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생했어. 다들 잘 들어가"

주말이라 유난히 바빴던 영업 시간이 끝나고 마감을 마친 나는, 귀가길이 아닌 술집 골목으로 들어섰다. 거리엔, 잠시라도 떨어져있다면 각자의 왼쪽, 오른쪽 옆구리가 이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동상이 걸릴까봐 두려운 듯, 인간들이 서로를 휘감고 다니고 있다. 이 시간대의 술집거리엔 대게 이런 작자들이 돌아다닌다.

세상이 이래서는 아니된다. 지금 이 시간에도 소말리아의 아이들은 기아로 죽어가고 있다는 말이다. 왜 저 사람들은 좀 더 숭고한 가치나 보편적인 인류애같은,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마땅히 관심을 가져야 할 그런 것들을 외면하고 한낱 알콜의 힘을 빌려 원초적 감정을 쫓는 걸까. 세상 사람들은 좀 더 쇼펜하우어의 글을 읽도록 해야 한다. 

그렇다고, 종족 번식의 사명을 띄고 태어난 개체들인만큼, 호로몬의 장난에 지나지 않는 사랑 따위, 그 한없이 가볍고 혼란스러운 거짓에 휘둘려 현자가 되기 위한 노동의 시간을 꿈 꾸는 것까지야 말릴 맘이 없지만 왜 하필이면 오늘인가. 묻고 싶다. 그대들은 왜, 하필이면 간만에 이 곳에 나온 내 눈 앞에서 꼴을 보이는가. 아니, 왜 거기에 내가 있으면 아니되는 것이냐! 왜 나만 빼고 하냐고!

그들을 향해 소리라도 지르고 싶지만, 나의 진실된 참 뜻이 곡해되어 미친놈이라는 낙인이 찍힌 채 온갖 조롱을 듣는 일만은 피하고 싶어, 일단 참기로 했다. 너그러이 그들의 만행을 지켜보는 것도 신사의 젠틀함에 속하는 일이겠지.

약속 장소에는 정호 선배가 기다리고 있었다.

"왔냐. 고기 꿔 놨다."

'하루에 소주 한병을 먹지 않으면 입 안에 가시가 돋는다'는 괴상한 지론을 갖고 있어, 때때로 술냄새를 풀풀 풍기며 출근해 카페 안에 가득한 커피 냄새를 모조리 머리 아픈 알콜 냄새로 바꿔버리며 일 할 때가 있었다. 이런 건수로 항상 사장에게 까였고 동료들에게 핀잔을 들었지만, 막상 술 먹을 사람이 없을 때는 또 이 양반 만큼 부르기 좋은 사람이 없다. 고기도 잘 굽는 것은 덤.

당연한 얘기겠지만 나야 그 위선적인 사람들과는 달리, 진실로 정호 선배와 술 먹는 것을 즐긴다. 비록 공사가 다망해 지난 한 달간은 술잔을 나눌 기회가 없었지만, 어쩌다 보니 오늘에서야 술자리를 가질 수 있었던 이유가 있다. 며칠 전 봉투 녀석에게 농락을 당한 그 대참사 이후, 속절없이 시무룩한 표정을 짓던 나의 낌새를 눈치채고 선배가 제안한 자리긴 하지만, 나의 방문 목적은 어디까지나 '정호 선배와의 즐거운 술자리다'다. 어디까지나 그것뿐이다. 기껏 알콜에 의지해 기분을 좀 풀어보겠다는 알량한 기대는 내게 없다. 나는 그들과는 다르다.

"그러니까, 형이 말했잖아. 진작에 좀 깨부수라고."

선배는 내가 겪은 대참사를 알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어제 같이 근무하며 담배를 피고 있을 때, 흡입한 연기의 양이 평소보다 조금 많아진 탓에 나도 모르게 술술 뱉은 것 같긴 한데, 딱히 기억엔 없다. 행여나 내가 징징대면서 우울하다느니, 죽겠느니 이런 아쉬운 소리를 했다고 생각한다면, 몹시 불쾌하다는 점 밝혀둔다.

"어쩐지 네가 이상하긴 하더라."

"뭐가요?"

