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나 따위의 사정이야 알 바 아니라는듯, 도도하게 흘렀다. 빌어먹을.

찬란하기로 따지면 밤하늘의 영롱한 플레이아데스 성단에 가깝고, 달콤하기로 치면 '마카롱보다 더 달게요'라고 노래하는 에프엑스의 목소리보다 더 달며, 아름다움을 견주기엔 고대 그리스 밀로의 비너스상도 부족할 것 같은, 봄이 가버렸다. 홀라당 가버렸다.

올 해 봄에는 반드시, 기어코, 결단코, 사랑하는 내 님을 찾아 흐드러지는 벛꽃 내음을 한껏 들이쉬며, 들이쉬는 동시에 누군지 알 수 없지만 좌우간 옆자리의 그녀의 체취도 한움큼 들어마신후 홍홍해지고 말겠다는 의지는 벛꽃잎이 거무튀튀해지듯 사라져버렸으나, 내가 애통해하는 까닭은 비단 그것이 아니다. 계절의 장난질, 한낱 인간이 성을 낸다고 달라지는 바 없다.

대뜸 그간 격조하였던 까닭을 고하기엔 다소 예의가 아닌 것 같아, 경위를 소상히 설명하고자 한다.


믿었던 정호 선배와 박지혜 양의 콜라보레이션으로 인해 굳건하고 고요했던 나의 마음이 속절없이 격침된 후, 나는 집으로 돌아와 벽면을 향해 정좌했다. 살아온 지난날을 돌아볼 필요를 느꼈다. 무엇이 나를 이리도 괴롭게 하는가. 인간의 고통은 어찌하여 사라지지 않는가. 나는 '자비 인애 화목 실천'이라는, 아버지께서 직접 써주신 가훈이 걸린 표구를 바라보았다. 자비는 무엇이고 인애는 또 무엇인가. 화목은 또 무엇이요, 실천은 어찌하는 것인가.

돌이켜보면, 나는 가훈에 충실했다. 밤 늦게 마감이 끝나면 하루가 멀다하고 애타게 술을 찾는 정호 선배와, 또 그에 못지않은 주당 지혜 선배를 위해 술집으로 향하곤 했다. 계산은 내 자비로, 동기는 오직 인애, 술 먹는날은 화목요일로 정해놓고 그들의 관계개선을 위한 실천을 해왔다. 그 커플은, 아니, 그 무뢰배들은 오롯이 선의로 그들의 화합을 위한 자리에서는 꼭 쌈박질로 파투를 내더니, 정작 나의 오지랖이 닫지 않은 그 잠깐 사이에 나에 대한 대역죄를 저질렀다니. 지금와서야 이렇듯 초연하고 냉정하며 누가봐도 공정한 평가를 내릴 수 있지만, 당시의 나는 상당한 분노에 젖어있었음을 양해바란다.

분을 못 이겨 주인따라 들썩거리는 어깨를 지긋이 바라보던 봉투가 입을 열었다.

"으이구 이 화상아."

나는 바로 답했다.

"이거 봐. 봉투 너는 염치가 없는거냐."

"어랍쇼. 염치?"

"그래. 염치다 염치. 염치라는 게 없는 녀석이더냐."

인간은 염치로 산다. 눈치든 염치든 도덕과 규범을 이루는 근간의 마음은 그런 류라 여겼다. 맹자님이 수오지심 측은지심 운운한 것은 너무나 고리타분하고, 대게 염치라는 단어면 충분하다는 것이 내 지론이다.

"네가 인간이 아니라는 점, 내 깊이 수용한다. 한낱 무생물에게 염치를 논하는 것, 차라리 접싯물에 코 박는 것이 세상에 좀 더 이로운 행동이라는 것도 잘 안다. 그래도 말야. 엄연히 이 작은 방에서 부던히도 수행을 지속한 나의 노력 덕에 너 같은 별종이 도래한 것이 아니겠냐, 이 말이다."

봉투는 징그러울 정도로 싱긋 생긋 웃더니, 말했다.

"개뿔이나, 그딴 거 내게 없다. 꼬우면 태우시던가."

아, 나는 염치없는 작자들로 인해 주변이 포위되었던 것인가. 항우의 심정이 다소 이해가 갈 따름이다.


