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XXX입니다. 기타는...한 5년 쳤는데 야매로 배워서 엉망이에요. 잘 부탁드립니다."

숨막히는 어색함이 장내를 휘감는 카페 안, 나는 왼손으론 뒷머리를 긁적이고 오른손으론 뒷짐을 진채 엉성한 인사를 했다. 몇가락 허공에 흩어지는 박수가 증발했다. 20여 명 즈음 되는 동호회 사람들의 시선을 오롯이 받는 일은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개중 몇몇은 자신의 핸드폰을 만지작 거렸지만. 성비는 6 : 4. 남자가 살짝 우세하지만 동호회치곤 희망적이다. 뭐가 희망적이냐고 묻지 마시길. 나도 프라이버시 쯤은 가질 만한 사람이다.

자기소개라는 것은 뭘 어떻게 해도 난감하다. 너무 튀면 튀는 대로 욕 먹고, 너무 짧으면 짧은 대로 욕 먹고. 이런 것은 대강 무난에 무난을 더해 무한무난의 태세를 취하며 넘겨버리는 것이 뒤탈없다는 것은 거듭된 시행착오 끝에 얻어낸 값비싼 경험이다. 아무튼, 신입 회원은 남자 4, 여자 1명. 남자 4명이 모두 인사를 마치고 신입 여성 회원의 차례가 되었다. 나는 문득 공기의 냄새가 달라짐을 느꼈다. 남성 신입 회원들의 자기소개에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던 이십대 후반 ~ 삼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성 회원들이 갑자기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기존 여성 회원들은 신입 남성 회원들에게 지어보이던 미소와 농담들을 거뒀다. 이 무슨 난데없는 긴장감이더냐, 그녀가 무슨 죄가 있기에. 나는 몇 분 뒤 쏟아질, 쓰잘데없는 환호성과 과한 박수 소리에 이 쪽 테이블을 찡그리며 쳐다 볼 옆자리 손님들의 눈빛과, 서로의 눈빛을 관찰하며 환영의, 그러나 그것이 진심인지 무엇인지는 도대체 알 수가 없는 묘한 미소를 지을 사람들의 표정이 스쳐지나갔다. 아아, 이것이 예지력인 것인가. 방구석 무사수행 2년이면 초능력이 생기는 것일까. 그러나 예지력 따위 그렇게 순순히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 몇 초 뒤의 벌어진 상황으로 깨닫게 되었다.

"김여은입니다."

우주를 담고 있는 듯한 검은 눈동자와 날렵하고 굳센 코, 붉고도 작은 입술, 힐을 신고 같이 거닐어도 내가 그다지 작게 보이지 않을 정도의 아담한 키(딱히 같이 걷는 상상을 한 것은 아니고 대충 그렇다는 것이다), 구름을 사뿐사뿐 건널듯한 플랫슈즈, 발목까지 올라오는 앙증맞은 흰 양말, 한 쪽 팔은 반대쪽 팔꿈치를 잡은 상태로 뒷짐을 진 채 인사하는 그녀를 따라 하늘거리던 푸른 치마, 그 팔을 종종 쫓아올라 새들의 쉼터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작지만 포근한 양어깨, 유려한 샛강의 곡선을 훤히 뽐내는 목선과, 강변에서 흩날리는 억새처럼 목선 위에서 나풀거리던 검은 단발. 그리고 내가 수백번 들락거린 집 앞 편의점에서 우유를 살 때처럼, 지극히 무신경한듯한 그 목소리.

으음, 상황을 정확히 전달하려는 나의 설명이 다소 과한 감이 있지만 아무튼 그녀는 그랬다. 허공에 초점을 맞춘 채로 이름 석 자를 알리는 멘트와 함께 꾸벅, 그걸로 끝이었다. 그녀가 자리에 앉자, 박수를 치기 위해 두 손을 미리 세워 모션을 취하고 있던 앞 자리의 남자는 '응?' 하는 표정을 지었고, 그 옆의 남자는 그의 손을 바라보며 자신이 더 민망해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소개할 때마다 얼굴을 맞대며 소곤소곤대던 여성들은 그대로 멈춰, 모두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황함과 민망함이 장내에 퍼지는 몇 초가 흐른 뒤, 누군가 빈약한 박수를 쳤다.