"새꺄. 자식이 뭐 그런 거 가지고 며칠 동안 있는 티 없는 티 다 내고 있냐. 아니, 애초에 누나가 뭐 너한테 별 말 한 것도 아닌데, 왜 혼자 지랄이여?"

"지랄은요 무슨, 제가 티를 내긴 어딜 냈다고요. 평소와 다름 없었다고요."

고기를 우걱 우걱 씹는 것을 핑계 삼아 퉁명스럽게 말해 본다.

"웃기고 있네. 아니, 누나랑 눈도 안 마주치고 퇴근해버리니까, 누나가 너 무슨 일 있냐고 나한테 묻더라. 하여간"

그랬었나. 알싸히 퍼지는 깻잎 내음을 삼키며 지난 며칠을 되돌아보았다.



봉투 녀석의 궤변을 들은 이후, 그 말 속에는 하나도 진실에 가까이 닿은 것은 없지만 어쩐지 그냥 기분이 참혹해서, 나는 침대를 벗어나지 않은 채 휴일을 마감했다. 물 건너온 예술 영상들을 볼 기분조차 들지 않았다. 녀석 역시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숨막히는 어색함 속에서 하룻 밤을 보낸 뒤, 출근하는 내게 덧붙였다.

"야. 출근해서 쓸데없이 티 내지 말고 평정심을 유지해라"

좁아지는 문 사이로 들린 녀석의 말 때문에 평소보다 출근이 5분이나 늦게 되었다.


점포가 바쁘게 돌아가면 헛된 상상이나 기분에 젖어들 틈도 없다. 그러나 평일, 그것도 화요일이나 수요일 오후에는 손님이 그다지 많지가 않다. 사장의 충실한 피고용자이자 점포의 매니져로서 당연히 많은 손님들에게 좋은 서비스와 제품을 제공하고 싶다는 나의 바램과는 달리, 너무나 한가해서 하등 쓸데없는 일거리라도 찾아 헤매야 했다.

박스를 일부러 쏟아 창고를 정리해야 한다는 명분을 만든 나는, 창고 안에서 빨대들을 차곡 차곡 담으며 예의 그 망상에 빠졌다. 그와 그녀가 서로를 향해, 누가 누가 더 빛이 나는가 경쟁하듯 웃어제끼는 그 아름다운 풍경에 나의 단정하고 품위있는 얼굴을 대입해보니, 그다지 잘 어울려 보이지는 않다는 것만은 인정해야 겠다. 쓰라린 사실이지만 나는 인정할 것은 인정하는 사내다.

그렇다고, 이제와 다 늦은 마당에 괜한 고백을 저질러서 상황을 꿀꿀이죽으로 만들고 싶은 욕심따위도 없다. 떠나야 할 때를 알고 떠나는 이의 뒷모습을 얼마나 아름다운가.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하겠지만, 그와 그녀의 사랑을 마음속으로 열렬히 응원하기로 했다. 나는 주연보다 값진 조연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좌우지간, 그런 것들을 차치하고 남은 고민은, 영국의 우중충한 날씨를 닮은 하늘과, 화성 탐사선 오퍼튜니티가 돌아다니며 보내는 메마른 대지와, 암을 유발하는 연기가 가득 뿜어져 나오는 쓰레기 소각장 같은 공기를 모두 뒤섞은 뒤, 나누기 2 (혹은 곱하기 2)를 한 것 같은 내 사랑의 풍경에는, 도대체 누구를 그려넣어야 완성이 된다는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었다. 왜 나는 찬란하고 아름다운 유화로 내 사랑을 그릴 수 없는 것인가. 

이 고민을 근거로 운명을 피고로 삼아 소송을 제소한다면, 배심원들은 분명 만장일치로 나의 억울함에 깊이 공감하여, 판사는 단호한 목소리로 나의 승소를 선언하며 땅땅땅 판사봉을 내려칠 것이 분명하다. 운명이란 놈은 극악무도한 범죄자에 비할만한 형을 선고 받고, 더이상 나같은 불의의 피해자들이 생겨나지 않기 위해 무기한으로 복역을 할 것이다.

