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나의 섣부른 기쁨은 곧 고난의 행군을 불러왔다. 옥수수와 조만으로 1주일을 사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을 수도 있으나, 가진 능력의 배를 요구하는 혁명 과업의 완수는 소크라테스의 이름빨을 받은 덕에 널리 알려진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의 참 뜻이 무엇인가에 대해 본질적이고 심도있는 고찰을 할 수 있었다. 불세출의 명곡인 만큼 <여름날>의 주법을 알려주는 기타 강의는 많았으나, 유감스럽게도 미묘하고 섬세하며 가련한 감성을 불세출이 아닌 손 끝 탓에 더이상 따라갈 수 없었던 것이다. 손 끝의 태업에 적잖이 당황했으나, 그보다 문제는 한없이 문디스러워지는 뇌에 있었다. <여름날>이란 제목을 떠오를때마다 '애시당초는 여름장이란 글러버려서...'로 시작되는 명소설의 문장이 떠올라, <여름날>도 여름장도 나의 여름도 모조리 글러버린 것은 아닌가 싶은 강한 사념이 뉴런들을 휩쓸고 다니며 각개격파, 오늘도 누군가의 뇌세포는 노벨 물리학상에 한걸음 다가서는 연구를 위해, 혹은 인류의 지적 자산에 당당히 그 이름을 올릴 중대한 철학적 고찰을 위해 그 값어치를 톡톡히 해내고 장렬히 전사하고 있지만, 주인을 잘못만난 나의 뇌세포는 안타깝게도 물 건너온 예술 영상과 출연하는 아리따운 배우들의 이름을 고이 간직하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자니, 어쩌면 천방지축으로 뛰어다니는 여름의 난동에 뇌가 익어버린 것은 아닌가 싶기도 했다. 어쨌든, 사태수습의 책임은 나에게 달려있으므로 나태한 손 끝과 혼란한 뇌 속에 통제명령을 내렸지만, 도저히 협상의 기미가 보이지 않아 이들의 연대투쟁에 백기투항을 선언하기 직전까지 몰려있었다.

이 난국을 타개하는 데 있어 평소 나의 아름다운 인생에는 1그램도 협조하지 않던 봉투 녀석의 기여가 일정부분, 으흠, 쿼크의 무게만큼은 기여했다는 것은 썩 기분 좋지는 않지만 나는 도덕적인 사람이므로 조금이나마 인정하는 바이다.

"거, 안 되는거 어거지로 하려고 들지 말고 야매로 해라 야매로"

"무사수행의 길에 포기란 없느니"

"포기는 둘째치고, 약속의 그날이 다가오는데 반절도 못치면 개망신 아니겠냐?"

"이 부분만 넘기면 웬만큼 할 수 있다!"

"4일 내내 인트로만 붙잡고 삑사리나는 걸 어쩔 수 없이 들어야 하는 내 신세도 좀 고려하는 게 어때"

"싫으면 나가시든가."

"동거인의 계약이라곤 쥐뿔만큼도 고려하지 않은 놈이로고."

"애시당초 네 놈의 무단침입으로 시작된 것이거늘"

"그건 됐고, 아무튼 그 인트로, 어차피 코드 변주 안 되잖아?"

"할 수 있.."

"아니 할 수는 있는데, 지금은 안 되잖아?"

잠시간 나는 떨리는 손 끝을 바라보았다. 손 끝에 얼굴이 달려있다면, 기타줄에 눌려 얼굴에 기스가 잔뜩 간채로 눈물을 흘리며 내게 "제발 죽여줘..."라는 호소를 하고 있을 것이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두 손을 들 수 밖에 없었다.

"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여러가지 불가항적인 환경 때문에 기한까지 과업 완수의 가능성이 다소 불투명할 수도 있는 것일 수도 있지."

"아휴, 아무튼, 어쨌든, 그러니까 좀 머리를 쓰라고"

"흐음, 계책을 짜내보거라."

