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파낭비잡문기/요괴봉투'에 해당하는 글 13건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나 따위의 사정이야 알 바 아니라는듯, 도도하게 흘렀다. 빌어먹을.

찬란하기로 따지면 밤하늘의 영롱한 플레이아데스 성단에 가깝고, 달콤하기로 치면 '마카롱보다 더 달게요'라고 노래하는 에프엑스의 목소리보다 더 달며, 아름다움을 견주기엔 고대 그리스 밀로의 비너스상도 부족할 것 같은, 봄이 가버렸다. 홀라당 가버렸다.

올 해 봄에는 반드시, 기어코, 결단코, 사랑하는 내 님을 찾아 흐드러지는 벛꽃 내음을 한껏 들이쉬며, 들이쉬는 동시에 누군지 알 수 없지만 좌우간 옆자리의 그녀의 체취도 한움큼 들어마신후 홍홍해지고 말겠다는 의지는 벛꽃잎이 거무튀튀해지듯 사라져버렸으나, 내가 애통해하는 까닭은 비단 그것이 아니다. 계절의 장난질, 한낱 인간이 성을 낸다고 달라지는 바 없다.

대뜸 그간 격조하였던 까닭을 고하기엔 다소 예의가 아닌 것 같아, 경위를 소상히 설명하고자 한다.


믿었던 정호 선배와 박지혜 양의 콜라보레이션으로 인해 굳건하고 고요했던 나의 마음이 속절없이 격침된 후, 나는 집으로 돌아와 벽면을 향해 정좌했다. 살아온 지난날을 돌아볼 필요를 느꼈다. 무엇이 나를 이리도 괴롭게 하는가. 인간의 고통은 어찌하여 사라지지 않는가. 나는 '자비 인애 화목 실천'이라는, 아버지께서 직접 써주신 가훈이 걸린 표구를 바라보았다. 자비는 무엇이고 인애는 또 무엇인가. 화목은 또 무엇이요, 실천은 어찌하는 것인가.

돌이켜보면, 나는 가훈에 충실했다. 밤 늦게 마감이 끝나면 하루가 멀다하고 애타게 술을 찾는 정호 선배와, 또 그에 못지않은 주당 지혜 선배를 위해 술집으로 향하곤 했다. 계산은 내 자비로, 동기는 오직 인애, 술 먹는날은 화목요일로 정해놓고 그들의 관계개선을 위한 실천을 해왔다. 그 커플은, 아니, 그 무뢰배들은 오롯이 선의로 그들의 화합을 위한 자리에서는 꼭 쌈박질로 파투를 내더니, 정작 나의 오지랖이 닫지 않은 그 잠깐 사이에 나에 대한 대역죄를 저질렀다니. 지금와서야 이렇듯 초연하고 냉정하며 누가봐도 공정한 평가를 내릴 수 있지만, 당시의 나는 상당한 분노에 젖어있었음을 양해바란다.

분을 못 이겨 주인따라 들썩거리는 어깨를 지긋이 바라보던 봉투가 입을 열었다.

"으이구 이 화상아."

나는 바로 답했다.

"이거 봐. 봉투 너는 염치가 없는거냐."

"어랍쇼. 염치?"

"그래. 염치다 염치. 염치라는 게 없는 녀석이더냐."

인간은 염치로 산다. 눈치든 염치든 도덕과 규범을 이루는 근간의 마음은 그런 류라 여겼다. 맹자님이 수오지심 측은지심 운운한 것은 너무나 고리타분하고, 대게 염치라는 단어면 충분하다는 것이 내 지론이다.

"네가 인간이 아니라는 점, 내 깊이 수용한다. 한낱 무생물에게 염치를 논하는 것, 차라리 접싯물에 코 박는 것이 세상에 좀 더 이로운 행동이라는 것도 잘 안다. 그래도 말야. 엄연히 이 작은 방에서 부던히도 수행을 지속한 나의 노력 덕에 너 같은 별종이 도래한 것이 아니겠냐, 이 말이다."

봉투는 징그러울 정도로 싱긋 생긋 웃더니, 말했다.

"개뿔이나, 그딴 거 내게 없다. 꼬우면 태우시던가."

아, 나는 염치없는 작자들로 인해 주변이 포위되었던 것인가. 항우의 심정이 다소 이해가 갈 따름이다.


도덕적 기준이 매우 높은 내게서 '염치론' 강의를 들은 봉투는, 비록 비웃었으나 한동안 명강의를 들은 후 머리가 맑아지고 뭔가 딱 트인 것처럼, 감사의 마음을 담아 한동안 낄낄 웃었다. 낄낄이 좀 과한 감이 있어 누가 보면 비웃는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겠다 싶어 부드럽게 주의를 줄까 싶었지만, 그것은 선비의 모양새에 부합하지 않는 듯해 그대로 두었다. 그것보단 녀석이 한번 낄낄댈때마다 안에 담겨있는 휴지들이 튀어나올까봐 걱정이었다. 푸석푸석 퍼석퍼석하는 봉투 특유의 소리 사이로 들려오는 녀석의 웃음소리가 잦아들어 '실컷 웃었나' 싶으면 어느새, 녀석은 나를 바라보곤 다시 웃음 그래프가 치솟는 반복적인 행태를 띄었다. 찬양 고무도 적당히 해야지, 좀 과하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드는 순간, 녀석이 말했다.

"너, 복수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더냐."

복수라.

내 사전에 복수란, '여러가지'를 뜻하는 단어 밖에 쓰여있지 않다. 복수, 그 달콤하지만 위험한 것. 태생적으로는 무사안일주의를, 후생적으로는 만민평화론을 익힌 고고한 성품을 가진 사람에게 복수란 단어는 머나먼 이국의 땅, 중동의 탈레반 뉴스에서나 들을 법한 단어였다. 복수는 복수를 부르는 법, 사회면에서 참사를 겪은 희생자의 '더 이상 나 같은 피해자는 나오지 않기를'이라 말하는 대사가 내게는 더 적합한 말이었다.

으음, 그러나 작금의 비상사태에서는 20여년간 일관되게 지켜온 신념에 약간의 융통성을 발휘할 필요가 있지 않나. 재고해본다. 불끈불끈 꿈툴꿈툴대는 복수에 대한 욕망과, 태산이 두쪽이나도 지켜오리라 다짐했던 신념의 충돌이 내면에서 세계제3차대전을 벌이는 중이었다. 전세는 호각, 전황은 불투명. '복수파'는 간결한 보병돌격과 신속한 기병운영으로 망치와 모루 전술을 시도한 반면, '신념파'는 우직한 보병방어 전술과 기민한 회피기동으로 이를 피해냈다. 양 측의 전술충돌로 인해 난타전으로 바뀐 전장. 전사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정좌하여 내면을 바라보던 나는, 종군기자나 음유시인의 시선으로 그 치열한 싸움은 관찰하고 있었다. 이 전쟁, 제법 재밌어서 계속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평생!"

호통이 들려온다. 백중지세였던 전장, 한 쪽으로 구원군이 몰려온다.

"그렇게!"

노성이 들려온다. 구원군의 기세는 전황을 완전히 바꿔놨다. 한 쪽이 순식간에 유린당한다.

"방구석에서!"

꾸중이 들려온다. 전투결과는 더 이상 볼 필요가 없다. 나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고민만 하고 있을..."

"쏘냐!!!!!!"

'복수파'의 압승으로 끝난 전쟁을 목도한 나는, 냉큼 달려가 그들의 선봉에 서기로 했다. 이기는 편이 내 편, 승리의 함성을 외쳐본다. '쏘냐! 그 커플에게는 고양이 선배 때와는 다른, 험난하고 잔인하며 인간 본성에 반하는 행위를 선사해주겠노라! 

봉투가 웃었다.

"그럼 이제, 작전을 짜보자고"


그날, 의기투합한 봉투와 나는 작전명 '유엔평화유지군'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참모는 봉투, 실행은 나의 역이었다. 막상 본격적으로 뭔가를 하려니까 조금 귀찮아지, 아니, 그것보다 도덕적인 딜레마가 살포시 고개를 치켜드는 바람에, 내가 참모를 하고 봉투 녀석에게 결행의 몫을 주는 아량을 베풀까 생각해보았지만, 봉투녀석은 일언지하로 내 제안을 기각했다.

"내가 손이 있냐 발이 있냐"

처칠도 울고 갈 만한 짧고 명확한 판단력을 보아하니 역시 녀석에게 참모를 맡기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일은 보고에서 시작한다. 나는 첫 공작으로, 사장에게 보고를 택했다. 사장은 손님이 없으면 굳이 날 부여잡고 몇 시간이나 떠드는 걸 좋아했다. 직원들 모두가 몸서리치며 기피하는, 지옥같은 시간이었다. 수시간의 대연설을 즐기는 사장과의 담화와 죽도록 싫어했던 고등학교 1학년 과학쌤의 교과를 벗어난 물리학 특강 중에서 양자택일을 강요당하면, 혀를 깨무는 심정으로 후자를 택한 후 밀려오는 졸음에 저항하기를 포기하고 수행평가 점수가 아작나고 엎드려 뻗쳐 후 빠따행을 당하고 말리라.

그러나 형벌같은 담화의 시간에서 의도치 않았던 장점도 있었으니, 사장이 가장 신뢰하는 직원이 내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불쾌하다, 오해다 라며 동료들에게 항변했지만, 아무래도 이럴 때는 적극적으로 상황을 이용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1시간 반 동안 정부의 삽질과 빨갱이 타령과 먹고 살기 힘들다는 푸념을 한 사장이 한 템포를 쉬자, 그 틈을 파고 들어 내가 말했다.

"저기 사장님. 근데 말입니다."

"왜?"

"요즘... 정호선배랑 지혜가 좀 수상한 것 같지 않나요?"

"뭔소리여"

"아니 맨날 쌈박질만 하던 사이인데 어쩐지 둘이 같이 있어도 조용해진 것 같은데요."

"음...그른가? 아! 그러고보니"

사장은 씨씨티비 화면으로 카운터의 그 둘을 진지하게 관찰하더니, 말을 이었다.

"저 자식들 저번에 내가 술먹자고 하니까, 웬일로 안 먹는다 하고 내빼버리대. 공짜 술을 포기할 녀석들이 아닌데."

사장, 삐쳤다.

"아니 그래도 사장이 먹자고 하면 먹어야 하는거 아니냐? 저 자식들이 그날 내빼는 바람에 요 앞에 투다리 사장님 알제? 투다리 사장님이랑 술 먹었는데, 하이고, 그 양반 어찌나 말이 많던지"

그 뒤로도 20분 간, 투다리 사장님에 대한 논증과 고찰과 비판을 이어가던 사장은, 알바를 불러 "아이스 커피 한 잔만 줘라" 하더니, 잠깐 말을 골랐다.

"아니 근데, 하던 얘기가 뭐였지?"

"저...그게, 정호 선배랑 지혜 얘기 하던 중이었죠."

"아 그래 그래. 그 얘기였지."

사장은 다시 씨씨티비를 쳐다봤다. 그런데, 점포 출입문이 열리며 고양이 선배가 출근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 민지왔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고양이 선배의 출근은 곧 나의 퇴근을 알리는 바다. 아무래도 공작은 다음을 기약해야하나, 여기선 일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가 필요한 시점인가, 고민하는 순간.

"야 그러고 보니 민지 쟤 요즘 남자만나는 것 같더라?"

사장은 불현듯 아군을 적으로 돌리는 발언을 내뱉었다.

"쟤 남친인지 뭔지 아무튼 남자애가 매일같이 오더라고. 매일 일 끝나면 남자 차가 기다리고 있던데. 아주 지극정성이야"

오전시간대로 근무를 돌려놓았던 나의 계락은 사장의 말 한마디에 무참히 박살나서, 그녀의 근무는 다시 마감으로 바뀐지 오래였다. 오전시간이 둘이 데이트하기 좋다며 호평했던 그녀는, 마감 시간대에 맞춰 그도 근무를 바꿨다며 다시 흡족해했다. 요즘 회사들은 근무자들의 근무시간을 너무 쉽게 바꿔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근무자들에게 너무 호락호락하면 아니되는것을. 아니, 그것보다, 왜 나만 쥐어짜냐고!

전의를 상실한 나는 빠른 퇴각을, 아니 퇴근을 위해 몸을 일어서려 하자, 사장이 말을이었다.

"앉아봐 앉아봐. 아니 그래서 내가 민지한테 쟤 누구냐고 물었거든? 근데 웃기만 하고 답이 없어. 왜 그러지? 내가 싫은건가?"

사장은, 그 뒤로도 30분 간이나 자신이 직원들에게 미움받고 있지는 않은지 각각의 직원을 호명하며 내게 의견을 물었다. 모두가 싫어하는 이에게 사실 증명을 해야하는 사람의 처지를 생각해본 적 있는가? 그것도 상사라면. 나는 내 안의 애매모호함을 있는 힘껏 끌어모아, 긍정도 부정도 아닌 모르쇠에 가까운 답변을 땀을 뻘뻘 흘리며 쏟아냈지만, 사장은 확고한 부정의 답변을 얻기 위해 나를 고문했다. 내면에서 승전 이후 기세등등했던 복수파의 군대들은 지리멸렬하게 흩어져갔고, 그 자리엔 사장의 점령군이 들어서 대지를 착취했다. 나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대로는 아니된다!

결국, 사장의 압력에 굴복하여 강한 부정의 답변(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으로 퉁을 치고 나서야, 나는 퇴근할 수 있었다. 퇴근하는 나를 바라보는 민지 누나의 눈빛엔. 안쓰러움과 어리석음을 비난하는 눈빛이 모두 들어있었다.


첫 날의 실패를 교훈삼아 기어코 사장에게 둘의 연애사실을 은근히 폭로할 수 있었던 나는, 사장이 면접때 부터 확고하게 주장해온 '사내 연애 금지 조항'을 발동시킬 수 있었다. 소기의 성과이자, 복수의 서막을 알리는 쾌거였다. 사장은 갑자기 공지용 어플리케이션을 이용해 '사내 연애 금지' 공지를 띄웠다. 직원들은 당황했다. 특히 정호 선배와 지혜는 눈에 띄게 당황했다. 끊임없는 눈빛 교환과 소근거리는 대화. 승리의 여신이 처음으로 내게 미소지었다. 