억울함에 사무친 마음은 지구 내핵에 근접할 때까지 뚝뚝 떨어져버렸고, 나는 방황하는 킬리만자로의 하이에나처럼 해야할 일을 슬금슬금 미루며 멍하니 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당장 내일부터 다시 돌아가는 근무표를 짜서, 그녀와 내가 마주치지 않게끔 바꿔놓았다. 운명이 나를 거부한다면, 내 있는 힘껏 저주해주리라. 그런 옹졸한 마음에 고양이 선배가 싫어하는 근무타임에 선배를 배치했다. 불만 제기는 단호히 기각하리라.

그렇지만, 그날의 퇴근은 어쩔 수 없이 그녀와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고양이 선배가 출근을 해야 내가 퇴근을 할 수가 있었다. 평소라면 나 역시 자본주의 미소가 아닌, 진심을 담아 제발 나를 바라봐 줘라며 애원하는 듯한 한껏 꾸민 미소를 일발 장전하며 매력을 뽐냈겠지만, 그럴 상황도 기분도 아니었을뿐더러 고양이 선배의 고양이 목소리와 얼굴을 응시하는 순간 나는 다시 그녀의 사악한 매력의 수렁으로 빠져들것 같은 우려가 있었다. 매력포인트인줄 알았던 나의 미소는 일그러진 썩소에 불과했다는 것을 얼마전에야 깨달았기에, 썩소를 걱정하는 것은 당시 행동의 사유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의식하지 않은 채, (그러나 온 신경은 그녀에게 집중하며) 그녀에게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점포 문을 나선 나는, 잘 해냈다며 스스로를 칭찬했다. 진정 모든 것에 초연한 쿨가이의 면모가 내게도 있었다. 이 정도면 꽤 훌륭했다. 줄 수 있는 것이 찝찝함 밖에 없더라도 기꺼이 내주리라, 찝찝함에 더해 그녀와 그의 힘겨운 사랑을 만들어주고 응원하리라, 라는 고얀 심보였지만 나도 항상 성인군자일 수만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정호 선배는 뜻밖의 말을 덧붙였다.

"물어보긴 했는데, 나도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더니, 별 신경 안쓰는 것처럼 보였는데."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내 다답을 듣고 으응~ 하더니 평소대로 돌아갔어. 아니, 그보다 자기 남친 근무는 어떻게 알고 근무시간표를 짜놨냐며 너를 칭찬하던데? 너가 누나 근무를 오전으로 바꿔놨잖아. 누나 남친은 야간 근무자라, 아침에 점포에서 만날 수 있다며 좋아하더라고."

"...뭐라고요?"

이럴 수는 없다. 나의 섬세한 복수 계획이 무참히 박살나는 것을 넘어, 오히려 그 선남선녀 커플에게 호재로 작용했다니. 신이란 녀석은 다른 이들에게는 인자한 풍모를 보이면서, 우째 내게는 아인슈타인의 유명한 사진처럼 메롱만 하고 있는 걸까. 나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끼며, 애꿏은 삼겹살을 불판에 태웠다.

"야 임마! 고기 아깝게 뭐하는 짓이야!"

"놔두라고요. 이렇게라도 해야만 분이 풀리겠어요."

나는 두번째 삼겹살을 젓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검게 그을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손님! 장난하시면 안되죠. 아이구."

지나가다가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장님이 한 소리를 했다. 정호 선배는 나 대신 사과해야만 했다.

"아휴, 죄송합니다. 얘가 좀 정신이 나갔었나봐요. 하하하하"

그렇다. 세상은 내게 이미 죽은 돼지의 잔해 조차도 두 번 죽이는 일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보다, 한 명 더 올거야."

"예? 누구요?"

"지혜있잖아 지혜. 걔 불렀어"

지혜라 하면, 연하의 여성 아르바이트이자 오랫동안 우리 가게에서 근무해온 능숙한 바리스타다. 정호 선배와는 술 친구인 동시에 늘 투닥거리는 사이다.

"설마, 제 얘기한 건 아니죠?"

"야, 마! 하긴 뭘해. 내 입이 그리 싸보이냐?"

나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네."

