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만의 휴일이다. 2주 연속이나 휴일없이 근무를 해야만 했다. 사장이란 사람은 마치 조선시대의 악덕 아전처럼 생겼고, 그런 행동을 했다. 그 덕에 알바들과 직원들을 어렵게 구해도, 금방 관두고 말았다. 죽어 나는 것은 나 뿐이었다.

모처럼 만의 휴일이지만, 딱히 할 일은 없다. 기분 전환 삼아 방 청소를 해볼까 생각하다가, 어쩌면 그것이 봉투의 생명을 위협하는 일이 아닐까는 걱정이 들어,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곧 관두었다. 당장이라도 대청소를 하고 싶지만, 일단은 말 벗의 안위를 당분간 걱정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적응이 되셨고만?"

"뭘?"

"이 몸의 존재와 이 상황을 말야"

"며칠 동안을 이러고 보냈는데, 이게 꿈이라면 내가 혼수상태에 빠진 거겠지."

"잘 생각했다. 상황이 어쨌든 일단 받아들이고 보는 것이 현명한 법이지."

녀석과의 기묘한 동거가 이어진 지도 어언 일주일째. 분명 이번 휴일은 뭔가 값지게, 기왕이면 지구와 인류 평화에 도움이 되고, 몇없는 내 지인들과 사랑하는 가족들에게도 뿌듯하며, 나아가 사랑의 결실을 맺고 장미빛 청춘 라이프에 응하는 우연한 만남을 이루리라 다짐했건만, 지난 휴일과 지지난 휴일에 그러했듯, 오늘도 방콕의 신세를 면하지 못한다.

"그러지말고, 심부름이나 좀 다녀와라."

웃을 일이다. 봉투 주제에 뭐가 필요하다고,

"나는 필요한 것이 없지만, 이 방이 원체 더러워서 안되겠단 말이지."

"뭐냐. 방 청소하면 너 죽는거 아니야?"

"죽긴 누가 죽어. 너는 봉투가 죽는다는 소리 들어봤냐?"

"청소야 뭐 금방 하지. 나는 그저 너의 안위를 걱정한 것 뿐이라구"

"이 몸은 걱정하지 말고 청소나 좀 해라.

그래, 오랜만에 청소나 해볼까. 하지만 오늘은 휴일이다. 휴일은 쉬는 날이다. 청소는 직장에서도 열심히 하니, 집에서는 좀 쉬고 싶다. 언제 또 휴일이 올지도 모르는데.

나는 잠시나마 청소라는, 나답지 않은 무익한 짓을 하려고 했던 것을 반성하며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스프링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침대가 괴성을 낸다. 침대를 괴롭히는 바로 이 느낌, 그래 휴일은 이런 맛이 있어야지.

"그럴 줄 알았다."

"청소는 다음에 해도 되지만, 쉬는 건 오늘이 아니면 못한다."

"조악하기 짝이 없군."

"결심했다. 오늘은 그동안 적금 대신 차곡 차곡 외장하드에 모아둔, 물 건너온 예술영상들을 보면서 한없이 빈둥거릴거다."

"세상에 너 같은 놈들만 살았다면, 지구는 일찌감치 쓰레기 더미가 태평양을 가득 메우고도 남았을 거다."

"잔소리하지마.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나는 오늘 한없이 빈둥거릴테다. 김정은이 핵폭탄을 쏴도 빈둥거릴거야."

빈둥거리는 일에 이유는 불문이다. 세상을 산다는 것은 옳은 일과 필요한 일을 선택해야 하는 것의 연속이지만, 빈둥거리는 것은 여하고문하고 둘 다에 속한다. 숭고한 아름다움까지 느껴진다.

어차피 누가 찾아오지도 않지만, 혹시나 모를 불상사에 대비해 서랍 깊숙한 곳에 숨겨놓은 외장하드를 꺼냈다. 주인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린 녀석의 반짝거림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동안 틈날때마다 모아놓은 작품들이 이 작은 네모난 녀석 안에 담겨져 있는 것이다. 이 어찌 훌륭한 휴일이 아닐쏘냐! 