이것으로 그들에 대한 방해 공작을 멈출 수는 없었다. 아니, 이제 시작일 따름이니. 먼저 그들의 근무를 오전과 마감으로 완전 떨어뜨려놓았다. 견우와 직녀의 심정을 이해시키기 위한 나의 드넓은 아량이었다. 장거리 연애도 아닐진데 근무 때문에 만나지 못하면 분명 애틋함이 넘실넘실 흘러넘쳐 서로의 사랑을 굳건하게 다질 것이다. 예상대로 그들은 한번도 함께 근무하지 못한 채 사내연애의 소소한 즐거움을 포기해야만 했다.

다음은 사장을 움직였다. 술자리에서 격퇴당한 나로선, 그들의 퇴근 후를 훼방놓을 방안이 없었다. 불법적인 방안들이 몇가지 떠올랐으나 '경찰서와 법원은 되도록 멀리하는 것이 좋다'는 돌아가신 할머니의 조언이 떠올라 고이 접어놓았다. 내가 택한 것은, 사장을 끊임없이 외로움에 몰아 넣는 것이었다. 가족들과 떨어져 사는 사장은 외아들의 사진을 보며 그리움에 젖곤 했는데, 직원들은 왜 그토록 아끼면서도 굳이 1주일에 한 번밖에 보러가지 않는 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회사원도 아닌 사장인데. 어쨌든, 그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치는 날이면 여지없이, 위 속에 맥주를 들이붓는 고약한 습관을 가졌다. 나는 사장과의 지옥같은 담화시간에, 나의 가족사를 얘기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별 관심없이 '얘가 왜 이러지'라는 반응을 보이던 그는, 나의 눈물없이는 들을 수 없는, 아침드라마의 시나리오 같은 막장 가족사를 듣자 깊은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2주동안이나 이어진 풀스토리에 감화된 그는, 썰을 푼지 이틀만에 외롭고 그리운 기러기 아빠의 신세한탄을 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점포 마감 후 카페의 양대 술꾼인 정호 선배나 지혜 둘 중 한명을 대리고 술을 먹으러 갔다. 사장에게 끌려가면 술자리가 아무리 일찍 파한다고 해도 새벽3시. 근무 패턴이 완전히 다른 두 사람이 서로를 마냥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3주 정도가 지났고, 나는 술이 덜 깬 사장에게 공들여 정보를 캐냈다. 과연 술 자리가 파하고 그들이 각자의 집으로 들어갔는지. 또한 다른 직원들의 소소한 담화에서도 손쌀같이 지나가는 귀한 정보들을 귀담아 들었다. 그 결과, 정호-지혜 커플은 3주간이나 데이트는 고사하고 만날 수 조차 없으며, 심지어 연락조차도 몇 번 못했다는, 희대의 승전보를 접할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여자 직원들끼리 있을땐 정호 선배에 대한 뒷담화를, 남자 직원끼리 있을 땐 지혜에 대한 뒷담화에 은근히 참여하여 은근히 주도하는 분위기를 이끌었다. 그 자리에서 나온 정보들은 어느 순간 각자의 귀에 들어가리라. 마찬가지로 무분별한 경제 운영을 해오던 정호 선배의 지갑 사정을 사장에게 은근히 고하고, 매번 공과금을 내기 위해 가불을 하던 악습을 끊게하니, 정호 선배는 지혜와 연락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써야하는 핸드폰 요금이 밀리기 시작했다. 아마 이 기세를 유지한다면, 어쩌면 요금 미납으로 인해 정지될 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것이 나의 목표이기도 했다.

이 모든 공작의 배후에 봉투 녀석이 있었으니, 나는 읊조렸다. 봉투에게 영광 있으라! long live the 봉투! 녀석은 가공할만한 사악한 아이디어를 매우 여러개 주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온건한 방법만 택했다는 점, 후손들이 내게 쏟을 비난이 다소 염려되어 밝혀둔다. 어쨌건 이 때를 전후하여, 나는 '봉투폐기론자'에서 '봉투찬양론자'로 전향을 하게 된 것이다. 벛꽃이 지는 것이 다 무어냐. 봄이 사라지는 것이 다 무슨 소용이더냐. 무소의 뿔처럼 홀로 복수의 길만 걸으리라.


이상, 그간의 경위에 대한 개략적인 설명을 마치겠다.

아무튼 나는, 방진을 펼쳐놓고 수레 위에서 전장을 내려다보는 제갈량처럼, 속속들이 들어오는 승전보에 더없는 승리의 기쁨에 도취되어 있었다. 바로 지금 이 순간까지는. 나는 바로 지금, 나의 눈썹을 찌뿌리게 하고 그간 펼쳐온 계략들을 재검토해야 하지 않나 라는 고민에 들게 한, 하나의 정보를 들었다.

"아니 그러니까, 정민 오빠랑 아름이 커플, 희성 오빠랑 나, 그리고 다희 언니도 남친 생겼다는거 있지?"

"진짜? 뭐야, 갑자기 다들 왜그래. 봄도 끝났는데"

"그러는 너는, 너도 남친 생겼잖아"

"그렇긴하지. 몰라 갑자기 나도 덜컥 생겨버렸어."

"오늘도 끝나고 보기로 한거지?"

"응. 아 잘됐다. 너도 희성 오빠랑 보기로 했다며?"

"응"

"같이 밥먹으러갈까?"

"어 그럴까? 그럼 오빠한테 연락해볼게."


손님의 주문을 받던 나는, 두 아르바이트의 대화를 듣느라 정신이 팔려 주문 실수를 하고 말았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도대체 이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나는 그녀들에게 물었다.

"얘들아"

그녀들은 무언가를 들킨듯, 흠칫 놀라며 답했다

"네?"

"아까 한 말, 무슨 얘기야?"

"어머, 매니저님. 왜 얘기를 함부로 듣고 그러세요?"

그녀의 말투가 제법 쌀쌀맞다.

"아니...일부러 들은건 아닌데...들려오니까..."

"아이, 그래도 그냥 모른척해주셔야죠. 사장님한테 말할거죠?"

"사장님한테? 내가 왜?"

"매니저님 친 사장파잖아요!"

오해였다. 지극히 억울하고 상당히 불합리한 오해였다. 친사장파? 내가? 이런 오해는 풀어야만 했다.

"아니 내가 왜 친사장파야! 그럼 너희가 나 대신 '사장님과의 대화' 할래?"

나는 나답지 않게 명쾌한 반론을 제시했다. 그녀들은 갑자기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역시 그것만은 싫은 모양이다.

"그래. 내가 친사장파라고? 그럼 '사장님과의 대화' 시간에 너희들을 부를 수도 있겠네. 어때? 한번 불러줄까?"

그녀들은 단호하고 간절하게 고개를 저었다. 고개를 젓는 속도가 초음속 스텔스기가 왕복하는 속도에 비할 법했다. 그녀들의 앞머리가 요란하게 휘날렸다. 

"그니까, 빨리 불어. 누가 누구랑 사귄다고?"


그녀들에게 들은 정보를 종합하면, 사장님의 '사내 연애 금지' 공지에도 불구, 요 몇 주 사이에 신규 커플이 속속 들어서서 사내에서 여전히 솔로인 남자 직원은 나뿐이라는 것이었다. 남자라고 해봐야 알바 둘에 매니져 둘 뿐이지만, 4명 중에서 1명 밖에 남지 않았다는 고립감이 거대한 파도가 되어 엄습해왔다.

비보는 그것뿐이 아니었다. 우째 이지경이 되었는가. 나는 지난 몇 주간의 근무 시간표를 검토해보았다. 그 결과 참혹하고 뼈저린 발견을 하고야 말았다. 내가 '유엔평화유지군' 프로젝트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원래 각자의 근무를 순환시키며 중첩되지 않게 하는 시간표 작성 요령을 개무시하고 정호 선배와 지혜를 훼방 놓는 데에만 정신이 팔린 탓이었다. 그동안 다른 직원들의 근무가 매번 겁치며, 서로에게 각자 호감을 품고는 있었지만 딱히 가까워질 계기가 없었기에, 그들의 사랑은 싹이 트지도 못한 채 모두 하나의 씨앗에 지나지 않을 뿐이었다. 그러나 나의 사소한, 매우 경미한 판단 오류는 나비효과가 되어 사랑의 큐피트 화살로 변하고 말았으니, 그들은 매일같이 얼굴을 마주하고 지들끼리 삼삼오오, 혹은 둘씩 짝을 지어 술집으로, 카페로, 노래방으로 향했다. 이 모든 사태 속에서 빠진 것은, 오직 나뿐이었다. 

'친사장파'라는 낙인이 찍힌 것도 억울할 지경인데, 이제는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즐거워보였다. 도대체가, '사내 금지 조항'을 지키는 사람이 나 뿐이라는 사실에, 이 나라 청년들의 준법 정신에 신물이 날 지경이었다. 이 나라의 미래가 매우 어둡다. 매우 매우 어둡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나, 사태를 어떻게 호전시키나, 고민을 하다가 결국 봉투에게 계락을 구했으나

"그정도 리스크는 감수했어야지. 바보냐"

라며 일언지하에 무시당했다. 

"원래 뭔가를 얻으려면 뭔가를 잃어야 하는 것이 세상에 이치니라"

라는 알 수 없는 소리까지 지껄이는 것이었다.

도대체 내가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잃었나 꼼꼼히 계산기를 두드려보아도, 당최 얻고 잃은 것의 비율이 너무나 차이가 큰 것이 아닌가, 산수밖에 할 줄 모르는 나도 이 정도 계산은 가능하다며 반문해보았다.

"내가 보기엔 아주 적절한 물물교환비인것 같은데."

봉투는 말했다.

"남의 불행이 너의 행복을 초래할 수 있다고 보냐? 그렇지 않다. 타인의 불행을 얻기 위해선 너의 행복도 희생해야 한다고. 그게 좀 더 정의로운 이치 아니겠냐.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 될 수도 있겠지. 그러나 분명, 자신도 모르는 어느 부분이 떨어져 나간다. 그게 바로 정의란 말씀이다. 또 누군가가 불행해졌으면, 그만큼 누군가에겐 행복이 들어서야, 세상에 부여된 행복의 총량이 일정하게 유지되지 않겠냐. 바로 그 이치에 따라 누군가는 행복해지고 누군가는 불행해진 것 뿐이지."

계산이 맞지 않았다. 불행해진 사람은 나와 정호선배 커플, 세 명뿐인데 행복해진 사람은 너무나 많다.

"그거야"

봉투는 단호히 말했다.

"네 놈의 존재가 블랙홀처럼 타인들의 불행을 모조리 빨아들이는, 불행의 중력이 압도적으로 큰 인간이기 때문이지."

녀석의 담담한 말 한마디에, 나는 반성했다. 그리고 회귀했다. 반성한 것은 잠시나마 '봉투찬양론자'로 전향했다는 것이고, 회귀한 것은 도로 '봉투폐지론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불행의 중력이 압도적으로 큰 인간' 언젠가 묘비에 나의 위대함에 대한 훌륭한 문구를 생각해 본 적은 있지만, 정말로 이 따위 문구가 쓰여질 생각을 하니 아찔해졌다.

아찔함이 뭉게뭉게 피어올라 올림푸스 산처럼 내 앞에 우뚝 섰다. 차라리 제우스의 벼락을 맞는 것이 낫지 않을까. 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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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빵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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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했어. 다들 잘 들어가"

주말이라 유난히 바빴던 영업 시간이 끝나고 마감을 마친 나는, 귀가길이 아닌 술집 골목으로 들어섰다. 거리엔, 잠시라도 떨어져있다면 각자의 왼쪽, 오른쪽 옆구리가 이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동상이 걸릴까봐 두려운 듯, 인간들이 서로를 휘감고 다니고 있다. 이 시간대의 술집거리엔 대게 이런 작자들이 돌아다닌다.

세상이 이래서는 아니된다. 지금 이 시간에도 소말리아의 아이들은 기아로 죽어가고 있다는 말이다. 왜 저 사람들은 좀 더 숭고한 가치나 보편적인 인류애같은,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마땅히 관심을 가져야 할 그런 것들을 외면하고 한낱 알콜의 힘을 빌려 원초적 감정을 쫓는 걸까. 세상 사람들은 좀 더 쇼펜하우어의 글을 읽도록 해야 한다. 

그렇다고, 종족 번식의 사명을 띄고 태어난 개체들인만큼, 호로몬의 장난에 지나지 않는 사랑 따위, 그 한없이 가볍고 혼란스러운 거짓에 휘둘려 현자가 되기 위한 노동의 시간을 꿈 꾸는 것까지야 말릴 맘이 없지만 왜 하필이면 오늘인가. 묻고 싶다. 그대들은 왜, 하필이면 간만에 이 곳에 나온 내 눈 앞에서 꼴을 보이는가. 아니, 왜 거기에 내가 있으면 아니되는 것이냐! 왜 나만 빼고 하냐고!

그들을 향해 소리라도 지르고 싶지만, 나의 진실된 참 뜻이 곡해되어 미친놈이라는 낙인이 찍힌 채 온갖 조롱을 듣는 일만은 피하고 싶어, 일단 참기로 했다. 너그러이 그들의 만행을 지켜보는 것도 신사의 젠틀함에 속하는 일이겠지.

약속 장소에는 정호 선배가 기다리고 있었다.

"왔냐. 고기 꿔 놨다."

'하루에 소주 한병을 먹지 않으면 입 안에 가시가 돋는다'는 괴상한 지론을 갖고 있어, 때때로 술냄새를 풀풀 풍기며 출근해 카페 안에 가득한 커피 냄새를 모조리 머리 아픈 알콜 냄새로 바꿔버리며 일 할 때가 있었다. 이런 건수로 항상 사장에게 까였고 동료들에게 핀잔을 들었지만, 막상 술 먹을 사람이 없을 때는 또 이 양반 만큼 부르기 좋은 사람이 없다. 고기도 잘 굽는 것은 덤.

당연한 얘기겠지만 나야 그 위선적인 사람들과는 달리, 진실로 정호 선배와 술 먹는 것을 즐긴다. 비록 공사가 다망해 지난 한 달간은 술잔을 나눌 기회가 없었지만, 어쩌다 보니 오늘에서야 술자리를 가질 수 있었던 이유가 있다. 며칠 전 봉투 녀석에게 농락을 당한 그 대참사 이후, 속절없이 시무룩한 표정을 짓던 나의 낌새를 눈치채고 선배가 제안한 자리긴 하지만, 나의 방문 목적은 어디까지나 '정호 선배와의 즐거운 술자리다'다. 어디까지나 그것뿐이다. 기껏 알콜에 의지해 기분을 좀 풀어보겠다는 알량한 기대는 내게 없다. 나는 그들과는 다르다.

"그러니까, 형이 말했잖아. 진작에 좀 깨부수라고."

