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싸 파리!!!"

네모난 옥상에 네모난 돗자리 위 네모난 판이 폈다. 사각의 링 위를 비추는 달빛의 은은한 스포트라이트. 비록 승부에 박진감을 더해주는 관중의 환호성도 없고, 육체미를 뽐내며 링을 선회하는 라운드걸도 없지만, 내가 느끼는 긴장감만큼은 그야말로 건곤일척. 내 안에 잠들어있던, 평생에 걸쳐 몇 번 나오지 않았던 전투적인 본능이 깨어나 주사위를 돌리는 손가락 끝으로 오롯이 뿜어져나왔다.

"야 임마. 좀 조용히 게임하자."

"싫은데? 싫은데? 싫은데~?"

나는 녀석을 한껏 약올리며 목전에 둔 승리를 만끽하고 있었다. 부루마불의 신이 강림한 이 땅 위에 무력한 패배자여. 나는 가련한 표정을 지으며 녀석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판세는 이미 뒤집을 수 없을 듯 보였다. 판 위에는 나의 빨간 건물들이 서초동처럼 빽빽하게 들어섰고, 녀석이 한 점 희망을 거는 곳은 오직 서울 하나 뿐. 이미 현금은 바닥난지 오래, 건물과 땅도 모조리 처분하여 한 턴 정도만 더 걸리면 파산의 낭떠러지에 떨어질 예정이었다. 

대저 부루마블이란 크게 세 가지의 전략이 있다. 무조건 한 라인에 집중 투자하는 '집중형', 소유 도시를 고르게 가져가는 '분배형', 그리고 여기저기 걸리는 대로 즉즉 건물을 세워제끼는 '난개발형'으로 정리할 수 있다. 애당초 나는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불로불사의 경지를 깨닫기 위해 입산한 도사님같은 녀석의 언행을 토대로 집중형이나 분배형의 전략을 쓸 것으로 예상했었다. 그러나 녀석의 선택은 난개발형. 어이가 없었다. 나 역시 부루마블 입문의 시기, 그저 눈 앞에 건물을 올리는 재미에 홀딱 빠진 까닭에 난개발형 전략으로 일관하다 무참히 파산을 당하던 불쾌한 기억이 있는 바, 녀석의 전략이 난개발형임을 깨닫자 그 즉시 회심의 미소를 지을 수 밖에 없었다.

"너무 들뜨지 않는 것이 좋다. 인생사 새옹지마란 법도 모르냐."

"야. 이건 올림푸스의 신들을 싸그리 모아놔도 이길 수 없어. 넌 이미 끝났다. 이제 그만 포기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무슨 소리. 나에게는 아직 서울이 남아있다."

"고작 서울 하나로 뭘 하려고. 봉투야, 어차피 나를 곧 형님이라 부르게 될테니 자칭을 하도록 하겠다. 형이 조언하는건데, 세상은 이미 다국적시대다 이 말이야. 신자유주의의 물결 아래 각국마다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며 세계의 시장은 하나로 통합되었고, UN과 EU의 깃발아래 각국은 세계적 질서를 지키며 국경없는 지구촌을 위해 노력해왔다고.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아직도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을 고집하냐. 서울 하나를 믿고 세계를 돌아다닐 생각을 하다니, 우물 안 개구리가 바로 네 꼴이다. 천조국의 대포를 빵야빵야 맞고 나서 개화를 선택해도 그때는 이미 늦을거라고."

"시끄럽다. 무엄하다. 기각한다."

"눈 앞의 현실을 부정하려 해도 네 놈에게 남은 길은 파산 신청 뿐이다. 신용불량자의 비루한 말로를 감당할 마음의 준비를 하시지."

"내 턴이다. 주사위나 돌려."

녀석의 말을 듣고 나는 주사위를 돌릴 듯 말듯, 현란한 손짓으로 녀석의 앞에서 허공 주사위 공기놀이쇼를 선보였다. 아까부터 녀석은 칙, 칙 하며 분노에 찬 움찔거림을 보이고 있었다. 녀석의 안에 담긴 휴지들이 들썩일때마다 나는 즐거워 견딜 수가 없었다. 남의 주사위를 대신 돌려주는 것이 이토록 즐거운 일이던가. 그 주사위가 주인을 파멸로 이끌기를 바라는 것이 이토록 아름다운 일이던가. 나는 부루마블의 신천지를 개척하는 중이었다.