도덕적 기준이 매우 높은 내게서 '염치론' 강의를 들은 봉투는, 비록 비웃었으나 한동안 명강의를 들은 후 머리가 맑아지고 뭔가 딱 트인 것처럼, 감사의 마음을 담아 한동안 낄낄 웃었다. 낄낄이 좀 과한 감이 있어 누가 보면 비웃는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겠다 싶어 부드럽게 주의를 줄까 싶었지만, 그것은 선비의 모양새에 부합하지 않는 듯해 그대로 두었다. 그것보단 녀석이 한번 낄낄댈때마다 안에 담겨있는 휴지들이 튀어나올까봐 걱정이었다. 푸석푸석 퍼석퍼석하는 봉투 특유의 소리 사이로 들려오는 녀석의 웃음소리가 잦아들어 '실컷 웃었나' 싶으면 어느새, 녀석은 나를 바라보곤 다시 웃음 그래프가 치솟는 반복적인 행태를 띄었다. 찬양 고무도 적당히 해야지, 좀 과하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드는 순간, 녀석이 말했다.

"너, 복수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더냐."

복수라.

내 사전에 복수란, '여러가지'를 뜻하는 단어 밖에 쓰여있지 않다. 복수, 그 달콤하지만 위험한 것. 태생적으로는 무사안일주의를, 후생적으로는 만민평화론을 익힌 고고한 성품을 가진 사람에게 복수란 단어는 머나먼 이국의 땅, 중동의 탈레반 뉴스에서나 들을 법한 단어였다. 복수는 복수를 부르는 법, 사회면에서 참사를 겪은 희생자의 '더 이상 나 같은 피해자는 나오지 않기를'이라 말하는 대사가 내게는 더 적합한 말이었다.

으음, 그러나 작금의 비상사태에서는 20여년간 일관되게 지켜온 신념에 약간의 융통성을 발휘할 필요가 있지 않나. 재고해본다. 불끈불끈 꿈툴꿈툴대는 복수에 대한 욕망과, 태산이 두쪽이나도 지켜오리라 다짐했던 신념의 충돌이 내면에서 세계제3차대전을 벌이는 중이었다. 전세는 호각, 전황은 불투명. '복수파'는 간결한 보병돌격과 신속한 기병운영으로 망치와 모루 전술을 시도한 반면, '신념파'는 우직한 보병방어 전술과 기민한 회피기동으로 이를 피해냈다. 양 측의 전술충돌로 인해 난타전으로 바뀐 전장. 전사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정좌하여 내면을 바라보던 나는, 종군기자나 음유시인의 시선으로 그 치열한 싸움은 관찰하고 있었다. 이 전쟁, 제법 재밌어서 계속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평생!"

호통이 들려온다. 백중지세였던 전장, 한 쪽으로 구원군이 몰려온다.

"그렇게!"

노성이 들려온다. 구원군의 기세는 전황을 완전히 바꿔놨다. 한 쪽이 순식간에 유린당한다.

"방구석에서!"

꾸중이 들려온다. 전투결과는 더 이상 볼 필요가 없다. 나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고민만 하고 있을..."

"쏘냐!!!!!!"

'복수파'의 압승으로 끝난 전쟁을 목도한 나는, 냉큼 달려가 그들의 선봉에 서기로 했다. 이기는 편이 내 편, 승리의 함성을 외쳐본다. '쏘냐! 그 커플에게는 고양이 선배 때와는 다른, 험난하고 잔인하며 인간 본성에 반하는 행위를 선사해주겠노라! 

봉투가 웃었다.

"그럼 이제, 작전을 짜보자고"


그날, 의기투합한 봉투와 나는 작전명 '유엔평화유지군'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참모는 봉투, 실행은 나의 역이었다. 막상 본격적으로 뭔가를 하려니까 조금 귀찮아지, 아니, 그것보다 도덕적인 딜레마가 살포시 고개를 치켜드는 바람에, 내가 참모를 하고 봉투 녀석에게 결행의 몫을 주는 아량을 베풀까 생각해보았지만, 봉투녀석은 일언지하로 내 제안을 기각했다.

"내가 손이 있냐 발이 있냐"

처칠도 울고 갈 만한 짧고 명확한 판단력을 보아하니 역시 녀석에게 참모를 맡기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일은 보고에서 시작한다. 나는 첫 공작으로, 사장에게 보고를 택했다. 사장은 손님이 없으면 굳이 날 부여잡고 몇 시간이나 떠드는 걸 좋아했다. 직원들 모두가 몸서리치며 기피하는, 지옥같은 시간이었다. 수시간의 대연설을 즐기는 사장과의 담화와 죽도록 싫어했던 고등학교 1학년 과학쌤의 교과를 벗어난 물리학 특강 중에서 양자택일을 강요당하면, 혀를 깨무는 심정으로 후자를 택한 후 밀려오는 졸음에 저항하기를 포기하고 수행평가 점수가 아작나고 엎드려 뻗쳐 후 빠따행을 당하고 말리라.