나는 본격적인 감상을 위해 심신을 단정히 가라앉힌 채, 무사가 칼을 뽑듯 헤드셋을 끼려고 한 찰나,

"그럼, 최소한 문 앞에 놓인 쓰레기 봉투라도 내다 버리는 게 어떠냐?"

는 말이 들렸다. 그 말은 퍽, 외면할 수가 없었다.


쓰레기봉투를 살 때는 항상 고민이 된다. 100리터의 호쾌함과 20리터의 귀여움 중 무엇을 선택해야하는가. 100리터는 성인의 품처럼 너그럽고 광활해서, 이 방의 모든 쓰레기들을 능히 품고도 남을 넉넉한 품을 지닌 반면, 20리터는 앙증맞고 귀여울 뿐 아니라, 쓰레기들을 차곡 차곡 담아야만 하는 불편한 속성까지 지니고 있어, 가계 경제에 도움이 되는 녀석이다.

나는 항상 고민하다가, 20리터를 사서 100리터 봉투에 담듯 대충 던져놓는 중재안을 택했다. 그러다보니 꽉 차지도 않은 헐렁한 봉투 세 개가 문 앞에서 입구가 봉해진 채, 나처럼 늘어져 있다. 문을 나서고 들어올 때마다 외면했던 것이라, 녀석의 말을 흘려보낼 수만은 없었다. 인간적으로 버릴 때가 되긴 했다.

"대낮부터 그런 불온영상을 보는 건 건강에도 좋지 않다. 쓰레기 봉투도 버리고 빨래도 좀 돌리면 내가 유익한 정보를 알려주도록 하지."

"정보? 봉투주제에 뭘 안다고"

"이 몸이 어떤 존재인지 다시 설명해야 하나. 나는 꽤 많은 것을 알고 있느니."

일주일이나 지났지만, 녀석의 도사풍 말투는 여전히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익숙해지지 않는다는 말은 주의 깊게 들을 수 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고민하는 나에게 녀석은 한마디를 덧붙였다.

"고양이 선배에 대한 정보다."

나는 용수철처럼 침대에서 튀어올랐다. 살짝 먼지가 일어나, 다시 제각기의 위치로 분배되었다.


쓰레빠를 찍찍 끌고 쓰레기를 후딱 버린 뒤, 세제와 섬유유연제를 탈탈 털어놓고 세탁기를 돌렸다. 기왕지사 움직인 거 인심 쓴다 생각하고 널브러져 있는 몇개의 봉투를 주워담았다. 일주일 분량의 청소는 대략 마친 것 같다. 

녀석이 사오라고 시킨 생필품들을 사오고 방 크기에 비해 쓸데없이 큰 빨래 건조대에 대충 빨래들을 널어놓고 난 뒤, 나는 녀석의 앞에 정좌하고 물었다.

"약속대로 정보를 내놓아라."

"엊그제, 겹치는 휴일에 커피라도 한 잔 하자는 너의 말에 고양이 선배가 선약이 있다며 거절했지? 그 선약은 깨진 것 같다. 지금 가면 아마 꽤 유익한 대화를 나눌 수 있을껄?"



고양이 선배에 대한 얘기를 아무래도 좀 해야겠다.

고양이 선배라는 별칭은, 그녀가 고양이를 닮아서 붙인 나만의 별명이다. 아는 사람은 그동안 나 뿐, 이제 봉투 녀석도 알게 되었으니 둘이 되었는가. 좌우지간 그녀는 고양이의 귀여운 외모를 간직한 소유자이자, 동시에 고양이의 그 까칠함까지 같이 보유한 사람이다. 고양이가 인간으로 둔갑해 돌아다닌다고 해도 크게 놀랄 것 같지는 않다. 

고양이 선배를 알게 된 것은 1년 전, 카페에 취직을 하고 부터였다. 선배는 답답하고 어리숙한 나를 꽤나 답답해 했다. 그래서 제일 무서웠던 선배인데, 일이 능숙해지고 꽤나 밥값을 하게 되자, 선배는 도리어 내게 많은 부분을 의지했다. 일적으로도 사적으로도 그러했다. 선배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듣는 밤은, 무료하기로 치면 갓 나온 백색 도화지같은 내 일상에 있어, 하나의 빨간색, 아니 핑크색 점에 가까운 밤이었다.