"어? 2네. 아쉽다."

젠장, 2였다. 녀석의 파란 말은 무인도로 쏙 들어가버렸다. 1이나 3만 걸렸어도 즉각 파산인데. 녀석을 훔쳐보니 가득찼던 공기가 슈욱 빠지며 살짝 쪼그라들었다. 여유있는 척은 혼자 다 하더니, 역시 녀석도 긴장하고 있었다. 

"네 턴이군. 보자....7. 7만 나오면 서울이고만."

"거, 까짓거 한번 걸려주지 뭐. 현찰부자라 현금박치기로 그까짓거 한번 걸려도 만사 오케이라고?"

"어떻게 될지는 두고봐야지."

"무인도에 있더니 벌써 실성하셨나."

"혓바닥이 너무 길다. 조심해라 잘리기 전에"

"손도 없는 주제에 누구 혓바닥을 자르시게? 뭐, 어디 한 번 돌려볼까. 갑니다~ 두구두구두구두구"

나는 녀석을 비웃고는 입으로 BGM을 깔며 주사위를 돌렸다. 빙글뱅글, 주사위는 윈드밀을 추듯 빠르게 돌다가, 이내 깜찍하게 멈췄다.

7이었다. 즐거웠던 감정에 살짝 균열이 갔다.

"7이로군"

"아이 뭐, 진짜로 걸릴 줄은 몰랐네."

"이 몸이 말하지 않았던가. 승부는 아직 안 끝났다고."

"아이, 너무 오래하는 건 안 좋은데 말이지."

"200만원이나 내놓거라"

"여깄다 여기. 이거 받고 어디 한 번 잘 해보시지요 봉사장님~"

"주사위나 돌려"

나는 녀석의 턴을 대리하여 주사위를 돌렸다. 나 때와는 다르게 주사위는 돌지도 않고 바로 안착했다. 2, 2. 무인도 탈출이다.

"탈출이군."


그 뒤로 녀석은 귀신같이 황금열쇠 칸과 우주비행장을 거치며 귀신같은 생존력을 보여주었다. 페름기 대멸종에도 살아남은 바퀴벌레의 끈질긴 생존력도 성냥불에도 무참히 녹아내릴 봉투 녀석의 부루마블 회생력에 비하면 근소한 차이로 패배할 듯 싶었다. 그러나 여전히 큰 흐름은 바뀌지 않았다. 나의 절대적 우세. 다만 바뀐 것은, 녀석은 전재산을 털어 도쿄를 샀다는 점이다.

"어이, 너무 리스크가 큰거 아냐? 나한테는 뭐든 다 아는 척척박사처럼 온갖 잔소리를 하더니만, 경영학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구만?"

"네 놈 따위에게 경영학 강의를 듣느니 차라리 초등학교를 입학하겠다."

"하이고오. 입만 살았구만."

"두고보자고. 네 놈의 5칸 앞에 따끈따끈한 도쿄가 있느니."

그랬다. 사실상 이번 턴만 무사히 지나면 녀석은 필경 내가 짜놓은 파산유도거미줄에 걸려 도쿄를 바로 팔아야 할 지경이었다. 녀석은 나를 5칸 뒤에 두고 모험을 걸었다.

"그러면, 한 번 돌려볼까"

나는 무신경한 손짓을 연기하며 주사위를 던졌다. 타닥, 판 위로 힘겹게 주사위가 눕는다. 하나는 2, 그리고 3.

행복이 뭉게뭉게 피어올라 이대로 극락을 향해 승천할 것 같던 나는 봉투 녀석의 억센 팔뚝으로 승천을 저지당하는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도쿄로구나! 긴자 만세! 신주쿠 만세! 하라주쿠 만세! 이케부쿠로 만세! 도쿄 만만세!"