선배는 내가 겪은 대참사를 알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어제 같이 근무하며 담배를 피고 있을 때, 흡입한 연기의 양이 평소보다 조금 많아진 탓에 나도 모르게 술술 뱉은 것 같긴 한데, 딱히 기억엔 없다. 행여나 내가 징징대면서 우울하다느니, 죽겠느니 이런 아쉬운 소리를 했다고 생각한다면, 몹시 불쾌하다는 점 밝혀둔다.

"어쩐지 네가 이상하긴 하더라."

"뭐가요?"

"새꺄. 자식이 뭐 그런 거 가지고 며칠 동안 있는 티 없는 티 다 내고 있냐. 아니, 애초에 누나가 뭐 너한테 별 말 한 것도 아닌데, 왜 혼자 지랄이여?"

"지랄은요 무슨, 제가 티를 내긴 어딜 냈다고요. 평소와 다름 없었다고요."

고기를 우걱 우걱 씹는 것을 핑계 삼아 퉁명스럽게 말해 본다.

"웃기고 있네. 아니, 누나랑 눈도 안 마주치고 퇴근해버리니까, 누나가 너 무슨 일 있냐고 나한테 묻더라. 하여간"

그랬었나. 알싸히 퍼지는 깻잎 내음을 삼키며 지난 며칠을 되돌아보았다.



봉투 녀석의 궤변을 들은 이후, 그 말 속에는 하나도 진실에 가까이 닿은 것은 없지만 어쩐지 그냥 기분이 참혹해서, 나는 침대를 벗어나지 않은 채 휴일을 마감했다. 물 건너온 예술 영상들을 볼 기분조차 들지 않았다. 녀석 역시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숨막히는 어색함 속에서 하룻 밤을 보낸 뒤, 출근하는 내게 덧붙였다.

"야. 출근해서 쓸데없이 티 내지 말고 평정심을 유지해라"

좁아지는 문 사이로 들린 녀석의 말 때문에 평소보다 출근이 5분이나 늦게 되었다.


점포가 바쁘게 돌아가면 헛된 상상이나 기분에 젖어들 틈도 없다. 그러나 평일, 그것도 화요일이나 수요일 오후에는 손님이 그다지 많지가 않다. 사장의 충실한 피고용자이자 점포의 매니져로서 당연히 많은 손님들에게 좋은 서비스와 제품을 제공하고 싶다는 나의 바램과는 달리, 너무나 한가해서 하등 쓸데없는 일거리라도 찾아 헤매야 했다.

박스를 일부러 쏟아 창고를 정리해야 한다는 명분을 만든 나는, 창고 안에서 빨대들을 차곡 차곡 담으며 예의 그 망상에 빠졌다. 그와 그녀가 서로를 향해, 누가 누가 더 빛이 나는가 경쟁하듯 웃어제끼는 그 아름다운 풍경에 나의 단정하고 품위있는 얼굴을 대입해보니, 그다지 잘 어울려 보이지는 않다는 것만은 인정해야 겠다. 쓰라린 사실이지만 나는 인정할 것은 인정하는 사내다.

그렇다고, 이제와 다 늦은 마당에 괜한 고백을 저질러서 상황을 꿀꿀이죽으로 만들고 싶은 욕심따위도 없다. 떠나야 할 때를 알고 떠나는 이의 뒷모습을 얼마나 아름다운가.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하겠지만, 그와 그녀의 사랑을 마음속으로 열렬히 응원하기로 했다. 나는 주연보다 값진 조연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좌우지간, 그런 것들을 차치하고 남은 고민은, 영국의 우중충한 날씨를 닮은 하늘과, 화성 탐사선 오퍼튜니티가 돌아다니며 보내는 메마른 대지와, 암을 유발하는 연기가 가득 뿜어져 나오는 쓰레기 소각장 같은 공기를 모두 뒤섞은 뒤, 나누기 2 (혹은 곱하기 2)를 한 것 같은 내 사랑의 풍경에는, 도대체 누구를 그려넣어야 완성이 된다는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었다. 왜 나는 찬란하고 아름다운 유화로 내 사랑을 그릴 수 없는 것인가. 

이 고민을 근거로 운명을 피고로 삼아 소송을 제소한다면, 배심원들은 분명 만장일치로 나의 억울함에 깊이 공감하여, 판사는 단호한 목소리로 나의 승소를 선언하며 땅땅땅 판사봉을 내려칠 것이 분명하다. 운명이란 놈은 극악무도한 범죄자에 비할만한 형을 선고 받고, 더이상 나같은 불의의 피해자들이 생겨나지 않기 위해 무기한으로 복역을 할 것이다.

억울함에 사무친 마음은 지구 내핵에 근접할 때까지 뚝뚝 떨어져버렸고, 나는 방황하는 킬리만자로의 하이에나처럼 해야할 일을 슬금슬금 미루며 멍하니 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당장 내일부터 다시 돌아가는 근무표를 짜서, 그녀와 내가 마주치지 않게끔 바꿔놓았다. 운명이 나를 거부한다면, 내 있는 힘껏 저주해주리라. 그런 옹졸한 마음에 고양이 선배가 싫어하는 근무타임에 선배를 배치했다. 불만 제기는 단호히 기각하리라.

그렇지만, 그날의 퇴근은 어쩔 수 없이 그녀와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고양이 선배가 출근을 해야 내가 퇴근을 할 수가 있었다. 평소라면 나 역시 자본주의 미소가 아닌, 진심을 담아 제발 나를 바라봐 줘라며 애원하는 듯한 한껏 꾸민 미소를 일발 장전하며 매력을 뽐냈겠지만, 그럴 상황도 기분도 아니었을뿐더러 고양이 선배의 고양이 목소리와 얼굴을 응시하는 순간 나는 다시 그녀의 사악한 매력의 수렁으로 빠져들것 같은 우려가 있었다. 매력포인트인줄 알았던 나의 미소는 일그러진 썩소에 불과했다는 것을 얼마전에야 깨달았기에, 썩소를 걱정하는 것은 당시 행동의 사유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의식하지 않은 채, (그러나 온 신경은 그녀에게 집중하며) 그녀에게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점포 문을 나선 나는, 잘 해냈다며 스스로를 칭찬했다. 진정 모든 것에 초연한 쿨가이의 면모가 내게도 있었다. 이 정도면 꽤 훌륭했다. 줄 수 있는 것이 찝찝함 밖에 없더라도 기꺼이 내주리라, 찝찝함에 더해 그녀와 그의 힘겨운 사랑을 만들어주고 응원하리라, 라는 고얀 심보였지만 나도 항상 성인군자일 수만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정호 선배는 뜻밖의 말을 덧붙였다.

"물어보긴 했는데, 나도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더니, 별 신경 안쓰는 것처럼 보였는데."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내 다답을 듣고 으응~ 하더니 평소대로 돌아갔어. 아니, 그보다 자기 남친 근무는 어떻게 알고 근무시간표를 짜놨냐며 너를 칭찬하던데? 너가 누나 근무를 오전으로 바꿔놨잖아. 누나 남친은 야간 근무자라, 아침에 점포에서 만날 수 있다며 좋아하더라고."

"...뭐라고요?"

이럴 수는 없다. 나의 섬세한 복수 계획이 무참히 박살나는 것을 넘어, 오히려 그 선남선녀 커플에게 호재로 작용했다니. 신이란 녀석은 다른 이들에게는 인자한 풍모를 보이면서, 우째 내게는 아인슈타인의 유명한 사진처럼 메롱만 하고 있는 걸까. 나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끼며, 애꿏은 삼겹살을 불판에 태웠다.

"야 임마! 고기 아깝게 뭐하는 짓이야!"

"놔두라고요. 이렇게라도 해야만 분이 풀리겠어요."

나는 두번째 삼겹살을 젓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검게 그을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손님! 장난하시면 안되죠. 아이구."

지나가다가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장님이 한 소리를 했다. 정호 선배는 나 대신 사과해야만 했다.

"아휴, 죄송합니다. 얘가 좀 정신이 나갔었나봐요. 하하하하"

그렇다. 세상은 내게 이미 죽은 돼지의 잔해 조차도 두 번 죽이는 일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보다, 한 명 더 올거야."

"예? 누구요?"

"지혜있잖아 지혜. 걔 불렀어"

지혜라 하면, 연하의 여성 아르바이트이자 오랫동안 우리 가게에서 근무해온 능숙한 바리스타다. 정호 선배와는 술 친구인 동시에 늘 투닥거리는 사이다.

"설마, 제 얘기한 건 아니죠?"

"야, 마! 하긴 뭘해. 내 입이 그리 싸보이냐?"

나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네."

점포 내에서 도는 어떤 은밀한 소문이든간에, 그에게로 흘러간다는 것은 곧 공공게시판에 써붙여놓거나, 혹은 점포 앞에 소문의 내용을 적은 플래카드를 다는 일과 같은 격의 유포행위였다.

"하..."

시멘트 바닥을 뚫을 듯한 나의 한숨을 듣자, 그는 고기를 씹는 입으로 웃음이 튀어나오는 바람에 사레가 들려 켁켁 거렸다.

"야, 야, 안 말했다니까. 형 못 믿어?"

굳이 대답할 필요를 못 느껴서 나는 삼겹살이나 또 집어들었다.

"어 저기 오네. 야 박지혜. 어여 와 여기야 여기."

레드와인으로 염색한 긴 머리를 가진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알 수 없는 조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이건 백프로다.

정호 선배가 말했다.

"야, 박지혜. 얘가 나 못 믿는다. 내가 너한테 이 자식 얘기 한 적 있냐?"

저런 물음을 한다는 것에 어이가 없어 나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응. 했잖아."

그녀는 웃으며 답했다.

"존나 찌질하다고 욕했잖아"

그런 거까지 세세하게 안 밝혀도 된다고!

"야! 말 안하기로 했잖아!"

"재밌잖아."

참 지랄들을 한다.

"xx 오빠. 너무 걱정하지마 이 오빠랑 나랑만 알아. 근데 오빠가 너무 티를 내니까 다른 사람들이 은근히 눈치를 챈단 말야."

"아니 내가 무슨 티를 냈다고. 나는 평소와 같이 한 점 흐트럼 없는 근무 태세를 유지하는 중이라고."

"말을 말자 말을 말어. 그냥 확 불고 다녀야겠다."

나는, 통찰력있는 반론을 제기하여 그녀를 논리로 제압할까도 했지만, 그녀를 회유하는 것이 향후 좀 더 유리할 것 같다는 냉철한 판단력을 우선 믿기로 했다.

"지혜야. 뭐가 먹고 싶니. 여기 맛있는 거 많더라."

그녀는 한바탕 시원하게 웃고는

"그럼 비싼거 시켜도 되지?"

나는, 생살이 도려지는 아픔을 느끼며 답할 수 밖에 없었다.

"콜"



그후로 한 시간 동안, 그녀는 자신이 마치 이 땅에 돼지고기를 말살할 역사적 사명을 품고 태어난 이처럼, 사정없이 고기를 결단내고 있었다. 고기를 굽는 선배의 페이스도 그녀의 젓가락질에 맞춰서 빨라질 수 밖에 없었다. 세 명이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이 자리에 모인 건지 의미를 상실한 채, 주변과는 독보적으로 다른 공기가 우리 테이블에만 넘쳐흘렀다. 나는 골똘히 그 모습을 관찰했다. 고기 굽기 장인과 고기 먹기 장인이 살아온 인생과 프라이드를 걸고 펼치는 운명의 한판 승부! 비장함이 흘러넘치는 광경에 불판을 갈아주는 직원도, 판이 아닌 사람의 열기에 놀라 흠칫했을 것이다. 

평소같은 때였다면 나는 이 광경을 웃으며 중계했을 것인데, 나는 침통한 표정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돼지고기들은 나의 지갑을 제물로 삼고 그녀라는 신에게 봉헌되고 있었다. 죄 없는 고기를 검게 그을린 죄가 이것이라면 지나치게 가혹한 것이 아닌가. 국가인권위원회나 과거사진상조사위원회에 진정서라도 해야 할 지경이다. 

"아휴, 배부르다. 오빠 잘 먹었어요."

그녀는 만족함에 젖은 촉촉한 눈빛으로, 설거지하시는 직원들이 매우 칭찬할 정도로 깨끗이 비워진 불판을 쳐다보더니 갑자기 존댓말을 쓰며 그렇게 말했다.

"이걸로 된거지?"

"음...뭐, 그렇다고 하지."

"뭐야 그 미덥잖은 말은!"

"어? 이 오빠봐라."

"이 정도면 만족해야지!"

"어머, 오빠. 나 쉬운여자 아니야. 그런 식으로 나오면 곤란해"

시련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것인가.

"소화도 시킬겸 커피라도 마시러 갈까?"

"그래 그래. 그러자. 물론 오빠가 쏘는거지?"

나는 유니세프 광고에 나오는 아프리카 소년의 눈빛을 가득 담아, 정호 선배를 향해 구원 요청을 보냈다. 그러나 그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모두다 한통속이다. 이 때 깨달았어야 했다.


까짓것, 고양이 선배를 좋아했던 과거사가 밝혀지는 게 차라리 덜 손해보는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일주일치의 생활비가 사라진 것은 둘째치고, 지나치게 굴욕적이다. 요즘 아르바이트들은 도대체 매니져를 어떻게 보는건가. 나는 사장의 조언을 다시 떠올렸다. 

그런 생각을 하며 카페를 향해 걷고 있는데, 틈만 나면 티격태격해서 남이 보면 유산 분배를 놓고 싸우는 남매나 혹은 여당 야당 각 의원의 보좌관들로 오인할만큼 잠시라도 말다툼을 멈추지 않았는데, 이 날따라 유난히 둘의 사이가 좋아보인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냥 좋아보이는 게 아니라, 나를 멀찌감치 두고 지들끼리 자그맣게 웃고 떠든다. 나는 그저 그들의 놀림감으로 전락한 처지를 비관하고 있을 뿐이었다. 으레 그런 결론밖에 낼 수 없었다.

그러나, 커피를 동시에 홀짝이던 둘이 그 다음 내놓던 말은, 내게 초신성 대폭발에 비할 법한 충격파를 주었다.

"우리 둘이 사귄다."

정호 선배는, 어린 날의 도둑질을 고백하는 사람처럼 털어놓듯 말했다. 나는,

"아, 이제 그만 놀려요. 적당히 좀 하자구요."

"거봐, 역시 안 믿잖아."

정호 선배는 그녀를 그윽히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말투가 지나치게 그윽하다. 이에 호응하듯, 그녀 역시 평소의 그 앙칼진 말투는 어디다 내버렸는지,

"자기가 평소에 워낙 뻥을 많이 쳤어야지."

