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찌하여 내가 이 곳까지 이르게 된 것인지 모르겠다. 뾰족한 나무들이 한 데 뭉쳐 뾰족한 산을 이루고, 그 중턱에 선뜻 뾰족하게 자리한 산장의 입구에 다다른 지금, 지금까지의 행보에 어떤 원인이 깔려있는지 되새기지 아니 할 수 없었다. 산행은 물론이요, 익숙치 않는 잠자리와 낯선 사람들, 세 요소 모두 내가 되도록이면 멀리하며 살아왔던 것들인데, 그 세 요소가 모두 포함된 이 곳을 홀로 오른 까닭이 위화감을 불러왔다.

말이 산장이지, 산장을 운영하는 가족들과 분리되지도 않은 건물에 방 하나를 얻어 지내는 형태였다. 요즘 세상에 인터넷 홈페이지나 카페도 운영하지 않는 숙박업체를 쉽게 신뢰할 수 없겠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며칠동안 집요하게 이 곳을 찾아 헤메었다. 아니, 집요하게 찾았다는 말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집요하게 나를 숨겨가며 찾아야 했기에, 여러 애로사항이 발생했다고 하는 것이 옳은 표현이다.

철저히 단골고객과 단골고객들의 입소문으로만 운영한다는 산장의 주인은, "어떤 분께 소개 받으셨어요?"란 질문을 던져왔다. 나는 그녀의 회사인 M업체를 댔다. "M업체랑 프로젝트하다가 그 분들이 회사 MT로 거기서 지내셨는데, 좋았다는 얘기를 들어서요."

"...그렇군요?"

주인은 이상한 침묵과 이상한 물음표를 붙이며 말을 받았다. 딱히 손님이 반가워하지 기색이 역력했는데, 도착해서보니 이렇게 분리되지 않은 공간에서 타인과 생활한다면, 아무리 산장주인이라도 썩 반갑고 좋은 일만은 아닐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손님은 반가우면서도 귀찮은 존재다.

하지만 일련의 행동들에 기저에 무언가 확신을 갖고 행동한 것은 아니었다. 안개를 헤쳐나가며 산을 오르던 바로 직전까지의 나는, 무언가의 뒤꽁무니는 쫓는 심정으로 거슬러왔다. 불안한 정신상태는 평소와는 다른 이상행동을 유발한다. 고작화된 패턴과는 다른 반응이 튀어나오는 것이다. 싫어하는 3요소를 모두 감수하고 이 곳에 오른 것이, 지금의 나와 평소의 나는 그녀를 처음 만날 때와 헤어지던 날의 나 만큼이나 꽤 긴 거리를 두고 멀어져있었다.

그 모든 '나'들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인지 모르겠지만.



#2


먼저, 약간의 고해성사를 해야겠다. 이 산장을 알게 된 경위에 대한 이야기다. 

지난 여름이 가기전에 그녀와 이별한 것은 벌써 반 년이 다 되어가는 이야기다. "어쩐지 너와 가을을 함께 할 수 없을 것만 같아."라며 두려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던 그녀는, 본인이 한 말을 지키면서 완벽한 합리주의자의 면모를 다시금 보여줬다. 나라는 균열이 그녀를 헤집다가 다시 틈을 메우며 완벽한 안녕-. 우리의 이별은 그토록 평온하고 제법 깔끔했다. 아마 이별의 본보기로 삼아도 좋을 것 같다. 

물론 어디까지나 표면적으로 그렇다.

함께 밤을 지새우던 어느 날, 꽤 격렬한 잠을 자는 그녀를 훔쳐보던 나는, 문득 못된 생각이 샘솟았다. 그녀에게 '꽤 괜찮은 인간'임을 어필하기 위해 여러모로 노력하던 나는, 들인 수고가 그녀에게 닿기에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꽤나 좌절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어쩌면 이 모든 것들이 전지적 그녀 시점에선 유치하고 촌스러운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염려가 생각의 지평을 까마득히 뒤덮고 있었다. 나는 전전긍긍했고, 그녀는 점점실망했다.

새벽이 깊어가던 그 시간, 찰나의 순간을 비집고 들어온 못된 생각의 속삭임은 이러했다. 

'만약 그녀랑 헤어지면 아마 그녀는 다시는 너와 연락을 하지 않을거야. 너도 알고 있잖아?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아마 그녀는 블로그도 없애고 번호도 바꿀거야. 그러기 전에 그녀의 핸드폰을 해킹해놓는 것이 어때?'