점포 내에서 도는 어떤 은밀한 소문이든간에, 그에게로 흘러간다는 것은 곧 공공게시판에 써붙여놓거나, 혹은 점포 앞에 소문의 내용을 적은 플래카드를 다는 일과 같은 격의 유포행위였다.

"하..."

시멘트 바닥을 뚫을 듯한 나의 한숨을 듣자, 그는 고기를 씹는 입으로 웃음이 튀어나오는 바람에 사레가 들려 켁켁 거렸다.

"야, 야, 안 말했다니까. 형 못 믿어?"

굳이 대답할 필요를 못 느껴서 나는 삼겹살이나 또 집어들었다.

"어 저기 오네. 야 박지혜. 어여 와 여기야 여기."

레드와인으로 염색한 긴 머리를 가진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알 수 없는 조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이건 백프로다.

정호 선배가 말했다.

"야, 박지혜. 얘가 나 못 믿는다. 내가 너한테 이 자식 얘기 한 적 있냐?"

저런 물음을 한다는 것에 어이가 없어 나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응. 했잖아."

그녀는 웃으며 답했다.

"존나 찌질하다고 욕했잖아"

그런 거까지 세세하게 안 밝혀도 된다고!

"야! 말 안하기로 했잖아!"

"재밌잖아."

참 지랄들을 한다.

"xx 오빠. 너무 걱정하지마 이 오빠랑 나랑만 알아. 근데 오빠가 너무 티를 내니까 다른 사람들이 은근히 눈치를 챈단 말야."

"아니 내가 무슨 티를 냈다고. 나는 평소와 같이 한 점 흐트럼 없는 근무 태세를 유지하는 중이라고."

"말을 말자 말을 말어. 그냥 확 불고 다녀야겠다."

나는, 통찰력있는 반론을 제기하여 그녀를 논리로 제압할까도 했지만, 그녀를 회유하는 것이 향후 좀 더 유리할 것 같다는 냉철한 판단력을 우선 믿기로 했다.

"지혜야. 뭐가 먹고 싶니. 여기 맛있는 거 많더라."

그녀는 한바탕 시원하게 웃고는

"그럼 비싼거 시켜도 되지?"

나는, 생살이 도려지는 아픔을 느끼며 답할 수 밖에 없었다.

"콜"



그후로 한 시간 동안, 그녀는 자신이 마치 이 땅에 돼지고기를 말살할 역사적 사명을 품고 태어난 이처럼, 사정없이 고기를 결단내고 있었다. 고기를 굽는 선배의 페이스도 그녀의 젓가락질에 맞춰서 빨라질 수 밖에 없었다. 세 명이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이 자리에 모인 건지 의미를 상실한 채, 주변과는 독보적으로 다른 공기가 우리 테이블에만 넘쳐흘렀다. 나는 골똘히 그 모습을 관찰했다. 고기 굽기 장인과 고기 먹기 장인이 살아온 인생과 프라이드를 걸고 펼치는 운명의 한판 승부! 비장함이 흘러넘치는 광경에 불판을 갈아주는 직원도, 판이 아닌 사람의 열기에 놀라 흠칫했을 것이다. 

평소같은 때였다면 나는 이 광경을 웃으며 중계했을 것인데, 나는 침통한 표정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돼지고기들은 나의 지갑을 제물로 삼고 그녀라는 신에게 봉헌되고 있었다. 죄 없는 고기를 검게 그을린 죄가 이것이라면 지나치게 가혹한 것이 아닌가. 국가인권위원회나 과거사진상조사위원회에 진정서라도 해야 할 지경이다. 

"아휴, 배부르다. 오빠 잘 먹었어요."

그녀는 만족함에 젖은 촉촉한 눈빛으로, 설거지하시는 직원들이 매우 칭찬할 정도로 깨끗이 비워진 불판을 쳐다보더니 갑자기 존댓말을 쓰며 그렇게 말했다.

"이걸로 된거지?"

"음...뭐, 그렇다고 하지."

"뭐야 그 미덥잖은 말은!"

"어? 이 오빠봐라."

"이 정도면 만족해야지!"