그러나 형벌같은 담화의 시간에서 의도치 않았던 장점도 있었으니, 사장이 가장 신뢰하는 직원이 내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불쾌하다, 오해다 라며 동료들에게 항변했지만, 아무래도 이럴 때는 적극적으로 상황을 이용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1시간 반 동안 정부의 삽질과 빨갱이 타령과 먹고 살기 힘들다는 푸념을 한 사장이 한 템포를 쉬자, 그 틈을 파고 들어 내가 말했다.

"저기 사장님. 근데 말입니다."

"왜?"

"요즘... 정호선배랑 지혜가 좀 수상한 것 같지 않나요?"

"뭔소리여"

"아니 맨날 쌈박질만 하던 사이인데 어쩐지 둘이 같이 있어도 조용해진 것 같은데요."

"음...그른가? 아! 그러고보니"

사장은 씨씨티비 화면으로 카운터의 그 둘을 진지하게 관찰하더니, 말을 이었다.

"저 자식들 저번에 내가 술먹자고 하니까, 웬일로 안 먹는다 하고 내빼버리대. 공짜 술을 포기할 녀석들이 아닌데."

사장, 삐쳤다.

"아니 그래도 사장이 먹자고 하면 먹어야 하는거 아니냐? 저 자식들이 그날 내빼는 바람에 요 앞에 투다리 사장님 알제? 투다리 사장님이랑 술 먹었는데, 하이고, 그 양반 어찌나 말이 많던지"

그 뒤로도 20분 간, 투다리 사장님에 대한 논증과 고찰과 비판을 이어가던 사장은, 알바를 불러 "아이스 커피 한 잔만 줘라" 하더니, 잠깐 말을 골랐다.

"아니 근데, 하던 얘기가 뭐였지?"

"저...그게, 정호 선배랑 지혜 얘기 하던 중이었죠."

"아 그래 그래. 그 얘기였지."

사장은 다시 씨씨티비를 쳐다봤다. 그런데, 점포 출입문이 열리며 고양이 선배가 출근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 민지왔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고양이 선배의 출근은 곧 나의 퇴근을 알리는 바다. 아무래도 공작은 다음을 기약해야하나, 여기선 일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가 필요한 시점인가, 고민하는 순간.

"야 그러고 보니 민지 쟤 요즘 남자만나는 것 같더라?"

사장은 불현듯 아군을 적으로 돌리는 발언을 내뱉었다.

"쟤 남친인지 뭔지 아무튼 남자애가 매일같이 오더라고. 매일 일 끝나면 남자 차가 기다리고 있던데. 아주 지극정성이야"

오전시간대로 근무를 돌려놓았던 나의 계락은 사장의 말 한마디에 무참히 박살나서, 그녀의 근무는 다시 마감으로 바뀐지 오래였다. 오전시간이 둘이 데이트하기 좋다며 호평했던 그녀는, 마감 시간대에 맞춰 그도 근무를 바꿨다며 다시 흡족해했다. 요즘 회사들은 근무자들의 근무시간을 너무 쉽게 바꿔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근무자들에게 너무 호락호락하면 아니되는것을. 아니, 그것보다, 왜 나만 쥐어짜냐고!

전의를 상실한 나는 빠른 퇴각을, 아니 퇴근을 위해 몸을 일어서려 하자, 사장이 말을이었다.

"앉아봐 앉아봐. 아니 그래서 내가 민지한테 쟤 누구냐고 물었거든? 근데 웃기만 하고 답이 없어. 왜 그러지? 내가 싫은건가?"

사장은, 그 뒤로도 30분 간이나 자신이 직원들에게 미움받고 있지는 않은지 각각의 직원을 호명하며 내게 의견을 물었다. 모두가 싫어하는 이에게 사실 증명을 해야하는 사람의 처지를 생각해본 적 있는가? 그것도 상사라면. 나는 내 안의 애매모호함을 있는 힘껏 끌어모아, 긍정도 부정도 아닌 모르쇠에 가까운 답변을 땀을 뻘뻘 흘리며 쏟아냈지만, 사장은 확고한 부정의 답변을 얻기 위해 나를 고문했다. 내면에서 승전 이후 기세등등했던 복수파의 군대들은 지리멸렬하게 흩어져갔고, 그 자리엔 사장의 점령군이 들어서 대지를 착취했다. 나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대로는 아니된다!