강하게 저항했다. 그러나,

'생각해봐. 분명 너는 헤어진 후에 늘 그래왔듯, 지난 사랑에 괴로워하고 그리워하게 될 거야. 게다가, 그녀는 지난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특별함을 지녔잖아? 더 힘들어질지도 모른다고. 완벽하게 궁금해하지 않고 찾지도 않을 수 있다고 다짐할 수 있어?'

다짐할 수 없었다. 물론 그 날, 그녀에겐 "걱정하지마. 찌질한 짓은 이제 하지 않을거야" 라며 웃으며 말했으나, 다짐하는 것과는 또다른 문제였다. 헤어진 후에 나의 모습은, VR 영상을 볼 때처럼 지나치게 생생했다. 어쩌면 이런 게 미래를 보는 능력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생생했다.

결국, 나는 자는 그녀의 핸드폰에 해킹 툴을 하나 심어놨다. 일주일에도 몇번이나 클리너 앱을 돌리는 그녀의 결벽증에도 해킹 툴은 잘 살아남았다. 아무래도 파일명을 '치코리타' 어쩌구로 해놓았던 덕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고 해서 매일 그녀의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세상이 끝난 것처럼 이별을 겪던 중2병 시절은 이미 겪고 난 터였다. 나는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나름대로 기준을 다져가며 보냈다. 운전하다가, 글을 쓰다가, 일을 하다가, 걸어가다가, 노래를 듣다가 스며드는 그녀에 대한 기억에도, 그녀에게 말했던 "찌질한 짓은 하지 않을거야"란 약속은 지켜가며 지냈다.

그럼에도, 회색 빗물이 고요를 삼켜버린 날이나, 완전히 차지 않은 달이 별무리를 이끌고 있는 밤은, 도저히 견디기가 힘들었다. 그런 날에만 들여다 봤다. 이런 야무지지 않은 다짐이 결국 그녀와의 거리를 벌어지게 만든 제1의 원인이었지만, '다시 돌아가/네 앞에 선대도/어쩌면 나는/ 그대로일지 몰라.'라는 가사말을 가진 요즘 자주 듣는 노래처럼 나는 그대로인 것이다. 만약 운이 좋아 다시 만난다 하더라도, 똑같은 결말만이 머지 않은 미래에 도래하리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안다.'는 것에 대한 참 뜻이 무엇인지에 대해선 이견의 여지가 있다고 본다.

일주일 전, 소복히 쌓인 눈 속에서 한걸음도 내딛지 않는 방 안에서, 나는 눈 내리는 배경에 몽상을 그리고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찰랑이는 흑단발과 심연을 담은 눈동자로 날 응시하고 있었다. 몽상의 끝에서 결국 그녀의 핸드폰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녀는, 누군가와 카톡을 주고 받고 있었다.

회사의 동료인 듯한 남자와 그녀는 여행 사진을 주고 받고 있었다. 이 산장을 알게 된 경위는 바로 여기에서였다. 붉은 색의 작은 등빛이 간신히 어둠과 다투고 있는 방, 울퉁불퉁한 나무기둥들과 잘 깎은 나무로 만든 침대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와 그는 즐거운 표정으로 순간에 남아있었다. 사진이 말하는 바는 행복과 맥이 닿아 있었다. 그녀는, 날 위해 자르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결국 그녀를 좋아한다고 말하게 만든 흑단발이 아니었다. 허리깨까지 내려오던 장발을 싹둑 자른 그녀였으나, 벌써 그녀의 머리는 어깨선을 지나고 있었다.

그것을 보자, 혼란함을 가둬놓은 둑에 약간의 금이 가기 시작했다. 단 한 순간도 나의 것이라는 생각 따위는 가지지 않았다고 자신있게(내가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정말 얼마 되지 않는다.) 말할 수 있으나, 그럼에도 길어진 머리는 나의 세계와 완전히 끊어졌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거기서 멈췄어야 했으나, 모든 안 좋은 일은 멈추지 않음에서 벌어지는 법이다. 다음에 이어진 대화 속에서 그녀가 이름모를 남자에게 건넨 말들은 가슴이 두근대고 흥미가 진진한 것들이었다.

"너를 만나서 참 다행이야. 네 덕에 머리도 기를 수 있고."

"너 같은 사람은 내 인생에서 처음이야. 고마워."