"어머, 오빠. 나 쉬운여자 아니야. 그런 식으로 나오면 곤란해"

시련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것인가.

"소화도 시킬겸 커피라도 마시러 갈까?"

"그래 그래. 그러자. 물론 오빠가 쏘는거지?"

나는 유니세프 광고에 나오는 아프리카 소년의 눈빛을 가득 담아, 정호 선배를 향해 구원 요청을 보냈다. 그러나 그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모두다 한통속이다. 이 때 깨달았어야 했다.


까짓것, 고양이 선배를 좋아했던 과거사가 밝혀지는 게 차라리 덜 손해보는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일주일치의 생활비가 사라진 것은 둘째치고, 지나치게 굴욕적이다. 요즘 아르바이트들은 도대체 매니져를 어떻게 보는건가. 나는 사장의 조언을 다시 떠올렸다. 

그런 생각을 하며 카페를 향해 걷고 있는데, 틈만 나면 티격태격해서 남이 보면 유산 분배를 놓고 싸우는 남매나 혹은 여당 야당 각 의원의 보좌관들로 오인할만큼 잠시라도 말다툼을 멈추지 않았는데, 이 날따라 유난히 둘의 사이가 좋아보인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냥 좋아보이는 게 아니라, 나를 멀찌감치 두고 지들끼리 자그맣게 웃고 떠든다. 나는 그저 그들의 놀림감으로 전락한 처지를 비관하고 있을 뿐이었다. 으레 그런 결론밖에 낼 수 없었다.

그러나, 커피를 동시에 홀짝이던 둘이 그 다음 내놓던 말은, 내게 초신성 대폭발에 비할 법한 충격파를 주었다.

"우리 둘이 사귄다."

정호 선배는, 어린 날의 도둑질을 고백하는 사람처럼 털어놓듯 말했다. 나는,

"아, 이제 그만 놀려요. 적당히 좀 하자구요."

"거봐, 역시 안 믿잖아."

정호 선배는 그녀를 그윽히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말투가 지나치게 그윽하다. 이에 호응하듯, 그녀 역시 평소의 그 앙칼진 말투는 어디다 내버렸는지,

"자기가 평소에 워낙 뻥을 많이 쳤어야지."

라는 것이 아닌가. 아무래도 아까 둘이 속닥거린 것은, 이 파렴치한 작당 모의를 위해 거사 계획을 짜던 것이 틀림 없다. 둘의 웬수같은 사이도 나를 골려먹기 위해선 극복이 가능한 것인가. 유엔은 이 상황을 면밀히 조사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경우에 적용할 만 하다.

그런데, 대뜸 선배는 그녀의 어깨를 한아름 감싸안으며 말했다.

"일주일정도 됐어. 그치?"

어깨를 감사안는 손짓에 호응하듯, 그녀는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며 답했다.

"오빠가 매니져 언니한테 푹 빠져있느라 우리 상황이 눈에 안들어왔겠지."

콩트도 도가 지나치면 감정싸움이 난다. 나는 슬슬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아이 거 참, 남사스럽게 꼭 그런 짓까지 해야겠어요? 안하던 짓 하면 급사합니다 급사. 그리고 지혜 너도, 고기 만찬에 커피까지 쐈는데 대체 내가 뭘 더 해야하냐고! 너 북한에서 왔냐. 왜이리 심보가 고약해"

나의 호된 질책에도 그들은 여전히 서로를 향해 눈웃음을 만개한다. 만개하다 못해 이대로 눈이 찢어져 영원히 한 일자로 살아갈 기세다. 

그러니 나의 흔들림없는 의심의 눈초리도 차츰 무뎌질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이상하긴 했다. 뜬금없이 사내끼리 의기투합하는 시간에 지혜를 부르질 않나, 둘이 단 1회의 회전없이 천하제일고기대회를 열지 않나. 그래도 말이나 되어야지. 차라리 남북통일이 더 현실적있는 가능성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의 송곳같은 질문에 답하는 둘의 태연하고 단호한 태도는, 결국 남북통일이 이 세상에 남은 마지막 난제라는 것을 증명하는 사실확인을 해주었을 뿐이다. 그렇다. 둘은 아무래도, 파렴치한 사이가 되었음을, 나는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자동차가 시속200km로 나의 뒤통수를 향해 돌진해오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분기탱천하여 이렇게 논할 수 밖에 없었다. 이어질 말이 다소 구차한 것은 독자제현의 양해를 구한다.

