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내가 한 것은, 흑암지옥을 방불케 하는 집 구석의 오른쪽 모퉁이를 향해 수색정찰에 돌입하는 일이었다. 가뜩이나 좁은 방에 괴상하고 파렴치한 봉투 쪼가리가 떡하니 공간을 차지, 어느 시점부터 내가 월세를 내고 있는 공간이라 여기지 않게 된 공간이었다. '나의 공간으로 인식하지 않기에 청소를 하지 않는다'는 지극히 이치에 입각한 논리는, 먼지와 괴물처럼 쓰레기를 내뿜고 있는 고약한 봉투들이 다소간 어지러울 뿐인 공간이, 한 사람의 생명이라도 더 구하기 위한 소방대원의 사투가 펼쳐지는 대지진 현장으로 진화해버렸다. 

물론 내가 이 상황을 타개하려는 노력을 안 한 것이 아니다. 다만 논리적, 상식적으로 이미 내가 책임져야 할 공간이 아니게 되었기 때문에, 적극적인 개입을 할 수 없었을 따름이다. 게다가, 통 큰 양보를 통해 봉투 녀석에게 공간을 내주었으니, 방을 절반으로 나누어 빗금을 치고 공간 안에 있는 쓰레기와 먼지들에 대해 상호 간 무한 책임을 지자는 나의 선량한 제안에 녀석은

"평화 지대 구축에 장애만을 덧쌓는 잠꼬대 같은 궤변으로, 우리 공화국의 인민은 모두 똘똘 뭉쳐 이런 오만하고 간사한 제안의 저의를 꿰뚫어보고 더욱 '우리 먼지끼리'를 외치며 혁명적 논의를 이어가고 있다."

라는 해괴한 논평으로 거절, 그 순간만큼은 쓰레기를 품은 녀석이 김정은의 배를 연상케 할만큼 불량하기 짝이 없었다. 그 제안이 수포로 돌아간 이후 이 지역은 그야말로 유사이래 인류의 손이 닿지 않은 미탐사 지역처럼 고이 먼지가 쌓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곳을 굳이 나의 폐를 걸고 탐사하는 까닭은, 장판에 쌓인 먼지 두께만큼 똑같이 먼지에 눌려있는 기타를 구해내기 위해서였다.

"너는 앞으로 물건을 사지 않는게, 아니 그냥 입산출가해서 무소유의 삶을 사는 게 어떠냐?"

"무슨 뜻이여"

"네 놈이 소유하는 물건들의 운명이 너무나 안타깝다는 말이다."

"네가 신경쓸 바가 아니다!"

"이대로 놔두면, 곧 나같이 득도할 녀석들이 이 방에 가득가득 할지도 모르겠군."

"뭐시라?"

매사의 사려깊은 나조차도 깨닫지 못했던 중요한 포인트를 녀석이 짚었을 때, 심장이 씽크홀이라도 생긴 것처럼 철렁했다. 아뿔싸, 통렬한 아뿔싸였다. 저 괴이쩍인 봉투 놈 한 명으로도 족한데, 봉투 같은 녀석이 떼로 떠들어 대면 정말로 입산출가하는 것이 더 현명할지도 모르겠다. 조만간 청소를 하긴 해야겠다 싶었다.

물론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보다 더 중요한 임무가 있으니.


오랜만에 꺼낸 기타는 주인을 책망하듯 애닳픈 소리를 내었다. 줄이 다 풀린 채 '딩딩'대는 녀석을 보니, 불현듯 울화가 치밀었다.

"이 녀석도 저 녀석도 죄다 괘씸한 녀석들 뿐이로고."

봉투가 물었다. "또 무슨 궤변을 늘어놓으려고"

"생각해 봐라. 이 녀석, 지가 무슨 일주일간 음식 섭취를 못한 조난자처럼 아사 직전의 소리를 내고 있지 않냐. 우리 부친께서 내게 그러하셨듯, 가풍에 따라 강하게 키웠는데 그 결과가 이따위라니. 이 녀석의 나약함에 울화가 치민다. 울화가 치밀어."

