하다보니 기왕이면 제일 좋아하는 노래를 듣고 싶어서 저도 다른 생각을."

"그렇다고 사과하실 것 까지는 없, 없습니다만"

"다음 주에 <여름날> 연주해주시기로 했으니, 그러면 저도 나름 답례를 드리고 싶은데요."

"예?"

"좋아하시는 음악을 알려주세요. 저도 연습을 좀 해볼게요."

평소 같았으면 퇴계 이황의 문하로 들어가도 예의범절이 몸에 익은 것으로는 문하생 중 으뜸이라 평가받고 걸어다니는 예기 그 자체라 불릴만한 선비의 자세를 지녔기에 한껏 겸양있는 사양을 부려야 하겠지만, 그 때의 나는 갓끈 따위 어디다 갖다 버렸는지, 냉큼 대답을 해버렸다.

"이문세의 <옛사랑>이요!"

"아아, 그 노래요."

하지만 미처 간과하던 사실이 부메랑처럼 뒤통수에 강한 지진을 일으켰다. 과연 그녀가 이 노래를 연주할 수 있을 것인가. 다짜고짜 뱉어놓기만한 자신이 한심했다.

"뭐, 그러지요."

그녀는 웃은건지 무표정인건지 알 수 없는 표정을 보이며 말했다.


'전파낭비잡문기 > 요괴봉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괴 봉투 (13)  (0) 2018.01.29
요괴 봉투 (12)  (0) 2017.10.19
요괴 봉투 (10)  (0) 2017.09.11
요괴 봉투 (9)  (0) 2017.07.14
요괴 봉투 (8)  (2) 2017.07.11

WRITTEN BY
빵꾼

,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내가 한 것은, 흑암지옥을 방불케 하는 집 구석의 오른쪽 모퉁이를 향해 수색정찰에 돌입하는 일이었다. 가뜩이나 좁은 방에 괴상하고 파렴치한 봉투 쪼가리가 떡하니 공간을 차지, 어느 시점부터 내가 월세를 내고 있는 공간이라 여기지 않게 된 공간이었다. '나의 공간으로 인식하지 않기에 청소를 하지 않는다'는 지극히 이치에 입각한 논리는, 먼지와 괴물처럼 쓰레기를 내뿜고 있는 고약한 봉투들이 다소간 어지러울 뿐인 공간이, 한 사람의 생명이라도 더 구하기 위한 소방대원의 사투가 펼쳐지는 대지진 현장으로 진화해버렸다. 

물론 내가 이 상황을 타개하려는 노력을 안 한 것이 아니다. 다만 논리적, 상식적으로 이미 내가 책임져야 할 공간이 아니게 되었기 때문에, 적극적인 개입을 할 수 없었을 따름이다. 게다가, 통 큰 양보를 통해 봉투 녀석에게 공간을 내주었으니, 방을 절반으로 나누어 빗금을 치고 공간 안에 있는 쓰레기와 먼지들에 대해 상호 간 무한 책임을 지자는 나의 선량한 제안에 녀석은

"평화 지대 구축에 장애만을 덧쌓는 잠꼬대 같은 궤변으로, 우리 공화국의 인민은 모두 똘똘 뭉쳐 이런 오만하고 간사한 제안의 저의를 꿰뚫어보고 더욱 '우리 먼지끼리'를 외치며 혁명적 논의를 이어가고 있다."

라는 해괴한 논평으로 거절, 그 순간만큼은 쓰레기를 품은 녀석이 김정은의 배를 연상케 할만큼 불량하기 짝이 없었다. 그 제안이 수포로 돌아간 이후 이 지역은 그야말로 유사이래 인류의 손이 닿지 않은 미탐사 지역처럼 고이 먼지가 쌓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곳을 굳이 나의 폐를 걸고 탐사하는 까닭은, 장판에 쌓인 먼지 두께만큼 똑같이 먼지에 눌려있는 기타를 구해내기 위해서였다.

"너는 앞으로 물건을 사지 않는게, 아니 그냥 입산출가해서 무소유의 삶을 사는 게 어떠냐?"

"무슨 뜻이여"

"네 놈이 소유하는 물건들의 운명이 너무나 안타깝다는 말이다."

"네가 신경쓸 바가 아니다!"

"이대로 놔두면, 곧 나같이 득도할 녀석들이 이 방에 가득가득 할지도 모르겠군."

"뭐시라?"

매사의 사려깊은 나조차도 깨닫지 못했던 중요한 포인트를 녀석이 짚었을 때, 심장이 씽크홀이라도 생긴 것처럼 철렁했다. 아뿔싸, 통렬한 아뿔싸였다. 저 괴이쩍인 봉투 놈 한 명으로도 족한데, 봉투 같은 녀석이 떼로 떠들어 대면 정말로 입산출가하는 것이 더 현명할지도 모르겠다. 조만간 청소를 하긴 해야겠다 싶었다.

물론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보다 더 중요한 임무가 있으니.


오랜만에 꺼낸 기타는 주인을 책망하듯 애닳픈 소리를 내었다. 줄이 다 풀린 채 '딩딩'대는 녀석을 보니, 불현듯 울화가 치밀었다.

"이 녀석도 저 녀석도 죄다 괘씸한 녀석들 뿐이로고."

봉투가 물었다. "또 무슨 궤변을 늘어놓으려고"

"생각해 봐라. 이 녀석, 지가 무슨 일주일간 음식 섭취를 못한 조난자처럼 아사 직전의 소리를 내고 있지 않냐. 우리 부친께서 내게 그러하셨듯, 가풍에 따라 강하게 키웠는데 그 결과가 이따위라니. 이 녀석의 나약함에 울화가 치민다. 울화가 치밀어."

"그 울화를 잘 새겨둬라."

"왜?"

"춘부장께서도 네 녀석의 꼬락서니를 보실 때마다 울화가 치미실테니."

항우가 살아 돌아와 용을 쓴다 하여도 한 치도 움직이지 않을, 태산보다 더 부동부혼의 사나이 자긍심에 한 줄기 새빨간 스크래치가 갔다. '조만간' 있을 대청소 때 그냥 모조리 버릴까도 싶다.


기타줄을 새 것으로 갈아끼고 먼지를 싹 청소하고 나니 진이 다 빠졌다. 작일의 나였다면 이미 지쳐서 깨끗해진 기타를 다시금 유배보냈을테지만, 당면한 목표가 시급했으므로 그리할 수는 없었다.

"웬일이냐? 도로 안 집어넣고"

"이 몸은 목표가 생기면 경부 고속도로를 시속 200km로 달리는 사내이기 때문이지"

"기타 동호회에서 또 부질없는 연심을 품을 여성이라도 만난 것이겠구만. 뻔하다 뻔해. 너무 뻔해서 신작영화의 스포일러를 당한 느낌이야"

"연심이라니, 무엄하도다. 기왕 동호회 활동을 하게 된 것, 구성원으로써 좀 더 적극적인 의무를 수행하기 위함에 지나지 않으니, 나의 순수하고 선량한 의도를 곡해하지 말도록"

"기왕 스포일러 당했으니 나도 스포일러로 갚아줘야겠다. 너, 그 연심의 결말을 내가 알려주.."

"조용! 조용! 지금 누가 소리를 내었는가! 나는 지금 무사수행의 삼매에 빠져야 하니 조용히 해주길 정중히 요청한다."

내가 녀석의 말을 끊는 일은 좀처럼 없는 일이나, 녀석은 화를 내기는 커녕 씨익 웃으며

"그럼 어디 한번 열심히 연습해보셔."

라는 말과 함께 나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녀석의 불량한 의도와는 달리 나의 연습은 순조로웠다. 코드도 찾고 운지법도 열심히 체크하며 한 소절 한 소절 열심히 반복했다. 문제는 한 소절 뿐이었다는 점에 지나지 않으니 이 기세라면 이 달안에는 마스터할 수 있는 속도였다. 그녀에게 이 곡을 연주해주겠다는 호언장담을 하긴 했지만 딱히 언제라고 시기를 언급한 것은 아니니, 꼭 다음주에 있을 모임까지 마스터해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테클걸지 마라"

"당치않는 소리. 나는 여기서 그저 미소를 띄운 채 네 녀석의 연주를 관람하고 있을 뿐이라고?"

"속으로 비웃고 있는 거 다 안다. 그리고 연주를 관람이라니, 문법부터 익히고 오도록"

"하라는 곡 연습은 안 하고 왜 관심법부터 마스터했냐. 그리고, 연주라고 하기엔 너무 조악해서 볼 꺼라고는 낑낑대는 네 꼬라지 밖에 없어서 관람이라 한 것일 뿐"

역시나 순조로웠던 연습은 녀석의 훼방으로 인해 차질을 빚기 시작했다. 부아가 치밀어 올라 두개골을 열고 승천할 것 같았지만, 잠시간의 화를 억누르고 다음 소절로 진입했다.

"오호"

"왜 또!"

"거기까지 하고 관둘 줄 알았더니만, 다음 소절로 넘어가긴 하네?"

"이미 말했듯, 나는 목표가 생기면 시속 200km로 경부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사나이라고"

녀석이 덧붙였다. "10km도 못 가서 항상 차가 퍼져버리던데"

"기억을 날조하지 마시게 제군"

가볍게 응수한 후,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연습을 이어나갔다. 세번째 소절로 접어들 무렵, 녀석이 또 말을 걸어왔다.

"그거 쳐주겠다고 또 헛된 약속을 남발하고 온 게냐"

"헛된 약속이라니. 이름을 걸고 천지신명께 올린 맹약이다."

"오호, 흥미롭구먼. 돈 받고 하는 일도 여름방학 숙제처럼 미루기만 하는 자식이, 이렇게 내일 할 일을 오늘 몰아서 하는 게. 사회학적으로 아주 흥미로운 주제야. 춘부장께서 이 모습을 보면 조금이나마 혈압이 낮아지실 것 같군."

대꾸하고 싶었지만, 굳은 살이 많이 무뎌진 손가락에 베여드는 기타줄이 반론대신 희뿌연 신음소리만 입으로 보내고 있었기에 기운이 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건전한 동아리 활동을 위해 이토록 애를 쓰는 자신의 모습은 조금은 칭찬받아도 마땅하다. 칭찬해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은 다소 아쉬운 요소지만.


천금같은 휴일을 모두 쏟아부은 결과 천신만고 끝에 1절을 모두 연습할 수 있었다. 며칠만 더 하면 완곡은 무리없이 소화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늘 그렇듯 밤이 능구렁이 같이 방 안에 스며들자, 남사스럽게도 외로움이 지렁이처럼 이불 안으로 기어들어왔다. 이불 속에서 꼬물꼬물대는 외로움을 퇴치하기 위해 나는 머릿 속으로 그녀를 그려 넣었다. 그녀를 그려넣고 보니 다소 배경이 허전하여, 다음 모임 때 모이기로한 카페를 좀 더 그려보았다. 아기자기한 카페에 홀로 앉아 있는 그녀는, 다소 민망한 말이지만 아름답다는 말을 얼렁뚱땅 붙일 수 있는 풍경으로 남았다. 그럼에도 질긴 외로움이 질척대며 온 몸에 비비적거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아름다움으로도 지울 수 없는 녀석의 극악무도함에 꼭 봉투 녀석 같았지만, 그쪽을 쳐다보면 즐거운 상상의 나래가 산산조각이 날 것이므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다만 정적을 먹고 점점 자라는 외로움을 경고하기 위해 자그마한 소리를 내보았다.

"흠냐흠냐"

당연하지만 잠이 없는 녀석은 그 소리를 듣고 또 입을 열었다. 한번쯤 그냥 지나쳐주는 에티켓은 도대체 언제 새길런지.

"야심한 밤에 망상은 금물이니라."

"망상따위 하지 않았다. 예술에 가까운 상상을 했을 뿐"

"보나마나 그녀에게 기타를 쳐주고 칭찬을 받는 것 따위의 저질스러운 생각이겠지"

바로 그것을 위해 정신을 가다듬은 것이나, 아직 본격적으로 시작조차 하지 않았으니 이런 비난은 부당하다.

"하지 않았느니라"

"할려고 했겠지"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군. 나는 그런 의도따위 없었지만, 설령 의도가 있었다 하더라도 하지 않은 일 때문에 비난받는 것은 옳지 않다 이 녀석아"

"네 놈의 지난 망상들을 적어서 경찰서에 제출하면 그대로 철창행이야. 전과만으로도 입증은 충분하다."

시덥잖은 입씨름을 하루종일 해서 그런지, 범죄를 운운하는 녀석의 시비를 무시하고 본격적으로 망상에 빠졌다. 녀석은 창문 가운데에 있던 달이 어느새 창문을 벗어나 도망갔을 시간동안이나 지난 나의 망상들을 읊조려댔지만, 시속 200km로 질주하는 망상의 오토바이는 모든 소리들을 잡아먹고 달렸다. 오랜만에 썩어빠진 독자 제위들의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붙여두는 말이지만, 기타연주를 하는 상상에 몰두하다보니 다른 상상은 그려낼 틈이 없었다. 기타를 연주하는 손이 상상 속임에도 불구, 방자하게 제멋대로 움직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망상이 아니라 예감인듯 하여 외로움이 있던 자리에 불안감이 차고 들었으나, 망각의 이불을 덮어쓰기 위해 작은 전등을 껐다.