"그러니까, 둘이 맨날 싸움박질해서 내가 어거지로 중재를 해야했던 과거는 헌신짝처럼 내팽겨치고, 그렇게 됐단 말이지. 나보고 이 사실을 받아들이란 거지? 아니,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것인가. 축하는 일단 하겠는데, 그럼에도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 있다 이거지."

나는 논변을 이어갔다.

"먼저, 석달 전에 선배가 지혜한테 꿔간 20만원. 그거 갚았어요? 그거 갚기 싫어서 지혜랑 사귀기로 하고 그냥 뭉개려는거 아녜요? 그리고, 나랑 둘이 있을 때 지혜가 멍청하다는 둥, 쓸데없이 가슴만 크다는 둥, 그렇지만 어떻게 한번 해보려고 해도 안 설 정도로 여자라는 생물이 아니라 무생물을 대할 때의 느낌이 든다는 둥, 온갖 부도덕한 말을 해놓던건 또 뭐냐구요! 세상에 선배랑 지혜만 남는다면, 차라리 돌로 아랫도리를 내려치고 무성욕자가 되겠다고 했잖아요. 벌써 잊은거에요?"

그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지혜 너도 말야. 나한테 '절대 오빠랑 근무 붙여주지 마세요. 근무 붙이면 깽판놀거야'라고 나한테 카톡 보냈던 거 기억안나? 정호 선배가 술 만땅 취해서 술주정 부릴 때, 나한테 전화해서 도와달라고 불러놓고, '다시는 이 인간이랑 술 먹으면 내가 사람이 아니다'라고 한 것도 기억안나? 정호선배보고 쓰레기 매립장에서도 수거하지 않은 인간 쓰레기라며, 그건 좀 심했다는 나의 반론에 도리어 화를 내며 나도 한통속이라고 욕했었잖아! 기억안나냐고!!"

그녀 역시 그저 웃을 뿐이었다.

"세상에는 말이죠. 순리라는 게 있어요. 그게 자연의 이치인지 물리법칙인지는 알게 뭐야지만, 아무튼 그런게 있다구요. 예를 들면, 자석의 양극은 붙을 수 없고, 빛보다 빠른 물질은 없으며,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1 더하가 1은 귀요미, 아니지, 1 더하기 1은 2다. 뭐 이런 것들 말이죠. 어느 날 갑자기 어떤 협회나 미국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열며 "고심끝에 1더하기 1은 2가 아니라 3으로 하기로 결정했습니다"라고 발표한다든가, 아니면 유럽연합에서 표결을 거친 후 "이제부터 물은 아래에서 위로 흐르는 거라고 결정합니다." 라는 발표를 지들 멋대로 한다면 세상이 어떻게 되겠어요? 엉망진창이 되겠죠? 일대 혼란이 벌어져서 세상의 종말이 벌어질 거란 말이죠. 요는, 둘이 그런 사이가 됐다는 것은,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인 성질의 것을 아득히 넘어선, 순리에 어긋나는 일이라 이겁니다. 아무리 명왕성이 인간 마음대로 태양계에서 퇴출되었다고 해도 적당히라는 게 있다는 겁니다!"

공자님도 울고 갈 논리정연한 나의 연설에, 정호 선배는 답했다.

"웃기고 있네. 그냥 배알꼴려서 그런거 아녀."

세상이 도대체 어찌되려는가. 나는 더욱 암담해질 수 밖에 없었다. 옛 성현들이 피를 토하며 후대에 전해주려 했던 '순리를 지키며 사는 법'이 실종된 현대 사회의 폐해가 절절히 느껴졌다. 조선일보를 읽는 어른들이 젊은이들을 지켜보며 쯧쯧대는 것도 나름의 이유가 다 있다.


