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상근예비역으로 군 생활을 보냈다는 것은 참 축복같은 시간이었다. 고졸 무지랭이로 산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 덕에 상근으로 꿀빨 수 있었다는 것은 태생이 가져온 몇 없는 뽀나스같은 것이었다. 현역으로 입대했다면 좀 더 부지런하고 근성있으며 체력도 증강되고 몸도 우람해져서, 우리 사회에 좀 더 나은 인간에 보다 가까워질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상근으로 지내며 잉여로운, 한없이 잉여로워서 담배피며 바라본 앞산이 비웃을 지경으로, 어떻게하면 하루를 날로 먹을 수 있을까 고민하던 면사무소의 모 아저씨의 잉여로움의 호각을 다투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뿌듯하고 살 맛 나는 시간이었다.


훈련소에서 어렵게 얻은 전화 찬스를 그녀에게 써서, 강철같은 마음을 지닌 내가 살짝 울컥하는 통화를 하게 된 이후로 그녀와의 사이가 한층 진보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품게 된 것이 1년, 이미 그것만 해도 손 쓸 수 없는 바보의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지만, 나는 그녀와 내일로 여행을 떠났다.


#2


여행은 좋았고 슬펐다. 그녀는 요상하게도 내게 거짓을 고했기 때문이다. 금쪽같은 휴가를 내고 몇 달간 봉급을 개처럼 모은 것은 둘째치고, 그녀와의 괴랄한 관계가 시작된 후로 처음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 공유할 수 있다는 사실에 나는 향토예비군을 지원하는 복무의 목표는 헌신짝처럼 내버리고 몇달간이나 방북을 염원하는 실향민처럼 그날만 바라보게 되었다.

여행 일주일 전, 가족 사정으로 못 가게 될 지도 모른다는 그녀의 말을 좀 더 진지하게 들었어야 했다. 좀처럼 짜증이나 화를 내지않는, 특히나 상대가 다름아닌 그녀라면 더더욱 그러했던 내가 싸움 직전까지 간 것은 오랜 기간 연마한 인내심과 자비심에 생채기를 긁는 발언이었다. 여행계획을 짜서 기안서까지 만들고, 그 안에 '여행을 파토내는 사람은 벌금을 문다'라는 해지방어조항까지 상빙ㅁㅂ한 나의 노력은, 그녀의 말 한마디에 물거품으로 돌아가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녀답지 않게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며 여행 계획의 재개를 선언했고, 우리는 사전 준비 모임까지 하며 여행의 출발을 기대했다. 적어도 나는 기대했다.


기대하지 말았어야 했다. 파토를 내자는 그녀의 발언을 좀 더 진지하게 들었어야 했다.


#3


그녀는 당시 C와 사귀고 있었다. 그녀가 C와의 관계로 고생하다가, C와 나의 관계까지 작살이 난 상황에서 C를 만나고 있었을 줄은 나는 예상하지 못했다. 뼈아픈 실책이로고. 그녀에 관한한 며칠 철야를 하고난 후 피로에 쩔은 몸상태로도 A4지 수십장정도는 앉은 자리에서 작성하고 이를 '그녀 백서'라고 적을 수 있을 정도로 전문가인 나지만, 그것을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무래도 여행계획에 혼미해진 정신이 잠시 평소의 냉철함을 가린 탓이리라. 어쨌든, 여기저기서 의심스러운 징조가 드러났고 여행 출발 직전에서야 나는 깨닫고 말았다.