라는 것이 아닌가. 아무래도 아까 둘이 속닥거린 것은, 이 파렴치한 작당 모의를 위해 거사 계획을 짜던 것이 틀림 없다. 둘의 웬수같은 사이도 나를 골려먹기 위해선 극복이 가능한 것인가. 유엔은 이 상황을 면밀히 조사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경우에 적용할 만 하다.

그런데, 대뜸 선배는 그녀의 어깨를 한아름 감싸안으며 말했다.

"일주일정도 됐어. 그치?"

어깨를 감사안는 손짓에 호응하듯, 그녀는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며 답했다.

"오빠가 매니져 언니한테 푹 빠져있느라 우리 상황이 눈에 안들어왔겠지."

콩트도 도가 지나치면 감정싸움이 난다. 나는 슬슬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아이 거 참, 남사스럽게 꼭 그런 짓까지 해야겠어요? 안하던 짓 하면 급사합니다 급사. 그리고 지혜 너도, 고기 만찬에 커피까지 쐈는데 대체 내가 뭘 더 해야하냐고! 너 북한에서 왔냐. 왜이리 심보가 고약해"

나의 호된 질책에도 그들은 여전히 서로를 향해 눈웃음을 만개한다. 만개하다 못해 이대로 눈이 찢어져 영원히 한 일자로 살아갈 기세다. 

그러니 나의 흔들림없는 의심의 눈초리도 차츰 무뎌질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이상하긴 했다. 뜬금없이 사내끼리 의기투합하는 시간에 지혜를 부르질 않나, 둘이 단 1회의 회전없이 천하제일고기대회를 열지 않나. 그래도 말이나 되어야지. 차라리 남북통일이 더 현실적있는 가능성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의 송곳같은 질문에 답하는 둘의 태연하고 단호한 태도는, 결국 남북통일이 이 세상에 남은 마지막 난제라는 것을 증명하는 사실확인을 해주었을 뿐이다. 그렇다. 둘은 아무래도, 파렴치한 사이가 되었음을, 나는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자동차가 시속200km로 나의 뒤통수를 향해 돌진해오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분기탱천하여 이렇게 논할 수 밖에 없었다. 이어질 말이 다소 구차한 것은 독자제현의 양해를 구한다.

"그러니까, 둘이 맨날 싸움박질해서 내가 어거지로 중재를 해야했던 과거는 헌신짝처럼 내팽겨치고, 그렇게 됐단 말이지. 나보고 이 사실을 받아들이란 거지? 아니,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것인가. 축하는 일단 하겠는데, 그럼에도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 있다 이거지."

나는 논변을 이어갔다.

"먼저, 석달 전에 선배가 지혜한테 꿔간 20만원. 그거 갚았어요? 그거 갚기 싫어서 지혜랑 사귀기로 하고 그냥 뭉개려는거 아녜요? 그리고, 나랑 둘이 있을 때 지혜가 멍청하다는 둥, 쓸데없이 가슴만 크다는 둥, 그렇지만 어떻게 한번 해보려고 해도 안 설 정도로 여자라는 생물이 아니라 무생물을 대할 때의 느낌이 든다는 둥, 온갖 부도덕한 말을 해놓던건 또 뭐냐구요! 세상에 선배랑 지혜만 남는다면, 차라리 돌로 아랫도리를 내려치고 무성욕자가 되겠다고 했잖아요. 벌써 잊은거에요?"

그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지혜 너도 말야. 나한테 '절대 오빠랑 근무 붙여주지 마세요. 근무 붙이면 깽판놀거야'라고 나한테 카톡 보냈던 거 기억안나? 정호 선배가 술 만땅 취해서 술주정 부릴 때, 나한테 전화해서 도와달라고 불러놓고, '다시는 이 인간이랑 술 먹으면 내가 사람이 아니다'라고 한 것도 기억안나? 정호선배보고 쓰레기 매립장에서도 수거하지 않은 인간 쓰레기라며, 그건 좀 심했다는 나의 반론에 도리어 화를 내며 나도 한통속이라고 욕했었잖아! 기억안나냐고!!"

그녀 역시 그저 웃을 뿐이었다.

"세상에는 말이죠. 순리라는 게 있어요. 그게 자연의 이치인지 물리법칙인지는 알게 뭐야지만, 아무튼 그런게 있다구요. 예를 들면, 자석의 양극은 붙을 수 없고, 빛보다 빠른 물질은 없으며,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1 더하가 1은 귀요미, 아니지, 1 더하기 1은 2다. 뭐 이런 것들 말이죠. 어느 날 갑자기 어떤 협회나 미국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열며 "고심끝에 1더하기 1은 2가 아니라 3으로 하기로 결정했습니다"라고 발표한다든가, 아니면 유럽연합에서 표결을 거친 후 "이제부터 물은 아래에서 위로 흐르는 거라고 결정합니다." 라는 발표를 지들 멋대로 한다면 세상이 어떻게 되겠어요? 엉망진창이 되겠죠? 일대 혼란이 벌어져서 세상의 종말이 벌어질 거란 말이죠. 요는, 둘이 그런 사이가 됐다는 것은,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인 성질의 것을 아득히 넘어선, 순리에 어긋나는 일이라 이겁니다. 아무리 명왕성이 인간 마음대로 태양계에서 퇴출되었다고 해도 적당히라는 게 있다는 겁니다!"

공자님도 울고 갈 논리정연한 나의 연설에, 정호 선배는 답했다.

"웃기고 있네. 그냥 배알꼴려서 그런거 아녀."

세상이 도대체 어찌되려는가. 나는 더욱 암담해질 수 밖에 없었다. 옛 성현들이 피를 토하며 후대에 전해주려 했던 '순리를 지키며 사는 법'이 실종된 현대 사회의 폐해가 절절히 느껴졌다. 조선일보를 읽는 어른들이 젊은이들을 지켜보며 쯧쯧대는 것도 나름의 이유가 다 있다.


절박한 심정으로, 순리대로 돌려놓으려는 나의 일장연설을 궤변이나 분풀이쯤으로 받아들였는지, 둘은 커피를 마시자마자 자리를 나섰다. 나의 이의제기는 그녀의 코웃음으로 각하되었다. 속절없이 둘을 따라 가게를 나와야만 했다.

"이제 어디 가지?"

그녀가 말했다.

"어디 가긴 어디 가! 2차 가야지! 신에게는 아직 할 말이 남았나이다!"

나는 단호하게 답했다. 어째 대답이 없다. 정호 선배는 잠시 멋쩍게 머리를 긁더니, 내게

"야, 담배한대 피자"

며 나를 으슥한 뒷골목으로 끌고 가는 것이었다. 논리에 대응하여 폭력을 쓰려는 건가. 나는 독립투사의 의연함을 떠올리며 결코 굴복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선배의 이어진 말은 그런 것들과 거리가 멀었다.

"저, xx야. 사실은 우리가 이제 모텔을 갈건데 말이지."

"......"

"그니까 먼저 들어가."

"......?"

"아, 고양이 선배 건은 걱정하지 말고. 어여 집에 가서 푹쉬어라. 내일 출근해야지."

그러는 그쪽은? 이런 반문이 나오려고 했으나, 상황에 이렇게 되자 나는 깨달을 수 밖에 없었다. 

이들에게 있어 순리가 아닌 것은, 오히려 내 쪽이었다.



내가 우스꽝스러운 아이돌 출신 배우처럼 부자연스러운 대사로 출근을 핑계대며 집을 향해 걷자, 그녀는 아쉬운 어투로 (그러나 표정은 매우 밝았다.) 배웅 인사를 했다. 덕분에 고기 잘먹었다는 인사도 덧붙였다. 3초 정도 나를 배웅하던 그 둘은, 이 순간만을 애타게 기다려왔다는 듯 몸을 돌려 인파를 헤치고 음속과 견주듯 나란히 걸었다. 나란히가 아니라 아예 하나로 합쳐서 걸었다. 오늘 밤 둘이 실행하려는 합병 계획을 벌써부터 연습하는 듯 보였다. 불꽃튀는 법리 싸움과 투자자들에 대한 설득, 또는 각자의 손해와 향후 기대되는 이익을 철두철미하게 계산하고 실행에 옮기는 합병 계획이 아닌, 무지의 소치이자 지극히 동물스러운 감정으로 행해지는 무계획적인 합병계획이 둘 사이에서 일어날 예정이다. 

괘씸한지고. 괘씸한지고. 씩씩 거리며 그 둘이 향하는 모습을 외면하며 나의 길을 걸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말은 이런 때에 쓸 만한 말이다. 그릇된 결정과 휘발성 감정들이 엉키는 류와 어울리는 것은, 때로는 이처럼 배신감에 치를 떠는 상황도 견뎌내야 한다. 알고는 있지만, 그럴 때마다 받아들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인간에 대한 선한 시선을 가지고 바라보려 하지만, 비겁하고 치졸한 행위를 마주할때마다 정의로운 분노가 치솟을 수 밖에 없다. .

도대체 무엇이 파렴치한 짓이냐고 되묻는 다면, 답변은 일단 보류하고 집에가서 숙고한 뒤 반론장으로 제출하겠다. 좌우지간, 나는 대상을 잃은 분노에 휩쌓여 길을 걸었다. 어라, 어쩐지 데자뷰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기분탓이리라. 

그렇게 길을 걷다, 나는 사라지려 하는 대상을 다시 세우기 위해, 멈추고 몸을 돌렸다. 그들이 향한 모텔의 간판이 영롱히 빛나고 있었다. 방황하는 분노가 다시 의지를 추켜세우려는 순간, 만실을 알리며 모텔의 불이 꺼졌다. 나는, 온몸에 힘이 주욱 빠지며 현자타임에 빠져들었다.

남은 건, 봉투 녀석이 쏟아낼 잔소리에 대한 걱정뿐이었다. 여기에 남는 것도 두렵고 집에 가는 것도 두렵다. 이 길 잃은 양은 어디로 가야 하나이까! 전봇대의 신에게 빌어보았지만, 날파리만 꼬여들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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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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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만의 휴일이다. 2주 연속이나 휴일없이 근무를 해야만 했다. 사장이란 사람은 마치 조선시대의 악덕 아전처럼 생겼고, 그런 행동을 했다. 그 덕에 알바들과 직원들을 어렵게 구해도, 금방 관두고 말았다. 죽어 나는 것은 나 뿐이었다.

모처럼 만의 휴일이지만, 딱히 할 일은 없다. 기분 전환 삼아 방 청소를 해볼까 생각하다가, 어쩌면 그것이 봉투의 생명을 위협하는 일이 아닐까는 걱정이 들어,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곧 관두었다. 당장이라도 대청소를 하고 싶지만, 일단은 말 벗의 안위를 당분간 걱정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적응이 되셨고만?"

"뭘?"

"이 몸의 존재와 이 상황을 말야"

"며칠 동안을 이러고 보냈는데, 이게 꿈이라면 내가 혼수상태에 빠진 거겠지."

"잘 생각했다. 상황이 어쨌든 일단 받아들이고 보는 것이 현명한 법이지."

녀석과의 기묘한 동거가 이어진 지도 어언 일주일째. 분명 이번 휴일은 뭔가 값지게, 기왕이면 지구와 인류 평화에 도움이 되고, 몇없는 내 지인들과 사랑하는 가족들에게도 뿌듯하며, 나아가 사랑의 결실을 맺고 장미빛 청춘 라이프에 응하는 우연한 만남을 이루리라 다짐했건만, 지난 휴일과 지지난 휴일에 그러했듯, 오늘도 방콕의 신세를 면하지 못한다.

"그러지말고, 심부름이나 좀 다녀와라."

웃을 일이다. 봉투 주제에 뭐가 필요하다고,

"나는 필요한 것이 없지만, 이 방이 원체 더러워서 안되겠단 말이지."

"뭐냐. 방 청소하면 너 죽는거 아니야?"

"죽긴 누가 죽어. 너는 봉투가 죽는다는 소리 들어봤냐?"

"청소야 뭐 금방 하지. 나는 그저 너의 안위를 걱정한 것 뿐이라구"

"이 몸은 걱정하지 말고 청소나 좀 해라.

그래, 오랜만에 청소나 해볼까. 하지만 오늘은 휴일이다. 휴일은 쉬는 날이다. 청소는 직장에서도 열심히 하니, 집에서는 좀 쉬고 싶다. 언제 또 휴일이 올지도 모르는데.

나는 잠시나마 청소라는, 나답지 않은 무익한 짓을 하려고 했던 것을 반성하며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스프링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침대가 괴성을 낸다. 침대를 괴롭히는 바로 이 느낌, 그래 휴일은 이런 맛이 있어야지.

"그럴 줄 알았다."

"청소는 다음에 해도 되지만, 쉬는 건 오늘이 아니면 못한다."

"조악하기 짝이 없군."

"결심했다. 오늘은 그동안 적금 대신 차곡 차곡 외장하드에 모아둔, 물 건너온 예술영상들을 보면서 한없이 빈둥거릴거다."

"세상에 너 같은 놈들만 살았다면, 지구는 일찌감치 쓰레기 더미가 태평양을 가득 메우고도 남았을 거다."

"잔소리하지마.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나는 오늘 한없이 빈둥거릴테다. 김정은이 핵폭탄을 쏴도 빈둥거릴거야."

빈둥거리는 일에 이유는 불문이다. 세상을 산다는 것은 옳은 일과 필요한 일을 선택해야 하는 것의 연속이지만, 빈둥거리는 것은 여하고문하고 둘 다에 속한다. 숭고한 아름다움까지 느껴진다.

어차피 누가 찾아오지도 않지만, 혹시나 모를 불상사에 대비해 서랍 깊숙한 곳에 숨겨놓은 외장하드를 꺼냈다. 주인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린 녀석의 반짝거림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동안 틈날때마다 모아놓은 작품들이 이 작은 네모난 녀석 안에 담겨져 있는 것이다. 이 어찌 훌륭한 휴일이 아닐쏘냐! 

나는 본격적인 감상을 위해 심신을 단정히 가라앉힌 채, 무사가 칼을 뽑듯 헤드셋을 끼려고 한 찰나,

"그럼, 최소한 문 앞에 놓인 쓰레기 봉투라도 내다 버리는 게 어떠냐?"

는 말이 들렸다. 그 말은 퍽, 외면할 수가 없었다.


