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빈은 잘 쌩겼다. 하지만 우리 률형이 더 잘쌩겼다.

 

 

 

 

나왔다. 미니앨범 [답장]. 데뷔 25년 차. 자신이 걸어온 길에 시그니쳐가 철철 흘러넘쳐, 그 이름 석 자만 듣더라도 모든 이들이 "아! 그 양반!"이라며 그가 하는 예술이 어떤 색인지, 어떤 소리인지, 어떤 느낌인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공감할 수 있는 것은, 모든 예술인이 바라마지 않는 경지가 아닐까 싶다. 김동률은 수많은 브랜드 중에서도 압도적인 경향성을 가졌다. 경향성은 하나의 장르가 되고, 곧 정합성을 낳는다. 세대를 초월하는 률덕의 스펙트럼 속에서 '찌질한 2030 남자닝겐' 포지션에 담긴 본 률덕, 이번 미니앨범의 수록곡들과 같이 듣기 좋은 이전의 곡들을 정리하며 신입 률덕 영업을 뛰어본다. 누구 맘대로 분류하냐고? 엿장수 맘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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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머겅

 

 

1. 다시류 - <답장>

 

타이틀곡 <답장>은 김동률 이별 노래의 주된 감성인 '다시' 류로 분리하겠다. 일찍이 <기억의 습작>에서 '많은 날이 지나고 너의 마음 지쳐갈 때'라 노래했던 그 감성은, 25년의 세월 동안 조금씩 변화하며 '다시 돌아가 널 볼 수 있대도, 어쩌면 나는 그대로일지 몰라'로 되돌아왔다. '다시'라는 단어는 김동률 음악에서 매우 중요하다.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 - <다시 떠나보내다.> - <다시 시작해보자> 3연타로 이어지는 '다시' 시리즈에서 읽을 수 있듯, 만남과 이별, 후회와 재회가 거듭되는 한편의 모노드라마를 떠올리게 한다. 2011년, EP앨범의 타이틀곡이었던 <replay>에서 '너 머물렀던 그때로 거슬러, 멈춰있는 어리석은 내가 있지'의 가사는 '다시류' 음악을 한 줄 정리해준다. '닝겐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물론 각각의 곡이 그려내는 상황과 화자의 감성은 모두 제각각이지만, '다시류'는 '이별 이후의 치명적인 감정에 휘둘리지만, 그래도 삶은 이어나가는' 사람들에게 충분한 위로(라 쓰고 구여친에게 새벽 2시에 '자니?'라 보낼 수 있는 용기)를 건네준다. 사실 2집 앨범에 <편지>라는 곡이 있는데, 시종일관 g minor로 후려치는 곡이라 듣기에 쉽진 않다. 다만 노래에 깔린 감정이 얼마나 성숙해졌는지 비교하기에 참 좋다.

 

여기서 쬐끔 더 나가면, <그건 말야>나 <오래된 노래>, <그 노래>, 혹은 <오늘> 같은, 조금 더 묵은 감정을 이야기하는 노래가 등장한다. 회한이나 체념의 자세는 잃지 않지만, 완전히 마음속에서 지워지지 않을 그녀의 기억은 삶의 순간순간마다 깜빡이도 안 켜고 훅 들어온다. 스무 살, 서른 살, 마흔 살에도 기억은 쉬이 지워지지 않는다. <답장>은 '묵은 감정'으로 나아가기 이전, '되돌아가고 싶다.'라는 아주 약간의 희망이라도 품게 되는 감정의 한복판에 서 있는 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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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시절. 잘쌩겼다. 리얼루다가.