방 안에 어둠이 켜지고, 상상의 방 역시 어둠이 켜졌다.


'전파낭비잡문기 > 요괴봉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괴 봉투 (12)  (0) 2017.10.19
요괴 봉투 (11)  (0) 2017.09.18
요괴 봉투 (9)  (0) 2017.07.14
요괴 봉투 (8)  (2) 2017.07.11
요괴 봉투 (7)  (0) 2017.03.30

WRITTEN BY
빵꾼

,



"안녕하세요. XXX입니다. 기타는...한 5년 쳤는데 야매로 배워서 엉망이에요. 잘 부탁드립니다."

숨막히는 어색함이 장내를 휘감는 카페 안, 나는 왼손으론 뒷머리를 긁적이고 오른손으론 뒷짐을 진채 엉성한 인사를 했다. 몇가락 허공에 흩어지는 박수가 증발했다. 20여 명 즈음 되는 동호회 사람들의 시선을 오롯이 받는 일은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개중 몇몇은 자신의 핸드폰을 만지작 거렸지만. 성비는 6 : 4. 남자가 살짝 우세하지만 동호회치곤 희망적이다. 뭐가 희망적이냐고 묻지 마시길. 나도 프라이버시 쯤은 가질 만한 사람이다.

자기소개라는 것은 뭘 어떻게 해도 난감하다. 너무 튀면 튀는 대로 욕 먹고, 너무 짧으면 짧은 대로 욕 먹고. 이런 것은 대강 무난에 무난을 더해 무한무난의 태세를 취하며 넘겨버리는 것이 뒤탈없다는 것은 거듭된 시행착오 끝에 얻어낸 값비싼 경험이다. 아무튼, 신입 회원은 남자 4, 여자 1명. 남자 4명이 모두 인사를 마치고 신입 여성 회원의 차례가 되었다. 나는 문득 공기의 냄새가 달라짐을 느꼈다. 남성 신입 회원들의 자기소개에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던 이십대 후반 ~ 삼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성 회원들이 갑자기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기존 여성 회원들은 신입 남성 회원들에게 지어보이던 미소와 농담들을 거뒀다. 이 무슨 난데없는 긴장감이더냐, 그녀가 무슨 죄가 있기에. 나는 몇 분 뒤 쏟아질, 쓰잘데없는 환호성과 과한 박수 소리에 이 쪽 테이블을 찡그리며 쳐다 볼 옆자리 손님들의 눈빛과, 서로의 눈빛을 관찰하며 환영의, 그러나 그것이 진심인지 무엇인지는 도대체 알 수가 없는 묘한 미소를 지을 사람들의 표정이 스쳐지나갔다. 아아, 이것이 예지력인 것인가. 방구석 무사수행 2년이면 초능력이 생기는 것일까. 그러나 예지력 따위 그렇게 순순히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 몇 초 뒤의 벌어진 상황으로 깨닫게 되었다.

"김여은입니다."

우주를 담고 있는 듯한 검은 눈동자와 날렵하고 굳센 코, 붉고도 작은 입술, 힐을 신고 같이 거닐어도 내가 그다지 작게 보이지 않을 정도의 아담한 키(딱히 같이 걷는 상상을 한 것은 아니고 대충 그렇다는 것이다), 구름을 사뿐사뿐 건널듯한 플랫슈즈, 발목까지 올라오는 앙증맞은 흰 양말, 한 쪽 팔은 반대쪽 팔꿈치를 잡은 상태로 뒷짐을 진 채 인사하는 그녀를 따라 하늘거리던 푸른 치마, 그 팔을 종종 쫓아올라 새들의 쉼터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작지만 포근한 양어깨, 유려한 샛강의 곡선을 훤히 뽐내는 목선과, 강변에서 흩날리는 억새처럼 목선 위에서 나풀거리던 검은 단발. 그리고 내가 수백번 들락거린 집 앞 편의점에서 우유를 살 때처럼, 지극히 무신경한듯한 그 목소리.

으음, 상황을 정확히 전달하려는 나의 설명이 다소 과한 감이 있지만 아무튼 그녀는 그랬다. 허공에 초점을 맞춘 채로 이름 석 자를 알리는 멘트와 함께 꾸벅, 그걸로 끝이었다. 그녀가 자리에 앉자, 박수를 치기 위해 두 손을 미리 세워 모션을 취하고 있던 앞 자리의 남자는 '응?' 하는 표정을 지었고, 그 옆의 남자는 그의 손을 바라보며 자신이 더 민망해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소개할 때마다 얼굴을 맞대며 소곤소곤대던 여성들은 그대로 멈춰, 모두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황함과 민망함이 장내에 퍼지는 몇 초가 흐른 뒤, 누군가 빈약한 박수를 쳤다.

짝, 짝, 짝

끊어지는 박수를 뒤늦게 사람들이 따랐고, 덕분에 모션만 취하고 있던 사람도 위기에서 탈출했다. 그의 표정에서 '좋아, 자연스러웠어.' 라고 여기고 있는 것이 훤히 보였다. 

그 뒤로는 기존 회원들의 무난, 무색, 무취, 무개성한 자기 소개가 이어졌다. 막혔던 흐름이 뻥 뚫렸다. 이 난국을 타개한 것은, 누군가 먼저 냈던 끊어지는 박수 소리. 칭찬할 만하다. 흐름과 분위기를 잘 읽었다는 점에서 가히 유재석의 센스에 닿아있다. 아마도 그는 모든 상황을 이해하고 속으로 몇 초간의 유쾌함을 즐기고 있었을 것이다. 

생각해보니, 그 몇 초간의 나는 다소 유쾌했던 것도 같다. 그 외에 다른 감정도 가슴 안 쪽에서 불쑥 고개를 내밀다가 이성의 뿅망치를 맞고 두더지처럼 되돌아갔는데, 그 감정의 이름을 밝히는 것은 하등 중요하지 않으므로 비밀로 부치겠다.


 

뒤풀이로 이어진 회식에 따라갔다. 벌써부터 피곤하고 다소간의 유쾌함은 얻었으니 분수를 알고 돌아갈까도 했지만, 그래도 첫 날이니만큼 얼굴을 비춰주는 것도 필요하리라. 맥주집에 주욱 늘어선 테이블로 사람들이 착석했다. 이 배치는 좌, 우, 앞 자리의 사람들 밖에 이야기 할 수 없어서 여러 사람들과 친해지기 위해선 술잔들고 돌아다닐 수 밖에 없다.

"자, 신입 회원분들, 환영합니다!"

회장의 건배사와 함께 사람들이 술잔을 들었다. 10여 명이 넘는 사람과 함께 재잘대며 술잔을 기울이는 것은 나도 오래간만의 일이라, 분위기에 취하여 흥이 돋는 일은 인생을 통틀어 손 꼽을 만큼 흔들림없는 자세를 유지하는 나조차도 다소간 들뜬 기운이 들 수 밖에 없었다. 그것도 잠시, 잔이 몇 배순 돌고 난 뒤 나는 예의 그 관찰하는 습관으로 되돌아갔다. 봉투 녀석은 나의 이 습관을 빌어

"중증 관음증이야. 그거"

라며 폄하했지만 듣자마자 각하했다. 관음증이라니, 진리를 탐구하는 첫 시작은 관찰이 아니던가. 물론 관찰하다보면 관찰 결과와 뇌리에 잔영이 남아있는 물 건너온 예술 영상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남사스러운 형태로 꿈에 나타나기도 하지만, 그런 것은 부수적인 결과물일 뿐이지 이 관찰 활동의 본 목적과는 하등 거리가 멀다 하겠다.

끝 자리 사람들이 모인 지점에서 엉거주춤 걸터 앉은 신입 남성 회원. 스물 아홉이라고 했던가. 그는 빛나는 개그센스를 선보이며 주목 받고 있었다. 옆 자리 여성의 물컵을 자신의 것과 바꾸며,

"이게 물물교환이지요 하하"

비록 나의 짧은 소견이지만, 첫 만남 자리에서 이 따위 개그를 치는 사람들은 모조리 재입대 시켜, 사회를 불편하게 만드느니 적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적과 조우할 시 총 보다 이런 종류의 개그를 치는 것이 어쩌면 지구 평화에 더욱 도움이 될 지도 모르겠다. 대포동 미사일보다 더 심장을 찌르는 듯한 충격적인 개그, 이것도 나름의 용기일까. 진심으로 정색하는 듯한, 옆 자리 기존 여성 회원의 표정에도 기계적인 웃음소리를 내는 그를 보자 어쩐지 아련해졌다.

반면 바로 반대편에서 아예 서로를 바라보며 불타는 시선을 교환하는 남녀들이 있었다. 신입회원인 20대 초반의 남성과 기존회원 20대 후반의 여성. 훔쳐 들으니 내용은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따위의 소소한 것에 지나지 않건만 왜 그 목소리들은 칠리소스를 잔뜩 끼얹은 듯한 뜨거운 내음이 가득한건지 모르겠다. 웃으며 빵긋 미소를 짓는, 키가 훤칠한 남성과 물개박수와 함께 까르르 까르르 연달아 볼이 발그레한 여성, 맞은편에서 '물물교환' 개그를 하는 것과 비교하니, 어쩌면 저들은 몇일 뒤에 진짜로 육체의 물물교환을 할 지도 모르겠다는 도덕적인 노파심이 잠시간 일렁였으나, '관음증' 운운하는 불쾌한 목소리가 떠올라 고개를 돌렸다.

양 편으로 모임의 축이 옮겨간 테이블에서 가운데 나란히 앉아 있는 두 남성이 눈에 들어왔다. 기존회원의 20대 남성 두 명은 그야말로 유유자적, 무사평안, 안빈낙도의 술자리를 만들고 있었다. 왁자지껄한 사람들 가운데의 평화로운 무릉도원, 태풍의 핵 같아서 마치 그 둘의 시간은 타인보다 백 배쯤 느리게 가는 듯 했다. 잠시 귀를 기울였다. ...치지직, 치치직 하는 소리가 그들의 대화를 엿 듣는 것을 방해했다. 이상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안개에 휩쌓여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그들의 대화에 대한 호기심이 증폭했다. 그들의 논의는 도대체 무엇이기에 이토록 위험한 호기심이 들게 하는가. 나는 조심스레 발을 내딛었다. 그러자 그곳에선,

..."그러니까 그 때, 아직 날짜도 기억해 1월 21일, GOP 들어가있는데 무슨 일이 있었냐면..."

나는 1초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들을 수 있던 그들의 대화를 파악하자마자 뜨거운 냄비에 손을 데인 사람처럼 황급히 벗어났다. 조금만 더 빠져들었어도 나는 영락없이 군대 얘기에 갇혀 앞으로 술 먹을때마다 헤어나올 수 없는 수렁에 빠졌을 것이라 생각하니 식은 땀이 줄줄 흘렀다.이런 불운은 이제 사양이라고!

반대쪽 테이블 끝의 그룹에선 진짜로 기타 얘기를 하고 있었다. 기타를 정말로 좋아한 나머지 술자리에서 조차도 기타를 꺼내어 튕기는, 20대 초반의 기존회원을 중심으로 아직 기타가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한 사람이 물었다.

"이거 칠 수 있어요? 벛꽃엔딩"

"아, 네."

벙거지 모자를 쓰고 나온 그 기존회원은 코드를 잡으며 인트로를 연주했다. 그런데 인트로가 채 끝나기도 전에,

"이것도 칠 수 있어요? <금요일에 만나요>"

라며 다른 사람의 신청곡이 날아 들었고, 그는

"아, 이거 였던가."

라며 새로운 연주를 시작했다.

또다시 몇 소절 가지도 않은 채,

"이건 어떻게 치는거야?"

라든가,

"난 꼭 이 곡을 치고 싶었어."

따위의 배움 요청을 빙자한 사실상 신청곡 메들리를 연주하는 신세가 되었지만, 사실상 완곡은 한 곡도 못하는, 그저 노래방 기계에 준하는 존재가 되어 버렸으니 일말 측은한 감정이 들었다. 그의 표정이 어두워질때마다 기타 줄도 늘어졌으나, 알콜이 쏟아진 사람들에게 그 정도 변화가 눈에 들어올리 있으랴. 아티스트의 길은 원래 외로운 법, 그의 건투를 빌며 다시 눈을 돌렸다.


앞서도 말했지만 나는 본디 관찰하는 것을 즐긴다. 12층 아파트 난간에 올라서서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차들이 어디로 향하는지 지켜보는 것도 즐겁고, 밤이면 옥상에 올라 앞 동 여러 세대들을 지켜보며 작은 방의 불이 몇 시 쯤 꺼지는지 지켜보는 것도 즐거웠다. 모두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야자 시간, 맨 뒷자리에서 그들의 뒤통수를 관찰하며 그들이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책을 토대로 뒤통수들 위에 말풍선을 그려보기도 했다. 자전거를 탈 때, 빨간불에 걸리면 몇 초 뒤에 파란불로 돌아오는지, 파란불은 또 몇 초 동안 지속되는지, 이 파란 불 다음엔 어느 신호등의 불이 바뀌는지 몇일 간 살펴보는 것도 소시민의 깨알같은 일상에서의 낙이랄까. '어쩌면 이러다가 정말 중요한 사건의 목격자가 되는 행운을 얻고 9시 뉴스에 데뷔할지도 몰라!' 라는 섣부른 기대가 앞선 나날들도 있었다.

