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야기가 끝났다. 이 때에 이르러 굳이 생성과 소멸, 혹은 만남과 이별에 관한 고전적인 글귀들을 되새기고 싶지는 않다. 뇌리에 지나치게 가득 박혀있어, 영원을 탐하는 것조차 죄악으로 생각했던 나날들이 여전히 깊은 자욱을 내고 그 안에 도사리고 있으니.
독자의 내면에서 좋은 책으로 결정되는 순간은, 대부분 책장을 덮고 난 그 순간이다. 쏟아졌던 이야기로 들어가 한참을 유영한 뒤, 이야기에서 빠져나와 파리한 현실의 온도를 체감했을 때, 그 이야기가 쓰라린다거나, 아프다거나, 달콤하다거나, 따스해진다거나, 두려워진다거나, 뿌듯해진다거나, 깊은 생각에 잠기게 한다거나, 등등의 감상이 온전하고도 오롯이 보존될 수 있다면 그 책은 제법 좋은 책이라 할 수 있다. 꼭 그것이 책장을 덮은 찰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삶을 영위해가는 가운데 독자에게 주어지는 난제들, 또는 아주 쉬운 문제라 하더라도, 그것들과 마주하다보면 책을 덮은 순간은 새로운 시간으로 다시 생산된다. 이 괴랄한 논리를 전하면 그녀는 항상 모순덩어리의 존재였던 나를 대할 때 처럼 어이없어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야기는 끝났으되, 내게는 끝나지 않은 것과 같다.
#2
생각해보면, 이야기가 끝났음에도 나의 세계가 그다지 붕괴되지 않아 천만다행이라 생각한다. 8월 한 달간, 마지막 페이지가 코 앞에 있음에도 일부러 넘기지 않았던 나의 어리석음은, 역설적이게도 결말을 꽤나 편하게 맞을 수 있는 준비기간이 되어주었다. 스포일러를 잔뜩받은 영화는, 지나치게 높아진 기대나 타오르기도 전에 식어버린 설렘을 준다. 문제는 공포영화였다는 것에 있지만.
로맨스 영화로 미화하기엔 솟아나는 두려움이 꽤나 컸기에, 나는 게으르고 미덥지 못하며 뭐든지 엉성하게 매듭짓는 그 특유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결말을 한없이 미뤄왔고 그 결과 한꺼번에 받을 고통을 한 달간 할부로 받았다. 여전히 의아한 것은 그녀의 태도다. 그녀의 내적 세계는 대칭과 균형으로 잘 짜맞춰져 있는데, 나의 존재는 어쩌면 그동안 그 균형을 함부로 해쳐놓는 시간이 아니었나 싶다. 더이상 그래야 할 이유가 그녀의 내면에서 사라졌음에도 불구, 왜 미뤄뒀던 것인지 알 수 없다. 더이상 중요해지지 않아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거나, 그녀 역시 결말을 보기가 두려웠다거나, 아니면 항상 불안함을 표현하기만 했던 나에 대한 배려, 그 마저도 아니면 또 나의 단견이 닿지 않는 의미가 있거나, 정말로 아무 의미 없을지도 모르겠다. 지극히 자의적인 해석으로 나는 그녀의 배려심이라 여기기로 했다.
#3
어떤 사람의 바닥 끝을 보고 난 뒤에 지쳐 쓰러지듯 고하는 이별이 아니라면, 대부분의 이별은 아쉬움을 기저에 깔고 또다른 감정들을 양산하게 된다. 나의 경우는 아쉬움이 가장 컸다. 그녀에게 투정부리듯 전했던, 함께 하고 싶은 것들이 엄청나게 많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어느 순간부터 나의 희망사항에 대해 "생각해 볼게"라는 답을 전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퇴보하는 나의 태도에 기인한 대답이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그런 아쉬움들을 더이상 느끼지 않아도 되는 논리적 근거 역시 그녀가 만들어주었다. "그런게 꼭 나와 함께여야 한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어." 그렇다고 일거에 아쉬움이 해소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아쉬움을 느끼기 전에 자신에 대한 회의와 비판으로 채울 수 있는 말이었다. 나의 희망이 타인의 이해와 배려 속에서만 꽃 필 수 있는 것이라면, 희망을 피우기도 전에 짓밟는 것이 좋다고 여겨왔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추악한 욕심이 생각의 줄기를 휘어잡았는지 모르겠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그녀의 말대로, 내가 아무리 스스로 비판을 해도 개선이 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개선이 되지 않기 때문에, 나는 가을의 푸른 하늘을 보고 착각에 빠져, 어느 봄날 찬란하게 뿌려졌던 파란 하늘의 바다를 떠올리고, 여름의 끝자락을 고하는 키가 다 자란 풀들을 보고 망각에 빠져, 바람 세차게 불어 가슴 속과 망막에 맺힌 실루엣조차 흔들리게 했던 목장의 초록을 떠올리며, 차에서 흘러나오는, 보랏빛 목소리로 불려지는 "미안해 널 미워해"란 가사를 듣고 회상에 잠겨, 형형색색의 빛들이 요란했던 작은 방에서 보라보다 더 짙은 보라색으로 울려퍼지던 어느 목소리를 떠올리며, 도서관에서 새로운 책을 찾다 무심코 시선이 멈춰버린 모리미 도미히코의 책들을 보고 몽상에 잠겨, 멍청하고 조잡하기 짝이 없는 글들의 책으로 엮어 감사의 말에 그녀의 이름을 적어놓는 꿈을 꾸게 되는 것이다.