그녀의 시간에서는 전혀 다른 것이었겠지만.

이번 주, 어쩌다 보니 휴일이 겹치는 희귀한 상황에 놓이게 되어, 나는 내가 짠 근무 시간표를 들여다보며 며칠을 고민했다. 영화라도 보러 가자고 할까. 그건 좀 그런가. 아니면 차나 마시러 가자고 할까. 신사답고 품위있게 커피를 홀짝이며 선배와의 커피 향기나는 시간을 보내볼까. 는 고민들로 본업을 대충 뭉게다가, 어제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말을 꺼냈지만, 선약이 있다는 말을 듣고 시무룩 모드로 빠져버렸다. 이런 일이 익숙해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며칠간 좌절 모드로 우울해했을 것이다.

그녀를 사모하게 된 경위는 이러하다. 여느 때와 같은, 혼란하고 바쁜 카페 일이 거의 마무리 되고 손님도 거의 찾지 않는 마감시간, 그녀는 문득 내게 말했다.

"xx는 어떤 동물을 좋아해?"

뜬금없는 질문에 나는 속마음을 들킨 것처럼 잠시 당황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고양이를 좋아해요."

그녀는 그 말에, 세상의 모든 성녀들의 웃음을 총합한 듯, 한껏 빛나는 미소를 지으며 "역시 그렇구나. 그럴 줄 알았어.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티가 난단 말이지. 나도 고양이 좋아해."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우주 공간에서 태양을 직접 바라보면 실명한다고 한다. 나는 그 미소에 실명할 뻔했다. 그리고 즉시 깨달았다. 고양이를 좋아한다는 나의 말은, 사실상 "선배를 좋아해요"라는 고백이었다는 것을. 이미 나는 그녀를 사모하는 불측한 마음을 어느 순간부터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 후로 연애사업이 잘 되었다고 하면, 내가 이런 글을 쓰고 있을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녀를 사모하는 마음을 깨달은 후부터, 어쩐지 나는 그녀를 대하는 일이 어렵고 어색했다. 천진난만한 웃음을 지으며 농담을 주고 받던 것도 어렵고 낯설었다. 나는 그녀의 미소를 볼 때마다 음료를 만들던 컵을 잠시 내려놓았다. 언젠가 불현듯 찾아온 그 미소에 컵을 떨구고 깰 뻔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루를 견디고 나면, 정호 선배와 함께 술을 마시며 하소연을 하곤 했다. 그는 내게

"그러고 있으면 떡이 생기냐. 사내가 말야 일단 한번 부딪히고는 봐야지. 그러고 있다가 딴 놈이 채가면 그 때는 술 사달라고 하지마."

그랬다. 그의 말대로, 그녀는 손님들에게서나 다른 남자들에게서나 인기 만점이었다. 손님들에게 번호를 따이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적인 일이었고, 어떤 날은 바빠 죽겠는데 장미꽃 한아름이 배달되 손님들과 직원들의 시선을 강탈하는 일도 있었다.

그녀는 그 모든 것을 귀찮아했지만.

"선배, 나만의 후리함이 있다구요. 원래 어렵고 힘들고 간절하게 얻은 사랑일 수록 빛이 나는 법이죠."

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울고 갈 인내심으로, 불측한 감정을 가지고 접근하는 모든 남자들에게 얼음성처럼 냉혹하고 도도한 그녀의 마음에 불을 지피는 중이었다. 다른 어리석은 자들이 그녀의 성 근처에도 못가고 얼음에 미끄러져 낙오해 갈 때, 나는 열심히 부채질을 하며 나만 들어갈 수 있는 입구를 녹이고 있었다. 

이런 내 깊은 속뜻을 설명하자 선배가 말했다.

"라이터로 지진다고 얼음 성이 녹냐? 녹아?"

그러고는 소주를 들이키며 술집이 떠나가라 웃는 것이었다. 반박은 하고 싶지만 어쩐지 명쾌한 말이 나오지 않아, 분한 마음을 삭히고 나도 소주를 들이켰다.