결국, 사장의 압력에 굴복하여 강한 부정의 답변(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으로 퉁을 치고 나서야, 나는 퇴근할 수 있었다. 퇴근하는 나를 바라보는 민지 누나의 눈빛엔. 안쓰러움과 어리석음을 비난하는 눈빛이 모두 들어있었다.


첫 날의 실패를 교훈삼아 기어코 사장에게 둘의 연애사실을 은근히 폭로할 수 있었던 나는, 사장이 면접때 부터 확고하게 주장해온 '사내 연애 금지 조항'을 발동시킬 수 있었다. 소기의 성과이자, 복수의 서막을 알리는 쾌거였다. 사장은 갑자기 공지용 어플리케이션을 이용해 '사내 연애 금지' 공지를 띄웠다. 직원들은 당황했다. 특히 정호 선배와 지혜는 눈에 띄게 당황했다. 끊임없는 눈빛 교환과 소근거리는 대화. 승리의 여신이 처음으로 내게 미소지었다. 

이것으로 그들에 대한 방해 공작을 멈출 수는 없었다. 아니, 이제 시작일 따름이니. 먼저 그들의 근무를 오전과 마감으로 완전 떨어뜨려놓았다. 견우와 직녀의 심정을 이해시키기 위한 나의 드넓은 아량이었다. 장거리 연애도 아닐진데 근무 때문에 만나지 못하면 분명 애틋함이 넘실넘실 흘러넘쳐 서로의 사랑을 굳건하게 다질 것이다. 예상대로 그들은 한번도 함께 근무하지 못한 채 사내연애의 소소한 즐거움을 포기해야만 했다.

다음은 사장을 움직였다. 술자리에서 격퇴당한 나로선, 그들의 퇴근 후를 훼방놓을 방안이 없었다. 불법적인 방안들이 몇가지 떠올랐으나 '경찰서와 법원은 되도록 멀리하는 것이 좋다'는 돌아가신 할머니의 조언이 떠올라 고이 접어놓았다. 내가 택한 것은, 사장을 끊임없이 외로움에 몰아 넣는 것이었다. 가족들과 떨어져 사는 사장은 외아들의 사진을 보며 그리움에 젖곤 했는데, 직원들은 왜 그토록 아끼면서도 굳이 1주일에 한 번밖에 보러가지 않는 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회사원도 아닌 사장인데. 어쨌든, 그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치는 날이면 여지없이, 위 속에 맥주를 들이붓는 고약한 습관을 가졌다. 나는 사장과의 지옥같은 담화시간에, 나의 가족사를 얘기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별 관심없이 '얘가 왜 이러지'라는 반응을 보이던 그는, 나의 눈물없이는 들을 수 없는, 아침드라마의 시나리오 같은 막장 가족사를 듣자 깊은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2주동안이나 이어진 풀스토리에 감화된 그는, 썰을 푼지 이틀만에 외롭고 그리운 기러기 아빠의 신세한탄을 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점포 마감 후 카페의 양대 술꾼인 정호 선배나 지혜 둘 중 한명을 대리고 술을 먹으러 갔다. 사장에게 끌려가면 술자리가 아무리 일찍 파한다고 해도 새벽3시. 근무 패턴이 완전히 다른 두 사람이 서로를 마냥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3주 정도가 지났고, 나는 술이 덜 깬 사장에게 공들여 정보를 캐냈다. 과연 술 자리가 파하고 그들이 각자의 집으로 들어갔는지. 또한 다른 직원들의 소소한 담화에서도 손쌀같이 지나가는 귀한 정보들을 귀담아 들었다. 그 결과, 정호-지혜 커플은 3주간이나 데이트는 고사하고 만날 수 조차 없으며, 심지어 연락조차도 몇 번 못했다는, 희대의 승전보를 접할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여자 직원들끼리 있을땐 정호 선배에 대한 뒷담화를, 남자 직원끼리 있을 땐 지혜에 대한 뒷담화에 은근히 참여하여 은근히 주도하는 분위기를 이끌었다. 그 자리에서 나온 정보들은 어느 순간 각자의 귀에 들어가리라. 마찬가지로 무분별한 경제 운영을 해오던 정호 선배의 지갑 사정을 사장에게 은근히 고하고, 매번 공과금을 내기 위해 가불을 하던 악습을 끊게하니, 정호 선배는 지혜와 연락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써야하는 핸드폰 요금이 밀리기 시작했다. 아마 이 기세를 유지한다면, 어쩌면 요금 미납으로 인해 정지될 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것이 나의 목표이기도 했다.

