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아아아아악!"

열대야의 가혹한 시련 속에서 창문이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입을 벌리고 있고 뜨듯한 바람이 창문의 아가리로 한없이 쏟아져들어오고 있었다. 그럼에도 밤은 고요하고 사람들은 잠이 들어, 모든 것이 조화롭고 태평해서 이대로 전쟁이 터진다 해도 "그래. 쉴 만큼 쉬었으니 전쟁쯤이야."라며 가볍게 납득한 후 총을 들쳐메고 나갈 수 있을 정도로 평화로운 새벽을 헤집고 터진, 석연치 않은 비명이 창문의 아가리를 향해 뻗어나갔다. 

"뭐하냐 너."

"으어억, 소..손이..."

"손이 뭐."

"손이...으아아아.."

"뭐하냐 너. 왜 오징어가 되고 있어."

"손이....오.....오....오그라든다아아아악!!!!"

"....멍청한 놈"


여전히 달빛 은은한 밤. 오늘도 월용할 양식을 구하기 위해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 뛰어든 한 부품이 되어, 이리저리 육체의 정신의 담금질을 반복한 고된 하루를 마치고 퇴근한 나는, 지난 밤의 이야기를 되새기며 하루종일 비웃을 멘트를 준비했을 봉투 녀석의 계략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 바로 잠이 들었다. 녀석의 간교한 함정에 빠질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침대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깊은 잠에 빠졌을 때즈음, 아뿔싸, 지난 밤의 에피소드가 꿈의 장막에 영화처럼 펼쳐지고 말았다. 꿈 속의 나는 애써 그 장막을 걷어 치우려 노력해봤지만, 봉투 녀석이 손잡이를 길게 늘리더니 내 발을 부여잡고 한 치도 움직이지 못하게 막았다. 장막에서는 월하독부, 달밤 아래 홀로 부루마블을 하는 나의 모습이 비쳐졌고, 롤러코스터같은 감정 분출 행동을 보이더니 어느 순간 절체절명의 위기에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바로 그 때, 육중한 철문이 열리며 남녀남녀의 인간들이 뛰어든 것이었다.

차마 더 이상 볼 수 없음에 나는 꿈 속에서 손을 꺾었다. 그때문에 꿈에서 깼으니, 비록 관절을 잃었으나 긍지는 취할 수 있었다는 훌륭한 무사의 이야기로 독제제현께서 후세에 전해도 좋을 것이다.

"자다가 뭔 지랄이여 갑자기"

"아, 아무것도 아니니라."

"얼레? 정색하는 걸 보니 또 뭔가 추잡스러운 꿈 꿨구만."

"네 놈은 알 것 없음이라."

"어젯밤 꿈 꿨나?"

"..."

"풉"

녀석은 일소를 머금고 잠시 뜸을 들였다. 나는 재빠르게 긍지를 취할 수 있는 탄탄한 논리에 기반한 멘트들을 궁리하고 있었다. 녀석의 어떤 비웃음에도 단호히 반격하기 위해서. 그러나 녀석의 이어진 말은, 뜻밖이었다.

"너 말야."

녀석은 눈이 찢어진 채로(gs 글자가 늘어져있었으니 대략 그런 느낌인 것 같았다.)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부러우면 부럽다고 하는 게 좋아"

"부럽지 않다! 그깟 한 때의 허상따위. 남녀남녀가 달빛 아래 모여 맥주를 마시든 뭔 지랄을 하든, 인간사에 피고 지는 크고 작은 에피소드들 뿐이다. 모두 다 윤회의 수레바퀴를 더욱 밀어제끼는 부질없는 짓일 뿐이라고."

"뭐가 부러운 지는 아직 얘기 안했는데?"

이런 젠장.

"거 드럽게 부럽나보구만"

"부럽지 않다고! 사나이 가는 길에 시기와 질투 따윈 없다. 그런 것에 굴복하면 지는 거라고."

"너는 시기와 질투를 하지 않아도 연전연패의 나날들 아니더냐"

"네 녀석은 사실을 교묘하게 부풀려서 타인을 공격하는 삼류 언론인 같은 기질이 있어. 누누히 말하지만 말이지."

"어쨌든 사실에 기반한다는 것이군. 또한 나 역시 네 놈이 자꾸 같은 실수를 반복하니까 이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준비했던 반격멘트들이 꽁지 빠지게 퇴각했다. 삼십육계 줄행랑. 사나이 긍지가 잠시 휘청했다. 

"좋다. 내가 해결책을 하나 제시해주지."

"뭐냐? 또 지난번 처럼 간악한 술수를 쓰는 거면 이번에야 말로 손모가지를 잘라주겠다."