"그 울화를 잘 새겨둬라."

"왜?"

"춘부장께서도 네 녀석의 꼬락서니를 보실 때마다 울화가 치미실테니."

항우가 살아 돌아와 용을 쓴다 하여도 한 치도 움직이지 않을, 태산보다 더 부동부혼의 사나이 자긍심에 한 줄기 새빨간 스크래치가 갔다. '조만간' 있을 대청소 때 그냥 모조리 버릴까도 싶다.


기타줄을 새 것으로 갈아끼고 먼지를 싹 청소하고 나니 진이 다 빠졌다. 작일의 나였다면 이미 지쳐서 깨끗해진 기타를 다시금 유배보냈을테지만, 당면한 목표가 시급했으므로 그리할 수는 없었다.

"웬일이냐? 도로 안 집어넣고"

"이 몸은 목표가 생기면 경부 고속도로를 시속 200km로 달리는 사내이기 때문이지"

"기타 동호회에서 또 부질없는 연심을 품을 여성이라도 만난 것이겠구만. 뻔하다 뻔해. 너무 뻔해서 신작영화의 스포일러를 당한 느낌이야"

"연심이라니, 무엄하도다. 기왕 동호회 활동을 하게 된 것, 구성원으로써 좀 더 적극적인 의무를 수행하기 위함에 지나지 않으니, 나의 순수하고 선량한 의도를 곡해하지 말도록"

"기왕 스포일러 당했으니 나도 스포일러로 갚아줘야겠다. 너, 그 연심의 결말을 내가 알려주.."

"조용! 조용! 지금 누가 소리를 내었는가! 나는 지금 무사수행의 삼매에 빠져야 하니 조용히 해주길 정중히 요청한다."

내가 녀석의 말을 끊는 일은 좀처럼 없는 일이나, 녀석은 화를 내기는 커녕 씨익 웃으며

"그럼 어디 한번 열심히 연습해보셔."

라는 말과 함께 나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녀석의 불량한 의도와는 달리 나의 연습은 순조로웠다. 코드도 찾고 운지법도 열심히 체크하며 한 소절 한 소절 열심히 반복했다. 문제는 한 소절 뿐이었다는 점에 지나지 않으니 이 기세라면 이 달안에는 마스터할 수 있는 속도였다. 그녀에게 이 곡을 연주해주겠다는 호언장담을 하긴 했지만 딱히 언제라고 시기를 언급한 것은 아니니, 꼭 다음주에 있을 모임까지 마스터해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테클걸지 마라"

"당치않는 소리. 나는 여기서 그저 미소를 띄운 채 네 녀석의 연주를 관람하고 있을 뿐이라고?"

"속으로 비웃고 있는 거 다 안다. 그리고 연주를 관람이라니, 문법부터 익히고 오도록"

"하라는 곡 연습은 안 하고 왜 관심법부터 마스터했냐. 그리고, 연주라고 하기엔 너무 조악해서 볼 꺼라고는 낑낑대는 네 꼬라지 밖에 없어서 관람이라 한 것일 뿐"

역시나 순조로웠던 연습은 녀석의 훼방으로 인해 차질을 빚기 시작했다. 부아가 치밀어 올라 두개골을 열고 승천할 것 같았지만, 잠시간의 화를 억누르고 다음 소절로 진입했다.

"오호"

"왜 또!"

"거기까지 하고 관둘 줄 알았더니만, 다음 소절로 넘어가긴 하네?"

"이미 말했듯, 나는 목표가 생기면 시속 200km로 경부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사나이라고"

녀석이 덧붙였다. "10km도 못 가서 항상 차가 퍼져버리던데"

"기억을 날조하지 마시게 제군"

가볍게 응수한 후,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연습을 이어나갔다. 세번째 소절로 접어들 무렵, 녀석이 또 말을 걸어왔다.

"그거 쳐주겠다고 또 헛된 약속을 남발하고 온 게냐"

"헛된 약속이라니. 이름을 걸고 천지신명께 올린 맹약이다."