"안 되는 인트로 어거지로 맞추지말고, 그냥 코드로 쑥 쳐버려"

"아니 그래도 가오가 있거늘"

"가오같은 소리하네. 백날 인트로 붙잡고 있다가 본전도 못 건질 뽄새구만."

"흐음"

그런 연유로 나는, 지금까지 그래왔듯 '야매'로 이 곡을 때우기 시작했다. 무사수행에도 때때론 실용주의적인 태도가 필요한 것이라는 훌륭한 결론을 낸 채로. 


"안녕하세요."

나긋하게 허리를 숙이며 내게 인사하는 그녀. 그녀의 앞머리가 생긋한 이마를 감추고 합쳐졌다가, 다시 홍해처럼 갈라지며 제자리로 돌아간다. 

"아, 네. 안녕하세요."

그에 반해 나의 앞머리는 강풍에 흩날리는 민들레 씨앗처럼 흩뿌려졌다가, 본모습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헝클어져 괴상한 몰골이 되어 버렸다. 나는 머리에 손을 가져갔다.

"이번엔 갑자기 다른 곡을 부탁하거나 하지 않아요."

그녀의 농담에 머리를 만지던 손 끝이 갑자기 저리기 시작했다. 앞머리는 당최 돌아올 기세가 없었다. 손 끝의 태업은 다시 시작인가.

"나름, 어, 연습을 좀 하긴 했는데, 굉장히 어려워서 어설퍼요."

"어려운 거 알고 있어요. 그래서 부탁드린거니까요."

"그래도 기대는 안 하시는게"

"그런 말은 좀 늦은 것 같은데요."

알싸한 개망신의 기운이 카페 안을 잔뜩 메웠다. 대대적으로 망할 느낌이 손 끝에 잔뜩 몰렸다. 초나라 노래가 사방에서 울려 퍼지던 때 항우의 심정이 바로 이런 것일까.

"그럼, 어쨌든, 해볼게요."

만취한 친구녀석마냥 비오는 날이면 쿡쿡 쑤시는 허리위에 널부러진듯 얹어져 있던 기타를 꺼냈다. 영 시원치 않은, 골골대는 소리를 내며 기타 녀석이 잠에서 깨어났다. 기타야, 이번만큼은 좀 힘내주면 안되겠니. 이제 잘 관리해줄게. 나는 녀석에게 간절한 속마음을 건네며, 조심스레 기타에 스트로크를 던졌다.


눈부시게 반짝거리는

파란 미소의 너의 얼굴 손 흔들며

예전 그대로의 모습으로

내게 달려오고 있어.

그토록 내가 좋아했던

상냥한 너의 목소리 내 귓가에서

안녕 잘지냈니 인사하며

여전히 나를 지켜주고 있어.


"짝, 짝, 짝"

그녀는 여백을 삽입한 박수를 세번 치고 말했다.

"XX씨는 노래를 잘 하시네요"

땀을 삐질삐질 흘리던 나는 그 말을 듣자 뒷머리가 간지럽기 시작했다. 이것은 마치 누군가 칭찬을 할 때 의례적으로 뒷머리를 긁으며 "아니에요~ 그정도는~"하는 말을 하곤, 속으로 '역시 해냈구나'하는 만족이 차오르는 것을 기쁘게 즐겨야 할 때임을 알리는 신호다. 나는 조심스레 손을 뒷머리로 올렸다.

그런데 그녀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

"기타에 비하면 훨씬요."

간지러웠던 뒷머리에 누군가 함마로 후려친 듯한 충격이 들었다. 의식을 깨우친 봉투에게 이제 드디어 손 발이 달린걸까. 사실이라면 태초에 의식이 먼저 발현되었고 뒤이어 진화가 따랐다는 학설을 발표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돌아봐도 머리 뒤에는 허공 뿐, 머리를 후려친 것은 물체가 아니라 목소리라는 것은 고개를 다시 되돌려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야 깨달았다.