여기서 또 하나의 바보짓이 추가된다. 출발 전날, 나는 그 사실을 그녀가 먼저 말해주기를 기대했다. 그러면 적절히 선을 갖춰 행동하면 그만일 뿐이었다. 적당한 말투와 적당한 행동은, 마음의 깊이가 적당한 수준에까지 이르는데 도움을 준다. 혹시 한없이 마음이 커져서 고민인 사람이 있다면 나의 방법을 참조해보라. 그렇다고 고통이 덜어지지는 않는다는 점도 참고해야 한다. 어쨌든, 그런 알량한 기대를 갖고 그녀를 방문했으나, 그녀가 그 사실을 알려줄 기미는, 그녀의 새하얀 얼굴에서 찾아볼 수 없는 기미처럼 보이지가 않았다. 나는 심통이 나서 그녀의 신상 가방을 슬쩍 찼다가, 그녀의 호된 분노와 함께 "대체 왜이러는 거야 오늘?"이란 얘기를 들어야 했다. 


그때 물었어야 했다. 확실한 정리 후에 길을 떠났어야 했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그길이 여행길이 아닌 귀가길이 될까봐 두려웠고, 그래서 웃음으로 때우고 말았다.


#4


결국, 내가 그 사실이 진짜냐고 묻게 된 것은, 여행이 막바지로 접어든 경주에서였다. 막바지여서 물었을 뿐인데, 그 날이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다. 숙소를 잡고 자전거를 빌려 그녀를 안내하다가, 길치인것이 드러나 예의 그 조롱과 핀잔을 실컷 듣고는, 그녀의 뒤를 따라가는 처지가 되었다. 바보짓도 정도가 있다. 평소보다 바보력이 월등이 폭등해, 바보의 3승 정도로 진화한 일주일간의 나였다. 어쨌든 그래도 쌈박한 밥도 먹고, 나름대로 좋은 구경도 하고, 경주 박물관에서 나의 열띤 역덕 해설을 들으며 생각지도 않게 그녀의 깊은 이해를 느낄 수도 있었다. 몰랐던 바와 새로이 깨닫게된 바가 많았다. 모든 것이 좋은 와중에, 딱히 내 마음을 들키고 싶지는 않지만 굳이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하나를 꼽자면,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와중에 내가 튼 정재형의 running을 듣고, 선곡이 좋다며 칭찬해 준 그녀의 말 한마디였다. 


하지만 우리는 같은 공간에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 조짐은 얼핏 읽었는데, 홀로 개풀뜯어먹는 상상에 빠져있던, 바보의 5승까지 치달은 나는 조짐을 알고도 외면했다. 나의 페이스와 그녀의 페이스는 남극과 사하라 사막처럼 어마어마한 간극에 빠져있었다. 그것을 알게 된 것은 어느 한 카페에서 시간을 보낼 때 였다.


방문자가 포스트잇을 붙이는, 흔한 컨셉의 그 카페는, 그러나 옛날 집 특유의 낮은 천장과 고즈넉한 분위기가 살아 있었다. 그것에 매료되, 계획에 없던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저 구석, 노란 조명 아래 포스트잇들이 빛나고 있던 자리에서 우리는 무언가 얘기를 나눴고, 아마도 나는 책을 읽지 않았나 싶다. 

그러다가 우리는 각자 포스트잇에 무언가를 적었다. 그때라도 멈췄어야 했다. 나는 바보력의 관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녀와의 여행'을 기념하고 추억할만한 글귀를 적었다. 뻔하디 뻔해서 라디오 사연으로 올린다면 0.001초만에 작가의 눈에서 벗어날 글귀였던 것 같다. 그런데 그녀는, 포스트잇을 적는 표정이 사뭇 진지해서, 나를 놀라게 했다. 자연스레 내용이 궁금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설마하니, 나와 함께 있는데 한 글자정도는 적어주겠지. 라는 희망과 불안이 서로를 껴안듯 피어올라 호기심이 솟았다. 그런 그녀는 나의 표정을 읽고, 화장실로 떠나며 "절대 읽지마"라는 언질을 단단히 남겼다.


하지만 나는 읽었다. 읽지 말았어야 했다. .


