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비 오는 밤은 요행이었다. 예상치 못한 비가 내리는 날엔 영원히 잠든 것 처럼 보여 곧 무덤자리를 알아봐줘야 할 같은 전화기가 요란하게 울렸다. 불쑥 찾아온 전화는 대뜸 우는 소리를 전한다. 그 때 마다 당황스러웠지만 익숙해지는 것 또한 때 마다 반복되었다. 그녀는 영원히 여릴 것만 같았고, 나는 그녀의 여린 마음이 온전하기를 바랬다. 주기적으로 깊은 상처를 입고 내게로 돌아오기를. 다치고 또 다쳐서 나에게만 울고 또 어리광부리기를. 다만 그 정도의 보상은 받을 만한 존재가 아니던가라며 자신을 과대평가했지만, 그보다 좀 더 내밀한 속마음 속에는, 아프다 보면 아프지 않을 선택을 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것은 옳았다. 그녀는 바야흐로 아프지 않는 법을 배웠다. 다만, 그 선택지 안에는 내가 없었음을 나는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2

세상에 익숙해지고 개차반 생활을 견뎌내는 그녀의 표정이 나날이 루즈해질수록, 나와의 전화 통화도 뜸해지기 시작했다. 함께 써 왔던 다이어리의 반짝이는 new알림은 수명이 다 된 전구처럼 고요하기만 했다.
그 즈음에는, 얼굴에 비하면 훨씬 예쁘다는 평을 받는 다섯 손가락 사이로, 그녀가 스멀스멀, 새어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항하의 모래를 움켜쥐는 느낌이 이런걸까. 한번도 그녀를 소유는 커녕 곁에 두지도 못했으면서 상실의 감각에 두려움이 앞서던 나는, 혼란스러웠다. 갖지도 못했으면서 상실한다는 억울함과 괴리감이 피어올라, 머릿 속에서 혼세마왕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미련하고 어리석게도 나는 수도없이 불안함을 내비쳤다. 정정한다. 나는 내비침을 넘어 너도 불안해하라고 강요했다. 나의 불안함이 글을 타고 전염되어 그녀의 삶도 불안해지기를. 감정도 불안해지기를. 그렇게 다시 예전처럼, 불안함에게 지배되어버린 그녀가 나를 통해 해소하기를.

사악한 기도가 아예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나의 경우는 한번도 이뤄지지 않았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3

여름비가 목욕 후 바르는 스킨처럼 촉촉히 숲을 감싸던 날, 그녀와 나는 늦잠을 자고 일어나 노닥거렸다. 한 공간에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좋은 일인데 비까지 내린다. 내게 있어선 원더랜드로 여행을 떠나는 것과 유사한 사태였다. 감사한다. 그 날이 여름이었음을. 겨울비였다는 나는 또 감정의 충동질을 이겨내지 못하고 엉뚱한 일을 벌였을 것이다.

나긋하고 그윽한 목소리들이 오가며(사실은 아주 일상적이고 게으른 대화였다. 전혀 로맨틱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격렬하게 아무것도 하기 싫은 냥이처럼 시간을 꾸물대던 우리가 좋았다. 한량없이 한량이 되는 것이 좋았다. 그렇게 잠든 그녀가 좋았다.

애타게 꿈꾸던 나날이 째깍째깍 소멸해간다는 사실에 불안함이 더 가득했다.


#4

결국엔 불안함이 모든 것을 망쳤다. 그녀를 잃기 두려워서 더 나아가지도 않았고, 멈춰서지도 않았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지도 않았다. 모든 것을 다 가질 수는 없음을 인식하는 것이 잘 조율된 삶의 출발이라는 나의 지론은,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취하지 못함을 증명하게 됐다.

어리석게도, 수년에 걸친 가혹하고 뼈저린 교훈을 얻고도 지론도 행동도 달라진 바가 없다. 실패한 사랑은 여전히 진행중이다.

불안함에 시달려 내게로 올 것이라니, 가장 불안한 존재가 꾸는 꿈치고는 지나치게 허황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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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빵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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