나는, 그녀에게서 영영 그런 말들을 들을 수 없으리라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랬다. 그러나 그녀는, 태연히도, 명징하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그녀를 처음 볼 때의 나와 헤어질 때의 나 사이의 거리보다, 나와 헤어질 때의 그녀와 지금의 그녀의 거리가 태양계를 아득히 넘을 만큼 멀게 느껴졌다. 언뜻 훔쳐본 것만으로도 둘 사이엔 잔망스러운 것들로는 전혀, 아니, 행여나 감당하기 힘든 무거운 사건에도 흐트러짐이 없을 견고함이 굳어져 있었다. 나는 그 남자를 전혀 알지 못하나, 그가 그녀에게 건네는 말들은 내가 전혀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채우며 함께할 수 있다는 것, 다름 사이에서도 온전한 균형을 유지하는 것.

그녀가 말했던 이상이면서, 나는 결코 다다르지 못했던 환상이 거기에 있었다.



#3


이 역시 진심이지만, 나는 정말로 그녀가 다른 좋은 사람을 만나 잘 지내기를 바랬다. 이 얼마나 진부하고도 주제넘은 생각이냐 하겠지만, 나름의 선의이면서 동시에 불온전한 나의 행위에 대한 합리화였다. 어떤 식으로든 실패를 상쇄하기 위해, 혹은, 아주 자그마한 자욱이라도 그녀에게 남겨지기 위해, 애써 친 몸부림이었다. '제발 괴롭고 힘들어졌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없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비율로 따지지만 2:8 정도로 선의가 앞섰다. 

'제발 나와 함께 한 시간이 어떠한 의미도 남지 않는 무익한 시간이 아니게 되길'

사실은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솔직하겠다. 이 저열한 이기심이란, 

그러나 제법 바라마지 않았던 현실을 목도하는 순간, 내 마음의 엘리베이터는 갑자기 전력이 끊어져 지하 30층까지 자유낙하하는 기분을 느꼈다. 모공이 송연해지고 머리끝이 쭈뼛서는 파리함에 흥미진진했던 것들은 무너지는 존재를 위해 자리를 비워주었다. 심연을 담고 있던 눈동자에서 피어나는 생명의 아름다움은, 그녀를 닮은 색이 이젠 보라가 아닌, 샛노랑과 새빨강 사이 어딘가로 보였다.


'그것'을 본 뒤로부터의 나의 일상은, 산장을 찾아야겠다는 마음 뿐이었다. 일상을 영위했던 균형감은 무너지고 오직 그 산장, 아니, 그들이 웃음꽃을 피우며 대화를 나눴던 그 방을 찾아가야겠다는 마음만이 남아 하루를 무너뜨렸다. 최대한의 노력을 다해 스스로 그 정보를 지우려한 산장 때문에 다소 시간이 걸렸고, 갈증은 더해갔다.

비로소 이곳에 도래한 것이다.


"어느 방을 쓰시겠어요?"

수염이 송송 난 아저씨의 물음에 나는 잠시 당황했다. 얇은 복도가 가로지르는 내 눈 앞에서 방 세개가 나란히 있었다. 나는 사진 속 배경이 어떤 방인지 전혀 몰랐다. 

"음..."

아저씨는 갈등하는 나를 보며 다소 찡그렸다. '귀찮으니까 빨리 고르라고!'

"방이 모두 똑같은가요?"

"아니요. 일단 오른쪽 방은 장기 투숙객이 계시고, 맨 왼쪽 방은 원래 우리 아이들 자는 방이라 디지몬 인형도 있고 장난감도 있어서 정신이 좀 사납습니다."

명백하게 왼쪽 방을 고르지 말라는 압박이나 다름없었다. 처음부터 답은 가운데 방으로 정해져있었다. 그가 얼굴을 찡그린 까닭을 이해했다. 답은 정해져있으니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았으니. 그러나 나는 고민했다. 디지몬을 미친듯이 좋아하는 그녀는 분명 왼쪽 방을 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저씨가 내게 했던 말과 똑같은 말을 했다면? 타인에게 불편을 끼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그녀라면 당연히 가운데 방을 택했을 수도 있다. 나 역시 왼쪽 방은 안 된다는 주인장의 말을 듣고 기어코 왼쪽 방을 택하는 타입은 아니었으나, 포켓몬 인형은 선택지의 확률을 확 높여주었다.

하지만 주인은 한 마디를 더 붙이며, 선택지를 고민할 자유를 박탈했다.