쓰레기봉투를 살 때는 항상 고민이 된다. 100리터의 호쾌함과 20리터의 귀여움 중 무엇을 선택해야하는가. 100리터는 성인의 품처럼 너그럽고 광활해서, 이 방의 모든 쓰레기들을 능히 품고도 남을 넉넉한 품을 지닌 반면, 20리터는 앙증맞고 귀여울 뿐 아니라, 쓰레기들을 차곡 차곡 담아야만 하는 불편한 속성까지 지니고 있어, 가계 경제에 도움이 되는 녀석이다.

나는 항상 고민하다가, 20리터를 사서 100리터 봉투에 담듯 대충 던져놓는 중재안을 택했다. 그러다보니 꽉 차지도 않은 헐렁한 봉투 세 개가 문 앞에서 입구가 봉해진 채, 나처럼 늘어져 있다. 문을 나서고 들어올 때마다 외면했던 것이라, 녀석의 말을 흘려보낼 수만은 없었다. 인간적으로 버릴 때가 되긴 했다.

"대낮부터 그런 불온영상을 보는 건 건강에도 좋지 않다. 쓰레기 봉투도 버리고 빨래도 좀 돌리면 내가 유익한 정보를 알려주도록 하지."

"정보? 봉투주제에 뭘 안다고"

"이 몸이 어떤 존재인지 다시 설명해야 하나. 나는 꽤 많은 것을 알고 있느니."

일주일이나 지났지만, 녀석의 도사풍 말투는 여전히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익숙해지지 않는다는 말은 주의 깊게 들을 수 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고민하는 나에게 녀석은 한마디를 덧붙였다.

"고양이 선배에 대한 정보다."

나는 용수철처럼 침대에서 튀어올랐다. 살짝 먼지가 일어나, 다시 제각기의 위치로 분배되었다.


쓰레빠를 찍찍 끌고 쓰레기를 후딱 버린 뒤, 세제와 섬유유연제를 탈탈 털어놓고 세탁기를 돌렸다. 기왕지사 움직인 거 인심 쓴다 생각하고 널브러져 있는 몇개의 봉투를 주워담았다. 일주일 분량의 청소는 대략 마친 것 같다. 

녀석이 사오라고 시킨 생필품들을 사오고 방 크기에 비해 쓸데없이 큰 빨래 건조대에 대충 빨래들을 널어놓고 난 뒤, 나는 녀석의 앞에 정좌하고 물었다.

"약속대로 정보를 내놓아라."

"엊그제, 겹치는 휴일에 커피라도 한 잔 하자는 너의 말에 고양이 선배가 선약이 있다며 거절했지? 그 선약은 깨진 것 같다. 지금 가면 아마 꽤 유익한 대화를 나눌 수 있을껄?"



고양이 선배에 대한 얘기를 아무래도 좀 해야겠다.

고양이 선배라는 별칭은, 그녀가 고양이를 닮아서 붙인 나만의 별명이다. 아는 사람은 그동안 나 뿐, 이제 봉투 녀석도 알게 되었으니 둘이 되었는가. 좌우지간 그녀는 고양이의 귀여운 외모를 간직한 소유자이자, 동시에 고양이의 그 까칠함까지 같이 보유한 사람이다. 고양이가 인간으로 둔갑해 돌아다닌다고 해도 크게 놀랄 것 같지는 않다. 

고양이 선배를 알게 된 것은 1년 전, 카페에 취직을 하고 부터였다. 선배는 답답하고 어리숙한 나를 꽤나 답답해 했다. 그래서 제일 무서웠던 선배인데, 일이 능숙해지고 꽤나 밥값을 하게 되자, 선배는 도리어 내게 많은 부분을 의지했다. 일적으로도 사적으로도 그러했다. 선배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듣는 밤은, 무료하기로 치면 갓 나온 백색 도화지같은 내 일상에 있어, 하나의 빨간색, 아니 핑크색 점에 가까운 밤이었다.

그녀의 시간에서는 전혀 다른 것이었겠지만.

이번 주, 어쩌다 보니 휴일이 겹치는 희귀한 상황에 놓이게 되어, 나는 내가 짠 근무 시간표를 들여다보며 며칠을 고민했다. 영화라도 보러 가자고 할까. 그건 좀 그런가. 아니면 차나 마시러 가자고 할까. 신사답고 품위있게 커피를 홀짝이며 선배와의 커피 향기나는 시간을 보내볼까. 는 고민들로 본업을 대충 뭉게다가, 어제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말을 꺼냈지만, 선약이 있다는 말을 듣고 시무룩 모드로 빠져버렸다. 이런 일이 익숙해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며칠간 좌절 모드로 우울해했을 것이다.

그녀를 사모하게 된 경위는 이러하다. 여느 때와 같은, 혼란하고 바쁜 카페 일이 거의 마무리 되고 손님도 거의 찾지 않는 마감시간, 그녀는 문득 내게 말했다.

"xx는 어떤 동물을 좋아해?"

뜬금없는 질문에 나는 속마음을 들킨 것처럼 잠시 당황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고양이를 좋아해요."

그녀는 그 말에, 세상의 모든 성녀들의 웃음을 총합한 듯, 한껏 빛나는 미소를 지으며 "역시 그렇구나. 그럴 줄 알았어.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티가 난단 말이지. 나도 고양이 좋아해."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우주 공간에서 태양을 직접 바라보면 실명한다고 한다. 나는 그 미소에 실명할 뻔했다. 그리고 즉시 깨달았다. 고양이를 좋아한다는 나의 말은, 사실상 "선배를 좋아해요"라는 고백이었다는 것을. 이미 나는 그녀를 사모하는 불측한 마음을 어느 순간부터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 후로 연애사업이 잘 되었다고 하면, 내가 이런 글을 쓰고 있을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녀를 사모하는 마음을 깨달은 후부터, 어쩐지 나는 그녀를 대하는 일이 어렵고 어색했다. 천진난만한 웃음을 지으며 농담을 주고 받던 것도 어렵고 낯설었다. 나는 그녀의 미소를 볼 때마다 음료를 만들던 컵을 잠시 내려놓았다. 언젠가 불현듯 찾아온 그 미소에 컵을 떨구고 깰 뻔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루를 견디고 나면, 정호 선배와 함께 술을 마시며 하소연을 하곤 했다. 그는 내게

"그러고 있으면 떡이 생기냐. 사내가 말야 일단 한번 부딪히고는 봐야지. 그러고 있다가 딴 놈이 채가면 그 때는 술 사달라고 하지마."

그랬다. 그의 말대로, 그녀는 손님들에게서나 다른 남자들에게서나 인기 만점이었다. 손님들에게 번호를 따이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적인 일이었고, 어떤 날은 바빠 죽겠는데 장미꽃 한아름이 배달되 손님들과 직원들의 시선을 강탈하는 일도 있었다.

그녀는 그 모든 것을 귀찮아했지만.

"선배, 나만의 후리함이 있다구요. 원래 어렵고 힘들고 간절하게 얻은 사랑일 수록 빛이 나는 법이죠."

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울고 갈 인내심으로, 불측한 감정을 가지고 접근하는 모든 남자들에게 얼음성처럼 냉혹하고 도도한 그녀의 마음에 불을 지피는 중이었다. 다른 어리석은 자들이 그녀의 성 근처에도 못가고 얼음에 미끄러져 낙오해 갈 때, 나는 열심히 부채질을 하며 나만 들어갈 수 있는 입구를 녹이고 있었다. 

이런 내 깊은 속뜻을 설명하자 선배가 말했다.

"라이터로 지진다고 얼음 성이 녹냐? 녹아?"

그러고는 소주를 들이키며 술집이 떠나가라 웃는 것이었다. 반박은 하고 싶지만 어쩐지 명쾌한 말이 나오지 않아, 분한 마음을 삭히고 나도 소주를 들이켰다.



그렇지 않아도 지구 평화와 (중간생략) 청춘 러브 라이프에 조금이나마 가까운 행위를 하며 휴일을 채우고 싶었던 바, 나는 녀석이 내준 정보를 믿고 꽃단장을 마쳤다. 책이라도 한 권 들고 가야겠다. 느긋한 휴일에 모자란 지식을 쌓으며 보내기 위해 카페를 들렀다가, 우연히 마주친 것처럼 선배를 만나는 게 좋을 것이다. 

봉투 녀석에게서 들은 정보를 따라 찾아간 카페가 눈 앞에 보였다. 주인의 뜻을 알아차리지 못한, 아니, 너무 잘 알아차려서 시키지도 않은 짓을 벌이고 만 심장이, 늑골을 깨버리고 튀어나올 정도로 요동쳤다. 고구려가 요동을 치던 기세가 바로 이 것인가. 심장이 전해주는 에너지는, 쌓인 피로들이 지배했던 육신을 재설정하여, 아드레날린이 샘솟는 육체로 바꿔주었다. 나는 머릿속으로 근사하고 신사다운 말들을 준비하고, 그녀가 좋아할만한 이야기와, 그녀가 좋아하는 케이크를 사주기로 마음을 먹고, 다시 발을 딛었다. 

유리창가로 그녀의 모습이 비쳤다. 고양이를 닮은 속눈썸이 닫히며 깜박, 그리곤 반짝이는 눈동자가 다시 열린다. 그녀는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손과 그녀의 눈길을 누구보다 가장 많이 받고 있을 핸드폰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같이 촉촉한 터치를 느낄 수 있을텐데. 나의 섬세한 하트는, 이미 그런 불측하고 경망스러운 망상들로 가득차, 고작 몇 미터의 거리를 걷는 동안 여러 차원을 여행하는 사람처럼 내밀한 시간을 거쳤다.

한껏 준비된 미소를 일발 장전하고 문을 열었다. 그런데

"...그래서 있잖아. 자기랑 여행가기로 약속한 거 때문에 휴가 내야 한다고 했지."

"아! 역시, 기억하고 있었구나?"

"당연하지. 자기랑 한 약속인데. 나도 여행가고 싶다고 전부터 졸랐었잖아."

"다행이다. 내가 그잖아도 자기가 좋아할 만한 펜션 몇 개 봐둔 거 있어."

내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그녀는 핸드폰을 보던 고개를 들어 앞을 보았다. 그 앞에는, 못 보던 남성이 있었다. 그의 훤칠하고 잘쌩긴 면모와, 우롱차를 녹여낸 듯한 그윽하고 깊은 음성을 듣자, 나는 순식간에 쪼그라드는 기분이 들었다. 쪼그라들고 쪼그라들어서, 애벌레나 번데기나 민달팽이에 비할 법한, 볼품하기 짝이 없어 그가 의도치 않게 짓밟고 가도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하고 꾸엑 죽어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상황에 놀라 잠시 서 있는 나를 발견하고, 그녀가 말을 걸었다.

"어? xx야, 무슨 일이야?"

...아, 선배, 잠깐 책 읽으려고 카페 왔어요."

"아~ 그래? 무슨 책이야?"

나는 더듬대며 책 제목을 살짝 보여줬다.

"...하여간 진짜 재미없는 것만 읽어요. 인사해, 내 남친님이야. 자기야, 이 쪽은 우리 카페 직원"

"아, 안녕하세요. 말씀 많이 들었어요."

나는 잠시 당황하다가, "아, 예, 안녕하세요."라며, 두더지가 땅굴로 기어들아가는 듯한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그 역시, 태양에 필적할 법한 미소를 가지고 있었다.



그 시간을 어떻게 흘려보냈는지 모르겠다. 나는 구석에서 쪼그려 책을 활짝 펴놓고, 활자보다 곁눈질로 그녀와 그를 훔쳐보다가, 이러다간 번데기가 아니라 박테리아나 세균 수준으로 작아질 것 같은 자괴감이 들어 그 자리를 파했다. 몰래 후문으로 나가 터덜터덜 걸었다. 이미 노을은 짙어져 휴일이 끝나감을 알리고 있었다. 장미빛 청춘 라이프는 개뿔이나. 어찌하여 신은 내게 이런 쓰라림을 주시는가. 이에야스가 틀렸다. 틀렸다고!

겁없이 길가에 나와있는 돌맹이를 걷어 차봤지만, 하필이면 엄지발가락에 맞는 바람에 눈물이 날 듯 아팠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세균까지 작아졌던 내가 번데기 정도로 회복되자, 마취제를 맞은 듯 정지했던 뇌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나는 왜 이런 수모를 겪어야만 했나. 나는 왜 물 건너온 예술 영상들을 탐미하며 금쪽같은 휴일을 한없이 잉여스럽게 빈둥거리지 못하고, 이런 못 볼 꼴을 봐야만 했나. 뇌는 말했다. 봉투 때문이라고.

나는 분노와 원통에 휩쌓여 구천을 떠도는 악귀마냥 걸음을 옮겼다.


"첫째는, 이런 구라라도 안 치면 네놈이 평생 청소를 미루다가 먼지에 질식사할 것 같은 노파심 때문이었다."

가공할 만한 분노에 휩쌓여 철문을 부술듯한 기세로(그러나 엄지발가락을 희생하며 느낀 교훈을 토대로 중요한 순간엔 섬세한 스냅으로 문을 열었다.) 방에 들어가자, 불문곡직하고 봉투가 말했다.

"너, 요즘 좀 위험했다고. 밀린 청소량이 한계 수준이었단 말이다."

그건 안다. 하지만 굳이 이렇게까지 사람을 절벽으로 밀어야 하나! 나는 차분히 반론을 준비하며 녀석의 무도한 행위를 비난하려 했다.

"둘째는, 네 놈의 헛짓거리를 끝내기 위함이었다."

나는 순간 정지했다.

"네 녀석은 '자신만의 사랑법' 운운하며 그 길이 마치 참된 사랑의 길인양 말하고 있지만, 실상은 그녀와의 해피엔딩은 자신이 없고, 털어놓자니 친구인 그녀도 잃을 것 같고, 아무 것도 잃기 싫어서 차일피일 시간을 떼우고 있을 뿐이었잖냐. 네 녀석이 나름대로 목표를 향해 접근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 카페 앞의 그 남자는, 네가 그녀를 품에 두고 있던 시간의 5분의 1만에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고 연인이 되었다. 네놈이 라이터로 얼음을 녹이고 있을 때, 그는 쇄빙선을 가져와 얼음을 박살내버렸지."

녀석은 말을 이었다.

"'우연히 휴일이 겹치는' 날을 맞이하고도 고작 그 정도 일 밖에 하지 못하는 네 놈을 며칠간 지켜보면서 나는 결론을 내렸다. 네 녀석은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그 '우연히 휴일이 겹치는 날'도, 네놈이 굳이 안 해도 되는, 2주동안 휴무 없이 근무를 하면서 억지로 맞춘 것이 아니었냐. 그토록 지랄을 해놓구선 고작 그 꼴이라니. 내 욕 할 것 없다. 다 네 놈의 어리석음이 빚은 일이로고. 내게 죄가 있다면, 네 놈의 어리석음을 마주할 거울을 갖다 준 죄 뿐이다. 사형집행인에게도 살인의 죄를 물을 셈이냐?"

