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독자를 잃어버린 블로그에 글을 쓴다는 것은 참 버거운 일이다. 항상 타인의 시선에서 자신의 가치를 찾아다니는 못된 습성 탓이다. 오롯이 자신의 의지로 가득찬 그녀의 모습에서 나는, 영원히 다다를 수 없는 아득함을 느꼈다. 때때로 순간을 착각하고 문득 그때의 아득함이 불쑥 일어날 때가 있다. 

음, 독자를 잃어버렸기에 이런 글도 쓸 수 있는 거겠지.



#2


태생적인 게으름이 내면과 외면 구석구석을 가득채운 나는, 어지간해선 플레이리스트를 확 뒤집지 않는다. 1년에 한 두번, 그것도 플레이리스트가 꽉 차 기존의 곡들이 삭제됐다는 메시지가 뜰 때, 그제서야 무거운 손가락을 옮기곤 한다.

지난 가을에 플레이리스트를 정리했다. 무의식적으로 다음 곡 버튼을 누르며 운전하는 습관을 지닌 나는, "비오는 날엔, 모르는 노랜 듣고 싶지 않아"라는 가을방학의 <종이우산>처럼, 비 오는 날이 아니라 특별한 날과 특별하지 않은 날과 특별함과 특별하지 않음 그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 대부분의 나날 모두 모르는 노래가 흘러나오는 것이 영 거북하다. 따라 부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습관이란 게 무서운 거더군." 그래서 유감, 또 유감이다. 일주일에 세 번 이상은 듣는 듯한 김동률의 <동반자>를 들으면, 곡이 끝나고 몇 초 뒤 곱씹는 듯한 표정으로 "가사가 참 좋아."라는 말을 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오른다. 취향이 아니기에 전주가 나오자마자 다음 곡으로 돌리는 자우림의 <파애>는, 힘들 게 대관령 길을 오르던 때 노래에 담긴 배경을 설명해주던 목소리가 떠오른다. 지드래곤의 목소리가 나오기 전에 돌려버리는 아이유의 <팔레트>에선, 그 날 내가 저질렀던 망언과 그녀의 화난 목소리가 떠오른다. 플레이리스트 중에서 가장 이질적인 아티스트인 샘 옥의 <love>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관계로 접어들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찌질함의 나락으로 빠져들던 내가 떠오른다. 우리 가족 모두가 좋아하게 된 넬의 <Standing in the rain>에선, "우울한 날엔 어떤 노래를 들어?"라며 이미 수차례 물었던 질문을 아무 생각없이 다시 건네던 끔찍한 광경이 떠오른다. 윤종신에 대한 기사를 쓰면서 내내 듣던 <좋니>는, 마지막 스캣 부분을 왜 마저 부르지 않냐며 농담을 건네던 그녀의 말과 함께, 또 역시 고속도로 안에서 윤종신의 찌질한 노래들이 흘러나오자 "넌 항상 이렇게 짝사랑하는 노래만 듣네?"라는 그녀의 예리한 지적에 대책없이 바보같은 대응으로 일삼던 때가 떠오른다. 듣기가 두려워진 짙은의 <안개>는, 희뿌연 바다에서 나즈막히 읊조리던 나와, "적절한 선곡이군."이라며 최대한의 칭찬을 하던 그녀가 떠오른다. 

조각조각 흩어진 기억들이 깜빡이도 안 켜고 불쑥 튀어나오며 나를 놀래킬 때가 있다. 정적에 가까웠던 일상에 균열이 생기고 익숙한 자괴감이 새어 들어온다. 그때에나 잘 기억하면서 살았을 것이지, 무의미하다는 표현을 붙이기에 그 잉크가 아까울 무게의 무의미한 되새김질. 그러나 항상 쓰는 성찰의 글은 진정성을 잃고 동어의 반복에 빠졌고, 그 인지부조화로 인해 결국 파국을 맞았던 것 모르지 않으나, 모르지 않으나, 모르지 않으나, 

다음 문장이 떠오르지 않을 만큼 할 말이 없다.


#3


익숙한 곡에서 튀어나오는 기억에 몸서리치고, 고개를 뒤흔들다가, 그래도 안 되면 "연락 좀 해!"라며 소리치던, 마지막 인사로는 정말 최악이었던 그날 바로 다시 담배를 물었던 때처럼 라이터를 들고 바깥으로 나선다. 그러나 하루에 반갑 이상은 안 피겠다던 쓸모없는 다짐 때문인지, 기억이 제멋대로 뛰쳐나오는 횟수에 비해 열 개비는 턱없이 부족하기에 다소 애로사항이 꽃핀다. 

익숙하지 패턴이지만 다양한 공간에서 튀어나오는 애로사항이기에 처음엔 적응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무던해지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던 치졸한 신조는 어디갔는지 조소만 흘러나온다. 그럼에도, 김윤아의 <비밀의 정원>은 참 받아들이기 어렵다.

어느날 그녀는, 그녀 답지 않게 "자우림 노래 중에 어떤 게 젤 좋아?"라고 물어왔다. 참 소중한 질문이었는데, 나는 "<미안해 널 미워해>도 좋고, <스물 다섯, 스물 하나>도 좋고. 근데 김윤아 솔로 앨범이 더 취향에 맞는 것 같아"라는, 번뜩임이라곤 1g도 없는 시시한 답변을 내놓고야 말았다. 말을 뱉자 마자 순간 당황했던 것 같다. 그러나 바로 떠오르는 노래가 없었다. 나는, 그녀와 자우림과 김윤아에 대한 이야기를 그토록 많이 나눴음에도 불구, 김동률 노래를 줄줄이 읊을 때처럼 답변하지 못했다. 당황했다. 

