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느 집이든, 앞 보다 뒷 쪽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집 뒤로 가면 어쩐지 풀어지고, 탐험하는 기분도 들고, 아무튼 묘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이 집은 뒷공간조차 신경써서 지었다. 똑같은 문양들이 집을 도는 사람들을 반긴다. 집 뒤를 가는 사람들은, 양반님네가 아닌, 하인이나, 어린 아이나, 여성들이었을텐데. 아마도 이 집 안에 있는 사람의 존재감을, 집 뒤로 오는 자들에게 각인하기 위한 신경씀이 아니었을까.
담장같지도 않은 담장을 사이로 앞집과 뒷집이 마주하고 있다. 지금의 사람들이 이 집에 들어산다면, 밤이 깊으면, 뒷집의 사람들은 앞집의 불이 언제 꺼지나, 이윽고 불이 꺼지면 대체 뭘 하고 있을까 궁금할 것이다. 앞집의 사람은 또 무엇을 하든 뒷통수에서 쳐다보는 기분 때문에 힘들 것이다. 해가 뜨고 아침이 되면, 방문을 열고 아침인사를 나눌 수 있는 사이. 이 담장의 의미는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훤한 마루를 보여줬던 집의 뒤쪽으로 돌아가자, 이 같은 풍경이 나왔다. 나무 벽들은 뒤틀려서 불빛에 죄다 세어들고, 문 역시 이제 맞지 않아 틈이 벌어지며, 제멋대로인 벽장 마감이 보였다. 이 집을 만들었을 때는, 제작자의 상황이 그렇게 좋지 않았거나, 장인의 솜씨가 그다지 훌륭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 주제에, 문을 들어서면 일단 행랑채의 창문을 지나야 한다. 마치 경비실 같다. 낮이고 밤이고 이 방안에 사는 사람은, 문을 통해 사람이 왔다갔다 하는 소리를 누구보다 먼저 듣고, 누구보다 마지막까지 들어야만 하는, 문지기와 같다. 문제가 생기면 바로 튀어 나와 앞장서야 하는 것은 덤이다.
여러 모로 불쾌한 집이었다.
수많은 기와집 중에서도, 당연한 얘기지만 절집은 하나도 없었다. 엄격진지근엄한 유학자의 마을에 절집이 살아남을 수 있을리가 없다. 절집은 아마 보이지 않는 골짜기 깊숙이나, 산 너머 어딘가에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땅에 교회가 들어섰다. 그것도 꽤 우람하다. 개신교의 번식력은 놀라울 따름이다.
이 마을에서 가장 화려한 집이다. 겹겹이 층이 올려진 지붕들이, 마을을 들어서는 사람들의 이목을 확 당기는 집이다. 마을의 하이라이트라고 해도 좋다.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고. 그런데, 이 집을 들어서기 위해선 이렇듯 꾹 닫힌 벽을 먼저 마주하고, 정면이 아닌 측면의 문을 통해 돌아야만 한다. 복잡한 진입로다. 미로같은 인상까지 준다. 그 문들은 굳게 닫혀있어, 내부로 진입할 수가 없었다. 양반가의 자존심일까, 아니면 오만함일까. 방문자를 이렇게 불편하게 하는 것은, 가장 소중한 곳이기 때문일까.
지붕을 갈은 흔적이 색별로 남아있다. 무지개 떡 같다. 기와집이든 초가집이든, 한옥은 정말로 손이 많이 간다.
마치 들어서면 안 될 것 같은, 뒷산으로 가는 길. 야삼경에 이 산에 오르면 온갖 동물의 소리도 들렸을 것이고, 음산한 대나무 스치는 소리도 들렸을 것이다. 유학은 괴력난신을 논하지 않는 법이라지만, 유학자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어쩔 수 없었을텐데. 이 산에 존재했었던 괴담들은 무엇이었을까.
가장 아래에는, 마을의 자랑인 충효각을 배치하고. 중간에는 하인이나 소작농이 사는 초가집들이 있었으며, 가장 위에 우람한 기와집을 배치했다. 왜 굳이 산 비탈에 집을 지어놔야만 했는가 하는 의문과 동시에, 갑오개혁 이후 이 마을에서 신분 갈등이 있었다는 역사가 이해가 갔다. 내가 그 시대의 청년이었다면, 옛 것이고 나발이고 진작에 도시로 떠났을 것이다. 모든 것이 역사가 되어버린 지금에나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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