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제위께서 지금껏 이 책을 성실히 읽어오셨다면, 연거푸 불행이 중첩된 나날을 보낸 나에 대한 일말의 동정심을 가지실 것이다. 아니, 필히 그럴 것이다. 마땅히 나의 고통스러운 경험을 읽고 안구에 습기가 촉촉해지면서 가슴 깊은 곳 저 너머에서부터 올라오는 뜨거운 감정에 인간애적인 따스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봐줘야 한다. 그렇지 않고 그저 낄낄대며 즐거워했다면, 독자께서는 지극히 불성실한 독서습관을 지니셨거나 혹은 남의 불행을 자신의 행복이라 느끼는 인륜을 저버린 인간이라 비난해도 납득하셔야 한다.

나는 며칠 간 매우 격렬한 나날을 보냈다. 매우 격렬하고 역동적이며 스펙타클하게 아무 생각이 없이 일과 집장을 오갔다. 출근-퇴근-잠, 출근퇴근-잠, 출근-퇴근-잠. 다가올 인류의 미래에서 기계가 보내게 될 나날이 바로 이런 것인가. 직장에서는 뇌를 세탁기에 돌린듯 새하얘진 채로 한 잔 두 잔 커피를 뽑다보니 머신이 나이고 내가 곧 머신인가 하는, 머운몽의 경지에 이르는가 하면, 퇴근 후 집에서는 세탁을 마친 뇌가 빨래가 널리듯 탈탈 털려 축 늘어진채로 잠이 들어, 그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필연코 맞게 되는 영면의 나날을 미리 체험해 보는 시간을 지냈다. 나름대로 유익한 시간이었다.

유익한 시간이었음에도 불구, 봉투 녀석은 나의 보람찬 나날이 고까웠는지, 아니면 미증유의 불행론을 펼친 자신의 업보를 참회하는 것인지, 자꾸만 내게 말을 붙였다.

"마, 고만 자라 좀."

라며 자꾸 깨운다거나,

"좌절감이 사나이를 키우는 것이다."

라는 조홍식 가르침을 펼친다거나

"이 몸에게 하소연이라도 해보거라."

라며 어설픈 카운슬러 짓을 시도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동안 번번히 녀석의 작당놀음에 놀아나 나는, 그 모든 유혹을 이겨내고 오롯이 잠의 세계에서 흔들리지 않은 편안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어느 날은 뒤척임 없이 10시간이 훌쩍 넘는 잠을 자고 일어나보니, 밤새 옆동네에서 화산이라도 새로 솟았는지 하얀 면티에 먼지가 쌓여 회색빛을 내뿜기도 하였다. 이 방에 유독 먼지가 많은 까닭을 이해할 수가 없다. 그전까진 그럭저럭 깨끗했는데 봉투 녀석이 나를 귀찮게 하기 시작한 이래로 정말로 방이 더러워진 의혹을 지울 수가 없었다. 생각해보면, 그럭저럭 괜찮았던 소소노멀라이프가 녀석의 강림 이래로 세기의 대종말을 향해 수렴하기 시작한 느낌도 든다. 

일정한 하중을 일정한 시간동안 일정한 형태로 침대에 가하고 있던 나는, 녀석을 향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르는 의혹들을 지워버릴 수가 없었다. 때때로 녀석의 말에 흠칫하며 잠인지 뭔지 하여간 그 상황에서 깰 뻔도 했지만, 아무런 미동없이 잠이 들며 속으로 '좋아. 자연스러웠어'라며 흡족해하기도 했다. 녀석과의 무언의 한판승부야 말로 지금 내게 겨룰 수 있는 유일한 승부처였다는 것이 꽤나 흡족했다. 

나는 본디 만물과의 조화로움을 추구하는 사내이기에, 호승심이나 투쟁심으로 쓸데없는 것에 자존심을 건 한판승부를 벌이는 사내들을 보면 경멸해왔었다. 오락실의 펀치기계를 앞에 두고 아리따운 숙녀 앞에서 아웅다웅하는 우락부락한 사내들이나, 즐겁고 명랑해야 마땅할 축구경기에 유독 활활 타오르는 승부욕을 발휘하며 금방이라도 전쟁이 일어날 것 같은, 아니 일어나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듯한 녀석들이 귀여운 교복을 입은 여학우들의 앞을 굳이 지나가는 드리블을 지켜보고 있자면, 도대체 인간이란 얼마나 어리석은 생물인가에 대한 철학척 고찰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숙녀와 여학우들이 또 어느 순간, 미련한 사내의 곁에 서서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마노라면,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한 고찰은 '이대로 인류가 멸망한다고 해도 당연한 죄값이다.' 라는 꿈도 희망도 없는 결론에 도달하기도 했다.