<비밀의 정원>은, 조예는 깊지 않으나 10초 정도의 멜로디에도 가슴 속에서 바닷바람이 불어오며 가보지 않은 곳에 아이러니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아이리쉬 풍 노래다. 이 곡을 얘기했어야 했다. 바로 나왔어야 했다. 그러나 그때 내 머릿속에 이 노래는 까마득히 지워져있었다. 

그 대화는 지극히 상징적이었다. 나는 딱, 거기까지였다. 나라는 개인이 가진 내면의 완성도도, 좋아하는 것을 위한 책임도, 사랑을 이야기할 만한 그릇도, 딱 거기까지였다. 그녀가 "잘 안 맞을 뿐이야."라며 호의적으로 해석해준 이유를 뜯어보면, 감정적 자해를 수백번 저질러도 지워지지 않을, 거기까지에 그쳐버린 나의 최대치에 맞닿아있다. 

고작, 고작이라고 밖에 표현하지 못한다는 것이 퍽 슬프다. 조금 더 나은 인간이 되지 못한, 되지 않은 사실이 퍽 애닳다.


#3


며칠전인가, 핸드폰 일정에 그녀의 생일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삭제하는 것조차 귀찮은, 아니, 확인하는 것이 두려워 미뤄두기만 했는데, 오늘 낮 12시에 그녀의 생일이 화면에 가득차 요란한 알람을 울린다. 그렇게 강조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는 것인데, 이것을 설정해놓은 자식을 찾아서 흠씬 두들겨패주고 싶다. 그 녀석이 과거의 나라는 것이 안타깝지만.

고민했다. '생일 축하한다는 말 정도는 할 수 있지도 않을까?' 생일을 진심으로 챙기고 싶었던 과거의 나는 이미 역사가 되어버렸지만, 역사와 완전히 분리하는 것은 성공하지 못했기에 옅은 설레임의 감정이 주책맞게 알싸히 퍼졌다. 하지만 그녀는 분명히 말했다. "헤어진 사이에 다시 연락하고 그러는 건 좀 아니지 않을까?" 차분하지만, 단호하게. 이리도 생생히 기억이 나는데, 모른 척 하고 멍청한 짓을 저지를 수는 없는 일이다.

그깟 연락이 뭐 대수라 할 수도 있지만, 어쩌면 나는 그녀에게 있어 '착오'나 '오류'였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오래전부터 들었다. 그렇다. 그녀가 내게 '오만하다'고 표현했던, 겸손하지 못한 자의식 과잉이 분명하다. 하지만 일말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는 일이다. 사소한 연락에 그녀의 평온함에 아주 자그마한 생채기, 아니, 불결함이라도 묻는다면 옳지 않은 일이다.

이것 저것 다 따지다가 모든 것을 놓쳐버린 것에서, 나는 어떠한 생산적인 결론도 얻지 못했다. 무신론과 다신론 사이에서 부정합한 줄타기를 하는 나는, 그래왔듯 속으로 그녀의 생일을 축하했다. 그 외 기타 조잡하고 쓰잘 데 없는 기원들과 함께. 어둠이 짙게 내린 이 시간 그 행위를 되새겨보니, 찌질함으로 점칠된 수많은 에피소드 중에서도 제법 손가락에 꼽을만한 짓거리임이 분명하다.

그래도 축하하고 싶은 걸 낸들 어쩌라고. 태어나 스쳐지났다 하더라도 이렇게 값진 기억을 남겨준 것에 감사한 것을 어찌하냐고.

하여, 그것 밖에 안 되는 인간인 것을 어찌하리오.


#4

괴롭지 않다고 얘기하기엔 다소간 참작의 여지는 있다고 생각한다. 잊었다고 말 하기엔 거짓의 비율이 크다. 일상엔 여러모로 타격이 생겼고, 독자를 잃어버린 글쓰기 역시 생기가 부족하다. <요괴봉투>는 내년 하반기에나 다시 쓰게 되지 않을까 싶다. 어차피 망한 글인데 놓지는 못한다. 머리를 잘라볼까 했다. 그러나 또 그럴만한 결기도 없다. <사랑, 지나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닐 마음의 사치>라지만, 사치스러운 기억을 도저히 놓지 못하겠다. 

그래. 퍽 괴롭다. 꽤 힘들다. 썩 괜찮지 않다. 일상에 그녀가 다시 들어오는 머저리같은 상상을 때론 하기도 한다. 괴롭고 그리워하는 것이야 나의 자유아니겠는가. 그 정도야 허용될 만한 찌질함이지 않은가.

하지만 추잡함만을 야기할 그 모든 행동을 절제하고 있다는 것을 보면, 그나마 최소한의 양심은 있는 인간은 되는 듯하다. 



0.

다시 읽어보니, 그녀의 입장을 고려하는 구석이라곤 눈꼽만큼도 보이지 않는 이 글에서, 최소한의 양심을 찾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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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빵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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