현금이 부족했던 나는 아시아권 도시들을 팔아 벌금을 마련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천하에 악질 친일파 자식! 반민특위가 해산당한 것이 천추의 한이다!"

"친일파면 어떠하리, 친미파면 또 어떠하리."

어이없게 녀석의 모험수에 걸려 벌금을 낸 것도 화가 나는데,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도쿄 만세' 운운하는 녀석의 파렴치한 행위에 나는 한국인이면 마땅히 가져야할 민족적 분노에 치밀고야 말았다.

"도쿄, 거기 기다려라. 이 몸이 항복선언을 받고야 말겠느니."

"그건 재주껏 해보시고, 일단 내 턴이다. 주사위나 돌려라."

조금 전 까지만해도 주사위를 돌릴때마다 적중률 100%의 경품 추첨행사에 와 있는 듯한 기분에 젖었는데, 어느새 이 판을 시작할 때 내 안을 가득 채웠던 긴장감만 남아있었다. 마음을 다 잡아야겠다.

"뭐해? 주사위 돌리라니까."

"알았다! 거, 너는 입만 움직이면 되지만 나는 은행도 보고 내 재태크도 하고 네 놈의 대리도 해야 한다. 얼마나 바쁜지 아냐?"

"그거야 네 놈 사정이고. 애초에 네가 하자고 한 게임이 아니더냐. 이제와 불평한들 네 놈의 추한 면만 드러날 뿐이다."

입술을 깨물며 녀석을 잠시 노려보던 나는, 마음을 다잡으며 주사위를 집었다.

그 때 녀석이 말했다.

"지금이라도 무승부로 하면 없던 일로 해주지."

가당치도 않은 제안이었다. 어처구니호가 그대로 우주끝까지 수직 발사되었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집어쳐! 이 게임은 나의 승리다."

"뭐, 어쩔 수 없지. 고작 봉투에게 형님이란 호칭을 그렇게나 붙이고 싶다면야"



이 글을 읽으실 정도로 현명함이 철철 흘러 넘치는 독자 제위라면, 예상치 않게 흐름이 바뀐 까닭에 불안함을 감추지못한 나의 마음을 읽으셨을 것이다.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는 법이다. 불현듯 전쟁의 여신이 봉투를 두 손에 받아들고 사랑의 입맞춤이라도 선사한건지, 아니면 운명의 수레바퀴가 승리 직전에 있던 나의 기세를 보고 불쾌함에 젖어 역회전을 한 것인지, 귀신이 곡하다가 지쳐 과로사라도 할 지경으로 상황은 바뀌고야 말았다. 녀석의 것과 내 것 모두 이내 손으로, 어머니께서 산고를 이겨내며 낳아 금지옥엽으로 키우며 동네 할머니들도 귀엽다 귀엽다 해 주신, 퍽 깜찍한 나의 손으로 돌리고 있는데 나의 말은 족족 파란 건물이 우람하게 서 있는 도시로, 녀석의 말은 무주공산으로 속속 기어들고 있었다. 아직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꼬꼬마 시절, 시골에 사시던 작은할아버지께서 내 손금을 보더니 찡그리시던데, 그 반응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알아채리신걸까. 

한 때 빨간 도시들로 지구를 정복하고 만수르에 비견할 법한 부동산 갑부였던 나의 왕국은, 그 때까지만 해도 개선 장군처럼 기세 좋게 돌아다니던 빨간 말이 무기력한 패잔병처럼 파란 건물로 들어갈 때 마다 소리소문없이 무너져내렸다. 모래성이 무너져도 이것보단 느릴 것 같았다. 찬란한 영화는 도대체 어디로 갔는가! 