녀석이 말을 마쳤다. 조곤 조곤, 어조의 변화 없이 내뱉는 녀석의 말들 사이로, 봉투를 갈기 갈기 찢어버리는 내 모습이 언뜻 비쳤다. 나는 상상에 이끌리듯 가위를 꽂아둔 책상 위로 나아갔다. 순간, 책상 위 거울에 내 얼굴이 나타났다.

내 얼굴에는, 그와 그녀에게 있는 태양빛 미소가 1그램도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있는 힘껏, 한아름 웃어보였지만, 태양빛에 비친 달 정도에도 근접하지 못하는 미소만 지어졌다. 빛나기는 커녕 잿빛이 가득한 달님의 크레이터 같았다.

거울 앞 상대에게 차마 화를 낼 수는 없어, 나는 다시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창 밖에는 노을이 패배하듯 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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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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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하신 카페모카 두 잔 나왔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뭉게뭉게 휘핑크림이 올라가고 그 위에 초코가루가 부시시 올라간 음료를 내밀며 나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최대치의 미소와 함께 자본주의의 그 냉혈한, '내 자신에게는 차갑지만 손님들에게는 따뜻하겠지'라고 가히 말 할 수 있는 엄격한 태도를 몸에 익힌 직장에서의 나의 모습은 필경 도시남이 갖춰야하는 면모를 갖추고도 한참이나 남아, 친절함이 손님들과 직원들에게 흘러넘치는 이 어두컴컴한 세상에 긍정의 빛을 전도하는 '긍정 전도사' 정도의 레벨에 근접했다고 하겠다. 일단은

어찌하여 이 곳에 도래했나. 회고해보면 그것은 참으로 치밀하게 짜여진 인생 플랜의 한 과정을 수행하기 위한 선택임이 분명하다. 스무살 무렵, 그 이름과 얼굴을 떠올리면 가슴에 한 줄기 서늘한 감정이 여전히 무덤처럼 남아, 그 앞에 세워진 묘비에 "소년이 남자가 되었도다" 따위의 묘비명이 써져있어 괜스레 어깨가 펴지고 어떤 사랑의 생채기에도 담담히 견뎌낼 수 있을 것 같은 체험을 한 그때에, 어느날 '로마의 휴일'이라는, 동명의 영화에서 이름을 따왔을 것이 분명한 그 카페에 갔던 날에서 비롯되었다. 

그녀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던 차, 땡 소리를 내며 엘리베이터가 열리자, 그곳은 잠시 무릉도원 같았다. 뽀샤시한 화면에 잘생긴것처럼 꾸며진 남녀들이 하하호호 웃으며 행복의 에너지를 무한 생성하고 있는 드라마 화면 같았다. 아마 사랑이라는 어설픈 감정에 취해있던 탓에 환각작용을 겪은 게 분명하다. 분명 그때의 나는 고고한 선비의 자세를 잠시 잃었던 바, 깊이 반성하고 있다. 어쨌든 수백차례의 회의를 통해 세웠던 인생 플랜은 그날의 환각으로 인해 갑자기 '카페에서 일한다'라는 문구가 추가되었다. 

차라리 카페를 주제로 한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으로 만족했어야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래로, 조금씩 돈 버는 일은 했지만 매일같이 출근하는 제대로 된 직장에는 첫 출근이었던지라, 나는 갓 자대에 전입한 이등병처럼 꼿꼿한 태세를 유지했다. 선배들에게는 깍듯이 선배님, 손님들에게도 90도 인사, 물론 사장님에게는 내 안에 담겨진 윗사람을 공경하는 마음을 가득 담은 자세를 취했다. 혹자는 비굴해보인다는 비판을 제기했으나, 그것은 그들의 예의범절이 아득히 높은 나의 수준을 이해하지 못함에서 도출된 잘못된 결론이리라.

사실은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설거지조차 몇번 안해봤던 내가 난데없이 카페 일이라니, 적응이 어려운 것이 당연했다. 애초에 섬세한 손놀림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 바로 직전에는 군대를, 그 직전에는 노가다를 했으니, 매일같이 신입사원 커피잔 파괴 신기록을 갱신하며 모두에게 애물단지 취급을 받았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그보다 더 괴로웠던 것은, 컵 하나를 깨고 나면 사무실로 불려가 사장의 교장쌤의 훈화말씀은 가볍게 이기고 신임 대통령의 취임 연설도 아슬아슬하게 이길 만큼의 일장연설을 들어야 하는 일이었다. 그 뒤로 얼마간, 나는 컵을 보면 깨지는 상상과 그 이후 들어야할 사장의 일장연설이 환청에, 컵을 만지지 못하는 바리스타라는 오명을 뒤집어써야 했다.

참으로 인간미라고는 없는 환경이었다. 몹쓸 인간들.

물론 지금이야 누구보다 능숙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능숙해지기까지 누구보다 힘 세고 강한 노예가 되었다는 사실은 독자 제현은 굳이 아실 필요가 없다고 하겠다. 하지만 직원들에게 존중을 잃지 않는, 영국의 신사도 나의 태도를 보고 모국의 신사도 역사에 대해 짙은 회의감을 불러올만큼 젠틀한 태도를 유지했다. 이를테면, "수정씨, 테이블 정리 좀 부탁드릴게요", "지혜야, 아메리카노 두 잔만 만들어주겠니?" 따위 였다. 그에 반해 같이 일하는 선배 매니져 형은, "수정, 아아 두잔" 따위로 정리하고 있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이란 뜻이다. 저런 편리주의적인 태도는 마땅히 서비스직 노동자로써 옳지 않다는 고고한 신념이 내겐 있었다. 때론 알바애들이 나의 태도 때문이 아닌 아마도 개인적인 사정들때문에 답답해할 때도 있긴 했지만, 다행히도 나는 그들의 개인적인 사정을 모두 이해할 수 있는 넓은 아량을 가진 사람이기도 했다.

답답해하는 횟수가 다소 잦은 것은 신경이 쓰이기는 하지만.

쨍그랑-.

누가 또 잔을 깼다. 이윽고 알바가 찾아온다.

“매니저님, 손님이 잔 깼어요.

어쩌라고. 네가 처리하면 되잖아. 이 여자애는 6개월이나 일 했으면서, 나 없을 때 잔 깨지면 지가 처리도 하면서 나 있을 땐 꼭 나를 찾는다.

“아이고 미안해요. 애기가 놀다 보니 잔을 떨어뜨렸네.”

하나도 안 미안해 보인다. 이 아줌마야.

“괜찮습니다~ 치워 드릴 테니 자리 이 쪽으로 옮겨주시겠어요?”

“엄마 나 마실 거 없잖아. 빨리 하나 더 사줘.”

“응 알았어 알았어. 저기요, 레몬에이드 좀 하나 더 갖다 주세요”

이럴 줄 알았다. 이번에도 진상이다.

“네 알겠습니다. 일단 위험하니까 깨진 잔부터 처리해드릴게요”

“엄마아아아. 나 빨리 저거 마시고 싶어”

“응 진호야 착하지 엄마가 금방 갖다 줄게. 저기요, 일단 음료부터 갖다 주세요.”

깨진 잔 조각 사이로 다른 손님들이 오간다. 이 아줌마도 그렇고 애도 그렇고 당최 의자에서 나올 생각이 없다. 제법 큰 사이즈인 소파가 유아용으로 보이게 하는 이 아줌마와 애의 엉덩이는 이유 없이 만들어 진 것이 아닌 듯하다. 나는 지나가는 알바 직원을 불렀다.

“예슬아. 미안한데 레모네이드 한 잔만 갖다 줄래?”

“저 따른 거 해야 하는데...”

순간 멍해졌다. 울산 바위만큼 부동의 인내심이 잠시 흔들바위로 변할뻔 했다.

“일단 레모네이드부터 해줘. 부탁할게.”

“아... 네”

말꼬리를 흘리며 예슬이는 느릿느릿 바 테이블로 걸어간다.

나는 조심스레 깨진 컵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런데 “으아아앙” 하는 듣기 싫은 소리와 함께 아이가 날 뛴다. 움직인 소파 덕에 깨진 조각이 내 손 끝을 스쳤다. 피가 살짝, 입으로 쪽쪽 빨면 1분 이내로 지혈이 될 것 같은 쥐똥만한 피가 흘렀다.

“어머 어머 피난다. 진호야 옆으로 옮기자 위험해 여기. 다치면 아야 해요. 착하지?”

목 뒤에도 턱에도 육중한 삼겹을 가진 아이는 아직도 ‘빨리 주세요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 라며 피 보단 레모네이드를 찾고 있지만, 정작 내가 현기증이 날 것 같다.

“아니 왜이리 늦게 나와요? 애가 자꾸 보채는데”

“금방 드릴게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다른 데는 금방 주던데 왜 여기는 이러지. 진호야 금방 나온대 조금만 참자~”

“으아앙!! 빨리 줘!!”

아이는 어쩐지 사지를 4D로 움직이며 잔을 깬 본인의 사소한 실수는 금세 잊은 듯 달고 신 맛있는 음료가 눈앞에서, 아니 입 안에서 사라진 것이 지극히 원통함을 온 몸으로 읍소중이다.

“아 계산을 안 해서 늦게 주나. 여기 카드 있어요.

엉덩이가 큰 것이 미인의 기준인 나라였다면 필히 왕비 후보자 3명 안에는 꼭 들었을 아줌마는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어, 테이블에 툭 던진다. 그 두툼한 손가락에서 테이블로 떨어지는 카드는 내 눈에 슬로모션으로 그려진다. 금빛 카드는 배를 뒤집으며 나를 비웃는다. 자신 안에 담긴 금액이 얼마인지 상상이나 되겠니? 라며. 모르긴 몰라도 이 카드라면 나 같은 사람 종신 노예로 부려먹어도 전혀 위법이 아닐 수 있게끔 합리적인 조치를 취할 능력이 있을 것이다.

“뭐해요. 카드 안 받아가고”

“네 고객님”

웃자. 참자. 장사 하루 이틀 하나. 이런 건 아무 것도 아니다.


결국 또 음료가 나오고, 잔을 다 치우고 쏟은 음료를 한참이나 닦은 뒤 소동은 마무리 되었다. 나의 당면한 일일 최대 목표인 ‘오늘은 어떻게 날로 먹지’는 오늘도 실패했다. 소동이 있던 뒤로부터 퇴근 때 까지 온갖 청소를 도맡아 하고, 만들기 복잡한 음료를 홀로 만들고, VIP손님이 오면 직접 갖다 주고, 자재를 발주하고 점검하고 기타 등등 잡무에 시달리던 하루였다. 언제쯤 나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인가.

사장은 늘 내게, ‘너는 전쟁에 나가면 제일 먼저 돌격하다 칼 맞아 죽을 지휘관이야’ 라곤 한다. 그 서두를 시작으로 나는 늘 본인을 닮아야 한다고 역설하는 것이 정해진 레퍼토리. 아마 내가 본인처럼 손님에겐 관대하고 직원에겐 막 대하는 사람이 되길 바라나 보다. 당연한 얘기라서 굳이 지면에 남길 필요는 없지만, 나는 단 한 번도, 추호도 그를 닮고 싶지 않았다. 그처럼 양심의 짐 1g도 없이 '알바들에게 막말하고, 손님을 걸어 들어오는 돈 덩어리로 볼 수 있다면 얼마나 편할까. 그리하면 일은 알바들에게 다 시켜 내 몸은 편하고, 돈 덩어리들이 하시는 말씀을 주님의 은총처럼 여겨 멘탈도 편할 것이다.' 따위의 생각을 하는 뇌세포를 발견하면 바로 나의 긍지높은 직업윤리가 출동, 색출하여 사살했다. 

사장은 자신의 매니저 시절 어떠했는지, 회사 생활 할 때는 어땠는지, 또 선배 매니저들은 어떻게 했는지, 경영이란 어떤 것인지 온갖 주제를 홀로 유영하다 ‘xx야. 여자는 말야. 나쁜 남자들한테 끌리는 법이야. 호덕이 봐라. 저 새끼 성격 개차반인데 알바애들이랑 잘 사귀잖아’ 라며 굳이 확인해 주지 않아도 알고 있는 가슴 아픈 사실을 되새겨주며 말을 맺곤 했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그를 닮는 것은 사양이다. 차라리 퇴사를 하고 말지. 


마감은 늘 새벽 1시다. 이 지역의 경쟁 점포들 중에서 가장 늦게 끝난다. 사장은 늘 ‘11시부턴 남는 거 없어’라면서도 마감시간을 절대 당기지 않았다. 사장의 "11시부터는 남는 거 없어"란 말은 곧, ‘사실 11시부터는 내가 원하는 매출이 안 나오지만 그런대로 봐줄 만하고 또 마감시간 줄이면 너네 근무 시간도 줄어지는데 그럼 인건비가 아깝기도 하고, 또 우리가 제일 늦게 까지 여는 곳이라고 소문 났을텐데 그 타이틀을 버릴 순 없지’라는 의미의 준 말이다. 속물적인 인간, 필경 노후가 편치 못할 것이다! 나는 속으로 그리 저주했다.

빨리 집에 가고 싶지만 내색은 안하고 그저 소파에 몸을 파묻은 채 핸드폰만 만지작거리던 알바들은 먼저 집에 보냈다. 어차피 1시도 넘어서 더 일하면 초과근무기도 하다. 나의 초과근무는 신만이 아실 것이다.

나는 문을 잠그고 터덜터덜 걷기 시작했다. 이층 주택들이 줄지어 가득찬 이 골목길을 30분쯤 걸어야 나의 집에 도착한다. 주머니 속에서 구깃구깃해진 이어폰을 한참이나 풀고 나서야 드디어 귀에 꽂을 수 있었다.

하루의 끝은 이렇게 음악이 함께 해야 한다. 아파트 뒤로 숨었다 사라지는 저 달빛을 바라보며 걷다보면, 내면의 골목 사이를 도깨비처럼 쏘다니며 내게 숨바꼭질 도전을 해오는 거무튀튀한 녀석이 보였다. 달이 나타나면 녀석도 나타나고, 달이 숨으면 녀석도 숨고. 달은 나타날때마다 "네놈 꼴이 그게 뭐냐."고 하고, 내 안에서 뛰노는 녀석은 나타날때마다 "미련곰탱이 같은 놈 얼레 얼레"하면서 쏘다녔다. 내게 핵폭탄이 있다면 한 발은 달에, 한 발은 내 가슴에도 쏘고 싶은 심정이다.