짝, 짝, 짝

끊어지는 박수를 뒤늦게 사람들이 따랐고, 덕분에 모션만 취하고 있던 사람도 위기에서 탈출했다. 그의 표정에서 '좋아, 자연스러웠어.' 라고 여기고 있는 것이 훤히 보였다. 

그 뒤로는 기존 회원들의 무난, 무색, 무취, 무개성한 자기 소개가 이어졌다. 막혔던 흐름이 뻥 뚫렸다. 이 난국을 타개한 것은, 누군가 먼저 냈던 끊어지는 박수 소리. 칭찬할 만하다. 흐름과 분위기를 잘 읽었다는 점에서 가히 유재석의 센스에 닿아있다. 아마도 그는 모든 상황을 이해하고 속으로 몇 초간의 유쾌함을 즐기고 있었을 것이다. 

생각해보니, 그 몇 초간의 나는 다소 유쾌했던 것도 같다. 그 외에 다른 감정도 가슴 안 쪽에서 불쑥 고개를 내밀다가 이성의 뿅망치를 맞고 두더지처럼 되돌아갔는데, 그 감정의 이름을 밝히는 것은 하등 중요하지 않으므로 비밀로 부치겠다.


 

뒤풀이로 이어진 회식에 따라갔다. 벌써부터 피곤하고 다소간의 유쾌함은 얻었으니 분수를 알고 돌아갈까도 했지만, 그래도 첫 날이니만큼 얼굴을 비춰주는 것도 필요하리라. 맥주집에 주욱 늘어선 테이블로 사람들이 착석했다. 이 배치는 좌, 우, 앞 자리의 사람들 밖에 이야기 할 수 없어서 여러 사람들과 친해지기 위해선 술잔들고 돌아다닐 수 밖에 없다.

"자, 신입 회원분들, 환영합니다!"

회장의 건배사와 함께 사람들이 술잔을 들었다. 10여 명이 넘는 사람과 함께 재잘대며 술잔을 기울이는 것은 나도 오래간만의 일이라, 분위기에 취하여 흥이 돋는 일은 인생을 통틀어 손 꼽을 만큼 흔들림없는 자세를 유지하는 나조차도 다소간 들뜬 기운이 들 수 밖에 없었다. 그것도 잠시, 잔이 몇 배순 돌고 난 뒤 나는 예의 그 관찰하는 습관으로 되돌아갔다. 봉투 녀석은 나의 이 습관을 빌어

"중증 관음증이야. 그거"

라며 폄하했지만 듣자마자 각하했다. 관음증이라니, 진리를 탐구하는 첫 시작은 관찰이 아니던가. 물론 관찰하다보면 관찰 결과와 뇌리에 잔영이 남아있는 물 건너온 예술 영상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남사스러운 형태로 꿈에 나타나기도 하지만, 그런 것은 부수적인 결과물일 뿐이지 이 관찰 활동의 본 목적과는 하등 거리가 멀다 하겠다.

끝 자리 사람들이 모인 지점에서 엉거주춤 걸터 앉은 신입 남성 회원. 스물 아홉이라고 했던가. 그는 빛나는 개그센스를 선보이며 주목 받고 있었다. 옆 자리 여성의 물컵을 자신의 것과 바꾸며,

"이게 물물교환이지요 하하"

비록 나의 짧은 소견이지만, 첫 만남 자리에서 이 따위 개그를 치는 사람들은 모조리 재입대 시켜, 사회를 불편하게 만드느니 적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적과 조우할 시 총 보다 이런 종류의 개그를 치는 것이 어쩌면 지구 평화에 더욱 도움이 될 지도 모르겠다. 대포동 미사일보다 더 심장을 찌르는 듯한 충격적인 개그, 이것도 나름의 용기일까. 진심으로 정색하는 듯한, 옆 자리 기존 여성 회원의 표정에도 기계적인 웃음소리를 내는 그를 보자 어쩐지 아련해졌다.