일련의 과거를 지녀온 내가 고작 봉투 녀석에게 호승심을 느낀다는 것은, 이전의 사내와는 달리 녀석이 굉장한 내공을 지닌 상대라는 뜻이리라. 나는 그렇게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지 않고선 이 변화를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가 없다.

그래서, 긴 잠에서 깨어난 나는, 오도송을 읊는 고승처럼 녀석에게 권했다.

"날씨도 좋은데 옥상이나 구경갈까?"

녀석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더니(이래도 구깃구깃 저래도 구깃구깃한 녀석이지만, 이때만큼은 황당한 표정을 지은 것이었다고 믿고 있다.) 

"뭐, 그러던지"

라며 구깃거리는 비웃음과 함께 답했다. 오냐, 오늘 네 놈에게 인간이란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지를 능히 알려줄 필요가 있었다. 이 오만한 녀석, 공룡도 멸종당한 이 험난한 지구를 정복한 인간의 무서움을 맛보게 되리라. 


옥상을 청승맞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벼락 맞을 놈들이다. 옥상에서 바라본 도시의 풍광만큼이나 이 삭막한 도시에 한줄기 오아시스를 제공하는 공간이 없다. 솔직히 기술적으로 가능만하다면 도시의 공원들은 모조리 빌딩 위로 올리는게 좋다. 초고속 엘레베이터와 함께. 초고속 빌딩의 옥상들은 시민의 공간으로 남겨두면 사람들이 삼삼오오 옥상을 이용하게 될 것이고, 개중에는 이 원룸의 거주자들도 포함될 것이고, 고로 이 원룸의 옥상은 오롯이 나 홀로 독점할 수 있으리라. 

이것은 단순히 놀부심보가 아니라, 옥상을 고작 장독보관이나 빨래건조용이나 삼겹살 파티용으로 밖에 쓰지 않는, '아마추어 옥상러'들에 대한 지탄이기도 하다. 자고로 옥상이란, 해질녁 저 먼 산 너머로 지워지는 붉은 해를 바라보다가 하루가 점멸하고 가로등이 살아나며 퇴근길이 분주한 도시의 풍광을 지긋이 감상하는 고즈넉한 멋을 즐기는 것이 비로소 '옥상순결주의자'의 바람직한 태도라고 여기고 있다. 또한, 모두가 잠이 든 새벽녘, 찬바람을 가르고 옥상에 올라 총총히 떠 있는 별을 관조하며 별 하나에 민혜와, 별 하나에 미정이와, 별 하나에 은영....아니, 좌우지간 떠나간 옛사랑보다 순국선열과 선지식들의 고고한 넋을 기리며 자신의 하루를 돌아보고 내일의 희망을 점검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옥상완전주의자'가 견지해야할 자세이기도 하다.

그런 옥상을 한낱 봉투 따위의 녀석과 오른 까닭은, 이곳이 나의 홈그라운드이기 때문이다. 녀석은 곧 펼쳐질 피비린내 나는 결투를 아직은 모르겠지만, 나는 안다. 녀석은 나의 함정에 걸려들었음을. 


육중한 철문을 열자 문 사이로 달빛이 스며든다. 나는 콜로세움에 들어서는 검투사의 심정으로 발을 내딛었다. 왼손에는 봉투를, 오른손에는 가방을. 잠시 투지를 다지며 감회에 젖자, 녀석이 한마디 붙인다.

"뭐야 이 자식. 왜이리 쓸데없이 비장해."

하아, 운치없다. 운치없어. 정말로 운치도 없고 눈치도 없는 녀석이다. 

"저기 보이는 드넓은 풍광을 보고도 감회에 젖지 않는 자가 있다면, 주사바늘로 심장을 찔러도 피 대신 녹슨 고철물이 나올 기계같은 작자겠지."

"며칠 전엔 '이 지긋지긋한 촌구석. 지겨워 죽겠다!' 며?"

"쓸데없는 말은 기각해라. 좀 더 자연에 경배하도록."

"넌 인간이 만들어낸 콘크리트 투성이도 자연으로 퉁치는거냐."

자연의 아름다움에 경탄할 줄 모르는 녀석의 오만방자함이 경멸스럽다. 나는 더이상 대꾸하지 않고, 조용히 담배에 불을 붙였다.

"어어? 너 임마. 그거 대기오염이야. 자연 타령하더니 공기만 오염시키는 놈이구만."

"무엄하다. 담뱃잎은 어디 외계에서 왔냐. 다 자연에서 거두어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법."