뜬금없이 웬 자기회고인가 싶겠지만, 이는 앞으로 전개될 나의 다소 과한 관찰결과가 독자 제위의 오해, 이를테면 '언제 이딴 걸 다 보고 있었지?', 혹은 '처음부터 이쪽만 뚫어지게 봤구만' 따위의 오해들을 차단하기 위한 사전 설명이니, 글쓴이의 의도를 잘 파악해야만 하는 국어 시험에 임하듯 글을 읽어주시기 바란다.

"신입회원 여러분, 환영합니다"

출렁이는 맥주와 맥주를 감싼 투명한 맥주잔과 그것을 움켜 쥔 손가락과 그 손과 맞닿아 있는 회장의 얼굴과 회장의 입에서 튀어나온 목소리가 장안을 휘감을 무렵, 그녀의 작은 입술도 남들에게 들릴듯 말듯한 목소리로,

"환영해주세요"

라고 하는 것을 눈치챘다. 술이 몇 순배 돌고 서로 서로 대화의 과녁을 찾아가고 있을 때, 여기 저기 그룹에 살짝씩 담궜다가 어색함을 느끼며 자리를 떠나기를 반복하는, 저러다가 결국 둘만 자리잡아 군대얘기를 나눌 것만 같은 두 남성이 그녀에게 말을 걸기도 했다.

남성 A : "여은씨, 맞지요?"

"네."

남성 B : "반가워요. 잘 들어왔어요."

"네."

남성 A : "기타는 언제부터 관심가졌어요?"

"얼마 안 됐어요."

남성 B : "...제일 좋아하는 노래는 뭐에요?"

그 질문에 잠시간의 정적이 흐르다, 그녀는 

"생각나는 건 있지만 딱히 댁한테 말씀드릴 이유는 없는 것 같네요."

라는, 도저히 인간세에 남아있을 수 없는 듯한 신선의 풍모가 가득담긴 멘트와 함께 남성 B를 빤히 쳐다보았고, 두 남성은 소싯적 잃어버린 장난감을 찾는 소년들처럼 할 말을 찾느라 황망한 자세로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다, 격퇴되는 패잔병처럼 사라졌고 이윽고 그들만의 안개에 갇히게 되었다.

한편, 조금 뒤에는 예의 그, 1918년부터 복개 공사가 진행된 청계천이 다시 뜯어지기 직전까지 고여있던 물처럼 완전히 썩어 문드러진 개그를 선보이던 그가 그녀에게 다가가기도 했다. 나는 바로 전 격퇴당한 두 사람이 떠올라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그를 지켜보았다.

그와 그녀는 몇마디 인사를 주고 받더니,

"여은씨, 피카츄가 드럽게 안 까지는 귤을 까면서 하는 노래가 뭔지 아세요?"

"어? 그거 개그에요?"

"네. 완전 웃긴 개그에요 이거."

"으음, 글쎄요. 뭘까요?"

"언제언제까지나~"

나는 설마하는 심정으로 그를 지켜보았지만, 답이 흘러나오자 차마 땅 밑으로 시선을 보냈다. 완전무결한 범죄기록을 자랑하는 내가 어째서 대역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야하는지 모르겠지만, 이것이 몰래 훔쳐들은 죄라면 기꺼이 양심이 이르는 대로 벌을 달게 받아야 할 것 같았다. 이윽고 그녀가 지을 것으로 예상되는, 시베리아 사하 공하국의 기후를 닮은 냉혹한랭한 표정과 반응이 걱정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풉"

이라며 수도꼭지를 돌릴 때 처음 나는 소리처럼 물꼬를 트더니,

"으하하하하하하하하하"

라며 박장대소를, 아니 이건 박장대소 수준을 아득히 넘어 헤드벵잉이나 브레이크댄스를 추는 비보이의 수준으로 요란하게 웃어 제끼는 것이었다. 

"으아, 피카츄가, 언제언제까지나래 으핳"

그 가녀린 속눈썹에 맹글대는 눈물을 닦아가며 웃음을 간신히 거둔 그녀를 보며, 왼쪽 어깨는 수미산처럼, 오른쪽 어깨는 태산처럼 솟아버린 그는 연거푸 썩은 개그를 난사했다. 이제 '고삐풀린 그를 누가 막을쏘냐' 라며 걱정하는 나를 비웃듯, 또 그녀는 싸늘한 반응만 이어가는 것이었다.

"이렇게 물을 서로 바꾸면..."

"물물교환이라구요? 재미없어요 그거."

도대체 뭐가 재밌는 개그고 재미없는 개그인지 종잡을 수 없는 기준을 가진 그녀의 선구안도 물론 놀랄만한 것이지만, 고작 몇 초 사이에 개그콘서트 방청객에서 대법원 형사소송의 방청객으로 모드가 바뀔 수 있는건지 귀신같은 태도변화에 더 놀랐다. 저 차가운 눈빛과 말투에 충격을 먹은 그는 어쩌면 테이블을 돌며 계속 물물교환 개그를 시도하는 트라우마에 빠질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한편, 술이 몇 잔 들어가자 그녀도 폭신해보이는 양 볼에 붉은 등을 킨 채 기타 토크에 빠져있는 무리에 끼었다. 사람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돌아가며 신청곡을 내고 있을 때 그녀는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기만 했다는 점이다. 물론 옆 사람과의 농담이나 이야기를 진지하게 귀 기울여 듣고 있었지만, 이야기의 끈이 다른 이로 향할 때 그녀는 여지없이 생각에 잠긴 표정을 화면보호기처럼 띄우고 있었다.

보통 관찰중엔 주제넘게 사건에 개입하는 것을 극도로 삼가는 것이 내 주의이자 일종의 기자정신이기도 하지만, 이번만큼은 나와 독자의 알 권리를 위해 질문을 해보기로 했다.

"왜 노래 신청을 하지 않으시는건가요?"

매우 신사답게 정중하며 교양있는 나의 질문과 태도에 놀랄 법도 하지만 그녀는 전혀 아무렇지 않은 채,

"아까 질문을 받았었는데, 아직 좋아하는 노래에 대한 정리가 다 안 끝나서요."

라는 답변을 내놓는 것이었다.

"좋아하는 노래를 고르는 것에 그렇게 고민할 필요가 있어요?"

"당연한 거 아닌가요? 아무 노래나 다 좋다고 할 수는 없다구요."

"물론 그건 그렇지만, 브로콜리너마저의 <사랑한다는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이나 가을방학의 <가끔 네가 미치도록 안고 싶어질 때가 있어>라는 노래들은 누구에게나 다 '좋다'로 꼽혀지는 곡이잖아요."

"그 노래들이 싫지는 않아요. 당연히 좋다에 가깝긴 하죠."

여기서 그녀는 잠시 뜸을 들였다.

"하지만 제게 있어서 그 노래들은 '꽤 괜찮은' 정도에 가까운 걸요."

"'꽤 괜찮은' 정도라구요? 그거, 나름 등급인가요?"

"네. 상당히 후한 평가에요."

"그럼 '좋은' 노래가 도대체 뭐길래요?"

"그러니까, 지금 고민중이라니깐요."

으음, 보통 남의 문제나 고민에 간섭하는 것은 지극히 합리적인 개인주의자에 가까운 나의 모던한 성향과는 거리가 멀지만, 이번만큼은 나의 호기심(전적으로 학문적인 호기심에 가깝다) 문제가 걸려있어 살짝 개입해보기로 했다.

"넬은 어때요"

"괜찮아요."

"국카스텐은?"

"그럭 저럭이네요."

"콜드플레이"

"괜찮구요."

"라디오헤드는요?"

"뭐, 그럭 저럭이에요."

흠,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음악 성향은 마치 아나키스트의 심보 같아서, 이 장르로 묶으면 이래 저래 도망가고, 또 어떤 가수로 묶으면 셀프 국외 추방하기를 반복하며 '좋은' 음악을 찾아 동유럽을 떠도는 집시가 되었다. 왜 내가 추격자가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소라는 어때요? 이소라의 <나를 사랑하지 않는 그대에게>"

10분 여의 숨바꼭질 끝에, GG치듯 던진 마지막 질문에 그녀는

"어라?"

라며 잠시 눈을 위로 치켜뜨며 생각에 잠기더니

"으음...음..."

하며 마감이 코 앞으로 다가온 만화가처럼 고뇌에 찬 소리를 내고

"하아"

라며 어쩔 수 없이 선고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상고심 피고처럼 한숨을 쉬며

"그건 정말로 '좋은' 노래네요." 

선언하듯 인정하고, 바로 벙거지 모자를 쓴 그에게 돌아서

"<나를 사랑하지 않는 그대에게> 쳐주세요."

라는 것이었다.


그 순간 나는 비상식량도 없이 보트 한 척에 의지해 망망대해에 강제적으로 띄워진 표류민처럼 소스라친 상실감, 혹은 고립감, 또는 당황스러움, 아니, 그 모든 것들을 믹서기에 넣고 돌린 감정에 젖어 들었으나, 이내 연주를 기대하는 반짝이는 눈빛을 별빛으로 착각하고, "그래 저기가 북쪽이구나"라며 별자리를 보고 항해하는 사람처럼 현명한 사람의 자세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것이 진짜로 별빛이 아니라는 것이 다소 위험한 사실이었지만.

"음, 그 노래는 몰라요."

하지만 벙거지모자를 쓴 회원의 답변에, 별빛은 나도 모르는 새 초신성 폭발을 마치고 이미 백색왜성으로 찌그러들어 아무런 빛도 남지 않은 채 어둠 저 너머로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나는 무엇을 의지하여 항해해야 하는가. 긴 항해가 물거품이 된 것만 같은 두려움이 배 안으로 쏟아져 내렸지만, 나는야 사나이, 이런 것에 지지 않아야 하는 법이다.

"그거, 제가 다음에 연주해볼게요!"

나의 말 한마디에 백색왜성은 시간을 거슬러, 흩어졌던 초신성 폭발의 잔해들과 감마선이 다시 모여들고 영롱하고 찬란한 빛을 내는 별로 바뀌었다. 나의 항해도 그 덕분에 계속할 수 있을 것 같아 다행이었다.

"음, 기대되네요. 다음 모임 때는 가능하겠죠?"

"네. 물론이죠."

"간신히 좋은 곡을 찾았는데, 못 듣고 넘어가면 아쉬울 것 같아서요."

"앞으로도 계속 찾아보죠. 기대한 만큼 아쉽기도, 또 뿌듯하기도 하는 것이니까요"

나의 궤변에 그녀는 잠시 갸우뚱하더니, 

"그렇군요!"

라며 나도 하지 못한 납득을 거둔 채 돌아섰다.



'전파낭비잡문기 > 요괴봉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괴 봉투 (11)  (0) 2017.09.18
요괴 봉투 (10)  (0) 2017.09.11
요괴 봉투 (8)  (2) 2017.07.11
요괴 봉투 (7)  (0) 2017.03.30
요괴 봉투 (6)  (0) 2017.03.25

WRITTEN BY
빵꾼

,



"으아아아아악!"

열대야의 가혹한 시련 속에서 창문이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입을 벌리고 있고 뜨듯한 바람이 창문의 아가리로 한없이 쏟아져들어오고 있었다. 그럼에도 밤은 고요하고 사람들은 잠이 들어, 모든 것이 조화롭고 태평해서 이대로 전쟁이 터진다 해도 "그래. 쉴 만큼 쉬었으니 전쟁쯤이야."라며 가볍게 납득한 후 총을 들쳐메고 나갈 수 있을 정도로 평화로운 새벽을 헤집고 터진, 석연치 않은 비명이 창문의 아가리를 향해 뻗어나갔다. 

"뭐하냐 너."

"으어억, 소..손이..."

"손이 뭐."

"손이...으아아아.."

"뭐하냐 너. 왜 오징어가 되고 있어."

"손이....오.....오....오그라든다아아아악!!!!"

"....멍청한 놈"


여전히 달빛 은은한 밤. 오늘도 월용할 양식을 구하기 위해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 뛰어든 한 부품이 되어, 이리저리 육체의 정신의 담금질을 반복한 고된 하루를 마치고 퇴근한 나는, 지난 밤의 이야기를 되새기며 하루종일 비웃을 멘트를 준비했을 봉투 녀석의 계략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 바로 잠이 들었다. 녀석의 간교한 함정에 빠질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침대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깊은 잠에 빠졌을 때즈음, 아뿔싸, 지난 밤의 에피소드가 꿈의 장막에 영화처럼 펼쳐지고 말았다. 꿈 속의 나는 애써 그 장막을 걷어 치우려 노력해봤지만, 봉투 녀석이 손잡이를 길게 늘리더니 내 발을 부여잡고 한 치도 움직이지 못하게 막았다. 장막에서는 월하독부, 달밤 아래 홀로 부루마블을 하는 나의 모습이 비쳐졌고, 롤러코스터같은 감정 분출 행동을 보이더니 어느 순간 절체절명의 위기에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바로 그 때, 육중한 철문이 열리며 남녀남녀의 인간들이 뛰어든 것이었다.

차마 더 이상 볼 수 없음에 나는 꿈 속에서 손을 꺾었다. 그때문에 꿈에서 깼으니, 비록 관절을 잃었으나 긍지는 취할 수 있었다는 훌륭한 무사의 이야기로 독제제현께서 후세에 전해도 좋을 것이다.