#5


고열 감기에 시달리던 그녀에게 치명상을 입힌 나의 어리석음으로, 어리석음이 한없이 농축된 아로니아 진액같은 실수를 저지른 탓에, 여행은 그날로 끝났다. C와 사귀는 것이 맞냐는 질문, 그녀의 정색이 섞인 부정, 하지만 C와 통화하는 것이 확실한 그녀의 목소리. 그녀 핸드폰에 뜬 C의 이름을 훔쳐본 나. 그 날 새벽, 세계 바보짓 대회가 열린다면 순위권에 들 수 있을 것 같은 바보짓을 벌인 것까지. 하루가 더 남긴 했지만 그것까지 되새기기엔 나의 알량한 자존감이 꽤나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라 차마 바라볼 수는 없다. 


여행에 대한 기억이 점차 흐릿해질수록, 뇌리에 남는 것은 그 카페의 포스트잇 뿐이었다. 다른 것들도 물론 강렬하게 자리잡고 있긴 한데, 기억의 창고에서 탈출할때마다 나의 차디찬 이성이 꾹꾹 눌러 담고 있는 중이다. 그나마 꺼낼만 한 것은, 카페에서의 포스트잇 뿐이다.

그래서 몇 년 간이나 궁금해했다. 언젠가 다시 경주로 가게 되면 꼭 들러봐야지. 하지만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고, 나의 귀찮음은 나날이 자가증식하고 있었다. '그녀와 함께하는 어리석은 꿈에서 깨어나게 되면, 그 때 가보리라'라는 생각이 있긴 했지만, 아무래도 귀찮음에 대한 합리화같다.


어쨌든, 나는 얼마 전 다시 그 자리에 가봤다. 기억이 많이 흐릿해져 위치를 찾는 데 고생했지만, 나는 바로 그 카페를 근처에 두고 200m 근방을 왔다 갔다 하며 헤맸다. 헤멘 이유는, 카페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건물도 위치도 그대로였지만, 주인도 카페 이름도 내부도 많이 바뀌었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포스트잇들도 쓰레기통에 쳐박혀 소각장으로 보내지거나 했을 것이다. 문을 열며 그 사실을 바로 파악했음에도, 나는 그 곳에서 커피를 주문하고 앉아보았다.


앉을 수 밖에 없었다.


영원히 그곳에 남아 있을 것 같던 그녀의, 그녀와의, 하지만 그녀는 없던 그 시간이, 이제는 영영 사라져버렸음을 마주하는 시간이었다. 앉으며 나는 글을 썼다. 할 수 있는 것이 글 밖에 없었다. 우스운 짤방이나 보고 있을 기분이 아니었다. 기억을 해방하는 일을 그렇게 단순하고 잉여스러운 일을 통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꼭꼭 숨겨두었던 기억을 해방하고, 그것과 마주하며, 창문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여전히 본가 어딘가에 짱박혀 있을, 그 때 찍은 포스트잇 사진을 다시 보고 싶기는 하다. 나는 무엇이라 적었고, 그녀는 무엇이라 적었는지 궁금하기는 하다. 그날 일기장에 적은 활자들이 뿌옇게 떠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확인하지는 않았다.

눈으로 직접 그것들을 확인하고, 가라앉은 열병의 바이러스들에게 활기를 제공해서, 무위에 그칠 희망의 나날에 연장티켓을 끊는 일을 하지 않는 것. 이것만으로도 내겐 꽤 진일보한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 카페가 확 바뀌고 포스트잇이 사라진 것은, 어떤 의미로 다행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이번 겨울의 여행은 후회로 남지 않게 되었다. 나는 여행을 하면 항상 후회하는 편인데, 손가락에 꼽을 만큼 후회없는 여행이었다. 그리고, 다녀온 후 그녀와의 통화에서 잠깐 그 카페를 말해보았으나, 예상대로 그녀는 전혀 기억을 하지 못했다.


바야흐로, '용기를 가지고 패배하는 법'을 시작하게 된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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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빵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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