"오호, 흥미롭구먼. 돈 받고 하는 일도 여름방학 숙제처럼 미루기만 하는 자식이, 이렇게 내일 할 일을 오늘 몰아서 하는 게. 사회학적으로 아주 흥미로운 주제야. 춘부장께서 이 모습을 보면 조금이나마 혈압이 낮아지실 것 같군."

대꾸하고 싶었지만, 굳은 살이 많이 무뎌진 손가락에 베여드는 기타줄이 반론대신 희뿌연 신음소리만 입으로 보내고 있었기에 기운이 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건전한 동아리 활동을 위해 이토록 애를 쓰는 자신의 모습은 조금은 칭찬받아도 마땅하다. 칭찬해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은 다소 아쉬운 요소지만.


천금같은 휴일을 모두 쏟아부은 결과 천신만고 끝에 1절을 모두 연습할 수 있었다. 며칠만 더 하면 완곡은 무리없이 소화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늘 그렇듯 밤이 능구렁이 같이 방 안에 스며들자, 남사스럽게도 외로움이 지렁이처럼 이불 안으로 기어들어왔다. 이불 속에서 꼬물꼬물대는 외로움을 퇴치하기 위해 나는 머릿 속으로 그녀를 그려 넣었다. 그녀를 그려넣고 보니 다소 배경이 허전하여, 다음 모임 때 모이기로한 카페를 좀 더 그려보았다. 아기자기한 카페에 홀로 앉아 있는 그녀는, 다소 민망한 말이지만 아름답다는 말을 얼렁뚱땅 붙일 수 있는 풍경으로 남았다. 그럼에도 질긴 외로움이 질척대며 온 몸에 비비적거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아름다움으로도 지울 수 없는 녀석의 극악무도함에 꼭 봉투 녀석 같았지만, 그쪽을 쳐다보면 즐거운 상상의 나래가 산산조각이 날 것이므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다만 정적을 먹고 점점 자라는 외로움을 경고하기 위해 자그마한 소리를 내보았다.

"흠냐흠냐"

당연하지만 잠이 없는 녀석은 그 소리를 듣고 또 입을 열었다. 한번쯤 그냥 지나쳐주는 에티켓은 도대체 언제 새길런지.

"야심한 밤에 망상은 금물이니라."

"망상따위 하지 않았다. 예술에 가까운 상상을 했을 뿐"

"보나마나 그녀에게 기타를 쳐주고 칭찬을 받는 것 따위의 저질스러운 생각이겠지"

바로 그것을 위해 정신을 가다듬은 것이나, 아직 본격적으로 시작조차 하지 않았으니 이런 비난은 부당하다.

"하지 않았느니라"

"할려고 했겠지"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군. 나는 그런 의도따위 없었지만, 설령 의도가 있었다 하더라도 하지 않은 일 때문에 비난받는 것은 옳지 않다 이 녀석아"

"네 놈의 지난 망상들을 적어서 경찰서에 제출하면 그대로 철창행이야. 전과만으로도 입증은 충분하다."

시덥잖은 입씨름을 하루종일 해서 그런지, 범죄를 운운하는 녀석의 시비를 무시하고 본격적으로 망상에 빠졌다. 녀석은 창문 가운데에 있던 달이 어느새 창문을 벗어나 도망갔을 시간동안이나 지난 나의 망상들을 읊조려댔지만, 시속 200km로 질주하는 망상의 오토바이는 모든 소리들을 잡아먹고 달렸다. 오랜만에 썩어빠진 독자 제위들의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붙여두는 말이지만, 기타연주를 하는 상상에 몰두하다보니 다른 상상은 그려낼 틈이 없었다. 기타를 연주하는 손이 상상 속임에도 불구, 방자하게 제멋대로 움직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망상이 아니라 예감인듯 하여 외로움이 있던 자리에 불안감이 차고 들었으나, 망각의 이불을 덮어쓰기 위해 작은 전등을 껐다.

방 안에 어둠이 켜지고, 상상의 방 역시 어둠이 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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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빵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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