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돈을 벌어야 살 수 있다는 것이다. 하물며 노숙자일지라도 거리에 떨어진 동전 몇 개를 주우는 노동이 필요하다. 노동이야 말로 삶을 영위해가는 근본 요소임이 확실하다. 노동이 우리를 자유케 하리라!

그러나 작금의 나는 노동자가 지녀야 하는 최소한의 태도, 즉, 월급 통장에 찍히는 액수에 대한 더없이 소극적인 주관적 평가를 바탕으로, 국가가 보장한 실업급여 대상자의 자격을 지니지 않기 위해 최대한의 몸부림을 최경량으로 부리는 중이었다. 봉투 녀석은 태업 운운했지만, 확실하게 태업은 아니었다. 다만 태업과 근로 그 사이 어딘가의 지점에서 자신만의 외로운 싸움을 계속했을 따름이다. 철저히 그것을 위장했다고 여겼지만 몇 번정도 탄로날 뻔 했던 위기 - 단골 손님에게 어디 아파보인다는 얘기를 듣거나 - 를 몽실몽실 자연스럽게 극복하면서까지 그래야만 했던 이유는, 칼퇴 후에 이어진 '기타수행 폐관수련'에 있다. 노동이 우리를 자유케 하리라, 나는 그 명제를 믿는다. 폐관수련도 일종의 노동인 만큼, 완전한 자유까진 아니더라도 그에 준하는 보상이 있을 것이라 믿으며. 아니, 냉혹한 자본주의의 섭리에 견주어도 그것은 마땅히 그정도는 받을만하다. 그 보상이 무엇인지는, 에헴, 묵비권을 행사하겠다.


그리고 드디어 동호회 모임 날이 도래했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세탁을 잘못하지도 않았건만 흰 샤쓰가 노란 샤쓰로 변하는 마법이 펼쳐질 시간, 나는 결전에 임하는 무사의 자세로 칼을 차듯 기타를 멨다. 오늘따라 유난히 거울이 예뻐보여 깊은 관찰의 시간을 갖자, 봉투 녀석이 여지없이 초를 쳤다.

"죄없는 거울 그만 고문하고 어여 가라."

"자식아. 잘 좀 들여다 봐라. 승리의 깃발을 휘두르는 장군의 풍모가 보이지 않더냐."

"오, 그렇구만. 보이네 보여."

녀석은 거울을 뚫어지게(봉투가 다소 앞으로 기울여서 휴지가 하나 튀어나왔다.) 쳐다보더니 말을 덧붙였다.

"머리는 산발되고 갑옷은 다 떨어진 채 피투성이로 패전의 소식을 전하는 패잔병이 보이는구만."

"어허, 또 초를 치는군."

"네 놈의 패전이 곧 나의 승리로 이어지는 것을 어쩐다냐"

"애초에 동호회를 시작하라고 한 놈은 너라고"

"그게 꼭 너 잘 되라고 한 얘기라는 보장이 있냐."

어라? 어쩐지 뒤통수에 급격한 빙하기가 찾아와 생의 끝자락에서 공룡이 내뱉는 최후의 숨결같은 한기가 불어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일주일간의 폐관수련은 어지러이 나의 길을 방해하는 그릇된 자들을 단호히 처단할 수 있는 지조를 주었으니, 이번만큼은 녀석의 함정에 빠지기엔 마음이 난공불락의 성채 같았다.

"자, 이제 네 놈의 장단을 맞춰줄 시간이 끝났다. 나는 가노라."

끝까지 비웃음으로 일관하는 녀석에게 나는 문을 열며 덧붙였다.

"이따 두고 보시게. 나의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를 듣게 될 것이니"

육중한 철문이 닫혔다. 닫히는 문틈 사이로 모든 것을 노랗게 만드는 마법의 빛이 어둠속으로 끌려들어갔다.