"자다가 뭔 지랄이여 갑자기"

"아, 아무것도 아니니라."

"얼레? 정색하는 걸 보니 또 뭔가 추잡스러운 꿈 꿨구만."

"네 놈은 알 것 없음이라."

"어젯밤 꿈 꿨나?"

"..."

"풉"

녀석은 일소를 머금고 잠시 뜸을 들였다. 나는 재빠르게 긍지를 취할 수 있는 탄탄한 논리에 기반한 멘트들을 궁리하고 있었다. 녀석의 어떤 비웃음에도 단호히 반격하기 위해서. 그러나 녀석의 이어진 말은, 뜻밖이었다.

"너 말야."

녀석은 눈이 찢어진 채로(gs 글자가 늘어져있었으니 대략 그런 느낌인 것 같았다.)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부러우면 부럽다고 하는 게 좋아"

"부럽지 않다! 그깟 한 때의 허상따위. 남녀남녀가 달빛 아래 모여 맥주를 마시든 뭔 지랄을 하든, 인간사에 피고 지는 크고 작은 에피소드들 뿐이다. 모두 다 윤회의 수레바퀴를 더욱 밀어제끼는 부질없는 짓일 뿐이라고."

"뭐가 부러운 지는 아직 얘기 안했는데?"

이런 젠장.

"거 드럽게 부럽나보구만"

"부럽지 않다고! 사나이 가는 길에 시기와 질투 따윈 없다. 그런 것에 굴복하면 지는 거라고."

"너는 시기와 질투를 하지 않아도 연전연패의 나날들 아니더냐"

"네 녀석은 사실을 교묘하게 부풀려서 타인을 공격하는 삼류 언론인 같은 기질이 있어. 누누히 말하지만 말이지."

"어쨌든 사실에 기반한다는 것이군. 또한 나 역시 네 놈이 자꾸 같은 실수를 반복하니까 이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준비했던 반격멘트들이 꽁지 빠지게 퇴각했다. 삼십육계 줄행랑. 사나이 긍지가 잠시 휘청했다. 

"좋다. 내가 해결책을 하나 제시해주지."

"뭐냐? 또 지난번 처럼 간악한 술수를 쓰는 거면 이번에야 말로 손모가지를 잘라주겠다."

"들어봐라. 현인의 지혜를 빌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뭔데 그게."

"듣고 싶지? 굴복하면 지는 거니 뭐니, 사실은 해결하고 싶고 너도 남녀남녀 무리 속에 끼어든 불나방이 되고 싶지?"

"얼른 내놓기나 하라고!"

본디 초조함과는 거리가 먼, 대해와 같은 인내심에도 한 줄기 파도가 일었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가.

"주변에 사람이 모이지 않는다면, 사람들 속으로 찾아가는 수 밖에."

"그걸 누가 몰라서 이러고 있냐?"

"개뿔이나, 네 놈은 알기만 하지 움직이진 않잖아."

"그거야 다 무언가를 결행하려 할 때엔 심사숙고하여 마스터 플랜을 짜은 후 수차례의 시뮬레이션과 시행 착오들을 거친 후에"

"개소리말고. 잔말 말고 들어라."

말을 끊다니. 아, 도대체 세상이 어떻게 되는 것인가. 매너가 사라진 세태에 나는 잠시 서글퍼졌다.

"동호회를 들어라."

"엥?"

"동호회 말이다."

"뭔 동호회?"

"맨날 주접 떨면서 혼자 기타줄이나 튕기고 있지 말고, 사람들과 좀 함께 하라고."

"아, 기타 동호회?"

"뭐가 됐든 좋은데 네 놈 그 특유의 허세를 위해선 아무래도 쥐똥 만큼은 손에 익은 기타 동호회가 낫겠지."

"허세라니, 입조심해라. 무사수행으로 농축된 결과물을 그리 얕보지 말라고?"

"맨날 똑같은 것만 연주하고, 조금이라도 어려운 거 나오면 집어치는 주제에 무슨 결과물. 입 아프게 하지 말고, 빨리 찾아보기나 해봐."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 당시 티비에서는 꽤 인기를 구사하던 시트콤이 있었다. 논스톱시리즈라고, 대학생들의 청춘연애일상코믹개그판타지류의 모습을 보여주는 시트콤이었다. 지금 다시 보자면야 정말 말도 안 되는, 어처구니 없는, 이런 곳이 있다면야 그 즉시 행복 대학교로 이름을 바꾸고 '극락국 행복대학교 한국 캠퍼스' 정도로 이름을 바꾸어도 자타가 공인할 만한 풍경을 보여주는 허황된 프로였다. 문제는 이것을 사회의 단맛쓴맛 다 본 후에야 깨달았다는 것이다. 애초에 대학을 가지 못한 나로썬 직접 겪지 못했지만, 몇 없는 지인들의 대학생활 고군분투를 보면 어렴풋이 깨달을 만한 것이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당시의 꼬꼬마 세대들은 그 프로를 보고 환상에 젖을 수 밖에 없었으니, 소위 순정만화를 보고 백마탄 왕자님을 꿈꾸는, 틈만 나면 책상의 금을 치고선 최대한 멀찍이 떨어져 앉던 옆 자리 짝꿍 여자아이의 심리도 이해할 만한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단연 백미를 꼽자면, 동호회 활동에 있었다. 물론 연애 이야기야 탐 나는 것이지만, 나는 원체 타고 나기를 그런 말랑말랑하고 잡스러운 감정에 혼을 빼앗기는 것과 거리가 먼, 바위와도 같은 마음새를 지니고 태어났기에 진부한 사랑 이야기 따윈 흘려 보내며 모른 척 키스신만 잠시 감상하는 정도로 만족할 줄 알았다. 다만 주인공들의 예의 그 동호회 활동은 시선을 빼앗기에 충분했다. 청춘의 서브 퀘스트를 수행하는 보람찬 취미 활동, 나 같이 다양한 재능을 지닌 이에게 선망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는 소재였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중학교 내에서 내가 가입하고 있던 동아리는 <역사탐구 동호회>라는 거창한 이름에, 사실은 국사책 펴놓고 시험공부를 대신하는 곳이었다. 2학년이 되어 동아리를 선택할 수 있게 되자, 한 선배는 "너 국사 성적 좋다며? 혹시 답사같은 것도 관심있니?"라고 나의 진심어린 혼을 이끌려놓고는, 주저없이 가입하고 첫 모임에서 "첫 답사는 이 고장을 아름답게 만드는 활동이 좋겠지"라는 불길한 멘트를 날리며 동네 뒷산으로 올라가 쓰레기 줍기 활동을 시켰다. 괴이하기 짝이 없었으나, 첫 답사니까 그려러니 했다. 붙여두는 말이지만, 그 산은 이름도 없는 산이라 애초에 향토 지리서에서 한 줄 찾아보기도 힘든 산이다. 주목할 만한 역사로는 전쟁에서 전사한 사람들의 공동묘지가 있었다는 정도. 

불길함은 항상 사실이 된다. 다음 모임에서 그 선배는 "그동안 고마웠고. 난 이제 여기 탈퇴할게"라며 후배 여학생들의 짝사랑을 훔쳐가는 그 빛나는 미소와 함께 사라졌다. 밴드 동아리에 가입하기 위해 역사탐구 동호회에 사람을 모집해서 명맥을 잇게한다. 라는 담당 쌤과의 교섭이 있었다는 것은 아주 뒤늦게나 알게 된 사실이다. 그 뒤로 나는 어떻게든 동호회를 건설적으로 만들기 위해 여기저기 답사를 제안했지만, 담당 쌤은 

"답사가면 지도 선생도 나가야 하잖아~ 귀찮아 자식들아~"

라며 일언지하에 거절. 게다가

"답사 따위 느그들 대학가면 신나게 할 수 있으니까, 진짜로 답사하고 싶으면 역사과를 가기 위한 국사 공부를 하는게 좋겠어."

라는 십년지대계를 제시하며 보충수업을 시켰다. 학창시절의 추억이 죄다 어째 이런 식인가 싶다. 여기에 막상 동아리 시간이 되어 국사책을 꺼내놓으면, 꼭 

"xx야~ 일로 와바. 어깨 좀 주물러라~"

라며 한 시간 내내 강제 노동을 시키면서, 그마저도 하는 말이

"야, 신라 금관을 구부리면 휠까 안 휠까? 그거 순금이라던데"

따위의, 도대체 역사 선생으로서의 자각은 안드로메다가 아니라 저 멀리 퀘이사 즈음으로 쾌속으로 날려보낸 발언을 일삼았으니, 내가 역사쌤이라는 어린 날의 목표를 포기하게 된 계기에는 일정 부분 그 양반의 책임도 있다. 지금에 와서 정신적 피해보상 청구 소송을 건다해도 시효가 만료일테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좌우간 나의 학창시절 추억이 그렇게 썩어 문드러질 때, 모두가 동경하던 밴드 동아리는 시 도 대회를 출전, 각종 상을 휩쓸며 학교를 대표하는 동아리로 거듭났다. 나는 밴드 동아리에 소속된 녀석들이 듣는 음악 수준을 아주 잘 알고 있었기에, 코웃음치며 시류에 영합하지 않는 고고한 절개와 높은 이상을 포기하지 않았다. '녀석들의 음악은 진정한 음악이 아니야! 자본주의의 산물들일 뿐이지.' 나의 강경한 발언에 당시 베스트프렌드였던 한 여자아이는

"그러니까 네가 여친이 안 생기는 거야"

라며, 우째 지금 봉투 녀석과 비슷한 말을 들려주었던, 자못 안타까운 기억도 방금 딸려왔다.

물론 시기와 질투를 전혀 하지 않았냐고 묻는다면, 보편적 권리인 묵비권을 당당하게 제시하겠다. '밴드 동아리에 대한 열등감 때문에 기타를 배웠구만?'라는 의문을 품는 독자들에겐, 댁들이 왜 평소 '이래서 눈치빠른 녀석들은 싫다니깐?'라는 말을 듣는 것인지 자각을 좀 하길 바란다.


심사숙고 끝에 밤새 닥쳐오는 출근을 외면하고 동호회를 뒤져보았다. 기타 동호회 <아르페지오> 적당한 품위를 지닌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거 동아리 고르는 것도 허세에 찌들은 이유구만"

녀석의 빈정거림은 무시하고 나는 가입신청서를 넣었다. 아, 드디어 절차탁마한 기타실력을 뽐낼 수 있는건가. 마음 맞는 사람과 버스킹을 하는 것도 괜찮겠지. 모임 후 술자리에서 즐거운 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운이 좋으면 검은머리를 가진 묘령의 여인과 함께 행복의 나라 저 편으로 떠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이 봉투 녀석의 조언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자못 마음에 걸리는 일이나, 어둠 속에서 피어나는 즐거운 상상을 즐기며 설레는 마음을 달랬다. 오리엔테이션이 기다려진다.

잠이 들기 직전, 어쩐지 봉투 녀석이 또 그 불쾌한 미소를 슬며시 머금은 것 같지만, 표정이 없는 녀석의 표정을 찾게 되는 것은 무익한 일이기에 무시하고 잠이들었다.

'전파낭비잡문기 > 요괴봉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괴 봉투 (10)  (0) 2017.09.11
요괴 봉투 (9)  (0) 2017.07.14
요괴 봉투 (7)  (0) 2017.03.30
요괴 봉투 (6)  (0) 2017.03.25
요괴 봉투 (5)  (0) 2017.03.13

WRITTEN BY
빵꾼

,





"아싸 파리!!!"

네모난 옥상에 네모난 돗자리 위 네모난 판이 폈다. 사각의 링 위를 비추는 달빛의 은은한 스포트라이트. 비록 승부에 박진감을 더해주는 관중의 환호성도 없고, 육체미를 뽐내며 링을 선회하는 라운드걸도 없지만, 내가 느끼는 긴장감만큼은 그야말로 건곤일척. 내 안에 잠들어있던, 평생에 걸쳐 몇 번 나오지 않았던 전투적인 본능이 깨어나 주사위를 돌리는 손가락 끝으로 오롯이 뿜어져나왔다.

"야 임마. 좀 조용히 게임하자."

"싫은데? 싫은데? 싫은데~?"

나는 녀석을 한껏 약올리며 목전에 둔 승리를 만끽하고 있었다. 부루마불의 신이 강림한 이 땅 위에 무력한 패배자여. 나는 가련한 표정을 지으며 녀석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판세는 이미 뒤집을 수 없을 듯 보였다. 판 위에는 나의 빨간 건물들이 서초동처럼 빽빽하게 들어섰고, 녀석이 한 점 희망을 거는 곳은 오직 서울 하나 뿐. 이미 현금은 바닥난지 오래, 건물과 땅도 모조리 처분하여 한 턴 정도만 더 걸리면 파산의 낭떠러지에 떨어질 예정이었다. 