이 모든 공작의 배후에 봉투 녀석이 있었으니, 나는 읊조렸다. 봉투에게 영광 있으라! long live the 봉투! 녀석은 가공할만한 사악한 아이디어를 매우 여러개 주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온건한 방법만 택했다는 점, 후손들이 내게 쏟을 비난이 다소 염려되어 밝혀둔다. 어쨌건 이 때를 전후하여, 나는 '봉투폐기론자'에서 '봉투찬양론자'로 전향을 하게 된 것이다. 벛꽃이 지는 것이 다 무어냐. 봄이 사라지는 것이 다 무슨 소용이더냐. 무소의 뿔처럼 홀로 복수의 길만 걸으리라.


이상, 그간의 경위에 대한 개략적인 설명을 마치겠다.

아무튼 나는, 방진을 펼쳐놓고 수레 위에서 전장을 내려다보는 제갈량처럼, 속속들이 들어오는 승전보에 더없는 승리의 기쁨에 도취되어 있었다. 바로 지금 이 순간까지는. 나는 바로 지금, 나의 눈썹을 찌뿌리게 하고 그간 펼쳐온 계략들을 재검토해야 하지 않나 라는 고민에 들게 한, 하나의 정보를 들었다.

"아니 그러니까, 정민 오빠랑 아름이 커플, 희성 오빠랑 나, 그리고 다희 언니도 남친 생겼다는거 있지?"

"진짜? 뭐야, 갑자기 다들 왜그래. 봄도 끝났는데"

"그러는 너는, 너도 남친 생겼잖아"

"그렇긴하지. 몰라 갑자기 나도 덜컥 생겨버렸어."

"오늘도 끝나고 보기로 한거지?"

"응. 아 잘됐다. 너도 희성 오빠랑 보기로 했다며?"

"응"

"같이 밥먹으러갈까?"

"어 그럴까? 그럼 오빠한테 연락해볼게."


손님의 주문을 받던 나는, 두 아르바이트의 대화를 듣느라 정신이 팔려 주문 실수를 하고 말았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도대체 이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나는 그녀들에게 물었다.

"얘들아"

그녀들은 무언가를 들킨듯, 흠칫 놀라며 답했다

"네?"

"아까 한 말, 무슨 얘기야?"

"어머, 매니저님. 왜 얘기를 함부로 듣고 그러세요?"

그녀의 말투가 제법 쌀쌀맞다.

"아니...일부러 들은건 아닌데...들려오니까..."

"아이, 그래도 그냥 모른척해주셔야죠. 사장님한테 말할거죠?"

"사장님한테? 내가 왜?"

"매니저님 친 사장파잖아요!"

오해였다. 지극히 억울하고 상당히 불합리한 오해였다. 친사장파? 내가? 이런 오해는 풀어야만 했다.

"아니 내가 왜 친사장파야! 그럼 너희가 나 대신 '사장님과의 대화' 할래?"

나는 나답지 않게 명쾌한 반론을 제시했다. 그녀들은 갑자기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역시 그것만은 싫은 모양이다.

"그래. 내가 친사장파라고? 그럼 '사장님과의 대화' 시간에 너희들을 부를 수도 있겠네. 어때? 한번 불러줄까?"

그녀들은 단호하고 간절하게 고개를 저었다. 고개를 젓는 속도가 초음속 스텔스기가 왕복하는 속도에 비할 법했다. 그녀들의 앞머리가 요란하게 휘날렸다. 

"그니까, 빨리 불어. 누가 누구랑 사귄다고?"


그녀들에게 들은 정보를 종합하면, 사장님의 '사내 연애 금지' 공지에도 불구, 요 몇 주 사이에 신규 커플이 속속 들어서서 사내에서 여전히 솔로인 남자 직원은 나뿐이라는 것이었다. 남자라고 해봐야 알바 둘에 매니져 둘 뿐이지만, 4명 중에서 1명 밖에 남지 않았다는 고립감이 거대한 파도가 되어 엄습해왔다.