나는 잠시 기억의 테잎을 돌려보았다. "도쿄 만만세"를 운운하는 녀석의 파렴치한 행동에 분노한 나는, 한바퀴를 돌아 또다시 도쿄에 걸리자 있는 현금을 모두 털고 (독자 제위께만 살짝 하는 얘기지만, 뒷 주머니에 감춰두었던 백만원짜리 다섯장 중에 한 장을 꺼냈다. 아무런 반응이 없던 것을 보면 녀석은 눈치채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벌금을 내고 도쿄를 인수했다. 나는 복수의 짜릿함에 젖어 길 건너 고등학교를 향해 왼쪽 가슴에 손을 올리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했다. 국기는 안 보이지만 좌우지간 그 쪽 방향 어딘가에서 나부끼고 있을 터였다. 순국선열이시여, 보고 계시나이까. 이 미욱한 후손에게 힘을 주소서. 

도쿄를 얻고 쾌재를 부르는 나를, 봉투 녀석은 알 수 없는 조소를 지으며 바라보긴 했지만, 행여나 그의 함정이거나 그의 수 낮은 도발에 내가 걸려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양심이 가르치는 대로 따랐을 뿐이다.

"야! 잔머리 그만 굴리고 주사위나 돌려라"

녀석은 나를 재촉했지만 나는 쉽사리 주사위를 돌릴 수 없었다. 간발에 차로 우주정거장을 벗어나버린 나는, 이 턴에서 서울이라도 걸려버리면 그대로 파산행급행열차를 타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순국선열들에게 양심이란게 있다면 이번 한 번 만큼은 나를 도와야만 한다. 제발, 제발...! 나는 그렇게 주사위를 던졌다.

어둠속으로 사라진 주사위가 이윽고 달빛 조명을 받으며 나타났다. 두 놈이 휘리리릭 허공을 가르는 소리를 내며 세계를 짜부러뜨렸다. 옥상을 둘러싼 공간이 순식간에 압축되어 강한 압박감을 주기 시작했다. 주사위는 한없이 공중에 떠 있을 것처럼 멈춰있더니, 천천히, 아주 천천히 땅으로 내려왔다. 느려진 시간과 더 느려지는 회전. 판 위로 내려온 하나의 주사위는, 발라당 드러누으며 뽈록 들어간 네 개의 점을 보였다. 4였다. 남은 주사위 하나는 모서리 끝으로 트리플 악셀을 하듯 무한 회전하고 있었다. 

동공이 커진다. 심장이 쿵쾅댄다. 모골이 송연해진다. 그러나 주사위는 도대체 멈출 생각이 없었다. 영원히 돌아가는 주사위, 도대체 언제쯤 멈출것인가. 절정에 달했던 긴장감도 계속되는 주사위의 회전, 뱅글뱅글에서 팽글팽글로 변해 이제는 끝없이 배애애앵글 배애애앵글 돌 것 같은 그 멈춰버린 시간 속에서 맥이 탁 풀리며 서울이고 도쿄고 나발이고 슬슬 그만 돌았으면 하는 바램이 든 순간,

"왈왈왈!!!"

옆 집 개가 짖었다. 감히 이 중대한 순간을 깬 개를 욕하며 잠시 옆 집을 바라봤던 나는, 시선을 다시 주사위로 돌렸다. 그런데,

영원히 돌 것 같았던 주사위는 이미 죽어버린채 사선으로 그어진 뽈록한 점 두 개를 내보이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걸까. 한 눈을 판 것은 0.5초도 안됐던 것 같은데.

항상 긴밀한 분석력과 냉철한 판단력으로 지성계의 스탠다드로 손 꼽힐 것 같다는 생각을, 일년에 한 두 번정도 깨닫고 스스로의 잠재된 능력에 놀라기도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솔로몬이 부활해 나의 입장에 선다 하더라도 쉽사리 파악할 수 없을 것이라 확신한다. 이 무슨 조화인가. 저 주사위는 사실 신의 주사위였단 말인가. 아니라면 나는 잠시 다른 차원의 세계로 다녀왔다는 것인가. 오오오, 이 체험을 책으로 팔면 분명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리. 두둑히 꽂히는 인세로 비루하고 사막같던 청춘의 나날을 청산하고 이대로 새사람 새인생의 지평이 열려 실락원한 자들을 위한 현실 극락을 만들어보..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녀석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핳-하-하-하-하"

기계적으로 띄엄 띄엄 웃는 그 불순한 의도가 가득 담긴 웃음소리에 나는 불쾌를 넘어 혐오감을 느꼈다. 