반면 바로 반대편에서 아예 서로를 바라보며 불타는 시선을 교환하는 남녀들이 있었다. 신입회원인 20대 초반의 남성과 기존회원 20대 후반의 여성. 훔쳐 들으니 내용은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따위의 소소한 것에 지나지 않건만 왜 그 목소리들은 칠리소스를 잔뜩 끼얹은 듯한 뜨거운 내음이 가득한건지 모르겠다. 웃으며 빵긋 미소를 짓는, 키가 훤칠한 남성과 물개박수와 함께 까르르 까르르 연달아 볼이 발그레한 여성, 맞은편에서 '물물교환' 개그를 하는 것과 비교하니, 어쩌면 저들은 몇일 뒤에 진짜로 육체의 물물교환을 할 지도 모르겠다는 도덕적인 노파심이 잠시간 일렁였으나, '관음증' 운운하는 불쾌한 목소리가 떠올라 고개를 돌렸다.

양 편으로 모임의 축이 옮겨간 테이블에서 가운데 나란히 앉아 있는 두 남성이 눈에 들어왔다. 기존회원의 20대 남성 두 명은 그야말로 유유자적, 무사평안, 안빈낙도의 술자리를 만들고 있었다. 왁자지껄한 사람들 가운데의 평화로운 무릉도원, 태풍의 핵 같아서 마치 그 둘의 시간은 타인보다 백 배쯤 느리게 가는 듯 했다. 잠시 귀를 기울였다. ...치지직, 치치직 하는 소리가 그들의 대화를 엿 듣는 것을 방해했다. 이상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안개에 휩쌓여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그들의 대화에 대한 호기심이 증폭했다. 그들의 논의는 도대체 무엇이기에 이토록 위험한 호기심이 들게 하는가. 나는 조심스레 발을 내딛었다. 그러자 그곳에선,

..."그러니까 그 때, 아직 날짜도 기억해 1월 21일, GOP 들어가있는데 무슨 일이 있었냐면..."

나는 1초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들을 수 있던 그들의 대화를 파악하자마자 뜨거운 냄비에 손을 데인 사람처럼 황급히 벗어났다. 조금만 더 빠져들었어도 나는 영락없이 군대 얘기에 갇혀 앞으로 술 먹을때마다 헤어나올 수 없는 수렁에 빠졌을 것이라 생각하니 식은 땀이 줄줄 흘렀다.이런 불운은 이제 사양이라고!

반대쪽 테이블 끝의 그룹에선 진짜로 기타 얘기를 하고 있었다. 기타를 정말로 좋아한 나머지 술자리에서 조차도 기타를 꺼내어 튕기는, 20대 초반의 기존회원을 중심으로 아직 기타가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한 사람이 물었다.

"이거 칠 수 있어요? 벛꽃엔딩"

"아, 네."

벙거지 모자를 쓰고 나온 그 기존회원은 코드를 잡으며 인트로를 연주했다. 그런데 인트로가 채 끝나기도 전에,

"이것도 칠 수 있어요? <금요일에 만나요>"

라며 다른 사람의 신청곡이 날아 들었고, 그는

"아, 이거 였던가."

라며 새로운 연주를 시작했다.

또다시 몇 소절 가지도 않은 채,

"이건 어떻게 치는거야?"

라든가,

"난 꼭 이 곡을 치고 싶었어."

따위의 배움 요청을 빙자한 사실상 신청곡 메들리를 연주하는 신세가 되었지만, 사실상 완곡은 한 곡도 못하는, 그저 노래방 기계에 준하는 존재가 되어 버렸으니 일말 측은한 감정이 들었다. 그의 표정이 어두워질때마다 기타 줄도 늘어졌으나, 알콜이 쏟아진 사람들에게 그 정도 변화가 눈에 들어올리 있으랴. 아티스트의 길은 원래 외로운 법, 그의 건투를 빌며 다시 눈을 돌렸다.