그렇지 않아도 지구 평화와 (중간생략) 청춘 러브 라이프에 조금이나마 가까운 행위를 하며 휴일을 채우고 싶었던 바, 나는 녀석이 내준 정보를 믿고 꽃단장을 마쳤다. 책이라도 한 권 들고 가야겠다. 느긋한 휴일에 모자란 지식을 쌓으며 보내기 위해 카페를 들렀다가, 우연히 마주친 것처럼 선배를 만나는 게 좋을 것이다. 

봉투 녀석에게서 들은 정보를 따라 찾아간 카페가 눈 앞에 보였다. 주인의 뜻을 알아차리지 못한, 아니, 너무 잘 알아차려서 시키지도 않은 짓을 벌이고 만 심장이, 늑골을 깨버리고 튀어나올 정도로 요동쳤다. 고구려가 요동을 치던 기세가 바로 이 것인가. 심장이 전해주는 에너지는, 쌓인 피로들이 지배했던 육신을 재설정하여, 아드레날린이 샘솟는 육체로 바꿔주었다. 나는 머릿속으로 근사하고 신사다운 말들을 준비하고, 그녀가 좋아할만한 이야기와, 그녀가 좋아하는 케이크를 사주기로 마음을 먹고, 다시 발을 딛었다. 

유리창가로 그녀의 모습이 비쳤다. 고양이를 닮은 속눈썸이 닫히며 깜박, 그리곤 반짝이는 눈동자가 다시 열린다. 그녀는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손과 그녀의 눈길을 누구보다 가장 많이 받고 있을 핸드폰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같이 촉촉한 터치를 느낄 수 있을텐데. 나의 섬세한 하트는, 이미 그런 불측하고 경망스러운 망상들로 가득차, 고작 몇 미터의 거리를 걷는 동안 여러 차원을 여행하는 사람처럼 내밀한 시간을 거쳤다.

한껏 준비된 미소를 일발 장전하고 문을 열었다. 그런데

"...그래서 있잖아. 자기랑 여행가기로 약속한 거 때문에 휴가 내야 한다고 했지."

"아! 역시, 기억하고 있었구나?"

"당연하지. 자기랑 한 약속인데. 나도 여행가고 싶다고 전부터 졸랐었잖아."

"다행이다. 내가 그잖아도 자기가 좋아할 만한 펜션 몇 개 봐둔 거 있어."

내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그녀는 핸드폰을 보던 고개를 들어 앞을 보았다. 그 앞에는, 못 보던 남성이 있었다. 그의 훤칠하고 잘쌩긴 면모와, 우롱차를 녹여낸 듯한 그윽하고 깊은 음성을 듣자, 나는 순식간에 쪼그라드는 기분이 들었다. 쪼그라들고 쪼그라들어서, 애벌레나 번데기나 민달팽이에 비할 법한, 볼품하기 짝이 없어 그가 의도치 않게 짓밟고 가도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하고 꾸엑 죽어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상황에 놀라 잠시 서 있는 나를 발견하고, 그녀가 말을 걸었다.

"어? xx야, 무슨 일이야?"

...아, 선배, 잠깐 책 읽으려고 카페 왔어요."

"아~ 그래? 무슨 책이야?"

나는 더듬대며 책 제목을 살짝 보여줬다.

"...하여간 진짜 재미없는 것만 읽어요. 인사해, 내 남친님이야. 자기야, 이 쪽은 우리 카페 직원"

"아, 안녕하세요. 말씀 많이 들었어요."

나는 잠시 당황하다가, "아, 예, 안녕하세요."라며, 두더지가 땅굴로 기어들아가는 듯한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그 역시, 태양에 필적할 법한 미소를 가지고 있었다.



그 시간을 어떻게 흘려보냈는지 모르겠다. 나는 구석에서 쪼그려 책을 활짝 펴놓고, 활자보다 곁눈질로 그녀와 그를 훔쳐보다가, 이러다간 번데기가 아니라 박테리아나 세균 수준으로 작아질 것 같은 자괴감이 들어 그 자리를 파했다. 몰래 후문으로 나가 터덜터덜 걸었다. 이미 노을은 짙어져 휴일이 끝나감을 알리고 있었다. 장미빛 청춘 라이프는 개뿔이나. 어찌하여 신은 내게 이런 쓰라림을 주시는가. 이에야스가 틀렸다. 틀렸다고!