"무슨 짓이냐!"

"상황 파악이 안 되시나?"

"무엇이!"

"6이 잖냐"

그래. 다른 차원에 대한 얘기는 나중에 잘 정리해서 적도록 하고, 일단 이 판을 마무리해야할, 순국선열을 대신한 역사적 사명이 내게 있었다. 보자. 6이면 어디지. 나는 말을 집었다. 파리에 서 있던 빨간 말은 이탈리아의 작은 언덕에서 시작해 지중해를 정복하고 팍스로마나를 실현시킨 고대제국 로마의 아름다운 유적들이 남아있는 로마를 지나, 부루마블의 필수요소 황금 열쇠 칸을 지나, 셜록 홈즈가 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베이커가가 있으며 현재는 국제적 중심지이자 트렌드를 선도하는 도시인 런던을 지나, 한국인이 갓쓰고 곰방대로 담배피고 있을 무렵 이미 하늘 같이 높이 솟은 고층건물들이 빼곡히 들어서 세계 금융의 수도 역할을 하는 동시에 지구방위대 총사령관 천조국의 핵심 도시인 뉴욕을 지나, 나 같은 사람에게 지급되어야 하지만 신체에 장애가 없고 노동가능한 연령이라는 편협한 사실만으로 혜택을 전혀 받고 있지 못한 사회복지기금을 지나...

"서울, 서울, 서울~ 아름다운 이야기~"

"......"

그랬다. 서울이었다.

"손에 손 잡고~ 벽을 넘어서 ~"

서울이고야 말았다.

정말 서울이 문제였다. 정부는 빠른 시일 내에 행정수도 이전을 완성하길 바란다. 서울 집중 현상이 나 같은 서민에게 집 한 칸 얻지 못하는 거렁뱅이 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모든 혜택이 서울에 집중되어있는 이 현실! 조속한 개선이 필요하다!

"돈 내놔 이 자식아"

녀석은 의기양양, 사채추심원처럼 봉투 손잡이를 한 껏 양쪽으로 뻗어올리며 당당한 풍모를 보이며 내게 손을, 손은 없지만 하여간 손을 내민 것 같은 포즈를 보였다.

치, 침착하자. 손은 눈보다 빠르다. 녀석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비상금을 슬쩍 꺼내는 거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야! 저거 봐! 주사위 6이 아니네"

"어디서 개수작이여?"

녀석은 주사위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오직 나만 뚫어지게 쳐다봤다.

"너 지금 시방 손이 어디로 들어가부러잉? 장난치다 걸리면 손모가지 날라가는거 안 배웠냐. 한번은 봐줬는데 두 번 세 번은 쪼까 그라지."

뒷주머니에 반쯤 꽂았던 손이 멈췄다. 녀석은 역시 알고 있었다. 이 천하의 음흉한 녀석같으니..! 

"자 그럼, 어디 수금을 한번 받아볼까나. 짜라자라 잔잔"

"야. 너. 왜이리 들떠보이냐"

"뭐가? 네 놈이 하던 짓거리 그대로 따라하는 것 뿐인데"

"거짓부렁! 나는 그렇게 교양없고 매너없고 졸렬한 행위를 한 적이 없다!"

"네 놈의 기억은 지극히 편향적이라 지나친 자의적 해석을 하는 경향이 있지. 시끄럽고, 돈이나 내노셔."

있는 재산을 모두 팔아도 서울의 벌금을 낼 수가 없었다. 모든 건물을 다 팔아봤지만 10만원이나 빈다. 젠장, 한 칸만 더 갔어도 돈이 들어오는건데...

그러나 불현듯 뇌리를 스치는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정경유착을 고발하는 내부자의 심정으로, 단호히 이의를 제기했다.

"이의를 제기한다!"

"또 뭐."

"나는 아까 다른 차원에 다녀왔다."

"이건 또 뭔 개소리여."