봉투 녀석은 내 말에 감탄했는지,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말을 이었다.

"네놈. 주둥이 놀리는 꼬라지를 보아하니 이제 좀 회복이 되었나 보구만."

"회복은 무슨. 나는 애초에 털끝하나 다치지 않았도다. 그보다"

슬슬 본론을 꺼내야겠다.

"요며칠 사색의 시간을 지내면서 무언가 깨달은 바가 있어."

"오. 드디어 너의 어리석음에 대한 성찰이 있던 건가?"

어리석음이라니. 역시 손 봐줄 필요가 있다.

"네놈은 말이지"

나는 미간을 손오공이 원기옥 모으듯 한껏 끌어모아, 호랑이가 먹잇감을 노려보는 눈매를 만들어 녀석을 쏘다보았다.

"너무 건방져."

"하루이틀이냐?"

"그래서 말이지. 조금 그 오만함을 손봐줄 필요가 있다."

"뭐야. 어리석음에 대한 성찰이 왜 또다른 어리석은 결론으로 도출된 것이냐."

"어리석음이라니. 나는 요며칠 내 삶이 왜이리 엉망진창이 되버린 것인지 진지한 탐구를 해왔다고."

"그래서?"

"그래서긴. 결론은 네놈 때문이다라는거지."

"어이는 없지만 일단 말은 더 들어보지."

"그래서 네놈의 오만함에 대한 교훈을 주고 나는 새로운 삶을 살겠다. 아니, 이전처럼 평온한 삶을 살겠다. 이 뜻이다."

"....풉"

봉투가 또다시 꼬깃대며 웃었다. 치익치익 웃었다. 배를 잡고 웃었다.

"으하, 하...뭐 그렇다고 치자. 네 놈이 뭘 어쩔껀대?"

"봉투 네놈의 성별은 아무래도 남자에 가깝겠지?"

"봉투에게 성별을 묻는 너의 어리석음엔 더이상 논평할 가치를 못느끼지만, 좋을대로 생각해라."

"그렇다면 사나이답게 승부를 보자!"

"왜 봉투에게 사나이 다움을 요구하는건지 알 수는 없지만, 뭘로 승부를 보냐? 보다시피 나는 손도 없고 발도 없다."

"알고 있다. 그래서 준비했다."

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오른손에 들고 있던 가방을 내려놓았다. 가방을 열고 나는, '그것'을 꺼내어 개선장군같은 위용을 뽐내며 봉투 녀석의 코 앞에 내밀었다.

"뭐야. 부루마블?"

그렇다. 부루마블이다.



부루마블은 인류 역사상 최고의 아케이드 게임이 아닌가 생각한다. 도박을 제외하고. 어린 날 나는 호텔왕게임, 혹은 경찰과 도둑같은 아류들을 먼저 접했는데, 형이 친구들과 함께 들고온 초대형 부루마블을 접하고 난 뒤 나의 유년은 새로운 차원의 문이 열리고 또다른 자아를 찾아낸듯한 진귀한 경험을 했다. 오리지널의 그 고귀함이란 역시 아류들은 감히 범접할 수 없다. 부루마블의 신도가 된 나는, 용돈을 탈탈 털어 학교 앞 문방구에를 찾았다. 수염이 불쑥불쑥 나있고 어린 초등학생들에게 "세상은 다 그런거란다." 따위의 알 수 없는 소리를 지껄여놓고는, 그것이 만족스러웠는지 혼자 낄낄댄다거나, 혹은 문방구 앞에 가져다놓은 '더킹오브파이터' 게임기 앞에서 학교의 자존심을 걸고 펼치는 더킹 대전에 불쑥 난입하여 연들아 아이들을 격파, 항의하는 초등학교 고학년생들에게는 "짜식들아. 어른을 만만하게 보면 안된다는거야. 좀 더 연습해와" 라는, 도저히 가게주인의 발언이라고는 볼 수 없는 말을 일삼으며 도발했다. 지금같으면 고발프로그램이나 뉴스나 sns에서 맹폭을 맞고 진작에 망할 것 같은 서비스 마인드를 가진 아저씨였다. 하지만 그 때엔 그것도 마케팅이었는지, 주인 아저씨의 도발에 울음을 터뜨리거나 씩씩거리며 집에 돌아간 녀석들은, 다음날이면 아저씨를 꺾고야 말겠다며 폐관수련을 하곤 했다. 