 

 

2. 쓰담류 - <Moonlight>

 

토이의 <나는 달>과 유사한 설정의 노래다. '당신이 해를 만나는 동안, 난 무엇도 할 수가 없답니다.' 달을 노래할 때 클리셰 같이 쓰이는 문장이지만, 일렁이는 선율에 얹으니 이대로 접싯물에 코 박고 코 잘 수 있을 것만 같은 노래가 되었다. ASMR와 수면다큐가 유튜브에서 입소문을 타는 시대, 고된 하루에 위로를 보내주는 '쓰담류' 음악은 여전히 가치 있다. 선율의 흐름과 곡의 분위기는 <크리스마스잖아요>나 <한 겨울밤의 꿈>과 닮았고, 곡의 메시지는 <괜찮아>나 지난 앨범의 <동행>과 궤가 닿아있다. 얄궂게도 위로는 "잘 될 거야"란 말을 들을 때 보다, 다른 이야기를 들을 때 뜬금없이 뚝 떨어지듯 내려올 때가 있다. 그런 점에서, 포근한 선율로 불쑥 솟구치는 외로움을 지우는 노래든, '괜찮아. 우리 같이 해보자.'라는 말을 건네는 노래든, 모로 가도 위로로만 가면 그만이라는 점에서 쓰담류로 분류하겠다. 특히, 언제든지 돌아갈 수 있는 존재를 오래도록 자처했던 경험을 통해보자면, 그런 존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된다 카더라.

 

사실 쓰담쓰담 같은 거 익숙하지 않아서 분량이 짧다. 아참, 이미 <자장가>란 노래가 있는데, 이 노랜 정말로 아기에게 자장자장 하는 노래라(...) 뭐 어쨌든 이 노래도 쓰담류의 일종이긴 하다. 데헷

 

 

3. 끝장류 - <사랑한다 말해도> (feat. 갓소라)

 

언제나 이별은 도래하기 마련이다. 예감하든 예감하지 못했든, 언제나 다가올 수밖에 없다. 단순히 예감이 아닌, 사랑이 끝장나고 있음을 온몸으로 느끼는 기간도 때론 있다. 이때를 담은 김동률의 노래들을 '끝장류'로 분리해본다. 

 

먼저, 4집 마지막 곡 <고별>이 있다. 우주로 떠나버릴 듯한 사운드에 무게감 있는 가사로 끝장남을 야무지게 노래하는 곡이다. '그 어떤 목숨에도 끝이 있는 법 / 길 위를 구르는 저 잎새들처럼'과 '우리의 만남에도 생명이 있어 / 어느새 조용히 숨 거두려 하네' 라는 가사들이 언뜻 들으면 뭔소리하나 싶겠지만, 꼭꼭 씹듯 들으면 우주적인 사운드가 끝을 향해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준다. 앨범의 마지막 곡으로 담기에 교과서 같은 곡이랄까. 또 5집 수록곡 <뒷모습>이 있다. 담백하면서도 기본에 충실한 탱고 선율에 운율감을 매우 잘 살린 곡이다. '사랑은 이미 우리를 떠나가고 있었네, 당신이 나의 곁에서 떠나버리기 전부터'이란 가사는, <사랑한다 말해도>의 '사랑'과 유사한 놈이다. 몹쓸 놈 이란 얘기다. 두 곡이 한 명의 당혹감, 체념, 각오, 후회를 담는다면, <사랑한다 말해도>는 갓소라의 음색이 더해지며 아름답게 끝장나는 노래가 되었다.

 

또한, 이 곡은 당연히 김동률이 만들고 이소라가 부른 <사랑이 아니라 말하지 말아요>를 다시 듣게 한다. 두 곡 다 '사랑'이란 단어가 지닌 사전적 의미를 해체하는 곡이다. 이런 사랑타령이라면 아무리 해도 지겹지 않다. 4집 앨범 수록곡, <사랑하지 않으니까요>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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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는 모습도 잘 쌩긴 우리 률형..

 

4. 하오류 - <연극>

 

사실 <연극>이란 곡은 김동률의 디스코그라피에서 독특한 곡이다. 언뜻 들어도 고상지의 존재감이 뿜뿜 쏟아져 나오는 곡이라서일까. 그래도 완성도는 훌륭해서 귀가 은혜로워지는 기분이다. 그래도 영업은 해야 하니까, <연극>의 마지막 가사 '이봐요 당신 이미 오래전 / 연극은 벌써 끝이 났다오'를 어거지로 끄집어내 '하오류'로 묶어본다. 원래 덕질 영업은 철판을 깔아야 한다카더라.