"너는 쉽사리 못 믿겠지만 이것은 진실이다. 조금 전 주사위를 돌리는 순간, 나는 대략 5분 정도 시간이 흘렀음을 분명히 느꼈다. 주사위는 영원히 빙글뱅글 돌고 있었다고! 나를 깨운 것은 옆 집 개의 짖는 소리지만, 그쪽을 쳐다봤던 건 0.5초도 안되는데 그사이에 주사위가 뻗어버렸다."

나는 논리정연하게 말을 이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볼 때 대략 두 가지 가능성이 제기된다. 첫번째, 내가 진정 다른차원으로 다녀왔을 가능성.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 턴은 무효이므로 나는 주사위를 다시 돌려야한다. 그 차원의 나와 이 차원의 나는 다른 나이니까! 그리고 두번째, 만약 내가 다른 차원을 다녀온 것이 아니라 그냥 기분탓이었다면, 어째서 0.5초만에 주사위는 멈춘건가. 이것은 그 틈새를 노려 네놈이 조작했을 짙은 의혹을 불러일으킨다. 따라서 이 턴은 무효! 서울행은 무효야!"

"아무리 내가 봉투계의 전설적이고 신화적인 존재라지만, 내 앞에서 그런 허무맹랑한 소리를 지껄인다고 넘어갈거라 생각하면 몹시 곤란한데. 불쾌하기 짝이없군."

녀석은 전혀 불쾌한 것 같지 않은 어조로 말을이었다.

"게다가 조작설에 관해서는, 애초에 나는 손이 없어서 조작을 못 한다는 걸 깜박한 것 같은데, 이제 궁지에 몰리니 무리수를 남발하는구만. 조야하기 짝이없느니."

''그, 그러면, 애초에 내가 뒷주머니에서 비상금을 처음 꺼낼 때 고발하지 않은 이유가 뭐냐! 불공정 행위는 그 때 시작되었으니, 판도 그 때로 돌려 다시 시작하는 것이 이치에 맞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더니 바로 이꼴이군. 부정행위자는 재도전이 아니라 몰수패가 상식 아니던가"

"아무튼 말도 안돼! 이건 뭔가가 잘못되었어. 네 놈 똑바로 말해. 말하고 생각하는 것 외에 뭔가 상황을 통제하는 초능력이 있는 것 아니냐?"

"그런게 있으면 내가 왜 너하고 같이 있냐? 좀 더 즐겁고 유쾌한 놈이랑 지내는게 낫지"

"그저 내가 골탕먹는 걸 즐기는 것 뿐이잖아! 네 놈이 도래하기 전까지 내 삶은 평온함 그 자체였다고!"

"논점 흐리지 마시고, 돈이나 내노셔"

"못 준다!"

"뭐시라?"

"못 준다고!"

"틈만 나면 웅변하던 사내로서의 긍지는 이제 하수구에 내다 버리기로 한 거냐"

"이건 논외다! 아니, 이것이야 말로 사내로서의 긍지를 지키는 것! 조작된 게임에는 단호히 투쟁으로 맞서겠다!'

나는 세상의 모든 부조리를 경험한 사람의 억울함을 가슴 깊이 공감한 뒤, 그것에 맞서기 위한 결의를 다지며 밤하늘을 향해 외쳤다.

"이건, 무효다!!!!"

그 때, 옥상 문이 열렸다.



그저 막연히 자취를 꿈꾸던 까까머리 소년 시절엔, 나도 시트콤처럼 이웃과의 단란한 나날과 나아가 예쁜 누나와의 설레는 이웃이 사촌이되고 사촌이 어느새 가족이 되는, 그런 것을 꿈 꾸기도 했었다. 이를테면 김치전을 만들어서 똑똑 옆집의 문을 두드리면, 방금 샤워를 마치고 나와 물기가 촉촉한 검은 머리를 말아올린 미모의 누님이 

"잠시만요~"

라며 문을 열고는, 나는 

"안녕하세요? 김치전을 했는데 조금 남아서요" 

라며 한없이 젠틀하면서도 깊은 마력을 지닌 도시 남자의 목소리로 인사를 나누고, 그녀는 잠시 놀랬지만 나의 품격있는 태도와 기품있는 얼굴을 보고는 마음을 놓은 뒤 

"잘 먹을게요. 차라도 한잔 마시고 가시겠어요?"