좌우지간, 나는 며칠 간이나 등하교길에 문방구를 지나며 창가에 진열되어있는 부루마블을 바라보았다. 지극히 무도할 뿐 아니라 안목이라고는 요만치도 없는 주인을 만난 탓에 구석자리에서 먼지에 파묻혀서, 한 달만 지나도 마치 천 년은 묵은 보물지도로 봐도 무방할 것 같은 안타까운 부루마블 하나가 나를 보며 구해달라고 외치고 있었다. 마음이 아팠다. 흙수저 소년의 가슴이 저렸다. 나는 그 부루마블에게 말하곤 했다.

"조금만 기다려. 구해줄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녀석이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돈 없는자의 설움은 아마도 그 때 처음 느끼지 않았나 싶다. 마침내 용돈이 충분해지자, 나는 당당히 문방구 문을 열며 들어갔다.

"뭐냐. 너냐?"

"아저씨."

"왜"

"부루마블 주세요."

"부...뭐라고?"

"부루마블이요"

"그게 뭔데?"

"아, 주사위던져서 세계 정복하는거요."

"우리 가게엔 그런거 없어."

어린 나이에도 나는 이 말을 듣자 황망의 바다에 잠시 다녀올 뻔 했다. 다시 생각해도 진작에 망했어야 했다.

"아니, 저기 있잖아요."

"있긴 뭐가 있어. 난 그런거 들여논 적 없다."

"있다구요! 제가 맨날 봤어요!"

"없다니까! 이 녀석 보게."

단호한 아저씨의 말에 나는, 직접 몸을 움직여 그 먼지의 아마존같은 구역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그 몇걸음 안되는 작은 보폭을 옮겼던 과정에서 어쩌면 내가 꾸었던 수많은 장래희망 중 '고고학자'라는 직업이 추가된 계기가 생기지 않았나 싶다. 

회고하다보니 그 가게의 풍경이 마치 내 방구석과 묘하게 닮은 것 같아 잠시 혼란스러웠지만, 아무래도 추억이란 왜곡되기 마련이다. 아무렴 그곳에 비교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나의 작은 안식처는 그에 비하면 오성급 호텔의 청결함과 정갈함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곳임이 확실하다.

"이거요 이거."

당당하게 부루마블을 꺼내온 나는, 아저씨에게 말했다.

"뭐야 이거. 이런 게 있었나."

"얼마에요?"

"음, 거기 가격 써져있냐?"

"예. 만원이네요."

"오천원만 내라."

"네?"

"그거 뭐 색도 바래서 팔 수도 없고. 그런 거 만원 받으면 너네 엄마한테 아저씨 혼난다."

이럴수가. 고작 오천원에 구할 수 있었다면 지난 주에 이미 나의 작고 귀엽고 고사리같은 손아귀 속에서 녀석은 따스한 보살핌을 받을 수 있었다!

"뭐에요! 기껏 만원 모아왔더니."

"싫으면 만원 내던가"

"아니, 오천원이면 진작에 살 수 있었던 말이에요!"

"그럼 한 번 물어보기라도 했어야지 이 녀석아. 싸게 준다 그래도 난리네. 거 참"

그런 지난한 과정을 거쳐서 나는 드디어 부루마블을 얻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자본주의의 시스템따위는 무참히 날려버리는, 참으로 알 수 없는 판매전략을 고수하던 그 문방구가 내가 중학교 교복을 입자마자 망해버린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는 납득이 간다.


그 뒤로 나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치며 매년 반이 바뀔 때 마다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 뺨을 치는 '부루마블 전도사'가 되었다. 때때로 압수도 당했지만, 어떻게해서든 다시 구해 전도행위를 이어나갔다. 학기 초 마다 학우들은 나의 부루마블 찬양에 감복해 하나 둘 합류하여 반 친구들이 의기투합하는 부루마블 대회가 반복적으로 열렸다. 그러나 나는 단 한번도 꼴찌를 해본 적이 없었다. 이것은 거짓이 한 점도 없는 사실이다. 1등을 한 적은 수 없이 많고, 꼴찌를 한 적은 단 한 게임도 없다. 게다가 부루마블 앞에서 나는 대학살을 벌이는 화성인처럼, 한 치의 자비로움없이 상대들을 파산시켰다. 파산, 파산, 파산. 은행 대출에 괴로워하는 녀석들을 볼 때마다 겉으로는 위로했지만 속에서는 끓어오르는 승리의 쾌감에 도취되었다. 그것이야말로 부루마블의 참 된 매력이었다. 게임이 끝나고 판을 접어 상자에 집어넣을 때, 나는 속삭이곤 했다. 자본주의는 영원할지어다!