 

'하오체'의 계보를 잇는 명곡들이 있다. <그림자>, <동반자>, <잔향>. 하오체로 쓰였으며, 김동률 최고의 곡으로 꼽을 만하다. 팁을 좀 드리자면, 김동률의 보컬은 과거보다 현재가 더 나은 것 같다. 때문에 라이브 앨범에 수록된 <그림자>와 <동반자>가 듣기에 훨씬 좋다. 아님 말고 좌우간, '하오류'의 음악들은 '다시류'에서 노래했던 후회와 체념의 감정이 훨씬 더 농익고 푹 익어 고이 우려낸 듯한 곡들로 정의해본다. 김동률 본인이 밝혔듯, 김동률이 하오체를 선호해서가 아닌, 곡의 무게가 하오체를 부르는 격이라 그 안에 담긴 감정에 더 집중할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2집의 <희망>이나 3집의 <귀향>도 하오류로 분류해 본다. 재밌는 것은, 20대 시절엔 하오체로 곡을 썼었는데, 정작 나이 먹으니 하오체가 잘 안 나온다. 

 

이 중에서도 특히 <동반자>는 윤도현의 러브레터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곡으로 밝혔다. 워낙 깨알 같은 에피소드를 듣기 어려운 사람이라 러브레터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동반자>는 본인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담겨있으며, 상대방의 양해를 얻고 쓴 가사라 한다. 정재형과 국밥집에서 국밥 먹다가 '다시는 이런 가사를 쓸 수 없을 것 같다.'며 <동반자>의 가사를 보여줬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아무튼, 이 세 곡은 김동률이란 아티스트가 표현할 수 있는 가장 깊은 감정을 그려내고 있다.  대중음악에서 쉬이 들을 수 없는 편곡과 가사를 가진 곡들인데, 김동률의 최근 앨범엔 하오체 곡이 없어 몹시 아쉽다.  현기증나니까 다음 앨범엔 꼭 하오체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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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률형은 피아노위에 있을 때 제일 잘쌩겼다

 

5. 뜬금류 - <Contact>

 

덕질에 심취하다 보면 고정관념에 젖게 된다. '김동률이니까 당연히 이런 곡이겠지?'라는 생각을 갖기 마련이다. 그러다 보니 앨범마다 가장 이질적인 느낌을 주는 노래들이 있다. '이것도 김동률' 류의 노래들을 뜬금류로 분류해본다.

 

박새별과 함께 부른 <새로운 시작>의 분위기와 흡사한 곡, 동명의 영화에서 영감을 얻었을 것으로 심히 추측되는 <Contact>는, 여기저기서 힘을 준 편곡으로 듣는 이의 정신을 무한한 공간 저 너머로 보낸다. 가사는 안정적인데 노래는 혼란하다. 펫 메시니 아재의 전조로 꽉 찬 곡을 듣는 듯한 느낌이다. 6집에선 <퍼즐>, EP앨범의 <크리스마스 선물>, 3집의 <구애가>, 그리고 본인이 트로트 풍으로 걸쭉하게 편곡해 부른 2집의 <님> 같은 곡들은 각각의 분위기나 메시지가 모두 다르지만, 기존의 김동률이 해오던 노선에서 약간 삐딱선을 탄 듯한 노래다. 이질감을 주는 곡 중에서 단연 탑은, 마이언트메리 정순용과 함께 부른 5집의 <Jump>가 아닐까 싶다. 저어기 불란서 빠리의 샹젤리제 거리 카페에서 쓰디쓴 에소를 홀짝이며 열심히 악보를 들여다볼 것만 같은 김동률도 '우리네랑 같은 사람이구나'라는 새삼스러운 생각을 들게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물론 <Contact>는 이런 곡들보다 그 이질감이 확 낮다. 아무래도 수록곡이 5곡밖에 안 되는 미니앨범이라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김동률답지 않게 수록곡이 적은데, 날이 갈수록 달라지는 음악 시장에 대한 고민이 얼핏 느껴진다. 사실 싱글 몇 개 던져도 뭐라 할 사람 없는데, 장인처럼 꿋꿋이 '앨범'의 형태 고집하는 바보스러움이 보인다. 수록곡은 적지만, 앨범이기에 새로운 시도도 해보고 싶은 마음이 <Contact>의 편곡에 힘이 실린 원동력이 아닐까. 아님 말고 222