이렇게 제안한 뒤, 못이기는 척 방안으로 들어가 쭈뼛쭈뼛 구석에 앉아

"방을 참 잘 꾸며 놓으셨네요. 제 방하고는 완전 다른데요?"

라며 그녀의 세밀한 센스를 칭찬하고,

좌우지간 중간생략 중간생략의 과정을 거쳐 이윽고 그녀와 이 방 저 방을 오가며 원룸 사람들이 모두 시기와 질투를 하는 커플이 될 수도 있지 않나라는, 너무나 허황되어서 차라리 호그와트를 찾는 것이 더 현실성 있는 망상에 빠지곤 했다.

문을 열고 들어선 사람들은 윗 집 사람들이었다. 윗 집에는 아마도 나와 연배가 비슷한 남자가 홀로 사는 것 같았는데, 밤이면 밤마다 남녀 남녀들이 그 집을 찾아가 술판을 벌이곤 했다. 나는 마음속으로는 당당히 그들의 집을 방문해 항의하고 이 원룸에서 가장 오래 살았던 거주자로서 필요한 공동 규칙을 너그럽게 설명하고는, 그들의 진정성 있는 반성을 이끌어내고 다른 주민들에게 호평을 받는 그림을 그리곤 했었지만,항상 잠이 너무 깊이 드는 바람에 행동에까진 옮기지 못했다. 잠은 깊이 들었지만 유난히 귀가 밝기 때문에 그들의 술파티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것뿐, 그들로 인해 잠을 설치거나 그러진 않았으니 나는 행동으로 옮길 필요가 없었다.

딱 한번, 역시 잠은 깊이 들었지만 그들의 웃음소리가 다소 생생한 감이 있어, 막대기를 들고 점잖게 지붕을 툭툭 쳐보았지만, 윗 집의 주민들은 오히려 떠나가라 웃었다. 나는 뭔가 재밌는 일이 생겼나보다라는, 굉장히 합리적인 추론 끝에 그들을 넓은 아량으로 이해한 적도 있었다. 그 때 내가 보였던 아량은 잠시나마 마더 테레사의 드넓은 품과 잠깐 맥이 닿는 것이었다 하겠다. 

그렇다고 내가 그들은 밤마다 술파티를 벌이며 뜨거운 청춘의 밤을 보내는데 나는 이 귀곡산장같은 아수라장안에서 시체처럼 누워지내는 삶에 대해 일말의 불평이나 억울함, 또는 그들에 대한 시기와 질투를 느꼈다고 생각하신다면 그것은 독자의 완벽한 오산이라는 점, 강하게 지적하며 넘어가겠다.


문을 열고 들어온 자들은 바로 그들이었다. 남녀 남녀. 2쌍의 커플은 술이 가득 담긴 봉투와 치킨을 들고 옥상으로 들어왔다.

"저기...뭐하세요?"

몇번 마주친 까닭에 얼굴을 익힌 윗 집의 주인이 말을 걸었다. 나는 답할 말을 찾지 못한 채 당황했으나 어디까지나 의연한 품새를 잃지 않았다. 부루마블 좀 한 것이 죄는 아니지 않나.

"혹시, 혼자 부루마블 하신 거에요?"

"아니, 아닙니다! 그럴리가요!"

"혼자 계신 거 같은데..."

"아니에요! 저는...."

그들의 잘못된 판단을 확실히 고쳐줄 명쾌한 답변을 위해 말을 고르던 나는, 잠시 주변의 풍경을 둘러보았다. 네모난 옥상 위에 네모난 돗자리 위 네모난 부루마블, 돗자리 언저리에 놓인 신발을 한 켤레뿐이고, 내 앞에는 검은 봉투 녀석이 시치미를 떼고 앉아있다. 나는 녀석에게 조용히 말했다. "야, 야. 뭐라도 좀 해봐"

"지금 뭐하세요? 혹시 봉투에 말 거는 건 아니시죠?"