그녀는 소담소담한 치마를 입고 구석자리에 있었다. 북적이는 카페 안에서 사람들은 북적이는 만큼이나 나름대로의 즐거움을 한껏 연출하고 있었다. 저 무더기 안에서 쏟아지는 말 한마디마다 어리석은 중생들의 일진일퇴가 반복되고 있을 것으로 생각하니, 출입문을 들어서는 나의 발걸음은 흡사 해골물을 만나기 전의 원효의 발걸음에 비할 법 했다. 아아, 세상이 아름답다고 믿는 철부지들은 도대체 어떻게 구제해야 하는가.

그런 와중에도 독야청청, 사방 1m 밖에 AT필드를 친 채 아우라만으로 어리석은 중생 중에서도 아귀도에 떨어질 법한 중생들의 침공을 오늘도 무사 격퇴해내는 수성의 대가, 그녀가 있었다. 머리를 긁적이며 퇴각하는 어리석은 중생들을 한 명으로 합쳐놓는다면, 아마 그의 뒷머리는 부분탈모가 생기리라. 칭찬하지 않을 수 없는 태도이다. 마땅히 그녀의 기세가 영원까지 이어지기를 잠시 기도했으나, 뭐라 말 할 수 없는 흉측스러운 마음이 기도장을 깽판쳐놨다. 몹쓸 녀석들이 현실의 방에도, 마음의 방에도 너무나 많다. 흉측한 마음의 깽판은 어느새 두 다리를 조종해 무량한 만용을 부리며 모든 어리석음을 튕겨내는 AT필드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AT필드를 딱 걸쳐있는 상태로 흉측한 마음이 말을 걸었다. 

"아, 네"

"저번에..."

"그, '나를 사랑하지 않는 그대에게' 쳐주시기로 했죠?"

흉측한 마음이 킬킬 거리고는 속삭였다. '거봐, 팔로미라고 ?'

"네, 네. 그래서 연습을 좀 해와..."

"엄청 고민해봤는데, 그 노래보다 더 좋아하는 노래가 떠올랐어요."

"아, 네."

흉측한 마음의 아가리가 상암월드컵경기장처럼 주우우우우우우우우욱 넓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네?"

"좋아하긴 하는데, 완전 좋아하지는 않아요. 그래서 다른 노래를 생각해왔어요."

"어떤....어떤 노래인가요?"

"유희열의 '여름날'이에요."

"아!"

"아세요?"

"저도 제법 맘에 품고 있습니다만"

"그럼, 그걸로 부탁드릴게요"

"예?"

"안 돼요?"

'안 돼요?'라는 그녀의 물음이 마음의 방 안으로 도달하자, 흉측한 마음이 침을 질질 흘리면서 공허한 마음의 동굴을 타액으로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그 노래가 훌륭하다는 것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으나, 문제는 나의 비루한 기타 실력이 그 노래를 연주하기에 썩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생각지도 못한 그녀의 말이 고막을 때리자, 순간 내 몸의 모든 땀샘이 햇빛 좋은 날 빨래를 널기 위해 활짝 열어제낀 창문처럼 무제한적인 개방정책을 실시했고, 덕분에 잠들어있던 땀들이 삐질대며 자유로운 해방전선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나는 대답을 찾아야만 했다.

"그게...그게 말이지요."

"왜요?"

'왜요?'라고 되묻는 그녀의 눈망울이 겨울날의 시리우스처럼 빛났다. 

"그 뭐시기...그 노래는 한번도 연습해보질 않아서요."

"그런가"

빛나던 시리우스가 순식간에 백색왜성으로 변했다. 수십억년의 시간을 넘나드는 그녀의 눈방울은 참으로 신묘하기 그지없다.