어떻게 그렇게 잘 했냐고? 이것은 영업비밀이지만, 독자 제위께만 살짝 공개한다. 절대 어디가서 발설해서는 아니된다. 여러 개의 부루마블을 구입한 나는, 그만큼의 종이돈이 있었다. 나는 교복 안주머니에 항상 백만원짜리 종이돈을 5장씩 숨겨놓고 다녔다. 이것은 아주 적절히 사용해야 하는데, 남발할 경우 눈치빠른, 아니, 눈치없는 녀석들의 고발을 당할 위험이 있었다. 아주 위급할 때만 사용하는 긴급셀프대출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그 판에서만큼은 신적인 존재라 할 수 있었다. 가끔씩 고발을 당하기도 했지만, 그들에게 한 번도 보여주지 않는 패기를 내뿜으며 정색을 했고, 후엔 그들을 판에서 영원히 퇴출시켰다. 나의 세계를 위협하는 존재들은 일찌감치 숙청을 해야만 했다.

허나 유감스러운 것은, 그러다보니 하나 둘 씩 참여자들이 빠져 나중엔 애걸복걸하며 해달라고 부탁해야만 하는 처지가 되는 것이었다. 녀석들은 싸늘한 반응을 보이며, 

"너나 해 이자식아. 너랑 해면 졸라 재미없어."

따위의 제멋대로인 말로 나와의 승부를 피하기 마련이었다. 후후, 나의 위용에 압도되어 그런 식으로 밖에 저항할 수 없는 녀석들의 처지를 조금은 동정했다. 

물론, 부루마블은 이겼지만 축구나 시험에서 처참하게 녀석들에게 발려서 조롱을 당했다는 것은 부루마블을 섬기기 위한 순례라고 위안삼고 있다.



찬란한 과거가 주마등처럼 흘러가며 나는 부루마블을 꺼냈다. 스윽. 그래. 바로 이 소리야. 오랫동안 감각을 잊고 살았던 손이 왕년의 역전용사를 소환하며 기세를 뽐냈다. 어서 주사위를 굴리고 싶어하는 손가락들이 뜨거운 혈액을 돌게하며 근질근질거렸다. 그리고, 뒷주머니에 숨겨놓은 백만원짜리 종이돈 다섯장은, 차분히 자신들의 출전을 기다리며 엉덩이 냄새를 맡고 있었다. 

봉투 녀석이 말했다.

"너란 놈은 정말로, 구제불능이다."

"훗. 쫄았냐."

"그보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나는 손이 없다."

"괜찮다."

"뭐가?"

"내 턴도 네 턴도 내 손으로 하면 된다. 네 턴일때의 행동은 네 놈이 말을 해주면, 내가 대리해서 수행해주도록 하지. 그럼 불만없지?"

"흐음...아니, 내가 왜 이걸 해야하는지 모르겠다만"

봉투 녀석은, 녀석의 품 안에 담긴 쓰레기들을 모두 쏟아낼 듯한 긴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꼭 해야 직성이 풀리겠다면, 그래 한 번 해주지 뭐."

"자 그럼. 승부 조건을 협상해볼까."

"조건도 있냐?"

"그게 없으면 재미가 없지."

"뭔데?"

"진 사람은 깔끔하게, 한 달간 상대를 형님이라 부른다."

"뭐야 그게. 엄연히 내가 형님인데 나한테 너무 불리한 조건 아니더냐."

이 녀석이 은근히 나를 하대하는 이유가 드디어 밝혀졌다. 진짜로 자신이 나보다 상위자라고 생각할 줄은 몰랐다.

"아이, 그래. 한번 해준다 해줘. 너 대신, 후회하지 않겠냐?"

"후회? 내가?"

나는, 노점상에게 바가지를 당한 불의의 손님처럼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녀석은 나의 과거를 모두 안다. 따라서 내가 한 때 부루마블의 왕을 넘어 부루마블의 신이었다는 것을 모를리가 없었다.

"네 놈의 사기행각은 나도 익히 알고 있지만,"

녀석은 고약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내가 손이 없다고 만만히 보면 곤란할텐데 말이지."

"그것이야말로 내가 할 대사다! 나의 대사를 훔쳐가지마라!"

"알았다. 알았어. 판이나 깔아라"

그렇게, 운명의 대회전이 펼쳐질 예정인 옥상에 팽팽한 긴장감이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트로이의 전쟁을 지켜보던 올림푸의 신들이 마치 이 원룸의 옥상으로 집결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신들이시여, 미리 승전보를 드리옵나이다. 하늘을 쳐다보며 나는 읊조렸다.

"야 헛소리 하지 말고 빨리 세팅이나 해!"

아무리 생각해도 녀석은, 정말로 운치가 없다. 눈치도 없고.

나는, 선공을 정하는 주사위를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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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빵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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