“왔냐.”

흠칫 놀랐다.

불 꺼진 집 문을 남의 집 인두 조심스레 열고, 더듬거려 스위치를 켜면 펼쳐지는 나의 쓰레기장. 그것이 나의 퇴근이었을진데, 당연히 누가 아는 체를 하니 놀랄 수밖에. 이런 일은 이 방에서 산 몇 년 간 내가 평생에 걸쳐 만났던 여자 친구 숫자만큼이나 귀한 일이다.

“보아하니 오늘도 속 좀 쓰렸겠구만”

“안 없어졌냐.”

“안 없어진다니까. 거 자식 사람 말 되게 못 믿네”

그니까 네가 왜 사람이냐고.

“그래서, 오늘은 또 어땠길래 패망한 나라의 왕족마냥 죽을상을 하고 있냐?”

“뭐, 늘 그렇지”

오늘 하루를 줄줄이 털어 놓을까 0.1초 가량 고민했지만, 뭘 굳이 말을 하나. 녀석은 봉투일 뿐이다. 봉투에 대고 약한 척 하는 것도 참 웃긴 일 일 테지.

“너는 참 답이 없는 멍청이로다”

또 시비다.

“나 방금 퇴근했거든? 뭐 안 없어진 거 보니 죽을 때는 안 된 거 같지만, 지금은 죽기 직전으로 피곤하다. 시비걸지마”

“생각이 그 것 밖에 안 되냐? 들어봐라. 너 같이 반쯤은 히키코모리인 녀석이 집에 왔다고 이 몸이 반갑게 맞아 주시는데 네 놈은 당연히 감사해야 한다. 물론 그건 둘째 치고, 이 몸이 좀 더 측은지심을 내어 네 놈의 하루일과를 다 들어주시고 네 놈 속에 있는 그 짜증의 잔여물까지 받아 주시겠다는데 그 속 깊음을 시비로 곡해하다니, 이게 멍청한 게 아니고 뭐냐 그럼?”

어째서 이런 놈이 내게서 나왔다는건가.

“아니 뭐 그런걸 일일이 말하냐. 말한다고 가벼워지는 것도 아닌데”

“웃기고 있네. 누가 좀 들어주세요! 누가 좀 위로해줘요! 매일 밤 길 가는 사람이라도 붙잡고 징징거리고 싶지만 차마 그럴 수 없고,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그나마 몇 없는 주소록을 위로도 올려보고 아래로도 내려 보고 한참 살펴보다 지쳐 잠이 드는 너를 내가 모를 거 같냐?”

정정한다. 아무래도 츤데레는 지나친 과대평가인 것 같고 새디스트에 가까운 것 같다.


“...뭐, 그렇게 된 거지. 어쨌든 그래도 오늘 하루 무사히 갔다.”

“무사히?”

“…….일단 매출도 괜찮았고. 사실 그 소동도 처음 있던 일도 아니고. 덤덤해 이젠”

“그렇군.”

이상하다. 이 녀석의 패턴대로라면 독설이 날아와야 하는데.

“…….왜 말이 없냐?”

“뭐가.”

“분명 이 찜되면 ‘너는 얼빠진 녀석이야‘너는 속도 없는 한심한 놈이야‘ 그것도 아니라면 ‘너는 천하에 적수를 찾아보기 힘든 멍청이야’ 뭐 이런 말 들이 나올 것 같아서”

“바보인걸 아는 녀석에게 바보라 말 하는 건, 바위에게 ‘넌 바위구나?’라고 묻는 것이랑 같은 거다”

명쾌하네.

“뭐, 나는 들어준다고 했지 잔소리해준다곤 안했다.”

“의외네.”

“원래 선생들도 포기한 학생들에겐 잔소리 안하는 법이다”

“풉”

학교 다닐 때 늘 듣던 얘기라서 웃음이 나왔다.

“그러면서 꼭 잔소리 하던데?”

“잘 되새겨 봐라. 정말로 포기한 애를 선생이 어떻게 다루던지.”

생각해보니 그렇다. 용찬이 그 녀석은 아예 학교에서 없는 존재였다.

“어쨌건, 시간이 늦었으니 슬슬 자라. 노예 놈은 내일 출근 준비를 해야지”

“안 그래도 슬슬 잘 꺼다.”

불을 껐다. 핏 하고 형광등이 꺼지자 원체 깜장인 녀석은 어디 있는지 찾아 볼 수가 없다. 아마 이 어둠이 눈에 익게 되면 형태는 대충 볼 수 있겠지.

노트북이든 형광등이든 모든 불을 끄고 자리에 누우면, 오늘 하루가 갔다는 안도감과 함께 왠지 아쉬움이 든다. 하지 말았어야 했거나, 꼭 해야만 했던, 혹은 하고 싶었지만 못한. 그런 것들이 숙제마냥 잔여물로 남아 나를 괴롭히곤 한다. 그리 길지 않다. 피곤에 지쳐 잠이 들기까지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 법이니.

“그런데 말이지”

녀석이 묻는다.

“왜?”

“갈팡질팡하는 네 녀석의 속마음이 눈에 보이는 구나. 원하는 것도 가려야 하는 허무맹랑한 거짓이”

웬 선문답인가.

“뭔 소리하는겨?”

“차차 알게 되겠지. 잠이나 자라”

“얼레? 지가 말 걸어 놓고선”

대꾸가 없다. 진짜 잠이 들어야 하나 보다.

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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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빵꾼

,


요괴봉투



1.


“야”



“야”

누군가 나를 부른다. 야. 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친구 혹은 손윗사람, 또는 동년배거나 손아랫사람인데 내게 시비를 걸고 있는 경우 등 다양한 때에 쓰이는, 사람이 사람을 부르는 말이다. 즉,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쓰이는, 쓰여야만 하는 말이다.

“야, 임마”

날 부르는 소리가 들린 후 나는 가장 먼저 내 입을 만져 보았다. 이 방엔 오로지 나뿐이고, 따라서 말을 할 수 있는 존재도 오로지 나뿐이다. 이것은 옆 방 할배가 내는 소리도, 옆 건물의 횟집에서 나는 소리도, 창문 앞 인도를 걷는 사람들이 내는 소리도 아니다. 분명 내 방에서 난다.

“좀 불렀으면 대답을 해라. 야!”

벌써 네 번째 호명이다. 의심의 여지가 없이 내 방이다.

머리를 손으로 받치고 옆으로 누워 있던 나는, 바로 누워 손을 배에 포개곤 가만히 눈을 감았다. 방년 28살. 아직 결혼도 못하고 경제력은 1인당 GDP를 한참이나 깎아 먹고 있으며 사회적 지위라고는 ‘이 자가 진정 무소유니라’ 하시며 법정스님께서 칭찬하실 만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인사대천명. 가는 것에는 순서가 없는 법이다. 평균 기대수명이 과거에 비해 현저히 늘어난 지금의 28살은 요절이라 할 수 있겠지만, 청동기-철기 시대만 해도 40살 50살만 해도 장수한 거라 하던데 어쨌거...

“야!! 여기야 여기!!”

요절하는 것도 억울한데 마지막으로 망상할 자유조차 뺏어가는 구나. 그래 어디 한 번 보자.

나는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GS25>가 웃고 있었다.




2.



“그러니까, 나도 모르겠다니까. 나도 얼마 안돼서 어리벙벙하니까 자꾸 나한테 묻지 마.”



애타게 날 부른 것은 <GS25> 편의점에서 얻어온 검은 봉투였다. 녀석이라고 해야 하나. 뭐라고 해야 하나. 일단 녀석이라고 하겠다. 녀석은 검은 봉투다. 다른 봉투들과 하나도 다를 게 없는, 구깃구깃하고 바스락 바스락 소리를 내는 검은 봉투다. 나는 항상 편의점에서 물건 보다 큰 봉투를 받아 오는데, 그 이유는 쓰레기를 담기 위함에 있다. 지금 내게 말을 걸고 있는 봉투도 쓰레기가 반쯤 담겨 구석에 쳐 박혀 있는 녀석이다.

나는 물었다.

“실례지만, 저승사자님이신가요?”

“개소리하지 마. 나는 봉투다.”

시원시원한 대답에 오히려 내 말문이 막혔다. 녀석은 스스로 그 존재를 규명하고 있었다. 데카르트도 울고 갈 존재에 대한 명확한 대답이다. 방금 전까지 요절 운운 한 것은 사실 농이였는데, 이젠 심각해졌다.

“제가 환청이란 걸 겪어 본 적이 없어서 묻는데, 지금 이 건 죽을 때가 돼서 들리는 환청인가요?”

“아니라니까! 나는 지극히 정상적인 존재야”

‘정상적’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오랜 세월 인간은 지구가 네모라고 생각했고, 지구를 중심으로 행성이 돈다고 믿었다. 그것은 절대 진리 였고 지극히 정상적인 사고였다. 갈릴레이 할배는 그 시대에서 지극히 비정상적인 인물이었다. 시대에 따라 진리라 여겼던 것은 뒤집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건 좀 아니지 않나.

어렸을 때 나는 <처키>라는 영화를 무서워했다. 잠드는 사이에 인형이 움직인다니, 소름끼치는 일이다. 모두가 감동을 받았을 명작 <토이 스토리>도 내겐 무서운 영화였다. 나는 두 영화를 보고 장난감을 사는 일을 멈췄다. 마치 유년을 박탈당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까탈스럽게 생긴 인형도 아니고 무한한 공간을 넘어 한 없이 날 수 있을 것 같은 우주 비행사 장난감도 아닌, 깜장 봉투가 말을 한다. 그리고 스스로 정상적인 존재란다. 나는 사상적으로 비교적 개방되어있는 사람이라 여겼는데, 스스로 재평가해야 하나 고민했다.

녀석은 입을 닫고 한 참을 머리를 굴리고 있는 나를 보더니 한 마디를 더 한다.

“야. 아무리 고민해봐야 나는 진짜야. 뭐, 왜 그러고 있는지 이해는 한다만, 빨리 받아들여라. 여기 말하고 있는 나는 진짜, 진!짜! 봉투다. 아, 말하고 있는 것도 진짜고”

존경할 만한 자세다. 만약 세상이란 게 봉투란 녀석들이 말을 하고 지배하는 곳이며, 인간은 그저 길 가의 돌덩이 같은 하나의 사물이라면, 녀석과 내가 입장이 바뀌어도 녀석처럼 말 하지 못했을 거다. 실로 감탄할 만한 냉철한 판단력이다.

“그러니까, 댁은 봉투고, 말을 할 수 있고, 나는 죽을 때가 된 것이 아니고, 이 상황은 리얼 이란 얘기죠?”

“오냐. 그렇게 된 것이다. 죽긴 뭘 죽어 새파랗게 젊은 놈이”

어처구니가 없다. 봉투 주제에 날 보고 새파랗단다.

“그러는 댁은 몇 살인데요?”

“몇 살은 무슨, 214일”

“예? 214일요?”

“응. 나는 봉투고 봉투로 만들어진 지 딱 214일 되었다.”

“...근데 왜 반말입니까”

“꼬우면 너도 반말 하던가. 봉투가 말을 할 수 있는 것만 해도 나는 봉투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영웅인데, 영웅이 반말 좀 한다고 불만이냐? 소인배 같은 놈”

냉정히 생각해 보니 그러하다. 인간의 역사로 보면 불을 발견한 구석기 시대의 이름 모를 모 선조며, 한자를 창조했다는 창힐 급의 위인이 될 만하다. 아니 근데 그 것보다 이게 말이 된다고? “이게 말이 된다고?”

속마음과 말이 동시에 튀어 나왔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상황은 진짜다. 정 안 믿기면 한잠 자고 일어나 보던가. 그래도 내가 말을 하면 너도 받아 들여야 할 걸? 아니면 날 불 태워 버려라. 그러면 없던 일로 여기고 살 수 있겠지. 그런데 내 생각엔 지구상에 이 몸 같이 말 할 수 있는 봉투와 대화할 영광을 얻은 녀석은 너 외엔 몇 없을 것 같다. 내가 너라면 절대로 그런 짓은 하지 않을게다.”

반박 할 수가 없다.

“그러니까, 이 방에서 100일 쯤 되니까 의식이란 것이 생기더라고. 나도 처음엔 당황스러웠다. 생각해 봐라. 곰이 동굴에서 마늘을 먹어 사람이 된 다 해도 이 몸이 겪은 격변엔 비할 데가 아니란 말이지. 선천적으로 봉사로 태어난 녀석이 길 가다 눈을 뜬 후 길 찾는 법을 몰라 줄줄 울었다는 이야기 아냐? 그것도 나에 비하면 발톱의 때 같은 일이야. 이 몸에게 일어난 일은 단지 의식 뿐 아니라, 이 세계 자체가 그대로 들어왔다 이 말이야. 그러니까, 네가 알고 있는 가치관이나 지식과 다르지 않는 것들이 내게도 그대로 들어왔다고. 이것이 바로 돈오돈수 아니겠냐. 하, 자식, 입을 쩍 벌리네. 그래, 봉투 입에서 문자가 나오니 입 벌릴 만도 하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 받아 들였다. 너처럼 얼빠진 표정을 하고 죽을 때가 됐니 어쨌느니 하지 않고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하는 심정으로 다 받아 들였다. 그렇게 하루 정도 생각을 정리하고 보니, 네 녀석 꼴이 참으로 한심해서 말을 건넨 거야. 이제 좀 정리가 되냐?”

나는 묵묵히 있다가, 고심 끝에 물었다.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걸까....요?”

“야 너 불교 신자 자나. 모든 것에는 불성이 담겨 있다, 몰라? 길 가는 돌덩이에도 불성이 담겨 있다 하던데 하물며 나라고 없겠냐.

“아니 그건 그거고 그렇다고 해서 말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어쭈, 말이 점점 짧아지네. 그래 뭐 그렇다 치고, 어쨌든 임마 너는 신화나 전설에 돌멩이가 말했다. 나무가 말했다. 그런거 모르냐? 나라고 안 될 게 뭐 있어. 임마, 내가 의식이 있고 말 하는 게 뭐 세계가 멸망할 징조로 여기지 마라. 무슨 일이 생길 지 모르는 게 인생이야 임마”

“...인생은 사람의 생애인데?”

“...어쨌건 임마. 그리고 내가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건 네 녀석의 공이 크다.”

“어? 내가 뭘?”