그녀가 입술을 빼쭉 내밀더니 아랫입술로 윗입술을 왼쪽으로 물고, 다음엔 오른쪽으로 물었다. 나 역시 어린 날, 동네 아이들 중에 가장 똑똑하다며 어르신들의 만장일치 판정을 받은 그 시절(동네에 아이들이라고는 동생과 나 밖에 없었다는 점은 간과해도 좋다.)의 얼굴에는 미약하게나마 지금 그녀의 얼굴과 비스무리한 무언가가 남아있긴 했다. 입술을 좌우로 삐쭉거리는 것은 과자가 먹고 싶다며 툴툴대던 말과 동시에 시행하는 일종의 안면근육 시위였는데, 유감스럽게도 엄한 부친께서는 시위에 몽둥이로 응징, 강력 진압 해버리셨다. 하지만 그 엄한 부친께서도 지금의 그녀와 마주하신다면, 몽둥이를 집어던지고 함께 시위대열에 합류하실 것이 분명하다.

말없이 관찰하던 내가 이상해진건지, 아니면 용건이 끝난것인지, 그녀는 천천히 몸을 돌리고 있었다. 공기가 회전문처럼 그녀를 감싸고 돌았다. 어쩐지 이 회전문은 그녀를 태우고 돌면 작동이 영영 멈춰버릴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니, 일종의 확신에 가까웠다. 흉측한 마음이 락페스티벌이라도 온 것 마냥 미친놈처럼 뛰댕기며 부실공사를 간신히 지탱하고 있는 마음의 방을 곧 무너뜨릴 것 같았으니까.

"다, 다음 주까지!"

나는 애타게 외쳤다. 그녀가 천천히 돌아보자, 백색왜생으로 변했던 그녀의 눈망울엔 어느새 어떤 일이 펼쳐질지 알 수 없어 궁금해하는 성운의 어둠이 깔려있었다.

"다음주모임에어떠세요?그때까지연습해보지요."

"음"

음절을 반 이상 갉아먹으며 숨을 토하듯 부리나케 뱉은 나의 대답에 그녀는 잠시 골똘한 표정을 지었다. 성운의 구름은 점점 퍼졌고, 시간이 꽤나 흐른 것 같은데 여전히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어쩌면 나는 그녀에게 '이상한 놈'이라 여겨지는 걸까. 아니, 그것만은 아니되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못 한다고 하고 다른 말이나 좀 붙일 것을. 아아, 어찌하면 좋으리오.

자책이 무럭무럭 자가번식하기 시작할 무렵, 그녀가 말했다.

"그러고보니,"

한 마디를 던져놓은 그녀가, 말을 이었다.

"이번 주에 들려주시기로 한 것은 죄송합니다."

그러고는 싱그러운 단발이 찰랑이며 쏟아지면서 고개를 숙였다. 

나는 당황했다.

"아니, 아니 그러실 것 까지는"

"아니요. '좋은' 노래를 내내 생각하다보니 기왕이면 제일 좋아하는 노래를 듣고 싶어서 저도 다른 생각을."

"그렇다고 사과하실 것 까지는 없, 없습니다만"

"다음 주에 <여름날> 연주해주시기로 했으니, 그러면 저도 나름 답례를 드리고 싶은데요."

"예?"

"좋아하시는 음악을 알려주세요. 저도 연습을 좀 해볼게요."

평소 같았으면 퇴계 이황의 문하로 들어가도 예의범절이 몸에 익은 것으로는 문하생 중 으뜸이라 평가받고 걸어다니는 예기 그 자체라 불릴만한 선비의 자세를 지녔기에 한껏 겸양있는 사양을 부려야 하겠지만, 그 때의 나는 갓끈 따위 어디다 갖다 버렸는지, 냉큼 대답을 해버렸다.

"이문세의 <옛사랑>이요!"

"아아, 그 노래요."

하지만 미처 간과하던 사실이 부메랑처럼 뒤통수에 강한 지진을 일으켰다. 과연 그녀가 이 노래를 연주할 수 있을 것인가. 다짜고짜 뱉어놓기만한 자신이 한심했다.

"뭐, 그러지요."

그녀는 웃은건지 무표정인건지 알 수 없는 표정을 보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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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빵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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