절박한 심정으로, 순리대로 돌려놓으려는 나의 일장연설을 궤변이나 분풀이쯤으로 받아들였는지, 둘은 커피를 마시자마자 자리를 나섰다. 나의 이의제기는 그녀의 코웃음으로 각하되었다. 속절없이 둘을 따라 가게를 나와야만 했다.

"이제 어디 가지?"

그녀가 말했다.

"어디 가긴 어디 가! 2차 가야지! 신에게는 아직 할 말이 남았나이다!"

나는 단호하게 답했다. 어째 대답이 없다. 정호 선배는 잠시 멋쩍게 머리를 긁더니, 내게

"야, 담배한대 피자"

며 나를 으슥한 뒷골목으로 끌고 가는 것이었다. 논리에 대응하여 폭력을 쓰려는 건가. 나는 독립투사의 의연함을 떠올리며 결코 굴복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선배의 이어진 말은 그런 것들과 거리가 멀었다.

"저, xx야. 사실은 우리가 이제 모텔을 갈건데 말이지."

"......"

"그니까 먼저 들어가."

"......?"

"아, 고양이 선배 건은 걱정하지 말고. 어여 집에 가서 푹쉬어라. 내일 출근해야지."

그러는 그쪽은? 이런 반문이 나오려고 했으나, 상황에 이렇게 되자 나는 깨달을 수 밖에 없었다. 

이들에게 있어 순리가 아닌 것은, 오히려 내 쪽이었다.



내가 우스꽝스러운 아이돌 출신 배우처럼 부자연스러운 대사로 출근을 핑계대며 집을 향해 걷자, 그녀는 아쉬운 어투로 (그러나 표정은 매우 밝았다.) 배웅 인사를 했다. 덕분에 고기 잘먹었다는 인사도 덧붙였다. 3초 정도 나를 배웅하던 그 둘은, 이 순간만을 애타게 기다려왔다는 듯 몸을 돌려 인파를 헤치고 음속과 견주듯 나란히 걸었다. 나란히가 아니라 아예 하나로 합쳐서 걸었다. 오늘 밤 둘이 실행하려는 합병 계획을 벌써부터 연습하는 듯 보였다. 불꽃튀는 법리 싸움과 투자자들에 대한 설득, 또는 각자의 손해와 향후 기대되는 이익을 철두철미하게 계산하고 실행에 옮기는 합병 계획이 아닌, 무지의 소치이자 지극히 동물스러운 감정으로 행해지는 무계획적인 합병계획이 둘 사이에서 일어날 예정이다. 

괘씸한지고. 괘씸한지고. 씩씩 거리며 그 둘이 향하는 모습을 외면하며 나의 길을 걸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말은 이런 때에 쓸 만한 말이다. 그릇된 결정과 휘발성 감정들이 엉키는 류와 어울리는 것은, 때로는 이처럼 배신감에 치를 떠는 상황도 견뎌내야 한다. 알고는 있지만, 그럴 때마다 받아들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인간에 대한 선한 시선을 가지고 바라보려 하지만, 비겁하고 치졸한 행위를 마주할때마다 정의로운 분노가 치솟을 수 밖에 없다. .

도대체 무엇이 파렴치한 짓이냐고 되묻는 다면, 답변은 일단 보류하고 집에가서 숙고한 뒤 반론장으로 제출하겠다. 좌우지간, 나는 대상을 잃은 분노에 휩쌓여 길을 걸었다. 어라, 어쩐지 데자뷰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기분탓이리라. 

그렇게 길을 걷다, 나는 사라지려 하는 대상을 다시 세우기 위해, 멈추고 몸을 돌렸다. 그들이 향한 모텔의 간판이 영롱히 빛나고 있었다. 방황하는 분노가 다시 의지를 추켜세우려는 순간, 만실을 알리며 모텔의 불이 꺼졌다. 나는, 온몸에 힘이 주욱 빠지며 현자타임에 빠져들었다.

남은 건, 봉투 녀석이 쏟아낼 잔소리에 대한 걱정뿐이었다. 여기에 남는 것도 두렵고 집에 가는 것도 두렵다. 이 길 잃은 양은 어디로 가야 하나이까! 전봇대의 신에게 빌어보았지만, 날파리만 꼬여들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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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빵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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