대저 부루마블이란 크게 세 가지의 전략이 있다. 무조건 한 라인에 집중 투자하는 '집중형', 소유 도시를 고르게 가져가는 '분배형', 그리고 여기저기 걸리는 대로 즉즉 건물을 세워제끼는 '난개발형'으로 정리할 수 있다. 애당초 나는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불로불사의 경지를 깨닫기 위해 입산한 도사님같은 녀석의 언행을 토대로 집중형이나 분배형의 전략을 쓸 것으로 예상했었다. 그러나 녀석의 선택은 난개발형. 어이가 없었다. 나 역시 부루마블 입문의 시기, 그저 눈 앞에 건물을 올리는 재미에 홀딱 빠진 까닭에 난개발형 전략으로 일관하다 무참히 파산을 당하던 불쾌한 기억이 있는 바, 녀석의 전략이 난개발형임을 깨닫자 그 즉시 회심의 미소를 지을 수 밖에 없었다.

"너무 들뜨지 않는 것이 좋다. 인생사 새옹지마란 법도 모르냐."

"야. 이건 올림푸스의 신들을 싸그리 모아놔도 이길 수 없어. 넌 이미 끝났다. 이제 그만 포기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무슨 소리. 나에게는 아직 서울이 남아있다."

"고작 서울 하나로 뭘 하려고. 봉투야, 어차피 나를 곧 형님이라 부르게 될테니 자칭을 하도록 하겠다. 형이 조언하는건데, 세상은 이미 다국적시대다 이 말이야. 신자유주의의 물결 아래 각국마다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며 세계의 시장은 하나로 통합되었고, UN과 EU의 깃발아래 각국은 세계적 질서를 지키며 국경없는 지구촌을 위해 노력해왔다고.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아직도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을 고집하냐. 서울 하나를 믿고 세계를 돌아다닐 생각을 하다니, 우물 안 개구리가 바로 네 꼴이다. 천조국의 대포를 빵야빵야 맞고 나서 개화를 선택해도 그때는 이미 늦을거라고."

"시끄럽다. 무엄하다. 기각한다."

"눈 앞의 현실을 부정하려 해도 네 놈에게 남은 길은 파산 신청 뿐이다. 신용불량자의 비루한 말로를 감당할 마음의 준비를 하시지."

"내 턴이다. 주사위나 돌려."

녀석의 말을 듣고 나는 주사위를 돌릴 듯 말듯, 현란한 손짓으로 녀석의 앞에서 허공 주사위 공기놀이쇼를 선보였다. 아까부터 녀석은 칙, 칙 하며 분노에 찬 움찔거림을 보이고 있었다. 녀석의 안에 담긴 휴지들이 들썩일때마다 나는 즐거워 견딜 수가 없었다. 남의 주사위를 대신 돌려주는 것이 이토록 즐거운 일이던가. 그 주사위가 주인을 파멸로 이끌기를 바라는 것이 이토록 아름다운 일이던가. 나는 부루마블의 신천지를 개척하는 중이었다.

"어? 2네. 아쉽다."

젠장, 2였다. 녀석의 파란 말은 무인도로 쏙 들어가버렸다. 1이나 3만 걸렸어도 즉각 파산인데. 녀석을 훔쳐보니 가득찼던 공기가 슈욱 빠지며 살짝 쪼그라들었다. 여유있는 척은 혼자 다 하더니, 역시 녀석도 긴장하고 있었다. 

"네 턴이군. 보자....7. 7만 나오면 서울이고만."

"거, 까짓거 한번 걸려주지 뭐. 현찰부자라 현금박치기로 그까짓거 한번 걸려도 만사 오케이라고?"

"어떻게 될지는 두고봐야지."

"무인도에 있더니 벌써 실성하셨나."

"혓바닥이 너무 길다. 조심해라 잘리기 전에"

"손도 없는 주제에 누구 혓바닥을 자르시게? 뭐, 어디 한 번 돌려볼까. 갑니다~ 두구두구두구두구"

나는 녀석을 비웃고는 입으로 BGM을 깔며 주사위를 돌렸다. 빙글뱅글, 주사위는 윈드밀을 추듯 빠르게 돌다가, 이내 깜찍하게 멈췄다.

7이었다. 즐거웠던 감정에 살짝 균열이 갔다.

"7이로군"

"아이 뭐, 진짜로 걸릴 줄은 몰랐네."

"이 몸이 말하지 않았던가. 승부는 아직 안 끝났다고."

"아이, 너무 오래하는 건 안 좋은데 말이지."

"200만원이나 내놓거라"

"여깄다 여기. 이거 받고 어디 한 번 잘 해보시지요 봉사장님~"

"주사위나 돌려"

나는 녀석의 턴을 대리하여 주사위를 돌렸다. 나 때와는 다르게 주사위는 돌지도 않고 바로 안착했다. 2, 2. 무인도 탈출이다.

"탈출이군."


그 뒤로 녀석은 귀신같이 황금열쇠 칸과 우주비행장을 거치며 귀신같은 생존력을 보여주었다. 페름기 대멸종에도 살아남은 바퀴벌레의 끈질긴 생존력도 성냥불에도 무참히 녹아내릴 봉투 녀석의 부루마블 회생력에 비하면 근소한 차이로 패배할 듯 싶었다. 그러나 여전히 큰 흐름은 바뀌지 않았다. 나의 절대적 우세. 다만 바뀐 것은, 녀석은 전재산을 털어 도쿄를 샀다는 점이다.

"어이, 너무 리스크가 큰거 아냐? 나한테는 뭐든 다 아는 척척박사처럼 온갖 잔소리를 하더니만, 경영학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구만?"

"네 놈 따위에게 경영학 강의를 듣느니 차라리 초등학교를 입학하겠다."

"하이고오. 입만 살았구만."

"두고보자고. 네 놈의 5칸 앞에 따끈따끈한 도쿄가 있느니."

그랬다. 사실상 이번 턴만 무사히 지나면 녀석은 필경 내가 짜놓은 파산유도거미줄에 걸려 도쿄를 바로 팔아야 할 지경이었다. 녀석은 나를 5칸 뒤에 두고 모험을 걸었다.

"그러면, 한 번 돌려볼까"

나는 무신경한 손짓을 연기하며 주사위를 던졌다. 타닥, 판 위로 힘겹게 주사위가 눕는다. 하나는 2, 그리고 3.

행복이 뭉게뭉게 피어올라 이대로 극락을 향해 승천할 것 같던 나는 봉투 녀석의 억센 팔뚝으로 승천을 저지당하는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도쿄로구나! 긴자 만세! 신주쿠 만세! 하라주쿠 만세! 이케부쿠로 만세! 도쿄 만만세!"

현금이 부족했던 나는 아시아권 도시들을 팔아 벌금을 마련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천하에 악질 친일파 자식! 반민특위가 해산당한 것이 천추의 한이다!"

"친일파면 어떠하리, 친미파면 또 어떠하리."

어이없게 녀석의 모험수에 걸려 벌금을 낸 것도 화가 나는데,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도쿄 만세' 운운하는 녀석의 파렴치한 행위에 나는 한국인이면 마땅히 가져야할 민족적 분노에 치밀고야 말았다.

"도쿄, 거기 기다려라. 이 몸이 항복선언을 받고야 말겠느니."

"그건 재주껏 해보시고, 일단 내 턴이다. 주사위나 돌려라."

조금 전 까지만해도 주사위를 돌릴때마다 적중률 100%의 경품 추첨행사에 와 있는 듯한 기분에 젖었는데, 어느새 이 판을 시작할 때 내 안을 가득 채웠던 긴장감만 남아있었다. 마음을 다 잡아야겠다.

"뭐해? 주사위 돌리라니까."

"알았다! 거, 너는 입만 움직이면 되지만 나는 은행도 보고 내 재태크도 하고 네 놈의 대리도 해야 한다. 얼마나 바쁜지 아냐?"

"그거야 네 놈 사정이고. 애초에 네가 하자고 한 게임이 아니더냐. 이제와 불평한들 네 놈의 추한 면만 드러날 뿐이다."

입술을 깨물며 녀석을 잠시 노려보던 나는, 마음을 다잡으며 주사위를 집었다.

그 때 녀석이 말했다.

"지금이라도 무승부로 하면 없던 일로 해주지."

가당치도 않은 제안이었다. 어처구니호가 그대로 우주끝까지 수직 발사되었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집어쳐! 이 게임은 나의 승리다."

"뭐, 어쩔 수 없지. 고작 봉투에게 형님이란 호칭을 그렇게나 붙이고 싶다면야"



이 글을 읽으실 정도로 현명함이 철철 흘러 넘치는 독자 제위라면, 예상치 않게 흐름이 바뀐 까닭에 불안함을 감추지못한 나의 마음을 읽으셨을 것이다.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는 법이다. 불현듯 전쟁의 여신이 봉투를 두 손에 받아들고 사랑의 입맞춤이라도 선사한건지, 아니면 운명의 수레바퀴가 승리 직전에 있던 나의 기세를 보고 불쾌함에 젖어 역회전을 한 것인지, 귀신이 곡하다가 지쳐 과로사라도 할 지경으로 상황은 바뀌고야 말았다. 녀석의 것과 내 것 모두 이내 손으로, 어머니께서 산고를 이겨내며 낳아 금지옥엽으로 키우며 동네 할머니들도 귀엽다 귀엽다 해 주신, 퍽 깜찍한 나의 손으로 돌리고 있는데 나의 말은 족족 파란 건물이 우람하게 서 있는 도시로, 녀석의 말은 무주공산으로 속속 기어들고 있었다. 아직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꼬꼬마 시절, 시골에 사시던 작은할아버지께서 내 손금을 보더니 찡그리시던데, 그 반응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알아채리신걸까. 

한 때 빨간 도시들로 지구를 정복하고 만수르에 비견할 법한 부동산 갑부였던 나의 왕국은, 그 때까지만 해도 개선 장군처럼 기세 좋게 돌아다니던 빨간 말이 무기력한 패잔병처럼 파란 건물로 들어갈 때 마다 소리소문없이 무너져내렸다. 모래성이 무너져도 이것보단 느릴 것 같았다. 찬란한 영화는 도대체 어디로 갔는가! 

나는 잠시 기억의 테잎을 돌려보았다. "도쿄 만만세"를 운운하는 녀석의 파렴치한 행동에 분노한 나는, 한바퀴를 돌아 또다시 도쿄에 걸리자 있는 현금을 모두 털고 (독자 제위께만 살짝 하는 얘기지만, 뒷 주머니에 감춰두었던 백만원짜리 다섯장 중에 한 장을 꺼냈다. 아무런 반응이 없던 것을 보면 녀석은 눈치채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벌금을 내고 도쿄를 인수했다. 나는 복수의 짜릿함에 젖어 길 건너 고등학교를 향해 왼쪽 가슴에 손을 올리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했다. 국기는 안 보이지만 좌우지간 그 쪽 방향 어딘가에서 나부끼고 있을 터였다. 순국선열이시여, 보고 계시나이까. 이 미욱한 후손에게 힘을 주소서. 

도쿄를 얻고 쾌재를 부르는 나를, 봉투 녀석은 알 수 없는 조소를 지으며 바라보긴 했지만, 행여나 그의 함정이거나 그의 수 낮은 도발에 내가 걸려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양심이 가르치는 대로 따랐을 뿐이다.

"야! 잔머리 그만 굴리고 주사위나 돌려라"

녀석은 나를 재촉했지만 나는 쉽사리 주사위를 돌릴 수 없었다. 간발에 차로 우주정거장을 벗어나버린 나는, 이 턴에서 서울이라도 걸려버리면 그대로 파산행급행열차를 타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순국선열들에게 양심이란게 있다면 이번 한 번 만큼은 나를 도와야만 한다. 제발, 제발...! 나는 그렇게 주사위를 던졌다.

어둠속으로 사라진 주사위가 이윽고 달빛 조명을 받으며 나타났다. 두 놈이 휘리리릭 허공을 가르는 소리를 내며 세계를 짜부러뜨렸다. 옥상을 둘러싼 공간이 순식간에 압축되어 강한 압박감을 주기 시작했다. 주사위는 한없이 공중에 떠 있을 것처럼 멈춰있더니, 천천히, 아주 천천히 땅으로 내려왔다. 느려진 시간과 더 느려지는 회전. 판 위로 내려온 하나의 주사위는, 발라당 드러누으며 뽈록 들어간 네 개의 점을 보였다. 4였다. 남은 주사위 하나는 모서리 끝으로 트리플 악셀을 하듯 무한 회전하고 있었다. 

동공이 커진다. 심장이 쿵쾅댄다. 모골이 송연해진다. 그러나 주사위는 도대체 멈출 생각이 없었다. 영원히 돌아가는 주사위, 도대체 언제쯤 멈출것인가. 절정에 달했던 긴장감도 계속되는 주사위의 회전, 뱅글뱅글에서 팽글팽글로 변해 이제는 끝없이 배애애앵글 배애애앵글 돌 것 같은 그 멈춰버린 시간 속에서 맥이 탁 풀리며 서울이고 도쿄고 나발이고 슬슬 그만 돌았으면 하는 바램이 든 순간,

"왈왈왈!!!"

옆 집 개가 짖었다. 감히 이 중대한 순간을 깬 개를 욕하며 잠시 옆 집을 바라봤던 나는, 시선을 다시 주사위로 돌렸다. 그런데,

영원히 돌 것 같았던 주사위는 이미 죽어버린채 사선으로 그어진 뽈록한 점 두 개를 내보이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걸까. 한 눈을 판 것은 0.5초도 안됐던 것 같은데.