"들어봐라. 현인의 지혜를 빌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뭔데 그게."

"듣고 싶지? 굴복하면 지는 거니 뭐니, 사실은 해결하고 싶고 너도 남녀남녀 무리 속에 끼어든 불나방이 되고 싶지?"

"얼른 내놓기나 하라고!"

본디 초조함과는 거리가 먼, 대해와 같은 인내심에도 한 줄기 파도가 일었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가.

"주변에 사람이 모이지 않는다면, 사람들 속으로 찾아가는 수 밖에."

"그걸 누가 몰라서 이러고 있냐?"

"개뿔이나, 네 놈은 알기만 하지 움직이진 않잖아."

"그거야 다 무언가를 결행하려 할 때엔 심사숙고하여 마스터 플랜을 짜은 후 수차례의 시뮬레이션과 시행 착오들을 거친 후에"

"개소리말고. 잔말 말고 들어라."

말을 끊다니. 아, 도대체 세상이 어떻게 되는 것인가. 매너가 사라진 세태에 나는 잠시 서글퍼졌다.

"동호회를 들어라."

"엥?"

"동호회 말이다."

"뭔 동호회?"

"맨날 주접 떨면서 혼자 기타줄이나 튕기고 있지 말고, 사람들과 좀 함께 하라고."

"아, 기타 동호회?"

"뭐가 됐든 좋은데 네 놈 그 특유의 허세를 위해선 아무래도 쥐똥 만큼은 손에 익은 기타 동호회가 낫겠지."

"허세라니, 입조심해라. 무사수행으로 농축된 결과물을 그리 얕보지 말라고?"

"맨날 똑같은 것만 연주하고, 조금이라도 어려운 거 나오면 집어치는 주제에 무슨 결과물. 입 아프게 하지 말고, 빨리 찾아보기나 해봐."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 당시 티비에서는 꽤 인기를 구사하던 시트콤이 있었다. 논스톱시리즈라고, 대학생들의 청춘연애일상코믹개그판타지류의 모습을 보여주는 시트콤이었다. 지금 다시 보자면야 정말 말도 안 되는, 어처구니 없는, 이런 곳이 있다면야 그 즉시 행복 대학교로 이름을 바꾸고 '극락국 행복대학교 한국 캠퍼스' 정도로 이름을 바꾸어도 자타가 공인할 만한 풍경을 보여주는 허황된 프로였다. 문제는 이것을 사회의 단맛쓴맛 다 본 후에야 깨달았다는 것이다. 애초에 대학을 가지 못한 나로썬 직접 겪지 못했지만, 몇 없는 지인들의 대학생활 고군분투를 보면 어렴풋이 깨달을 만한 것이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당시의 꼬꼬마 세대들은 그 프로를 보고 환상에 젖을 수 밖에 없었으니, 소위 순정만화를 보고 백마탄 왕자님을 꿈꾸는, 틈만 나면 책상의 금을 치고선 최대한 멀찍이 떨어져 앉던 옆 자리 짝꿍 여자아이의 심리도 이해할 만한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단연 백미를 꼽자면, 동호회 활동에 있었다. 물론 연애 이야기야 탐 나는 것이지만, 나는 원체 타고 나기를 그런 말랑말랑하고 잡스러운 감정에 혼을 빼앗기는 것과 거리가 먼, 바위와도 같은 마음새를 지니고 태어났기에 진부한 사랑 이야기 따윈 흘려 보내며 모른 척 키스신만 잠시 감상하는 정도로 만족할 줄 알았다. 다만 주인공들의 예의 그 동호회 활동은 시선을 빼앗기에 충분했다. 청춘의 서브 퀘스트를 수행하는 보람찬 취미 활동, 나 같이 다양한 재능을 지닌 이에게 선망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는 소재였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중학교 내에서 내가 가입하고 있던 동아리는 <역사탐구 동호회>라는 거창한 이름에, 사실은 국사책 펴놓고 시험공부를 대신하는 곳이었다. 2학년이 되어 동아리를 선택할 수 있게 되자, 한 선배는 "너 국사 성적 좋다며? 혹시 답사같은 것도 관심있니?"라고 나의 진심어린 혼을 이끌려놓고는, 주저없이 가입하고 첫 모임에서 "첫 답사는 이 고장을 아름답게 만드는 활동이 좋겠지"라는 불길한 멘트를 날리며 동네 뒷산으로 올라가 쓰레기 줍기 활동을 시켰다. 괴이하기 짝이 없었으나, 첫 답사니까 그려러니 했다. 붙여두는 말이지만, 그 산은 이름도 없는 산이라 애초에 향토 지리서에서 한 줄 찾아보기도 힘든 산이다. 주목할 만한 역사로는 전쟁에서 전사한 사람들의 공동묘지가 있었다는 정도. 