앞서도 말했지만 나는 본디 관찰하는 것을 즐긴다. 12층 아파트 난간에 올라서서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차들이 어디로 향하는지 지켜보는 것도 즐겁고, 밤이면 옥상에 올라 앞 동 여러 세대들을 지켜보며 작은 방의 불이 몇 시 쯤 꺼지는지 지켜보는 것도 즐거웠다. 모두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야자 시간, 맨 뒷자리에서 그들의 뒤통수를 관찰하며 그들이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책을 토대로 뒤통수들 위에 말풍선을 그려보기도 했다. 자전거를 탈 때, 빨간불에 걸리면 몇 초 뒤에 파란불로 돌아오는지, 파란불은 또 몇 초 동안 지속되는지, 이 파란 불 다음엔 어느 신호등의 불이 바뀌는지 몇일 간 살펴보는 것도 소시민의 깨알같은 일상에서의 낙이랄까. '어쩌면 이러다가 정말 중요한 사건의 목격자가 되는 행운을 얻고 9시 뉴스에 데뷔할지도 몰라!' 라는 섣부른 기대가 앞선 나날들도 있었다.

뜬금없이 웬 자기회고인가 싶겠지만, 이는 앞으로 전개될 나의 다소 과한 관찰결과가 독자 제위의 오해, 이를테면 '언제 이딴 걸 다 보고 있었지?', 혹은 '처음부터 이쪽만 뚫어지게 봤구만' 따위의 오해들을 차단하기 위한 사전 설명이니, 글쓴이의 의도를 잘 파악해야만 하는 국어 시험에 임하듯 글을 읽어주시기 바란다.

"신입회원 여러분, 환영합니다"

출렁이는 맥주와 맥주를 감싼 투명한 맥주잔과 그것을 움켜 쥔 손가락과 그 손과 맞닿아 있는 회장의 얼굴과 회장의 입에서 튀어나온 목소리가 장안을 휘감을 무렵, 그녀의 작은 입술도 남들에게 들릴듯 말듯한 목소리로,

"환영해주세요"

라고 하는 것을 눈치챘다. 술이 몇 순배 돌고 서로 서로 대화의 과녁을 찾아가고 있을 때, 여기 저기 그룹에 살짝씩 담궜다가 어색함을 느끼며 자리를 떠나기를 반복하는, 저러다가 결국 둘만 자리잡아 군대얘기를 나눌 것만 같은 두 남성이 그녀에게 말을 걸기도 했다.

남성 A : "여은씨, 맞지요?"

"네."

남성 B : "반가워요. 잘 들어왔어요."

"네."

남성 A : "기타는 언제부터 관심가졌어요?"

"얼마 안 됐어요."

남성 B : "...제일 좋아하는 노래는 뭐에요?"

그 질문에 잠시간의 정적이 흐르다, 그녀는 

"생각나는 건 있지만 딱히 댁한테 말씀드릴 이유는 없는 것 같네요."

라는, 도저히 인간세에 남아있을 수 없는 듯한 신선의 풍모가 가득담긴 멘트와 함께 남성 B를 빤히 쳐다보았고, 두 남성은 소싯적 잃어버린 장난감을 찾는 소년들처럼 할 말을 찾느라 황망한 자세로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다, 격퇴되는 패잔병처럼 사라졌고 이윽고 그들만의 안개에 갇히게 되었다.

한편, 조금 뒤에는 예의 그, 1918년부터 복개 공사가 진행된 청계천이 다시 뜯어지기 직전까지 고여있던 물처럼 완전히 썩어 문드러진 개그를 선보이던 그가 그녀에게 다가가기도 했다. 나는 바로 전 격퇴당한 두 사람이 떠올라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그를 지켜보았다.

그와 그녀는 몇마디 인사를 주고 받더니,

"여은씨, 피카츄가 드럽게 안 까지는 귤을 까면서 하는 노래가 뭔지 아세요?"

"어? 그거 개그에요?"

"네. 완전 웃긴 개그에요 이거."