항상 긴밀한 분석력과 냉철한 판단력으로 지성계의 스탠다드로 손 꼽힐 것 같다는 생각을, 일년에 한 두 번정도 깨닫고 스스로의 잠재된 능력에 놀라기도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솔로몬이 부활해 나의 입장에 선다 하더라도 쉽사리 파악할 수 없을 것이라 확신한다. 이 무슨 조화인가. 저 주사위는 사실 신의 주사위였단 말인가. 아니라면 나는 잠시 다른 차원의 세계로 다녀왔다는 것인가. 오오오, 이 체험을 책으로 팔면 분명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리. 두둑히 꽂히는 인세로 비루하고 사막같던 청춘의 나날을 청산하고 이대로 새사람 새인생의 지평이 열려 실락원한 자들을 위한 현실 극락을 만들어보..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녀석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핳-하-하-하-하"

기계적으로 띄엄 띄엄 웃는 그 불순한 의도가 가득 담긴 웃음소리에 나는 불쾌를 넘어 혐오감을 느꼈다. 

"무슨 짓이냐!"

"상황 파악이 안 되시나?"

"무엇이!"

"6이 잖냐"

그래. 다른 차원에 대한 얘기는 나중에 잘 정리해서 적도록 하고, 일단 이 판을 마무리해야할, 순국선열을 대신한 역사적 사명이 내게 있었다. 보자. 6이면 어디지. 나는 말을 집었다. 파리에 서 있던 빨간 말은 이탈리아의 작은 언덕에서 시작해 지중해를 정복하고 팍스로마나를 실현시킨 고대제국 로마의 아름다운 유적들이 남아있는 로마를 지나, 부루마블의 필수요소 황금 열쇠 칸을 지나, 셜록 홈즈가 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베이커가가 있으며 현재는 국제적 중심지이자 트렌드를 선도하는 도시인 런던을 지나, 한국인이 갓쓰고 곰방대로 담배피고 있을 무렵 이미 하늘 같이 높이 솟은 고층건물들이 빼곡히 들어서 세계 금융의 수도 역할을 하는 동시에 지구방위대 총사령관 천조국의 핵심 도시인 뉴욕을 지나, 나 같은 사람에게 지급되어야 하지만 신체에 장애가 없고 노동가능한 연령이라는 편협한 사실만으로 혜택을 전혀 받고 있지 못한 사회복지기금을 지나...

"서울, 서울, 서울~ 아름다운 이야기~"

"......"

그랬다. 서울이었다.

"손에 손 잡고~ 벽을 넘어서 ~"

서울이고야 말았다.

정말 서울이 문제였다. 정부는 빠른 시일 내에 행정수도 이전을 완성하길 바란다. 서울 집중 현상이 나 같은 서민에게 집 한 칸 얻지 못하는 거렁뱅이 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모든 혜택이 서울에 집중되어있는 이 현실! 조속한 개선이 필요하다!

"돈 내놔 이 자식아"

녀석은 의기양양, 사채추심원처럼 봉투 손잡이를 한 껏 양쪽으로 뻗어올리며 당당한 풍모를 보이며 내게 손을, 손은 없지만 하여간 손을 내민 것 같은 포즈를 보였다.

치, 침착하자. 손은 눈보다 빠르다. 녀석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비상금을 슬쩍 꺼내는 거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야! 저거 봐! 주사위 6이 아니네"

"어디서 개수작이여?"

녀석은 주사위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오직 나만 뚫어지게 쳐다봤다.

"너 지금 시방 손이 어디로 들어가부러잉? 장난치다 걸리면 손모가지 날라가는거 안 배웠냐. 한번은 봐줬는데 두 번 세 번은 쪼까 그라지."

뒷주머니에 반쯤 꽂았던 손이 멈췄다. 녀석은 역시 알고 있었다. 이 천하의 음흉한 녀석같으니..! 

"자 그럼, 어디 수금을 한번 받아볼까나. 짜라자라 잔잔"

"야. 너. 왜이리 들떠보이냐"

"뭐가? 네 놈이 하던 짓거리 그대로 따라하는 것 뿐인데"

"거짓부렁! 나는 그렇게 교양없고 매너없고 졸렬한 행위를 한 적이 없다!"

"네 놈의 기억은 지극히 편향적이라 지나친 자의적 해석을 하는 경향이 있지. 시끄럽고, 돈이나 내노셔."

있는 재산을 모두 팔아도 서울의 벌금을 낼 수가 없었다. 모든 건물을 다 팔아봤지만 10만원이나 빈다. 젠장, 한 칸만 더 갔어도 돈이 들어오는건데...

그러나 불현듯 뇌리를 스치는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정경유착을 고발하는 내부자의 심정으로, 단호히 이의를 제기했다.

"이의를 제기한다!"

"또 뭐."

"나는 아까 다른 차원에 다녀왔다."

"이건 또 뭔 개소리여."

"너는 쉽사리 못 믿겠지만 이것은 진실이다. 조금 전 주사위를 돌리는 순간, 나는 대략 5분 정도 시간이 흘렀음을 분명히 느꼈다. 주사위는 영원히 빙글뱅글 돌고 있었다고! 나를 깨운 것은 옆 집 개의 짖는 소리지만, 그쪽을 쳐다봤던 건 0.5초도 안되는데 그사이에 주사위가 뻗어버렸다."

나는 논리정연하게 말을 이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볼 때 대략 두 가지 가능성이 제기된다. 첫번째, 내가 진정 다른차원으로 다녀왔을 가능성.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 턴은 무효이므로 나는 주사위를 다시 돌려야한다. 그 차원의 나와 이 차원의 나는 다른 나이니까! 그리고 두번째, 만약 내가 다른 차원을 다녀온 것이 아니라 그냥 기분탓이었다면, 어째서 0.5초만에 주사위는 멈춘건가. 이것은 그 틈새를 노려 네놈이 조작했을 짙은 의혹을 불러일으킨다. 따라서 이 턴은 무효! 서울행은 무효야!"

"아무리 내가 봉투계의 전설적이고 신화적인 존재라지만, 내 앞에서 그런 허무맹랑한 소리를 지껄인다고 넘어갈거라 생각하면 몹시 곤란한데. 불쾌하기 짝이없군."

녀석은 전혀 불쾌한 것 같지 않은 어조로 말을이었다.

"게다가 조작설에 관해서는, 애초에 나는 손이 없어서 조작을 못 한다는 걸 깜박한 것 같은데, 이제 궁지에 몰리니 무리수를 남발하는구만. 조야하기 짝이없느니."

''그, 그러면, 애초에 내가 뒷주머니에서 비상금을 처음 꺼낼 때 고발하지 않은 이유가 뭐냐! 불공정 행위는 그 때 시작되었으니, 판도 그 때로 돌려 다시 시작하는 것이 이치에 맞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더니 바로 이꼴이군. 부정행위자는 재도전이 아니라 몰수패가 상식 아니던가"

"아무튼 말도 안돼! 이건 뭔가가 잘못되었어. 네 놈 똑바로 말해. 말하고 생각하는 것 외에 뭔가 상황을 통제하는 초능력이 있는 것 아니냐?"

"그런게 있으면 내가 왜 너하고 같이 있냐? 좀 더 즐겁고 유쾌한 놈이랑 지내는게 낫지"

"그저 내가 골탕먹는 걸 즐기는 것 뿐이잖아! 네 놈이 도래하기 전까지 내 삶은 평온함 그 자체였다고!"

"논점 흐리지 마시고, 돈이나 내노셔"

"못 준다!"

"뭐시라?"

"못 준다고!"

"틈만 나면 웅변하던 사내로서의 긍지는 이제 하수구에 내다 버리기로 한 거냐"

"이건 논외다! 아니, 이것이야 말로 사내로서의 긍지를 지키는 것! 조작된 게임에는 단호히 투쟁으로 맞서겠다!'

나는 세상의 모든 부조리를 경험한 사람의 억울함을 가슴 깊이 공감한 뒤, 그것에 맞서기 위한 결의를 다지며 밤하늘을 향해 외쳤다.

"이건, 무효다!!!!"

그 때, 옥상 문이 열렸다.



그저 막연히 자취를 꿈꾸던 까까머리 소년 시절엔, 나도 시트콤처럼 이웃과의 단란한 나날과 나아가 예쁜 누나와의 설레는 이웃이 사촌이되고 사촌이 어느새 가족이 되는, 그런 것을 꿈 꾸기도 했었다. 이를테면 김치전을 만들어서 똑똑 옆집의 문을 두드리면, 방금 샤워를 마치고 나와 물기가 촉촉한 검은 머리를 말아올린 미모의 누님이 

"잠시만요~"

라며 문을 열고는, 나는 

"안녕하세요? 김치전을 했는데 조금 남아서요" 

라며 한없이 젠틀하면서도 깊은 마력을 지닌 도시 남자의 목소리로 인사를 나누고, 그녀는 잠시 놀랬지만 나의 품격있는 태도와 기품있는 얼굴을 보고는 마음을 놓은 뒤 

"잘 먹을게요. 차라도 한잔 마시고 가시겠어요?"

이렇게 제안한 뒤, 못이기는 척 방안으로 들어가 쭈뼛쭈뼛 구석에 앉아

"방을 참 잘 꾸며 놓으셨네요. 제 방하고는 완전 다른데요?"

라며 그녀의 세밀한 센스를 칭찬하고,

좌우지간 중간생략 중간생략의 과정을 거쳐 이윽고 그녀와 이 방 저 방을 오가며 원룸 사람들이 모두 시기와 질투를 하는 커플이 될 수도 있지 않나라는, 너무나 허황되어서 차라리 호그와트를 찾는 것이 더 현실성 있는 망상에 빠지곤 했다.

문을 열고 들어선 사람들은 윗 집 사람들이었다. 윗 집에는 아마도 나와 연배가 비슷한 남자가 홀로 사는 것 같았는데, 밤이면 밤마다 남녀 남녀들이 그 집을 찾아가 술판을 벌이곤 했다. 나는 마음속으로는 당당히 그들의 집을 방문해 항의하고 이 원룸에서 가장 오래 살았던 거주자로서 필요한 공동 규칙을 너그럽게 설명하고는, 그들의 진정성 있는 반성을 이끌어내고 다른 주민들에게 호평을 받는 그림을 그리곤 했었지만,항상 잠이 너무 깊이 드는 바람에 행동에까진 옮기지 못했다. 잠은 깊이 들었지만 유난히 귀가 밝기 때문에 그들의 술파티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것뿐, 그들로 인해 잠을 설치거나 그러진 않았으니 나는 행동으로 옮길 필요가 없었다.

딱 한번, 역시 잠은 깊이 들었지만 그들의 웃음소리가 다소 생생한 감이 있어, 막대기를 들고 점잖게 지붕을 툭툭 쳐보았지만, 윗 집의 주민들은 오히려 떠나가라 웃었다. 나는 뭔가 재밌는 일이 생겼나보다라는, 굉장히 합리적인 추론 끝에 그들을 넓은 아량으로 이해한 적도 있었다. 그 때 내가 보였던 아량은 잠시나마 마더 테레사의 드넓은 품과 잠깐 맥이 닿는 것이었다 하겠다. 

그렇다고 내가 그들은 밤마다 술파티를 벌이며 뜨거운 청춘의 밤을 보내는데 나는 이 귀곡산장같은 아수라장안에서 시체처럼 누워지내는 삶에 대해 일말의 불평이나 억울함, 또는 그들에 대한 시기와 질투를 느꼈다고 생각하신다면 그것은 독자의 완벽한 오산이라는 점, 강하게 지적하며 넘어가겠다.


문을 열고 들어온 자들은 바로 그들이었다. 남녀 남녀. 2쌍의 커플은 술이 가득 담긴 봉투와 치킨을 들고 옥상으로 들어왔다.

"저기...뭐하세요?"

몇번 마주친 까닭에 얼굴을 익힌 윗 집의 주인이 말을 걸었다. 나는 답할 말을 찾지 못한 채 당황했으나 어디까지나 의연한 품새를 잃지 않았다. 부루마블 좀 한 것이 죄는 아니지 않나.

"혹시, 혼자 부루마블 하신 거에요?"

"아니, 아닙니다! 그럴리가요!"

"혼자 계신 거 같은데..."

"아니에요! 저는...."

그들의 잘못된 판단을 확실히 고쳐줄 명쾌한 답변을 위해 말을 고르던 나는, 잠시 주변의 풍경을 둘러보았다. 네모난 옥상 위에 네모난 돗자리 위 네모난 부루마블, 돗자리 언저리에 놓인 신발을 한 켤레뿐이고, 내 앞에는 검은 봉투 녀석이 시치미를 떼고 앉아있다. 나는 녀석에게 조용히 말했다. "야, 야. 뭐라도 좀 해봐"

"지금 뭐하세요? 혹시 봉투에 말 거는 건 아니시죠?"

"아니, 그런게 아니구요."

고개를 세차게 저었지만, 그 남자의 뒤에서 날 지켜보던 여성들이 수근수근 댔다. "어머, 이상해..." "미친건가?" 레이디, 오해입니다. 

"저, 이게 좀 오해의 소지가 다소 있는 상황이란건 이해합니다만, 그렇다고 옥상까지 와서 혼자 부루마블 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아 네. 그러시겠죠."