어리석은, 한없이 어리석은 시간은 언제까지나 나와 함께 할 것이다. 나의 존재와 그것을 칼로 자르기에는, 찰랑이는 물살이 너무 거세다.
#4
유감이지만, 나는 앞으로 그녀와 같은 사람을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이다. 가장 특별했기에, 0으로 수렴하는 가능성을 무시하고 나는 어설프게 쌓아올린 누각으로 그녀를 모시려 했다. 그녀는 누각에 들어서자 곳곳의 금가고 빈틈 투성이인 곳에서 환멸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너와 나의 다름이 결국 이해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야"라고 말했다. 나는 용납할 수 없다.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자 다짐했던 과거의 나는 어디로 가고, 이 모든 것들이 다 한바탕 꿈이였노라 퉁치길 바라는 현재의 나를. 바라지도 않은 존재에게 꿈을 제멋대로 투영하고, 또 제멋대로 서운해하는 편협한 존재를 용납할 수 없기에, 그래서 타인에게도 전해주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불완전함이란 단어의 의미에 닿기에 상당한 양의 허점을 담고 있는 내가 그녀에게 양해를 구하기엔 그녀는 너무나 완벽에 가까왔다. 그녀라는 존재를 규명할 수 있는 수식어는 꽤 많다. 합리적이고, 현실적이며, 논리적이기도 하고, 또 대부분의 면에서 완벽주의적인 기조를 유지하며, 그로 인한 스트레스는 내면의 논리구조로 격파하며, 아주 깊은 곳의 자리잡은 소녀적인 감성은 현실과 적절한 비율로 유지되며, 자신만의 이상세계가 뚜렷하고, 또 그것을 온전히 느끼는 법을 알고, 그렇기에 타인에게서 존재 이유를 찾으려는 어리석음과 거리가 멀고, 또 필요를 느끼지 않음에 결핍조차 없으며,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의 경계가 극명하고, 놀라울 정도의 기억력과 기저에 깔려있는 타인에 대한 집중력이 있다, 그 외에도 그녀를 설명할 문장은 상당히 많지만, 사실 그 어떤 문장으로도 그녀를 나타낼 수 없다. '어리석음'이란 단어로 완벽히 설명이 가능한 나와는 다르다. 그녀는 나의 모순적인 면을 이해하기 어려워했듯, 나는 그녀의 논리적 완벽성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만큼의 사랑스러운 그녀였다. 이해의 영역을 아득히 뛰어넘은 감정의 공간. 나는 그녀를 우주처럼 사랑했다.
#5
모든 것들이 흐르고 난 뒤에 자리한 감정이, 즐거운 꿈에서 꾼 뒤에 느끼는 아쉬움과, 꿈을 이루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부정, 그리고 꿈의 환상이 현실에 뿌리는 이해불가의 것들로 가득차 있다는 것조차, 다시는 그녀같은 사람을 만날 수 없을 것이라는 강한 암시를 들게 한다. 앞으로는 어떤 이야기가 나의 세계와 맞닿아 그녀를 되새기게 될 지는 모르겠지만, 원망같은 감정들과는 한없이 거리가 먼 것들일 것은 분명하다.
좋은 책을 읽고 나면 항상 이런 작품을 써준 작가에 대한 무량한 감사함이 피어오른다. 감사의 글이라고 보기에 지나치게 추접했지만, 이 글은 본디 감사의 글이다. 활자를 찍어내는 손가락을 타고 올라가면 자리하는 갈비뼈 언저리에 가득한 감정이, 그녀가 처음 내가 사는 시골로 놀러온 그 때의 감사함과 비슷한 것이므로.
지혜로운 그대가 앞으로 그래왔듯, 앞으로도 아무런 문제없이 살아갈 것임을 알기에, 남는 것이 감사함 뿐이라는 것에 다시 한번 감사함을 느낀다.
픽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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