 

 

6. 오글류

 

천 번 만 번 다행스럽게도 이번 앨범엔 오글류 곡이 없다. <아이처럼>이나 <욕심쟁이>, 그리고 결혼식 축가로 유명한 <감사>, 지난 앨범의 <내 사람>같은 곡이 그렇다. 이런 노래는 그만하시고 우울우울열매를 만 개쯤 절인듯한 곡만 써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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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딩은 절대 입지 마셨으면 해요 형 (왼쪽은 정재형)

 

 

 

뜬금없는 얘기인데, JTBC의 <비긴어게인>을 즐겨봤었다. 각자의 위치에서 최정점에 선 뮤지션들이 버스킹을 떠나는 이야기도 흥미로웠지만, 세 사람이 음악을 대하는 태도가 더 눈 여겨졌다. 윤도현에게선 정말로 음악을 즐기면서 하는 모습을, 이소라에게선 음악을 마주할 때 뮤지션이 가져야 하는 자세를, 유희열에게선 모든 사람들을 잘 버무려서 좋은 결과물을 내려는 노력이 보였다. 

 

김동률의 음악을 들을 때마다 이소라의 모습이 떠오른다. 두 사람이 곡 작업을 해서가 아니라, 프로불편러의 자세로 깐깐하게 음악을 대하지만, 그 모든 것이 청자를 향해 있다는 진심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콘서트 영상에서 뮤직팜 이사님이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김동률을 대하기 어려웠다고 토로했을까. 물론 그것이 꼭 정답이란 법은 없다. 윤종신처럼 뻔뻔해도, 김동률처럼 깐깐해도, 유희열처럼 능글맞아도 결국 창작자로서 고민과 진심이 담겨 있다면 반드시 청자도 선율과 가사 속에서 그것을 느낄 수 있다.

 

바로 그, 섬세한 고집스러움이 오매불망 김동률의 신보를 기다리게 한다. 한 아티스트가 25년을 버텨오기란 참 쉽지 않다. 단순히 재능러으로만 보기엔, 미니앨범을 내놓는데 들인 1년의 시간이 부정하고 있다. 전성기가 어디인지 쉬이 꼽을 수 없이 앨범마다 각각의 가치를 뽐내는 그에게, 여러모로 워너비인 나는 그저 감지덕지할 뿐이다. 앞으로 몇 장의 앨범이 더 나올진 모르겠지만, 방송 활동 따위 앞으로도 안 하셔도 되니 제발 음악 좀 많이 쏟아내 주셨으면 한다. 조금 덜 깐깐해도 되니까요 박리다매좀

 

김동률 페이스북에 신보 발표를 앞두고 이런 글이 올라왔다. 이곳으로 모인 률덕들, 숨은 팬 여기 있다고 손들어보자.

 

마지막으로, 조금 뒤에 설레는 맘으로 음악을 들어 주실 곳곳의 숨은 팬 여러분들. 

길거리에서 알아봐 주는 사람들이 없어도, 이제 생일 선물이나 초콜릿 선물 같은 건 들어오지 않아도, 조용히 각자의 삶 속에서 제 음악을 듣고 계신 분들이 많다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모쪼록 제 음악이 추운 겨울 조금이나마 위로와 힘이 되었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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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하고 다니니 누가 알아봅니까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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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빵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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