비보는 그것뿐이 아니었다. 우째 이지경이 되었는가. 나는 지난 몇 주간의 근무 시간표를 검토해보았다. 그 결과 참혹하고 뼈저린 발견을 하고야 말았다. 내가 '유엔평화유지군' 프로젝트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원래 각자의 근무를 순환시키며 중첩되지 않게 하는 시간표 작성 요령을 개무시하고 정호 선배와 지혜를 훼방 놓는 데에만 정신이 팔린 탓이었다. 그동안 다른 직원들의 근무가 매번 겁치며, 서로에게 각자 호감을 품고는 있었지만 딱히 가까워질 계기가 없었기에, 그들의 사랑은 싹이 트지도 못한 채 모두 하나의 씨앗에 지나지 않을 뿐이었다. 그러나 나의 사소한, 매우 경미한 판단 오류는 나비효과가 되어 사랑의 큐피트 화살로 변하고 말았으니, 그들은 매일같이 얼굴을 마주하고 지들끼리 삼삼오오, 혹은 둘씩 짝을 지어 술집으로, 카페로, 노래방으로 향했다. 이 모든 사태 속에서 빠진 것은, 오직 나뿐이었다. 

'친사장파'라는 낙인이 찍힌 것도 억울할 지경인데, 이제는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즐거워보였다. 도대체가, '사내 금지 조항'을 지키는 사람이 나 뿐이라는 사실에, 이 나라 청년들의 준법 정신에 신물이 날 지경이었다. 이 나라의 미래가 매우 어둡다. 매우 매우 어둡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나, 사태를 어떻게 호전시키나, 고민을 하다가 결국 봉투에게 계락을 구했으나

"그정도 리스크는 감수했어야지. 바보냐"

라며 일언지하에 무시당했다. 

"원래 뭔가를 얻으려면 뭔가를 잃어야 하는 것이 세상에 이치니라"

라는 알 수 없는 소리까지 지껄이는 것이었다.

도대체 내가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잃었나 꼼꼼히 계산기를 두드려보아도, 당최 얻고 잃은 것의 비율이 너무나 차이가 큰 것이 아닌가, 산수밖에 할 줄 모르는 나도 이 정도 계산은 가능하다며 반문해보았다.

"내가 보기엔 아주 적절한 물물교환비인것 같은데."

봉투는 말했다.

"남의 불행이 너의 행복을 초래할 수 있다고 보냐? 그렇지 않다. 타인의 불행을 얻기 위해선 너의 행복도 희생해야 한다고. 그게 좀 더 정의로운 이치 아니겠냐.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 될 수도 있겠지. 그러나 분명, 자신도 모르는 어느 부분이 떨어져 나간다. 그게 바로 정의란 말씀이다. 또 누군가가 불행해졌으면, 그만큼 누군가에겐 행복이 들어서야, 세상에 부여된 행복의 총량이 일정하게 유지되지 않겠냐. 바로 그 이치에 따라 누군가는 행복해지고 누군가는 불행해진 것 뿐이지."

계산이 맞지 않았다. 불행해진 사람은 나와 정호선배 커플, 세 명뿐인데 행복해진 사람은 너무나 많다.

"그거야"

봉투는 단호히 말했다.

"네 놈의 존재가 블랙홀처럼 타인들의 불행을 모조리 빨아들이는, 불행의 중력이 압도적으로 큰 인간이기 때문이지."

녀석의 담담한 말 한마디에, 나는 반성했다. 그리고 회귀했다. 반성한 것은 잠시나마 '봉투찬양론자'로 전향했다는 것이고, 회귀한 것은 도로 '봉투폐지론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불행의 중력이 압도적으로 큰 인간' 언젠가 묘비에 나의 위대함에 대한 훌륭한 문구를 생각해 본 적은 있지만, 정말로 이 따위 문구가 쓰여질 생각을 하니 아찔해졌다.

아찔함이 뭉게뭉게 피어올라 올림푸스 산처럼 내 앞에 우뚝 섰다. 차라리 제우스의 벼락을 맞는 것이 낫지 않을까. 으아!



'전파낭비잡문기 > 요괴봉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괴 봉투 (7)  (0) 2017.03.30
요괴 봉투 (6)  (0) 2017.03.25
요괴 봉투(4)  (0) 2017.03.06
요괴 봉투(3)  (0) 2017.03.01
요괴봉투(2)  (0) 2017.02.27

WRITTEN BY
빵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