"아, 왼쪽 방은 그냥 일반 방이라서 조명이 별론데, 가운데 방은 손님용으로 만든 거라 그래도 조명이 꽤 괜찮습니다."

절대로 방을 열어 보여줄 기미는 보이지 않으면서 설명으로 일관하는 태도의 주인장은 설명을 덧붙였고, 나는 사진 속에 가득한 붉은 빛의 조명을 떠올렸다. 어둠을 간신히, 간신히 이겨내고 있는 그 붉은 빛. 가운데 방이 확실했다. 

문풍지가 두꺼운 방문이 힘껏 삐걱대며 열렸다.

문을 열고 들어오자, 깊은 산 속의 고요가 바람과 함께 한없이 밀려들어왔다. 문을 닫자, 바람은 도로 나갔는데 고요만 여전히 남아있었다. 나는 방 한 가운데 우두커니 서서 그림을 그렸다. 그녀와 그가 마주 앉아 말을 나누던 바닥, 그녀와 그가 아침 안개가 더럭마다 묻어있는 풍광을 구경했을 문턱, 그리고, 그녀와 그가 사랑을 나누고 또 확인하며 다시 피워냈을 작고 하얀 침대를 응시했다. 망막에는 잠시 침대가 불에 타는 잔상이 맺혔다가 사라졌다. 잔상에는 휘발유 통을 들고 있는 나의 뒷모습도 잠시 나타났었다.

그러나 현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째깍대는 초침소리만 아득하게 남아있었다.


화려한 조명과 웅장한 음악, 그리고 수많은 배우들의 역동적인 연기가 펼쳐진 뮤지컬이 끝난 뒤의 무대는 사람을 시니컬하게 만든다. 모든 게 한바탕 꿈같이 느껴지며 삼라만상이 사실은 허상같은 것 아니었나 회의하게 한다. 새로운 무대를 준비하는 와중에도, 뒤돌아보는 것을 멈추지 않는 것이 인간, 아니다. 나의 습성이다.

그들의 사랑이 멀찌감치 떠난 방을 찾아와 뭘 어쩌겠단거였지.

그렇다고 갓 대금을 지불한 지금, "이제 가볼게요."라고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떠나는 일도 영 자연스럽지 않았다. 이 곳에 올라오는 일 역시 만만치 않았다. 한편으로 이 곳에서 하룻밤을 지내는 것도 영 내키지가 않았다. 타인의 사랑은 언제나 불편하고 고약스럽다. 침대에 조심스레 누워봤으나, 고약스러운 마음과는 달리 불편해지는 바짓자락에서 최하의 인간이 여기있음을 고하고 있었다. 나는 불현듯 몸을 움직여 바닥으로 향했다. 이곳도 썩 편치는 않았지만, 침대에서 자는 것 보다야 훨씬 낫겠지.

잠시 뒤, 문이 열리며 산장 주인이 들어왔다.

"어떠세요? 맘에 드세요?"

"네. 깔끔하고 좋네요."

이부자리와 여러 용품들을 갖고 들어온 그에게서 여전히 귀찮은 태도가 역력했지만, 그래도 할 껀 다 해야한다는 의무감도 동시에 보였다. 그는 이토록 귀찮아하면서 왜 산장을 운영하는 것일까. 궁금했다.

"저기, 사장님."

"예?"

"왜 인터넷으로 홍보를 안 하시는 건가요?"

자주 받는 질문인듯, 그는 식상함에 물든 표정으로 대답했다.

"사람이 많은 게 싫어서요."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의외다. 사람이 싫은 데 산장을 운영하는 이 아이러니, "나는 널 갖고 싶지만, 갖고 싶지 않아."라 말하던 기시감이 흠뻑 젖어들었다. 

"그럼 다른 일도 같이 하시나봐요?"

"아 예, 뭐 산이니까 약초캐고 뭐 그런 일 하지요."

"산삼도 캐고 그러신가요?"

"예 뭐."

점점 대답이 짧아지는 걸 보니 슬슬 대화를 알아서 끊어줘야 하는 타이밍임을 알았지만, 첩첩산중, 인간이라곤 눈 앞에 서 있는 수염 송송난 아저씨 밖에 없어서인지, 자꾸만 말을 붙이게 되었다. 

"그럼 아이들도 같이 사는 건가요?"

"예. 방학이라 어디 갔어요."

"아~ 어ㄷ.."