“내가 이 방에 들어온 지 100일 만에 의식이 생겼다고 했지? 그동안 네놈이 아주 극악무도하게 게을러빠진 녀석이라 100일 동안 방 청소를 안했음은 물론이요, 이 몸 안에 쓰레기를 담아서 구석에 처박아 놓고선 오며가며 한 번도 건들이지 않은 덕에 의식이 생겼다. 아마 네가 잠깐 창문이라도 열어서 바람이 닿았다면 그럴 일은 없었겠지만, 이 먼지만 쌓이는 사각지대에 쳐 박힌 덕에 무변의 100일을 보낼 수 있었다.”

그 말에 불현듯 나는, 내 영혼과 육신의 유일한 쉴 곳, 내 방을 바라보았다.



12평 남짓에 화장실 하나 주방 겸 거실하나, 그리고 방 하나로 이루어진 나의 원룸은 200/20 짜리다. 교차로에서 찾아 5번째로 방문한 이 집의 방문을 여는 순간 나는 결정했다. 이 집에서 살기로. 벽 한 면을 거진 채운 넓디넓은 창문에선 해질녘의 노을이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고, 옆 벽의 작은 창문으론 흔들리는 나뭇가지 사이로 바람이 살랑 살랑 기어들어 오고 있었다. 노리끼리한 벽지나 고향집을 생각게 하는 나무 방문은 15년 전 시청이 지워질 때 동시 다발 적으로 올라간 이 근방의 건물들과 그 역사를 같이 함을 증명하고 있었다. 가스레인지를 켜자마자 손이 뜨거워 질 만큼 도시가스는 빠삭하게 잘 나왔고, 변기 물을 내려도 샤워기를 틀어도 ‘주인님 기다리고 있었사와요’ 말하는 것 마냥 물은 콸콸 쏟아져 나왔다. 티비가 없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나는 티비가 내는 지직대는 소리를 싫어한다. 통돌이 세탁기를 비롯해 기구들이 제법 오래 된 것들이지만, 에어컨은 신식이였다. 200/20 짜리 집 치고는 훌륭하다. 게다가 이 지역은 위치적으로도 그리 나쁘지 않은 곳이다.

그렇게 4년이 지난 오늘의 이 방은, 그 자체로 전장이 되었다. 나무 무늬의 갈색 장판이 덮여 있던 바닥은 어째서인지 냉장고로 가는 길, 침대로 오는 길, 옷장으로 가는 길 외엔 화산재라도 덮인 듯 잿빛이 진하다. 그곳은 사뿐히 내려앉은 먼지들의 인해전술이 벌어지는 곳이다. 다만 내 굳건한 두 다리들이 먼지들을 짓밟고 퇴로를 만든 곳들만 간신히 장판의 갈색 빛을 되찾아 주고 있다. 이사 온 지 얼마 안 되어 의류함에 버러져 있던 것을 주워온 짱구 인형은 언젠가부터 엎어져 먼지로 등목 중이고, 기타는 짱구를 배게 삼아 나 처럼 한 없이 늘어져 있다. 고약한 녀석들이다. 그 주변으로 백색군대들이 게릴라 전투를 벌이는 중이다. 상기했듯 쓰레기통으로 삼은 검은 봉투들을 향해 던진 휴지들이 불시착하여 떨어진 것들이다. 제각기 알 수 없는 적을 향하여 사투 중이다. 편의점에서 한 주마다 사오는 3,000원 짜리 6개 번들 물병들은 이미 내장을 싹 비운 채 대전차포를 맞은 전차마냥 나자빠져 있다. 몇 개인지 세기도 귀찮을 정도다. 바닥이 먼지투성이니 차마 방바닥에 훌러덩 던져 버릴 수 없는 옷가지들은 빨래 건조대에 차곡차곡 쌓여 바벨탑을 목표로 삼고 있다. X자로 교차되어 서있는 빨래 건조대는 나날이 자신의 적재 한계량을 갱신 중이다. 식탁 겸 책상 겸 기타 잡동사니를 올려두는 박스위에는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는지 알 수 없는 과자 조각들로 가득차다 못해 그 주변으로 떨어져 있다. 이 녀석들은 휴지들과 각개 전투 중인 듯하다. 밥 할 때마다 수상스러운 뻑뻑 소리를 내서 ‘야 좀만 기다려라 내가 곧 터트려 버릴 랑게’라며 날 협박하는 빨간 밥통 주변으론 연금술을 시전한 밥알들이 그대로 돌이 되어 머물러 있었고, 지붕의 네 귀퉁이에는 거미줄 4천왕이 이 전장을 수호중이다. 실로 믿음직스럽다. 그러나 전장을 이끄는 주인공들은 녀석과 같은 봉투들이다. 분리수거도 하지 않아서 캔, 알루미늄, 종이, 휴지 등 온갖 것들을 대자대비하게 품은 봉투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사단 급 부대가 되어 이 방을 뒤덮고 있다. 그 와중에 봉투 안에 있는 녀석들은 봉투를 뛰쳐나와 돌격 하려 하는 듯하다. 아름다운 전우애다. 이 전장에서 내가 낙동강 방어선 마냥 사수하고 있는 침대는 그나마 사정이 좀 낫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싸디 비싼 주제에 제 멋대로 떨어져 내리는 담뱃잎 조각들이 건방진 자태를 드문드문 보이고 있다. 아마 담뱃재들도 제법 있을 거다. 아마 먼지로 화한지 오래겠지만. 녀석은 내가 태산처럼 굳건히 부동하는 침대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넓디넓은 창문의 아래, 그리고 그 왼쪽으로 가장 큰 거미줄이 차지한 구석의 아래에서 지 만의 보금자리를 제대로 만들었다. 어쩌다 저 녀석이 저기까지 갔을까. 미스터리하다. 어찌 됐건 녀석은 그 곳에서 책 장 따위 없어 가지런히 쌓아놓은 책을 성벽으로 삼아 자신만의 거점을 확고히 세웠다. 이 전장에서 독립과 중립을 선언한 공국이라 여겨도 좋다. 역사적으로 천혜의 요새에 세워진 공국들은 줄타기 외교만 잘 해주면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국체를 보존하는 법이다. 녀석은 모습이 꼭 그와 같다.


그리고, 그 쓰레기 더미들이 만든 전장의 지배자격 거대 쓰레기가 있었으니,

바로 나다.




3.



“...진짜 이거 완전 전래동화급이네”

“알긴 아네. 그래 뭐 네 놈이 잘 꾸며서 믿거나 말거나 하며 후손들에게 전해주면 전래 동화가 될 만한 사건이긴 하지. 음”

"그런데 나에 대한 건 어떻게 알았어?"

"내가 너로 인해 존재하게 되었으니, 당연히 너의 모든 것을 알고 있지."

"어느 정도?"

'네 놈이 어제 어떤 야한 만화를 보았는지, 뭘 먹고 뭘 쌌는지, 길 가는 어떤 여자의 가슴을 힐끗 했는지, 싫어하는 자가 누구고 좋아하는 여자가 누군지, 초등학교 때 선배한테 쳐 맞은 기억, 술 먹고 여자애한테 실수 한 거 까지"

"그만!"

실로 끔찍하다. 이 녀석은 그 자체로 나다. 근데 내가 싫어하는 기억만 지리산 도령마냥 콕콕 골라잡아 술술 내뱉는 놀부 심보는 대체 어디서 온 건가. 나는 절대 저렇지 않다. 어릴 적부터 고운 심성으로 가득 차 외할머니께서 늘 걱정해 마지않던 사람이다. 이 빌어먹을 녀석과는 천양지차다.

"이제 좀 상황을 받아 들이만 하냐?"

"...그럴 리가 있냐. 다만 그려러니 하는 것뿐이야. 자고 일어나면 네가 사라지거나 내가 죽거나 둘 중 하나일 거라고 생각 중이다."

"두고 보자. 내기해도 좋아. 둘 다 없다에 10만원 건다."

"웃기지마 봉투 주제에 돈이 어딨어"

"틀리면 날 불태워도 좋아. 이미 봉투 역사의 혁명을 일으킨 몸이니 죽어도 여한이 없다"

자못 당당하기가 장판파의 장비다. 역시 나랑은 전혀 다른 녀석이다. 나는 엄백호나 유장에 가까운 사람이다.

"일단, 밥이나 좀 먹어야 겠다"

"그래라. 야 뭐 먹고 쓰레기는 나한테 던지지 마. 주변에 있는 말도 못하는 무지렁이 봉투들한테 던져. 난 이미 이 안에 있는 것들도 벅차다."

말 안 해도 안다. 속절없이 구겨진 녀석의 입 구멍은 쓰레기들이 반쯤 토악질 중이니.



. . .



왕년 자취를 늘 꿈꾸던 때의 나는, 쿨한 도시남의 럭셔리 솔로 라이프를 꿈꾸기도 했었다. 그 꿈 안의 나는 모던한 디자인의 주방에서 팔뚝까지 걷어 올린 하얀 셔츠를 입고 사각 사각 날렵한 칼질에 집중한 탓에 미간을 찡그리고 있었다. 여자 못지않은 요리센스로 지인들의 각광을 받으며 만인의 기대를 한 몸에 받은 해물 탕을 내와 예의 그 감탄사를 연발케 하는 꿈을 꾸었다. 힘들게 이 집으로 이사해오자마자 자장면을 시켜 먹으며 산산 조각난 꿈이다. 포기는 빠를수록 좋은 법이다.

혹자들은 계란을 완전식품이라 하던데 그것은 영양학적으로 뿐 아니라 실증주의 적으로도 틀린 말이다. 이 시대의 진정한 완전식품은 오직 라면뿐이다. 완전식품이란 무엇인가. 현대 사회에서 영양의 균형이란 실로 어설픈 단어다. 북한이나 뭐 내전 시리아의 난민 정도가 아니라면 웬만큼 가난한 자라도 영양은 어느 정도 잡혀있는 것이 현대인들이다. 아니, 오히려 영양이 넘치다 못해 배불뚝이들이 되곤 하니까. TV에서는 주구장창 몸에 좋은 음식, 뭐 균형 잡인 영향 등을 나날이 떠들어대고 있지만 그것은 참으로 뜬 구름 잡는 소리라 할 수 있다.

위대한 라면을 한 번 살펴보자.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가진 라면은 과거에 한 젓가락 먹는 것도 귀한 경험이라 여겼다지만, 이미 모든 이의 반려자가 된지 오래다. 한국에서 라면을 단 한 번도 먹어보지 않은 자가 있을까? 신생아를 제외하곤 없다고 본다. 그 자체로 이미 완벽한 증명이 되지만 조금 더 살펴보자면, 일단 합리적인 가격에 있다. 편의점에서 5개 번들 라면 최저가 상품이 3000원 남짓이다. 개당 600원 꼴. 600원에 한 끼를 해결 할 수 있는 것이 이 세상에서 가당키나 한가. 심지어 최저임금이 합리적인 수준으로 보일 정도다. 뿐만 아니라 라면은, 다양한 베리에이션이 가능하다. 파송송 계란탁을 넘어 온갖 것들을 다 쓸어 넣은 잡탕도 오로지 라면 속이라면 썩 그럴싸한 맛으로 탈바꿈한다.

만들어지는 속도는 또 어떠한가. 최대 요리 시간이 7분 내외다. 우리 어머니들께서는 10분~20분 만에 땡 끝나버리는 식사를 위해 무려 1~2시간 준비를 하신다. 이에 따라 늘어나는 설거지 거리들도 식사 준비만큼의 고된 일이다. 뿐만 아니라 김치, 된장 등을 담는 노력까지 합하면 진정 4대보험을 들어야 하는 중노동에 가깝다. 그런데 라면은 그저 불+물+냄비+라면 4개로써 아름다운 풍미를 가진 음식이 되니 이는 곧 효도다. 어머니들이 괜히 주말에 라면을 끓이시는 게 아니란 말이다.

토요일에 하는 예능 프로그램을 다운 받아 보면서 라면을 호호 불다 보니 다시 한 번 라면의 위대성에 찬탄을 금할 수 없다. 노벨 경제학상, 노벨 화학상, 노벨 평화상 세 부문에서 석권할 가치가 있다고 본다.

"지겹지도 않냐?"

이 무슨 고얀 발언인가. 나는 설마하며 곧바로 대꾸했다.

"뭐가?"

"라면만 처먹는 거."

이건 반역이다. 아무리 녀석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나로 인해 탄생했을 지라도 이 발언은 용서할 수 없다. 아니, 내게서 나왔다니 오히려 아버지와 같은 마음으로 따끔하게 교육해야지.

"말조심해. 라면은 말야.."

"알아 알아 네놈의 라면 예찬론. 다 알고 있다. 그런데 너 배 꼬라지좀 봐라"

"내 배가 뭐"

"얼마 전에 네가 좋아하는 여자애가 너 뱃살 나왔다고 놀린 거 기억안나냐?"

"...그게 뭐"

"그거 다 라면 때문이다. 라면이 완벽하긴 개뿔. 후루룩 후루룩 들어가는 소리 그거 다 살찌는 소리다. 후루룩 후루룩 살덩이들 쭉쭉 이런 느낌이라고"

아. 어찌하여 나는 반박을 하지 못하는 가. 용납할 수 없다. 그런데 내 배도 부정할 수 없다. 나는 패러독스에 갇혀 버렸다.

"반박 못하지? 그렇지? 네 놈의 뱃살이 나날이 나이테를 더해 이제 예비군복 바지도 안 맞을 지경이잖아"

원통하다. 녀석의 말에 대꾸 한마디 못하는 것이 날 부들거리게 한다. 실로 원통하다.

"거 몇 푼이나 한다고 장 봐와서 간단한 찌개 하나 안해먹냐? 아니, 몇 푼인지는 그리 중요치 않지. 라면이 600원이 아니라 2000원 이였어도 넌 라면 먹었을 거야. 게을러빠진 녀석이 경제성으로 합리화 해봐도 이 몸은 속일 수가 없단 말이지"

기름기가 둥둥 떠다니는 라면 국물로 내 실루엣이 비친다. 식욕이 싹 가셔 버렸다.

"야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

"개는 너보다 부지런해."

...불 태워 버릴까. 괜스레 라이터만 만지작거리게 된다.

이미 식어버린 식욕에 라면을 냄비 채 주방으로 치운다. 그래 난 게을러빠진 녀석이라 설거지 따윈 바로바로 하지 않지. 이건 게으른 것이 아니라 유유자적한 여유로운 삶이야. 아니 뭐 게으르면 좀 어때. 나만 좋으면 그만이지.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성스러운 식후땡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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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빵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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