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성장, 혹은 변화하는 양상이 어떤 형태인지 확신하지 못한다. 작은 경험들이 차곡차곡 쌓여가며 계단을 오르듯 변화할 수도, 혹은 특정한 계기를 기점으로 엘리베이터를 타듯 쑥 변화할 수도 있다. 항상 성장하지는 않는다. 때때로 아래층으로 내려갈 때도 있다. 대게 이것을 역행으로 규정하게 되는데, 좀 더 넓게 보자면 그것 역시 필요했다고 생각하게 되기도 한다. 시야를 넓게 가지면 모든 일에 대범해지지만,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질 때는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여 일을 그르칠때도 있다.

 

5월 첫째 주는 모두에게 그렇겠지만, 나에게는 매우 특별한 한 주였다. '문재인 대통령 시대'의 의미를 고작 내가 짚을 필요도, 그럴 때도 없을 것이다. 역사책의 많은 페이지에는 평화로울 때보다 격변의 시대를 담고 있었는데, 이 시기를 기점으로 전후 1년간은 분명 역사책에 비중 있게 그려질 것이다. 그리고, 쏟아져 내리는 시대의 변화에 각각의 개인들은 그 나름대로 변화할 것이다. 혹자는 오르고, 혹자는 내려가고. 

 

내게는 또 하나의 변곡점이 있었다. 느닷없이 맞은 부친상이 그것이었다. 부친은 승려였다. 승려를 부친으로 부르는 것에 많은 이들은 거부감이 들겠지만, IMF라는 격동의 파도를 정신없이 헤엄치다 보니 어느새 승려를 부친으로 두게 된 나만큼 거부감이 들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한 번도 부친이라 부른 적은 없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갈 때마다 야간자율학습에 참석하는 기분이 들었다. 

 

석가탄신일을 준비하기 위해 목욕하러 가던 부친은 교통사고로 생을 마감했다. 사고 소식을 듣고 부리나케 달려간, 이미 수없이 드나든 익숙한 대학병원 입구에서 여느 때와는 달리, 지하 장례식장에서 울려 퍼지는 곡소리를 들었다. 불길했다. 응급실로 들어선 순간, 그러나 너무나 멀쩡했던 부친의 상태에 안도했다. 또 한 번의 해프닝으로 끝날 일인 줄만 알았다.

 

그러나 귀가 후, 급격히 호흡곤란을 호소하던 부친과 "업보가 많다."는 유언, 다시 방문한 응급실에서 시행된 심폐소생술까지 겪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깨달았다. 부친과 나의 인연이 끊어져 가고 있음을. 후회했다. 떠나려는 부친의 생을 바짓가랑이 잡듯 붙잡을 수 있었던, 몇 시간 전 내가 선택한 결정들을. 그것만으로 끝이 아니었다. 부친은 중환자실에서 24시간을 넘겼고, 사망진단서는 '병사'로 찍혔다. 나를 비롯한 유족은 납득할 수 없었기에 부검을 신청했다. 

 

국과수로 향하는 운구차 안에서, 나는 과거를 부여잡았다. 슬픔을 마주하기에 모든 것은 너무나 갑작스러웠고, 슬퍼지려 할 때마다 부친과 내가 마주한 다른 이의 죽음들을 떠올렸다. 어린 날, 부친을 돕기 위해 따라다녔던 많은 장례식장과, 입회할 때마다 무섭기만 했던 입관식과, 유족의 울음소리가 섞이던 49재들을 떠올렸다. 나는 어쩐지 슬플 수 없었다. 그럴 때마다 부친께서 유족에게 말씀하시던,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부검을 마친 뒤 다시 영구차로 오르는 부친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은, 한낱 어리석은 인간이기에 쉬운 일이 아니었다고 변명해본다.

 

요상하게도 부친은 작년 어느 때부터 종종 밥을 먹을 때, '죽으면 다비장을 해다오'라는 말을 하셨다. 밥을 먹는다는 것은 항상은 아니라도, 대체로 즐겁고 또 필요한 행위다. 밥을 먹기가 너무나 귀찮을 때에도 위는 내게 투쟁한다. 장례식장에서 많은 분들은 내게, '산 사람은 먹어야지.' 라며 식사를 권했다. 마치 산 자들이 살기 위해 필수적으로 끊어야 하는 연장티켓 같은 느낌이었다. 부친은 연장티켓을 끊으면서, 더 이상 티켓을 끊지 않아도 될 때를 생각했나보다.

 

불교계도 사람 사는 곳이라,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전통적인 장례의식인 다비장 역시 돈이 없으면 할 수없는 일이기에, 졸렬하게도 쉬이 엄두가 나지 않았다. 부검 후 검시관이 형사에게 하는 말을 훔쳐 들으니 '병사가 맞다'는 이야기가 아니었다면 과연 다비장을 치뤘을까. 확신할 수 없다. 나는 고인의 마지막을 편히 보내드리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다비장을 치렀다.

 

켜켜이 쌓인 나무조각들에 불을 들였다. 고인은 한 줌 재로 화했다. 유족들이 직접 불을 놓고, 직접 습골하며, 쇄골까지 모든 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다. 뼛조각이 잘게 아스러지는, 육중한 쇠공이가 떨어지는 소리가 날 때마다 엊그제까지 생생했던, 때론 카톡으로 이모티콘을 붙여 농담도 하던 고인의 기억이 과거 속으로 아스라이 멀어져갔다. 석가탄신일인 덕에 작은 절이지만 많은 분들이 함께할 수 있었다. 얄궂지만 감사한 일이다.