나의 진심이 가득해서 철철 흘러 넘치다 못해 아예 녹아내릴 정도의 진지한 목소리를 듣고도 그들의 오판은 어쩐지 더욱 깊어지는 것만 같았다. 봉투 녀석은 여전히 봉투 그 자체인듯, 일말의 미동 없이 입을 싹 닫고 있었다.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속삭였다. 

"보..봉투형, 뭐라 말 좀 해봐. 형님"

"저기, 저기요"

귀도 유난히 밝은 듯한 그 사람은 나의 속삭임을 엿듣고는 내게 말을 걸었다. 도대체 프라이버시라는 개념이란게 없는 교양없는 사내가 분명하다.

"죄송한데 다른 분 없으시면, 저희가 옥상 좀 쓸 수 있을까요?"

"네? 아..."

혼자가 아니라고! 나는 법정에 선 변호인의 심정으로 당당하게 외칠까 싶었지만, 상황이 더 악화될지도 모르겠다는 일말의 불안함이 그 대사만은 입 언저리에서 멈추게 했다.

"안그래도 이제 내려갈 예정이었어요. 같이 올라온 사람이 집에 먼저 들어갔거든요."

"네, 뭐, 그러시겠죠"

그 남자는 드디어 나의 반론에 납득한듯, 순순히 답을 했다. 말 끝에 묘한 웃음이 묻어나는 것은 나의 착각이겠지.


내가 짐을 싸들고 이동하자, 여성들이 멀찍이 비켜난다. 이유를 알 수 없는 행동이다. 이렇게 신사적인 사람이 어디있다고 왜 나를 피하는지. 도통 이해할 수 가 없었다. 걸어가는 나의 등 뒤로,

"불쌍하다..." "그러게. 난 절대 저렇게는 못 살것 같아"

등등의 무엄하고도 몰지각한 말들이 들리는 듯 했지만, 나는 어디까지나 당당한 태도로 걸었다. 나는 그들이 오해할만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부루마블이 너무나 하고 싶은 나머지 홀로 옥상에 올라 달빛 아래 주사위를 던지며 두개의 말을 옮기다가, 파산 직전에 몰려 내 안의 또다른 자아와 싸우는, 그런 일 따위는 하지 않았다고! 

역시 이 참사도 봉투 녀석 때문이 분명하다.

"저기요"

문을 여는 나를 그 남자가 불렀다.

"저희랑 같이 한 잔 하실래요? 심심해 보이시는데"

나는, 추호의 고민도, 일말의 흔들림도 없이 그 제안을 거절했다. 감히 내게 동정을 품다니, 기가 막혔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즐겁게 노세요."

계단을 내려오는 나의 발걸음에는 한 점 부끄러움도 묻어나오지 않았다. 문을 닫자 그들의 웃음소리가 귀 속을 파고들어 뇌 속에서 울리는 듯했지만, 나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다만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와 빨갛게 달아오른 양 볼만 남았고, 드디어 나의 스윗홈에 들어서자 봉투 녀석이 말했다.

"아이고, 웃음 참느라 혼났네."

그 말을 듣자마자 녀석 대신 널브러져있는 다른 봉투를 걷어찼다. 그러나 봉투 안에 담겨있는 쓰레기들이 사방으로 뻗어가나자, 그 꼴을 본 봉투는 아예 박장대소를 했다.

나를 안아주는 유일한 존재인 침대를 향해, 나는 침몰하듯 다이빙했다. 유리창 밖에는, 우스꽝스러운 캐릭터를 비추듯, 영롱한 달빛이 나를 향해 스포트라이트를 쬐고 있었다.

'전파낭비잡문기 > 요괴봉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괴 봉투 (9)  (0) 2017.07.14
요괴 봉투 (8)  (2) 2017.07.11
요괴 봉투 (6)  (0) 2017.03.25
요괴 봉투 (5)  (0) 2017.03.13
요괴 봉투(4)  (0) 2017.03.06

WRITTEN BY
빵꾼

,


독자제위께서 지금껏 이 책을 성실히 읽어오셨다면, 연거푸 불행이 중첩된 나날을 보낸 나에 대한 일말의 동정심을 가지실 것이다. 아니, 필히 그럴 것이다. 마땅히 나의 고통스러운 경험을 읽고 안구에 습기가 촉촉해지면서 가슴 깊은 곳 저 너머에서부터 올라오는 뜨거운 감정에 인간애적인 따스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봐줘야 한다. 그렇지 않고 그저 낄낄대며 즐거워했다면, 독자께서는 지극히 불성실한 독서습관을 지니셨거나 혹은 남의 불행을 자신의 행복이라 느끼는 인륜을 저버린 인간이라 비난해도 납득하셔야 한다.

나는 며칠 간 매우 격렬한 나날을 보냈다. 매우 격렬하고 역동적이며 스펙타클하게 아무 생각이 없이 일과 집장을 오갔다. 출근-퇴근-잠, 출근퇴근-잠, 출근-퇴근-잠. 다가올 인류의 미래에서 기계가 보내게 될 나날이 바로 이런 것인가. 직장에서는 뇌를 세탁기에 돌린듯 새하얘진 채로 한 잔 두 잔 커피를 뽑다보니 머신이 나이고 내가 곧 머신인가 하는, 머운몽의 경지에 이르는가 하면, 퇴근 후 집에서는 세탁을 마친 뇌가 빨래가 널리듯 탈탈 털려 축 늘어진채로 잠이 들어, 그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필연코 맞게 되는 영면의 나날을 미리 체험해 보는 시간을 지냈다. 나름대로 유익한 시간이었다.

유익한 시간이었음에도 불구, 봉투 녀석은 나의 보람찬 나날이 고까웠는지, 아니면 미증유의 불행론을 펼친 자신의 업보를 참회하는 것인지, 자꾸만 내게 말을 붙였다.

"마, 고만 자라 좀."

라며 자꾸 깨운다거나,

"좌절감이 사나이를 키우는 것이다."

라는 조홍식 가르침을 펼친다거나

"이 몸에게 하소연이라도 해보거라."

라며 어설픈 카운슬러 짓을 시도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동안 번번히 녀석의 작당놀음에 놀아나 나는, 그 모든 유혹을 이겨내고 오롯이 잠의 세계에서 흔들리지 않은 편안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어느 날은 뒤척임 없이 10시간이 훌쩍 넘는 잠을 자고 일어나보니, 밤새 옆동네에서 화산이라도 새로 솟았는지 하얀 면티에 먼지가 쌓여 회색빛을 내뿜기도 하였다. 이 방에 유독 먼지가 많은 까닭을 이해할 수가 없다. 그전까진 그럭저럭 깨끗했는데 봉투 녀석이 나를 귀찮게 하기 시작한 이래로 정말로 방이 더러워진 의혹을 지울 수가 없었다. 생각해보면, 그럭저럭 괜찮았던 소소노멀라이프가 녀석의 강림 이래로 세기의 대종말을 향해 수렴하기 시작한 느낌도 든다. 

일정한 하중을 일정한 시간동안 일정한 형태로 침대에 가하고 있던 나는, 녀석을 향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르는 의혹들을 지워버릴 수가 없었다. 때때로 녀석의 말에 흠칫하며 잠인지 뭔지 하여간 그 상황에서 깰 뻔도 했지만, 아무런 미동없이 잠이 들며 속으로 '좋아. 자연스러웠어'라며 흡족해하기도 했다. 녀석과의 무언의 한판승부야 말로 지금 내게 겨룰 수 있는 유일한 승부처였다는 것이 꽤나 흡족했다. 

나는 본디 만물과의 조화로움을 추구하는 사내이기에, 호승심이나 투쟁심으로 쓸데없는 것에 자존심을 건 한판승부를 벌이는 사내들을 보면 경멸해왔었다. 오락실의 펀치기계를 앞에 두고 아리따운 숙녀 앞에서 아웅다웅하는 우락부락한 사내들이나, 즐겁고 명랑해야 마땅할 축구경기에 유독 활활 타오르는 승부욕을 발휘하며 금방이라도 전쟁이 일어날 것 같은, 아니 일어나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듯한 녀석들이 귀여운 교복을 입은 여학우들의 앞을 굳이 지나가는 드리블을 지켜보고 있자면, 도대체 인간이란 얼마나 어리석은 생물인가에 대한 철학척 고찰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숙녀와 여학우들이 또 어느 순간, 미련한 사내의 곁에 서서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마노라면,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한 고찰은 '이대로 인류가 멸망한다고 해도 당연한 죄값이다.' 라는 꿈도 희망도 없는 결론에 도달하기도 했다.

일련의 과거를 지녀온 내가 고작 봉투 녀석에게 호승심을 느낀다는 것은, 이전의 사내와는 달리 녀석이 굉장한 내공을 지닌 상대라는 뜻이리라. 나는 그렇게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지 않고선 이 변화를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가 없다.

그래서, 긴 잠에서 깨어난 나는, 오도송을 읊는 고승처럼 녀석에게 권했다.

"날씨도 좋은데 옥상이나 구경갈까?"

녀석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더니(이래도 구깃구깃 저래도 구깃구깃한 녀석이지만, 이때만큼은 황당한 표정을 지은 것이었다고 믿고 있다.) 

"뭐, 그러던지"

라며 구깃거리는 비웃음과 함께 답했다. 오냐, 오늘 네 놈에게 인간이란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지를 능히 알려줄 필요가 있었다. 이 오만한 녀석, 공룡도 멸종당한 이 험난한 지구를 정복한 인간의 무서움을 맛보게 되리라. 


옥상을 청승맞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벼락 맞을 놈들이다. 옥상에서 바라본 도시의 풍광만큼이나 이 삭막한 도시에 한줄기 오아시스를 제공하는 공간이 없다. 솔직히 기술적으로 가능만하다면 도시의 공원들은 모조리 빌딩 위로 올리는게 좋다. 초고속 엘레베이터와 함께. 초고속 빌딩의 옥상들은 시민의 공간으로 남겨두면 사람들이 삼삼오오 옥상을 이용하게 될 것이고, 개중에는 이 원룸의 거주자들도 포함될 것이고, 고로 이 원룸의 옥상은 오롯이 나 홀로 독점할 수 있으리라. 

이것은 단순히 놀부심보가 아니라, 옥상을 고작 장독보관이나 빨래건조용이나 삼겹살 파티용으로 밖에 쓰지 않는, '아마추어 옥상러'들에 대한 지탄이기도 하다. 자고로 옥상이란, 해질녁 저 먼 산 너머로 지워지는 붉은 해를 바라보다가 하루가 점멸하고 가로등이 살아나며 퇴근길이 분주한 도시의 풍광을 지긋이 감상하는 고즈넉한 멋을 즐기는 것이 비로소 '옥상순결주의자'의 바람직한 태도라고 여기고 있다. 또한, 모두가 잠이 든 새벽녘, 찬바람을 가르고 옥상에 올라 총총히 떠 있는 별을 관조하며 별 하나에 민혜와, 별 하나에 미정이와, 별 하나에 은영....아니, 좌우지간 떠나간 옛사랑보다 순국선열과 선지식들의 고고한 넋을 기리며 자신의 하루를 돌아보고 내일의 희망을 점검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옥상완전주의자'가 견지해야할 자세이기도 하다.

그런 옥상을 한낱 봉투 따위의 녀석과 오른 까닭은, 이곳이 나의 홈그라운드이기 때문이다. 녀석은 곧 펼쳐질 피비린내 나는 결투를 아직은 모르겠지만, 나는 안다. 녀석은 나의 함정에 걸려들었음을. 


육중한 철문을 열자 문 사이로 달빛이 스며든다. 나는 콜로세움에 들어서는 검투사의 심정으로 발을 내딛었다. 왼손에는 봉투를, 오른손에는 가방을. 잠시 투지를 다지며 감회에 젖자, 녀석이 한마디 붙인다.

"뭐야 이 자식. 왜이리 쓸데없이 비장해."

하아, 운치없다. 운치없어. 정말로 운치도 없고 눈치도 없는 녀석이다. 

"저기 보이는 드넓은 풍광을 보고도 감회에 젖지 않는 자가 있다면, 주사바늘로 심장을 찔러도 피 대신 녹슨 고철물이 나올 기계같은 작자겠지."

"며칠 전엔 '이 지긋지긋한 촌구석. 지겨워 죽겠다!' 며?"

"쓸데없는 말은 기각해라. 좀 더 자연에 경배하도록."

"넌 인간이 만들어낸 콘크리트 투성이도 자연으로 퉁치는거냐."

자연의 아름다움에 경탄할 줄 모르는 녀석의 오만방자함이 경멸스럽다. 나는 더이상 대꾸하지 않고, 조용히 담배에 불을 붙였다.

"어어? 너 임마. 그거 대기오염이야. 자연 타령하더니 공기만 오염시키는 놈이구만."

"무엄하다. 담뱃잎은 어디 외계에서 왔냐. 다 자연에서 거두어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법."

봉투 녀석은 내 말에 감탄했는지,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말을 이었다.

"네놈. 주둥이 놀리는 꼬라지를 보아하니 이제 좀 회복이 되었나 보구만."

"회복은 무슨. 나는 애초에 털끝하나 다치지 않았도다. 그보다"

슬슬 본론을 꺼내야겠다.

"요며칠 사색의 시간을 지내면서 무언가 깨달은 바가 있어."

"오. 드디어 너의 어리석음에 대한 성찰이 있던 건가?"

어리석음이라니. 역시 손 봐줄 필요가 있다.