불길함은 항상 사실이 된다. 다음 모임에서 그 선배는 "그동안 고마웠고. 난 이제 여기 탈퇴할게"라며 후배 여학생들의 짝사랑을 훔쳐가는 그 빛나는 미소와 함께 사라졌다. 밴드 동아리에 가입하기 위해 역사탐구 동호회에 사람을 모집해서 명맥을 잇게한다. 라는 담당 쌤과의 교섭이 있었다는 것은 아주 뒤늦게나 알게 된 사실이다. 그 뒤로 나는 어떻게든 동호회를 건설적으로 만들기 위해 여기저기 답사를 제안했지만, 담당 쌤은 

"답사가면 지도 선생도 나가야 하잖아~ 귀찮아 자식들아~"

라며 일언지하에 거절. 게다가

"답사 따위 느그들 대학가면 신나게 할 수 있으니까, 진짜로 답사하고 싶으면 역사과를 가기 위한 국사 공부를 하는게 좋겠어."

라는 십년지대계를 제시하며 보충수업을 시켰다. 학창시절의 추억이 죄다 어째 이런 식인가 싶다. 여기에 막상 동아리 시간이 되어 국사책을 꺼내놓으면, 꼭 

"xx야~ 일로 와바. 어깨 좀 주물러라~"

라며 한 시간 내내 강제 노동을 시키면서, 그마저도 하는 말이

"야, 신라 금관을 구부리면 휠까 안 휠까? 그거 순금이라던데"

따위의, 도대체 역사 선생으로서의 자각은 안드로메다가 아니라 저 멀리 퀘이사 즈음으로 쾌속으로 날려보낸 발언을 일삼았으니, 내가 역사쌤이라는 어린 날의 목표를 포기하게 된 계기에는 일정 부분 그 양반의 책임도 있다. 지금에 와서 정신적 피해보상 청구 소송을 건다해도 시효가 만료일테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좌우간 나의 학창시절 추억이 그렇게 썩어 문드러질 때, 모두가 동경하던 밴드 동아리는 시 도 대회를 출전, 각종 상을 휩쓸며 학교를 대표하는 동아리로 거듭났다. 나는 밴드 동아리에 소속된 녀석들이 듣는 음악 수준을 아주 잘 알고 있었기에, 코웃음치며 시류에 영합하지 않는 고고한 절개와 높은 이상을 포기하지 않았다. '녀석들의 음악은 진정한 음악이 아니야! 자본주의의 산물들일 뿐이지.' 나의 강경한 발언에 당시 베스트프렌드였던 한 여자아이는

"그러니까 네가 여친이 안 생기는 거야"

라며, 우째 지금 봉투 녀석과 비슷한 말을 들려주었던, 자못 안타까운 기억도 방금 딸려왔다.

물론 시기와 질투를 전혀 하지 않았냐고 묻는다면, 보편적 권리인 묵비권을 당당하게 제시하겠다. '밴드 동아리에 대한 열등감 때문에 기타를 배웠구만?'라는 의문을 품는 독자들에겐, 댁들이 왜 평소 '이래서 눈치빠른 녀석들은 싫다니깐?'라는 말을 듣는 것인지 자각을 좀 하길 바란다.


심사숙고 끝에 밤새 닥쳐오는 출근을 외면하고 동호회를 뒤져보았다. 기타 동호회 <아르페지오> 적당한 품위를 지닌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거 동아리 고르는 것도 허세에 찌들은 이유구만"

녀석의 빈정거림은 무시하고 나는 가입신청서를 넣었다. 아, 드디어 절차탁마한 기타실력을 뽐낼 수 있는건가. 마음 맞는 사람과 버스킹을 하는 것도 괜찮겠지. 모임 후 술자리에서 즐거운 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운이 좋으면 검은머리를 가진 묘령의 여인과 함께 행복의 나라 저 편으로 떠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이 봉투 녀석의 조언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자못 마음에 걸리는 일이나, 어둠 속에서 피어나는 즐거운 상상을 즐기며 설레는 마음을 달랬다. 오리엔테이션이 기다려진다.

잠이 들기 직전, 어쩐지 봉투 녀석이 또 그 불쾌한 미소를 슬며시 머금은 것 같지만, 표정이 없는 녀석의 표정을 찾게 되는 것은 무익한 일이기에 무시하고 잠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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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빵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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