"으음, 글쎄요. 뭘까요?"

"언제언제까지나~"

나는 설마하는 심정으로 그를 지켜보았지만, 답이 흘러나오자 차마 땅 밑으로 시선을 보냈다. 완전무결한 범죄기록을 자랑하는 내가 어째서 대역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야하는지 모르겠지만, 이것이 몰래 훔쳐들은 죄라면 기꺼이 양심이 이르는 대로 벌을 달게 받아야 할 것 같았다. 이윽고 그녀가 지을 것으로 예상되는, 시베리아 사하 공하국의 기후를 닮은 냉혹한랭한 표정과 반응이 걱정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풉"

이라며 수도꼭지를 돌릴 때 처음 나는 소리처럼 물꼬를 트더니,

"으하하하하하하하하하"

라며 박장대소를, 아니 이건 박장대소 수준을 아득히 넘어 헤드벵잉이나 브레이크댄스를 추는 비보이의 수준으로 요란하게 웃어 제끼는 것이었다. 

"으아, 피카츄가, 언제언제까지나래 으핳"

그 가녀린 속눈썹에 맹글대는 눈물을 닦아가며 웃음을 간신히 거둔 그녀를 보며, 왼쪽 어깨는 수미산처럼, 오른쪽 어깨는 태산처럼 솟아버린 그는 연거푸 썩은 개그를 난사했다. 이제 '고삐풀린 그를 누가 막을쏘냐' 라며 걱정하는 나를 비웃듯, 또 그녀는 싸늘한 반응만 이어가는 것이었다.

"이렇게 물을 서로 바꾸면..."

"물물교환이라구요? 재미없어요 그거."

도대체 뭐가 재밌는 개그고 재미없는 개그인지 종잡을 수 없는 기준을 가진 그녀의 선구안도 물론 놀랄만한 것이지만, 고작 몇 초 사이에 개그콘서트 방청객에서 대법원 형사소송의 방청객으로 모드가 바뀔 수 있는건지 귀신같은 태도변화에 더 놀랐다. 저 차가운 눈빛과 말투에 충격을 먹은 그는 어쩌면 테이블을 돌며 계속 물물교환 개그를 시도하는 트라우마에 빠질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한편, 술이 몇 잔 들어가자 그녀도 폭신해보이는 양 볼에 붉은 등을 킨 채 기타 토크에 빠져있는 무리에 끼었다. 사람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돌아가며 신청곡을 내고 있을 때 그녀는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기만 했다는 점이다. 물론 옆 사람과의 농담이나 이야기를 진지하게 귀 기울여 듣고 있었지만, 이야기의 끈이 다른 이로 향할 때 그녀는 여지없이 생각에 잠긴 표정을 화면보호기처럼 띄우고 있었다.

보통 관찰중엔 주제넘게 사건에 개입하는 것을 극도로 삼가는 것이 내 주의이자 일종의 기자정신이기도 하지만, 이번만큼은 나와 독자의 알 권리를 위해 질문을 해보기로 했다.

"왜 노래 신청을 하지 않으시는건가요?"

매우 신사답게 정중하며 교양있는 나의 질문과 태도에 놀랄 법도 하지만 그녀는 전혀 아무렇지 않은 채,

"아까 질문을 받았었는데, 아직 좋아하는 노래에 대한 정리가 다 안 끝나서요."

라는 답변을 내놓는 것이었다.

"좋아하는 노래를 고르는 것에 그렇게 고민할 필요가 있어요?"

"당연한 거 아닌가요? 아무 노래나 다 좋다고 할 수는 없다구요."

"물론 그건 그렇지만, 브로콜리너마저의 <사랑한다는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이나 가을방학의 <가끔 네가 미치도록 안고 싶어질 때가 있어>라는 노래들은 누구에게나 다 '좋다'로 꼽혀지는 곡이잖아요."

"그 노래들이 싫지는 않아요. 당연히 좋다에 가깝긴 하죠."

여기서 그녀는 잠시 뜸을 들였다.