겁없이 길가에 나와있는 돌맹이를 걷어 차봤지만, 하필이면 엄지발가락에 맞는 바람에 눈물이 날 듯 아팠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세균까지 작아졌던 내가 번데기 정도로 회복되자, 마취제를 맞은 듯 정지했던 뇌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나는 왜 이런 수모를 겪어야만 했나. 나는 왜 물 건너온 예술 영상들을 탐미하며 금쪽같은 휴일을 한없이 잉여스럽게 빈둥거리지 못하고, 이런 못 볼 꼴을 봐야만 했나. 뇌는 말했다. 봉투 때문이라고.

나는 분노와 원통에 휩쌓여 구천을 떠도는 악귀마냥 걸음을 옮겼다.


"첫째는, 이런 구라라도 안 치면 네놈이 평생 청소를 미루다가 먼지에 질식사할 것 같은 노파심 때문이었다."

가공할 만한 분노에 휩쌓여 철문을 부술듯한 기세로(그러나 엄지발가락을 희생하며 느낀 교훈을 토대로 중요한 순간엔 섬세한 스냅으로 문을 열었다.) 방에 들어가자, 불문곡직하고 봉투가 말했다.

"너, 요즘 좀 위험했다고. 밀린 청소량이 한계 수준이었단 말이다."

그건 안다. 하지만 굳이 이렇게까지 사람을 절벽으로 밀어야 하나! 나는 차분히 반론을 준비하며 녀석의 무도한 행위를 비난하려 했다.

"둘째는, 네 놈의 헛짓거리를 끝내기 위함이었다."

나는 순간 정지했다.

"네 녀석은 '자신만의 사랑법' 운운하며 그 길이 마치 참된 사랑의 길인양 말하고 있지만, 실상은 그녀와의 해피엔딩은 자신이 없고, 털어놓자니 친구인 그녀도 잃을 것 같고, 아무 것도 잃기 싫어서 차일피일 시간을 떼우고 있을 뿐이었잖냐. 네 녀석이 나름대로 목표를 향해 접근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 카페 앞의 그 남자는, 네가 그녀를 품에 두고 있던 시간의 5분의 1만에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고 연인이 되었다. 네놈이 라이터로 얼음을 녹이고 있을 때, 그는 쇄빙선을 가져와 얼음을 박살내버렸지."

녀석은 말을 이었다.

"'우연히 휴일이 겹치는' 날을 맞이하고도 고작 그 정도 일 밖에 하지 못하는 네 놈을 며칠간 지켜보면서 나는 결론을 내렸다. 네 녀석은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그 '우연히 휴일이 겹치는 날'도, 네놈이 굳이 안 해도 되는, 2주동안 휴무 없이 근무를 하면서 억지로 맞춘 것이 아니었냐. 그토록 지랄을 해놓구선 고작 그 꼴이라니. 내 욕 할 것 없다. 다 네 놈의 어리석음이 빚은 일이로고. 내게 죄가 있다면, 네 놈의 어리석음을 마주할 거울을 갖다 준 죄 뿐이다. 사형집행인에게도 살인의 죄를 물을 셈이냐?"

녀석이 말을 마쳤다. 조곤 조곤, 어조의 변화 없이 내뱉는 녀석의 말들 사이로, 봉투를 갈기 갈기 찢어버리는 내 모습이 언뜻 비쳤다. 나는 상상에 이끌리듯 가위를 꽂아둔 책상 위로 나아갔다. 순간, 책상 위 거울에 내 얼굴이 나타났다.

내 얼굴에는, 그와 그녀에게 있는 태양빛 미소가 1그램도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있는 힘껏, 한아름 웃어보였지만, 태양빛에 비친 달 정도에도 근접하지 못하는 미소만 지어졌다. 빛나기는 커녕 잿빛이 가득한 달님의 크레이터 같았다.

거울 앞 상대에게 차마 화를 낼 수는 없어, 나는 다시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창 밖에는 노을이 패배하듯 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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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빵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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