"아니, 그런게 아니구요."

고개를 세차게 저었지만, 그 남자의 뒤에서 날 지켜보던 여성들이 수근수근 댔다. "어머, 이상해..." "미친건가?" 레이디, 오해입니다. 

"저, 이게 좀 오해의 소지가 다소 있는 상황이란건 이해합니다만, 그렇다고 옥상까지 와서 혼자 부루마블 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아 네. 그러시겠죠."

나의 진심이 가득해서 철철 흘러 넘치다 못해 아예 녹아내릴 정도의 진지한 목소리를 듣고도 그들의 오판은 어쩐지 더욱 깊어지는 것만 같았다. 봉투 녀석은 여전히 봉투 그 자체인듯, 일말의 미동 없이 입을 싹 닫고 있었다.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속삭였다. 

"보..봉투형, 뭐라 말 좀 해봐. 형님"

"저기, 저기요"

귀도 유난히 밝은 듯한 그 사람은 나의 속삭임을 엿듣고는 내게 말을 걸었다. 도대체 프라이버시라는 개념이란게 없는 교양없는 사내가 분명하다.

"죄송한데 다른 분 없으시면, 저희가 옥상 좀 쓸 수 있을까요?"

"네? 아..."

혼자가 아니라고! 나는 법정에 선 변호인의 심정으로 당당하게 외칠까 싶었지만, 상황이 더 악화될지도 모르겠다는 일말의 불안함이 그 대사만은 입 언저리에서 멈추게 했다.

"안그래도 이제 내려갈 예정이었어요. 같이 올라온 사람이 집에 먼저 들어갔거든요."

"네, 뭐, 그러시겠죠"

그 남자는 드디어 나의 반론에 납득한듯, 순순히 답을 했다. 말 끝에 묘한 웃음이 묻어나는 것은 나의 착각이겠지.


내가 짐을 싸들고 이동하자, 여성들이 멀찍이 비켜난다. 이유를 알 수 없는 행동이다. 이렇게 신사적인 사람이 어디있다고 왜 나를 피하는지. 도통 이해할 수 가 없었다. 걸어가는 나의 등 뒤로,

"불쌍하다..." "그러게. 난 절대 저렇게는 못 살것 같아"

등등의 무엄하고도 몰지각한 말들이 들리는 듯 했지만, 나는 어디까지나 당당한 태도로 걸었다. 나는 그들이 오해할만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부루마블이 너무나 하고 싶은 나머지 홀로 옥상에 올라 달빛 아래 주사위를 던지며 두개의 말을 옮기다가, 파산 직전에 몰려 내 안의 또다른 자아와 싸우는, 그런 일 따위는 하지 않았다고! 

역시 이 참사도 봉투 녀석 때문이 분명하다.

"저기요"

문을 여는 나를 그 남자가 불렀다.

"저희랑 같이 한 잔 하실래요? 심심해 보이시는데"

나는, 추호의 고민도, 일말의 흔들림도 없이 그 제안을 거절했다. 감히 내게 동정을 품다니, 기가 막혔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즐겁게 노세요."

계단을 내려오는 나의 발걸음에는 한 점 부끄러움도 묻어나오지 않았다. 문을 닫자 그들의 웃음소리가 귀 속을 파고들어 뇌 속에서 울리는 듯했지만, 나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다만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와 빨갛게 달아오른 양 볼만 남았고, 드디어 나의 스윗홈에 들어서자 봉투 녀석이 말했다.

"아이고, 웃음 참느라 혼났네."

그 말을 듣자마자 녀석 대신 널브러져있는 다른 봉투를 걷어찼다. 그러나 봉투 안에 담겨있는 쓰레기들이 사방으로 뻗어가나자, 그 꼴을 본 봉투는 아예 박장대소를 했다.

나를 안아주는 유일한 존재인 침대를 향해, 나는 침몰하듯 다이빙했다. 유리창 밖에는, 우스꽝스러운 캐릭터를 비추듯, 영롱한 달빛이 나를 향해 스포트라이트를 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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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빵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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