"역시 야매가 맞네요. 순전히 노래하실려고 배운거지요?"

내 단 한번도 야매기타가 아님을 부정한 적이, 아니, 기타친다는 것을 알릴때에는 꼭 야매 기타라는 말을 덧붙여 불필요한 오해나 기대를 줄이기 위해 최선을 다해왔으나, 그것을 타인의 입에서 듣는 것은 그다지 환영할 만한 일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서슴치않았다.

"코드변주할 때 운지법, 하이코드 운지법, 스트로크, 아르페지오 주법. 모두 엉망이에요."

"네, 네, 맞, 맞습니다. 그렇지요."

"리듬도 중간에 늘어지고, 삑사리도 네 번이나 났어요."

"네 번이나? 아니 그와중에 그걸 세고 계셨..."

"무엇보다, 인트로를 그렇게 하는 건 반칙이에요 반칙. 이 노래에 인트로가 얼마나 중요한지 아시죠?"

"...면목없습니다."

뒷머리를 긁적이려 했던 내 손은 어느새 곱게 뒤로 모아, 컴플레인을 제기하는 고객님을 응대할때처럼, 그보다 전에 방학숙제를 검사하는 담임선생님께 혼날때처럼, 그보다 전에 방 청소를 안 해놓고 띵가띵가 놀다가 아버지께 털릴때처럼, 양쪽 손에서 샘솟는 땀을 옷에 닦아대고 있었다. 고개는 점차 수그러져 어느새 신발 앞꿈치에 묻은, 이전에는 안보였던 얼룩들이 생생히 보이기 시작했고,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격언을 증명하듯 낯뜨꺼움에 뇌가 뜨겁게 익는 듯 했다. 아아, 망했구나. 망했구나.

"그래도 노래 부른 게 좋아서, 꽤 괜찮았지만,"

라는 말도 한 것 같은데 익은 뇌 때문에 고막도 전골이 됐는지 잘 들리지 않았다.

"그러면, 제 차례인가요?"

"아, 네, 네. 그렇죠."

그렇다. 잠시 잊고 있었지만, 그녀도 곡을 연습해오기로 했던 것이다. 웬만해서는 타인의 결점을 굳이 찾아보려 하지 않는 관대하고도 너그러운 성품을 지녔지만, 뜨겁게 익은 뇌는 평소대로의 자제력을 지니지 못하고 평론가 모드로 접속해버렸다. 그녀가 혹평을 쏟은 까닭의 근본 원인은 대책없이 야매인, 허접하디 허접한 나의 기타 솜씨 때문이지만, 나의 결점을 뒤돌아보기 전에 일단 화부터 내는 어느 연예인의 전략을 써야할 때가 비로소 지금이라는 옳지 못한 결론이 샘솟았다. 폭주하는 뇌여, 제발 멈춰다오. 그것만은 아니되오.

"그러면, <옛사랑>입니다. 잘 들어주세요."

"아, 네. 부탁드립니다."


이제 그리운 것은 

그리운대로

내 맘에 둘거야.

그대 생각이 나면

생각난대로

내버려 두듯이.