 

승려의 마지막처럼 허망하고 쓸쓸한 것이 없다는 것을 많이 지켜봐 왔다. 뒷방에서 잊혀진 노스님들이 어떤 마지막을 맞게 되는지 보게 된 것은, 어린 내게도 더없이 허망한 마음만을 낳게 하였다. 어차피 떠난 자의 마지막이 어떤 의미인가 따지는 것, 붓다의 가르침에는 정면으로 위배할지도 모르겠지만, 어쩔 수 없이 집착하게 되는 것이 또 중생 아니던가. 그런 의미에서 고인의 마지막은, 적어도 산 자들에겐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던 것 같다. 나는 위로가 되는 건지 아무 의미 없는 건지 확신할 수 없는 채로 생각을 뒤로 미뤘다. 내가 고인의 나이즈음이 되는 때로.

 

뒤로 미룬 이유는 또 있었다. 돌이켜보면, 법도 모르고 의학지식도 없어 일 처리가 너무나 어설펐다. 아직 부검 결과서는 날아오지 않았지만, 부검 결과서를 받아들면 마치 나의 무능함을 지적하는 징계사유서처럼 읽힐 것 같다. 조금 남은 일이 있기에, 의미를 따지는 생각은 애써 지우려 했다.

 

 

 

딴지일보에서 첫 기사를 내준 것이, 재밌게도 작년 석가탄신일 관련 기사였다. 부친의 다리를 주무르는, 너무나 고달팠던 2시간 동안 주워들은 것들을 토대로 쓴 글이 감사하게도 메인으로 올랐다. 부친의 사고 소식을 듣기 전날, 나는 올해 석가탄신일 관련 글을 쓰고 있었다. 딱히 대단치도 않은 인연이지만, 원래 인연이란 것은 의미를 부여할수록 단단해지는 법이다. (편집장님은 조화를 보내주셨다. 김어준의 이름을 보자 슬픔에 차 있던 몇몇 사람들이 웃었다. 다시 한번 감사하다는 말 남긴다.)

 

촛불집회가 한창 이어질 무렵, 나는 의문형이라는 형식을 빌려 사실상 답정너를 시전한(그러나 도비공님의 날카로운 눈은 피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굳이 답해주셨으니, 진실로 감사한 일이다.), 비겁한 글을 한편 쓴적이 있다. 부친의 동의 없이 부친의 생을 담았기에 알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는데, 유감스럽게도 주변인의 깨방정 덕에 읽으셨다. 아니, 기본적으론 보안을 철저히 하지 못한 내 탓이지만. 다행히도 부친께서는 언짢게 읽으시진 않은 것 같다. 그랬다면 분명 불호령이 떨어졌을테고, 나는 편짱에게 기사 삭제를 요청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겠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어느 날 부친은 내게 이런 카톡을 보내셨다.

 

"자등하며 법등 하라. 용기를 내어 살아가라. 마음을 단단하게 가져야 한다. (이모티콘)"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은 붓다의 유훈이다. '이제 저희는 누구를 의지하며 살아야합니까?' 라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붓다의 답이었다. '스스로를 등불로 삼아 의지하라' 집에 돌아와 피씨를 켜보니, 내가 쓰고 있던 석가탄신일 관련 기사에도 똑같은 말이 쓰여 있었다. 문재인 시대를 열게 한 촛불을 조잡하게 엮은 글이었다. 지나치게 조악해서 안올린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원체 변변치 못한 성품 때문에 살아갈 용기를 잃을 때가 있었다. 그 때에 내가 돌아갈 곳은 그분의 잔소리를 듣는 마룻바닥이었다. 도움이 될 때도, 안 될 때도 있었지만, 어쨌거나 한바탕 이야기를 듣고 잔치국수를 먹고 나오면 용기가 샘솟는 것은 둘째치고 일단 머리는 맑아지곤 했다. 

 

변화를 맞이할 때 대부분은 과거의 경험을 토대로 미래를 예측한다. 그것이 한계를 맞을 때서야, 스스로 새로운 경험을 창조해내는 법을 터득한다. 나는 앞으로도 쉴 새 없이 닥쳐오는 걱정거리를 마주할때 마다, 부친의 삶을 회고하거나 실수의 연속이던 과거의 경험들을 토대로 어리석음의 연장전을 이어갈 것이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는 말의 통찰력에 감탄하면서도 쳇바퀴처럼 돌아갈 것이다.

 

이윽고 모든 것이 깜깜한 어둠 속으로 저물어 갈 때, 그제서야 타인의 손에 들려진 등불 대신, 스스로 불을 내어 길을 걸어갈 생각을 하게 될 것 같다. 그때는 이미 늦은 감이 좀 있겠지만, 그때라도 깨닫게 된다면 다행이다. 스스로 불을 내고 어둠을 헤쳐나가는 일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기왕이면 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하게 될 것이다. 이 시대를 관통하는 내가 어렴풋이 느끼는 것과 부친의 유언이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기에. 아니, 어쩌면 걷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다행이련만. 어쨌든, 삶과 죽음의 경계는 그리 두텁지 않다. 부친의 삶이 내게 남긴 것이 의미가 있는지 없는지는, 다 내가 하기 나름일것이다.

 

갑자기 좀 부담스럽지만, 어쩌랴. 걸어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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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빵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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