"네놈은 말이지"

나는 미간을 손오공이 원기옥 모으듯 한껏 끌어모아, 호랑이가 먹잇감을 노려보는 눈매를 만들어 녀석을 쏘다보았다.

"너무 건방져."

"하루이틀이냐?"

"그래서 말이지. 조금 그 오만함을 손봐줄 필요가 있다."

"뭐야. 어리석음에 대한 성찰이 왜 또다른 어리석은 결론으로 도출된 것이냐."

"어리석음이라니. 나는 요며칠 내 삶이 왜이리 엉망진창이 되버린 것인지 진지한 탐구를 해왔다고."

"그래서?"

"그래서긴. 결론은 네놈 때문이다라는거지."

"어이는 없지만 일단 말은 더 들어보지."

"그래서 네놈의 오만함에 대한 교훈을 주고 나는 새로운 삶을 살겠다. 아니, 이전처럼 평온한 삶을 살겠다. 이 뜻이다."

"....풉"

봉투가 또다시 꼬깃대며 웃었다. 치익치익 웃었다. 배를 잡고 웃었다.

"으하, 하...뭐 그렇다고 치자. 네 놈이 뭘 어쩔껀대?"

"봉투 네놈의 성별은 아무래도 남자에 가깝겠지?"

"봉투에게 성별을 묻는 너의 어리석음엔 더이상 논평할 가치를 못느끼지만, 좋을대로 생각해라."

"그렇다면 사나이답게 승부를 보자!"

"왜 봉투에게 사나이 다움을 요구하는건지 알 수는 없지만, 뭘로 승부를 보냐? 보다시피 나는 손도 없고 발도 없다."

"알고 있다. 그래서 준비했다."

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오른손에 들고 있던 가방을 내려놓았다. 가방을 열고 나는, '그것'을 꺼내어 개선장군같은 위용을 뽐내며 봉투 녀석의 코 앞에 내밀었다.

"뭐야. 부루마블?"

그렇다. 부루마블이다.



부루마블은 인류 역사상 최고의 아케이드 게임이 아닌가 생각한다. 도박을 제외하고. 어린 날 나는 호텔왕게임, 혹은 경찰과 도둑같은 아류들을 먼저 접했는데, 형이 친구들과 함께 들고온 초대형 부루마블을 접하고 난 뒤 나의 유년은 새로운 차원의 문이 열리고 또다른 자아를 찾아낸듯한 진귀한 경험을 했다. 오리지널의 그 고귀함이란 역시 아류들은 감히 범접할 수 없다. 부루마블의 신도가 된 나는, 용돈을 탈탈 털어 학교 앞 문방구에를 찾았다. 수염이 불쑥불쑥 나있고 어린 초등학생들에게 "세상은 다 그런거란다." 따위의 알 수 없는 소리를 지껄여놓고는, 그것이 만족스러웠는지 혼자 낄낄댄다거나, 혹은 문방구 앞에 가져다놓은 '더킹오브파이터' 게임기 앞에서 학교의 자존심을 걸고 펼치는 더킹 대전에 불쑥 난입하여 연들아 아이들을 격파, 항의하는 초등학교 고학년생들에게는 "짜식들아. 어른을 만만하게 보면 안된다는거야. 좀 더 연습해와" 라는, 도저히 가게주인의 발언이라고는 볼 수 없는 말을 일삼으며 도발했다. 지금같으면 고발프로그램이나 뉴스나 sns에서 맹폭을 맞고 진작에 망할 것 같은 서비스 마인드를 가진 아저씨였다. 하지만 그 때엔 그것도 마케팅이었는지, 주인 아저씨의 도발에 울음을 터뜨리거나 씩씩거리며 집에 돌아간 녀석들은, 다음날이면 아저씨를 꺾고야 말겠다며 폐관수련을 하곤 했다. 

좌우지간, 나는 며칠 간이나 등하교길에 문방구를 지나며 창가에 진열되어있는 부루마블을 바라보았다. 지극히 무도할 뿐 아니라 안목이라고는 요만치도 없는 주인을 만난 탓에 구석자리에서 먼지에 파묻혀서, 한 달만 지나도 마치 천 년은 묵은 보물지도로 봐도 무방할 것 같은 안타까운 부루마블 하나가 나를 보며 구해달라고 외치고 있었다. 마음이 아팠다. 흙수저 소년의 가슴이 저렸다. 나는 그 부루마블에게 말하곤 했다.

"조금만 기다려. 구해줄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녀석이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돈 없는자의 설움은 아마도 그 때 처음 느끼지 않았나 싶다. 마침내 용돈이 충분해지자, 나는 당당히 문방구 문을 열며 들어갔다.

"뭐냐. 너냐?"

"아저씨."

"왜"

"부루마블 주세요."

"부...뭐라고?"

"부루마블이요"

"그게 뭔데?"

"아, 주사위던져서 세계 정복하는거요."

"우리 가게엔 그런거 없어."

어린 나이에도 나는 이 말을 듣자 황망의 바다에 잠시 다녀올 뻔 했다. 다시 생각해도 진작에 망했어야 했다.

"아니, 저기 있잖아요."

"있긴 뭐가 있어. 난 그런거 들여논 적 없다."

"있다구요! 제가 맨날 봤어요!"

"없다니까! 이 녀석 보게."

단호한 아저씨의 말에 나는, 직접 몸을 움직여 그 먼지의 아마존같은 구역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그 몇걸음 안되는 작은 보폭을 옮겼던 과정에서 어쩌면 내가 꾸었던 수많은 장래희망 중 '고고학자'라는 직업이 추가된 계기가 생기지 않았나 싶다. 

회고하다보니 그 가게의 풍경이 마치 내 방구석과 묘하게 닮은 것 같아 잠시 혼란스러웠지만, 아무래도 추억이란 왜곡되기 마련이다. 아무렴 그곳에 비교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나의 작은 안식처는 그에 비하면 오성급 호텔의 청결함과 정갈함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곳임이 확실하다.

"이거요 이거."

당당하게 부루마블을 꺼내온 나는, 아저씨에게 말했다.

"뭐야 이거. 이런 게 있었나."

"얼마에요?"

"음, 거기 가격 써져있냐?"

"예. 만원이네요."

"오천원만 내라."

"네?"

"그거 뭐 색도 바래서 팔 수도 없고. 그런 거 만원 받으면 너네 엄마한테 아저씨 혼난다."

이럴수가. 고작 오천원에 구할 수 있었다면 지난 주에 이미 나의 작고 귀엽고 고사리같은 손아귀 속에서 녀석은 따스한 보살핌을 받을 수 있었다!

"뭐에요! 기껏 만원 모아왔더니."

"싫으면 만원 내던가"

"아니, 오천원이면 진작에 살 수 있었던 말이에요!"

"그럼 한 번 물어보기라도 했어야지 이 녀석아. 싸게 준다 그래도 난리네. 거 참"

그런 지난한 과정을 거쳐서 나는 드디어 부루마블을 얻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자본주의의 시스템따위는 무참히 날려버리는, 참으로 알 수 없는 판매전략을 고수하던 그 문방구가 내가 중학교 교복을 입자마자 망해버린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는 납득이 간다.


그 뒤로 나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치며 매년 반이 바뀔 때 마다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 뺨을 치는 '부루마블 전도사'가 되었다. 때때로 압수도 당했지만, 어떻게해서든 다시 구해 전도행위를 이어나갔다. 학기 초 마다 학우들은 나의 부루마블 찬양에 감복해 하나 둘 합류하여 반 친구들이 의기투합하는 부루마블 대회가 반복적으로 열렸다. 그러나 나는 단 한번도 꼴찌를 해본 적이 없었다. 이것은 거짓이 한 점도 없는 사실이다. 1등을 한 적은 수 없이 많고, 꼴찌를 한 적은 단 한 게임도 없다. 게다가 부루마블 앞에서 나는 대학살을 벌이는 화성인처럼, 한 치의 자비로움없이 상대들을 파산시켰다. 파산, 파산, 파산. 은행 대출에 괴로워하는 녀석들을 볼 때마다 겉으로는 위로했지만 속에서는 끓어오르는 승리의 쾌감에 도취되었다. 그것이야말로 부루마블의 참 된 매력이었다. 게임이 끝나고 판을 접어 상자에 집어넣을 때, 나는 속삭이곤 했다. 자본주의는 영원할지어다!

어떻게 그렇게 잘 했냐고? 이것은 영업비밀이지만, 독자 제위께만 살짝 공개한다. 절대 어디가서 발설해서는 아니된다. 여러 개의 부루마블을 구입한 나는, 그만큼의 종이돈이 있었다. 나는 교복 안주머니에 항상 백만원짜리 종이돈을 5장씩 숨겨놓고 다녔다. 이것은 아주 적절히 사용해야 하는데, 남발할 경우 눈치빠른, 아니, 눈치없는 녀석들의 고발을 당할 위험이 있었다. 아주 위급할 때만 사용하는 긴급셀프대출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그 판에서만큼은 신적인 존재라 할 수 있었다. 가끔씩 고발을 당하기도 했지만, 그들에게 한 번도 보여주지 않는 패기를 내뿜으며 정색을 했고, 후엔 그들을 판에서 영원히 퇴출시켰다. 나의 세계를 위협하는 존재들은 일찌감치 숙청을 해야만 했다.

허나 유감스러운 것은, 그러다보니 하나 둘 씩 참여자들이 빠져 나중엔 애걸복걸하며 해달라고 부탁해야만 하는 처지가 되는 것이었다. 녀석들은 싸늘한 반응을 보이며, 

"너나 해 이자식아. 너랑 해면 졸라 재미없어."

따위의 제멋대로인 말로 나와의 승부를 피하기 마련이었다. 후후, 나의 위용에 압도되어 그런 식으로 밖에 저항할 수 없는 녀석들의 처지를 조금은 동정했다. 

물론, 부루마블은 이겼지만 축구나 시험에서 처참하게 녀석들에게 발려서 조롱을 당했다는 것은 부루마블을 섬기기 위한 순례라고 위안삼고 있다.



찬란한 과거가 주마등처럼 흘러가며 나는 부루마블을 꺼냈다. 스윽. 그래. 바로 이 소리야. 오랫동안 감각을 잊고 살았던 손이 왕년의 역전용사를 소환하며 기세를 뽐냈다. 어서 주사위를 굴리고 싶어하는 손가락들이 뜨거운 혈액을 돌게하며 근질근질거렸다. 그리고, 뒷주머니에 숨겨놓은 백만원짜리 종이돈 다섯장은, 차분히 자신들의 출전을 기다리며 엉덩이 냄새를 맡고 있었다. 

봉투 녀석이 말했다.

"너란 놈은 정말로, 구제불능이다."

"훗. 쫄았냐."

"그보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나는 손이 없다."

"괜찮다."

"뭐가?"

"내 턴도 네 턴도 내 손으로 하면 된다. 네 턴일때의 행동은 네 놈이 말을 해주면, 내가 대리해서 수행해주도록 하지. 그럼 불만없지?"

"흐음...아니, 내가 왜 이걸 해야하는지 모르겠다만"

봉투 녀석은, 녀석의 품 안에 담긴 쓰레기들을 모두 쏟아낼 듯한 긴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꼭 해야 직성이 풀리겠다면, 그래 한 번 해주지 뭐."

"자 그럼. 승부 조건을 협상해볼까."

"조건도 있냐?"

"그게 없으면 재미가 없지."

"뭔데?"

"진 사람은 깔끔하게, 한 달간 상대를 형님이라 부른다."

"뭐야 그게. 엄연히 내가 형님인데 나한테 너무 불리한 조건 아니더냐."

이 녀석이 은근히 나를 하대하는 이유가 드디어 밝혀졌다. 진짜로 자신이 나보다 상위자라고 생각할 줄은 몰랐다.

"아이, 그래. 한번 해준다 해줘. 너 대신, 후회하지 않겠냐?"

"후회? 내가?"

나는, 노점상에게 바가지를 당한 불의의 손님처럼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녀석은 나의 과거를 모두 안다. 따라서 내가 한 때 부루마블의 왕을 넘어 부루마블의 신이었다는 것을 모를리가 없었다.

"네 놈의 사기행각은 나도 익히 알고 있지만,"

녀석은 고약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내가 손이 없다고 만만히 보면 곤란할텐데 말이지."

"그것이야말로 내가 할 대사다! 나의 대사를 훔쳐가지마라!"

"알았다. 알았어. 판이나 깔아라"

그렇게, 운명의 대회전이 펼쳐질 예정인 옥상에 팽팽한 긴장감이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트로이의 전쟁을 지켜보던 올림푸의 신들이 마치 이 원룸의 옥상으로 집결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신들이시여, 미리 승전보를 드리옵나이다. 하늘을 쳐다보며 나는 읊조렸다.

"야 헛소리 하지 말고 빨리 세팅이나 해!"

아무리 생각해도 녀석은, 정말로 운치가 없다. 눈치도 없고.

나는, 선공을 정하는 주사위를 던졌다.



'전파낭비잡문기 > 요괴봉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괴 봉투 (8)  (2) 2017.07.11
요괴 봉투 (7)  (0) 2017.03.30
요괴 봉투 (5)  (0) 2017.03.13
요괴 봉투(4)  (0) 2017.03.06
요괴 봉투(3)  (0) 2017.03.01

WRITTEN BY
빵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