"그럼,편히쉬시고, 저녁식사는6시인데그때나오시면됩니다. 주변에산밖에없는데, 오늘날씨가영심상치않으니너무멀리가지는마세요."

더이상은 못 참겠는지, 주인은 '아이들은 어디갔나요?'란 내 질문을 매몰차게 끊고, 꼭 해야하는 말을 순식간에 내뱉고 홀연히 사라졌다. 모든 일이 순식간이라 어쩌면 산 속에서 도사님을 만났는지 착각할 만도 했다. 

주책이 아닐 수 없었다. 싫다는 사람 붙잡고 뭔 짓이었던가. 민폐도 적당해야 하거늘.


안개가 자욱한 숲으로 발을 옮겼다. 방 안에 누워있어봐야, 순백색의 침대가 자꾸만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 영 불편했다. 시골집 냄새라도 가득하면 위아래가 모두 불편한 상황을 이질감으로 덮어버릴텐데, 모텔을 들어설 때 나는 락스 냄새 비슷한 것이 방 안에 가득했다. '모텔 냄새'라는 것을 인식하자마자, 수많은 사랑이 피어나고 사라졌을 모텔 침대에 대한 거부감은 단 한 번도 없었던 것이 떠올랐다. 이름 모를 타인들이야 어떤 사랑을 나누든 알 바가 아니다. 그러나 그녀의 몸짓과 표정은 여전히 내 뇌 속에서 생생하다. 문제는 저 순백색의 침대에 그녀를 그려넣고 자연스레 이름모를 다른 남자 역시도 그려진다는 점이다. 그 둘의 몸짓을, 문에 구멍을 뚫어 훔쳐보는 나까지.

고개를 저었다. 짙은 안개는 수미터 앞도 가늠할 수 없게끔 세계를 축소시켰다. 좁은 시야가 불편해 나왔더니, 자그마한 물 알갱이들이 이젠 망상의 나래를 이루는 원자가 되어준다. 산세는 험한 편이었지만 주인 아저씨가 자주 다니는 길인지, 등산로는 제법 인간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었다. 그래도 망상과 함께 걷다보면 영원한 망상의 세계로 훌쩍 넘어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약간의 긴장감이야 말로 일상의 균형을 유지하는데 가장 필요한 것 아니던가. 그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똑같이 적용됐다.

그러나 좁은 등산로도, 궃은 날씨도 망상만큼은 막지 못했다. 죄의식에 젖었던 훔쳐보기는 어느새 스릴넘치는 포르노 시청이 되어버렸다. 나의 뇌가 이토록 형형색색하며 스무스하게 전개되는 훌륭한 상상을 자아낼 수 있었는지 놀라웠다. 괜찮아. 내 모든 죄악은 안개가 가려줄테야. 망상과 착각은 자유라는 오랜 말도 있잖아. 걸음이 빨라지고, 심박수가 올라가며, 눈엔 힘이 들어갔다. 몇시간이고, 몇시간이고 더 표류할 수 있음에 즐거웠다. 마치 일찌감치 같은 배게를 배고 누우며, 몇시간이고 더 함께 있을 수 있어 즐거워하던 그 때처럼. 그 안락함과 배려에 너무 빨리도 젖어버려, 그녀가 원한 최소한의 약속까지도 수면 부족을 핑계로 어영부영 넘어가려 하던, 나태함으로 점칠된 본연의 모습은 아마 오늘 내앤 나오지 않을 것이다. 고작 오늘이므로, 고작 오늘이니까.

"돌아갑시다."

정신이 들었다. 눈 앞엔 산장 주인이 서 있었다.

"너무 멀리 가지는 마시라고 분명히 말씀드렸는데..."

나는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딴 생각을 좀 하다보니."

그는 시야를 돌리며, 말을 붙였다.

"예. 뭐. 갑시다."

그가 시야를 돌린 이유가 바지의 모양새를 부자연스럽게 만든 그 '몹쓸 놈' 때문은 아니기를 바랬다. 아니, 촛불에 후 바람을 불어 꺼버리듯, 망상을 강제 종료시킨 그가 바로 몹쓸 놈인지도 모르겠다. 두 몹쓸 놈에 대한 원망스러움과 함께, 어색함을 애써 감추고 돌아왔다.

방으로 돌아와마자, 난 순백색의 침대에 누워 자위를 했다. 순백색의 침대는 지나치게 더러워졌고, 나는 마음 편히 바닥에 누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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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빵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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