"하지만 제게 있어서 그 노래들은 '꽤 괜찮은' 정도에 가까운 걸요."

"'꽤 괜찮은' 정도라구요? 그거, 나름 등급인가요?"

"네. 상당히 후한 평가에요."

"그럼 '좋은' 노래가 도대체 뭐길래요?"

"그러니까, 지금 고민중이라니깐요."

으음, 보통 남의 문제나 고민에 간섭하는 것은 지극히 합리적인 개인주의자에 가까운 나의 모던한 성향과는 거리가 멀지만, 이번만큼은 나의 호기심(전적으로 학문적인 호기심에 가깝다) 문제가 걸려있어 살짝 개입해보기로 했다.

"넬은 어때요"

"괜찮아요."

"국카스텐은?"

"그럭 저럭이네요."

"콜드플레이"

"괜찮구요."

"라디오헤드는요?"

"뭐, 그럭 저럭이에요."

흠,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음악 성향은 마치 아나키스트의 심보 같아서, 이 장르로 묶으면 이래 저래 도망가고, 또 어떤 가수로 묶으면 셀프 국외 추방하기를 반복하며 '좋은' 음악을 찾아 동유럽을 떠도는 집시가 되었다. 왜 내가 추격자가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소라는 어때요? 이소라의 <나를 사랑하지 않는 그대에게>"

10분 여의 숨바꼭질 끝에, GG치듯 던진 마지막 질문에 그녀는

"어라?"

라며 잠시 눈을 위로 치켜뜨며 생각에 잠기더니

"으음...음..."

하며 마감이 코 앞으로 다가온 만화가처럼 고뇌에 찬 소리를 내고

"하아"

라며 어쩔 수 없이 선고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상고심 피고처럼 한숨을 쉬며

"그건 정말로 '좋은' 노래네요." 

선언하듯 인정하고, 바로 벙거지 모자를 쓴 그에게 돌아서

"<나를 사랑하지 않는 그대에게> 쳐주세요."

라는 것이었다.


그 순간 나는 비상식량도 없이 보트 한 척에 의지해 망망대해에 강제적으로 띄워진 표류민처럼 소스라친 상실감, 혹은 고립감, 또는 당황스러움, 아니, 그 모든 것들을 믹서기에 넣고 돌린 감정에 젖어 들었으나, 이내 연주를 기대하는 반짝이는 눈빛을 별빛으로 착각하고, "그래 저기가 북쪽이구나"라며 별자리를 보고 항해하는 사람처럼 현명한 사람의 자세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것이 진짜로 별빛이 아니라는 것이 다소 위험한 사실이었지만.

"음, 그 노래는 몰라요."

하지만 벙거지모자를 쓴 회원의 답변에, 별빛은 나도 모르는 새 초신성 폭발을 마치고 이미 백색왜성으로 찌그러들어 아무런 빛도 남지 않은 채 어둠 저 너머로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나는 무엇을 의지하여 항해해야 하는가. 긴 항해가 물거품이 된 것만 같은 두려움이 배 안으로 쏟아져 내렸지만, 나는야 사나이, 이런 것에 지지 않아야 하는 법이다.

"그거, 제가 다음에 연주해볼게요!"

나의 말 한마디에 백색왜성은 시간을 거슬러, 흩어졌던 초신성 폭발의 잔해들과 감마선이 다시 모여들고 영롱하고 찬란한 빛을 내는 별로 바뀌었다. 나의 항해도 그 덕분에 계속할 수 있을 것 같아 다행이었다.

"음, 기대되네요. 다음 모임 때는 가능하겠죠?"

"네. 물론이죠."

"간신히 좋은 곡을 찾았는데, 못 듣고 넘어가면 아쉬울 것 같아서요."

"앞으로도 계속 찾아보죠. 기대한 만큼 아쉽기도, 또 뿌듯하기도 하는 것이니까요"

나의 궤변에 그녀는 잠시 갸우뚱하더니, 

"그렇군요!"

라며 나도 하지 못한 납득을 거둔 채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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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빵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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