일찍이 이데아론을 꺼내들으며 보편 절대적 상태에 대한 스스로의 확신과 동시에 독자에게는 불확실함을 선사했던 플라톤은 "음악과 리듬은 영혼의 비밀 장소로 파고든다."는 말을 했었다. 플라톤의 경우에는 아마도 그 마음속에 있을 동굴에 파고 들었었겠지. 영국의 왕정복고기 이름난 극작가였던 윌리엄 콩그리브는 "음악은 야만인의 가슴을 어루만져 주는 희한한 힘이 있다."고 말했다. 유래없이 많은 식민지를 건설하며 야만인들을 교화해왔던 영국인들의 눈에도 음악의 능력은 대단해 보였나보다.한편, "신은 죽었다"면서 후대에 수없이 많은 중2병들을 양산한 니체는 "간단히 말해서, 음악이 없는 삶은 잘못된 삶이며, 유배당한 삶이기도 하다."고 말했고, 또 젊은 남자와 유부녀의 불륜을 사무치게 그린 <젊은 베르터의 고뇌>를 쓴 괴테는 "음악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사람이라고 말할 자격도 없다.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때서야 비로소 반쪽 인간이 된다. 그러나 음악 활동을 하는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라는 말을 하며 글 쓰는 이 특유의 긴 혓바닥을 자랑하기도 했다. 아무튼 '옳은 인간'이 되기 위해 고민했던 독일의 전통이 베어나온 음악찬사라 할 수 있겠지 뭐. 또 누군지도 몰랐던, 지금도 잘 모르는 칼릴 지브란이란 사람은 "노래의 비밀은 노래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지닌 진동과 듣는 사람의 마음의 떨림 사이에서 발견된다."는 말을 했다. 아직 여기에 적어낼, 음악에 대한 찬사를 붙인 명사들의 수많은 말들이 남아있으나, 그녀의 노래를 듣던 나의 상태를 표현할 만할 꽤 쓸만한 글이 이미 이것들 중 하나로 표현됐으니 이만 쓰도록 하겠다.

고백하건대, 사실 그녀의 입과 손에서 멜로디가 울려 퍼질 때의 나는, 부루마블을 하다가 잠시 정신을 놓은 그 때처럼 어딘가로 유영을 떠나온 듯 해서, 나중에 인터넷을 뒤져 명언으로 대체했음을 밝히는 바이다. 저 양반들이 했던 말 따위 내가 평소에 알게 뭐냐. 

아무튼 그런 관계로, 불을 키고 스스로 익어가며 결점을 찾으려했던 나의 뇌는, 그 열기를 온전히 가슴에게 내준 채 차갑게 식어있었다. 눈과 귀가 그녀에게 인식을 뺏긴 채 넋을 잃었고, 아무 말 대잔치를 벌이려는 볼썽사나운 주둥이에게 몇번이나 되새김질을 시킨 뒤에야 감상이라고 말하기에 조악한 평을 내놓을 수 있었다.

"참, 훌륭하시네요."

"그래요? 흐음, 저는 별론데 말이죠."

"틀린 것도 없고, 너무 잘하시는데요?"

"글쎄요. 아직 썩 성에 차지가 않네요."

그녀의 고집스러운 불만족과 합의하는 것은 미뤄두기로 했다. 어쨌든 그녀가 나보다 훨씬 훌륭한 연주자라는 것을 안 이상, 감놔라 배놔라하면서 이러쿵저러쿵 비평을 달 자격이 없게 된 것이다. 심지어 그 기타실력이 빛이 바랠 정도로 훌륭한 음색의 소유자라는 것을 안 이상, 귀를 씻지 않는 것으로 목소리를 다시 재생할 수 있는 조건이라면 한 50년 쯤 귀는 커녕 귓볼 언저리 조차도 물이 닿지 않게끔 아예 싸매고 돌아다닐 수 있을 정도의 호강한 경험을 했기에, 가타부타 말을 꺼냄으로써 걸쭉한 내 음성이 내 귀로 흘러들어오는 자해행위를 할 맘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영영 아무말도 안 할 수가 없는 법, 나는 말을 꺼냈다.

"감사히 잘 들었습니다."

그녀가 답했다.

"아, 저도."

왠지 거기서 말을 끝내기엔 다소간, 피차간, 상호간, 뭔가 끈적지근함이 있어, 창피해 죽으려고 하던 뇌는 벌써 방관자 모드가 된 채 나는 이 말을 내뱉고야 말았다.

"다음엔 또 어떤 곡을 연습해올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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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빵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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