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떤 노래가 있었다. 

그가 그녀에게 그 노래를 들려주었을 때, 며칠 뒤 그는 말했다.

"퇴근하는 지하철에서 내내 이 노래만 들었어"

그녀는, 사랑한다는 말대신, 그렇게 마음을 전하는 사람이었다.

그와 그녀는, 갓 포장된 아스팔트 도로를 양 옆으로 가로지르는 희뿌연 바다를 바라보며, 그 노래에 함께 취했다. 함께 돌 수 있다고. 영원히 함께 할 수 있다고. 서로 간에 벌어지는 힘의 차이, 살아온 궤적이 만든 세상의 차이는, 어려운 조율 과정을 거치기만 하면 언젠가 안정화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갓 사랑에 빠진 모든 청춘이 하는 착각처럼, 공전하는 것은 서서히 파멸하고 있음을 간과하는 것처럼, 조율과정의 그 지난함을 과소 평가했던 그는 한 음조차 놓치지 않겠다며 함께 듣던 그 노래가 주례 선생의 백년가약 인증보다 훨씬 더 굳건한 약속이라 생각했다. 그는 그에 대해 너무나 잘 알았다. 그가 좋아하는 모든 음악을 4분 동안 모조리 쓸어담은 듯한 선율을 들으며, 그는 결코 이 노래를 트랙리스트에서 지우는 일은 없을 것이라 여겼다.

멀리서 보기엔 그저 두 행성이 자신의 길 따라 돌고 있을 뿐이나, 서로가 발을 딛고 있는 세계는 삶과 죽음의 거리만큼이나 다르다. 발을 닿지 않았을 때는 오직 반짝임만이 날에 따라 수줍음을 가르고 비출 뿐이었으나, 발을 딛고 난 뒤의 저 곳은 온갖 상처와 흉터와 공포스러운 환경이 펼쳐져 있다. 그는 그것을 몰랐다. 알았다고 자신했으나, 알았음을 증명하기엔 그는 무력한 모습만을 보였다.

그가 몰랐던 것은 하나 더 있다. 그 노래를 먼저 듣지 않게 된 쪽은 그가 아니라, 그녀일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에게는 공포였던 그녀의 강력한 중력은, 사실 그보다 그녀 자신에게 더 힘든 것이었음을.


#2

안개인지 먼지인지 모를 뿌연 것들이 모든 산봉우리를 숨기고 있던 날, 도로를 달리던 그는 라디오에서 어떤 낯선 노래를 듣게 되었다.

그 노래였다.

그의 세계 안에서 그 노래는 완전히 사라진 것에 가까웠다. 그 가수의 이름자만 보아도 귀를 막았고, 한 음절의 목소리만 들어도 눈을 감았다. 감각을 차단해 나가는 연습을 통해 무덤이 되는 법을 연습했다. 시간이 지나자 그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이제, 어지간한 일이 닥쳐와도 결코 수렁으로 빨려 들어가지 않아"

자기 안에 있는 커다란 구멍을 메우기 위해 하루도 쉬지 않고 부어놓은 콘크리트의 단단함에 자신이 있었다. 백 년 정도 지나면야 물론 여기저기 균열이 가겠지만, 적어도 죽는 날까지 이 콘크리트에 금이 갈 일은 없을 것이라고. 모든 시간이 흐르는 동안에도 견고하게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고. 

그의 착각은 계속된 셈이었다. 그 견고해보이던 철옹성은 단 2초의 시간 동안 종잇장처럼 무너져 내렸고, 속절없이 뛰쳐 나오는 무력했던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자신도 모르게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흥얼거리면서 그는 또렷해진 기억에 황망해졌다. 마침, 한적했던 쉼터에 정차한 그는, 자신과 자신과 자신이 내뿜는 비아냥의 소리들을 통제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그래요. 지나고 보니까 알겠어요. 당신도 참 힘들었겠네요."

죽음 이후에 건네는 인사보다 더 무효한 읊조림을 마치자 곡이 끝났고, 그는 다시 악셀을 밟았다. 속도 계기판이 한 칸 올라올때마다 뛰쳐나오는 자신들이, 불쾌한 손짓으로 눌려진 정지버튼 탓에 침묵하는 라디오를 대신해, 영원함이란 것이 무엇인지 희미하게 알게 했던 과거의 몇몇 노래들을 하나씩 들려주었다. 어떤 곡은 세상의 종말처럼 슬펐고, 어떤 곡은 생명의 탄생처럼 찬란했으며, 어떤 곡은 세상의 모든 설탕을 녹여만든 것처럼 달콤했다. 

참으로 많은 노래들이, 그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아득히 넘어선 수의 노래들이, 그의 귓 속에서 거미집을 짓고 있었다.


#3

그는 참으로 서툰 방법으로, 그에게는 가장 세련된 것이라 믿고 있던 방법으로, 사랑을 고했다. 사랑한다고. 당신을 위해서라면 나의 모든 것들을 버릴 수도 있고, 바꿀 수도 있다고. 당신에게 사랑받는 날을 꿈꾸며, 그 날이 완전히 오게 되기까지 한 순간도 멈추지 않겠다고.

그녀는, 모든 것에 냉소했던 자신을 비웃을 정도로 그 말을 믿었다. 의심의 눈초리를 완전히 지우지 못했으나, 그와 같은 사람을 단 한번도 만나본 적이 없었다. 그의 이야기는 달콤하지 않았으나 깊이가 있었고, 그의 목소리는 매력적이지 않았으나 진심처럼 떨렸었다. 그의 손짓은 능숙하지 않았으나 뜨거웠고, 그의 웃음은 멋있음과는 거리가 멀었으나 섹시함이 있었다. 그녀에겐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처음이었기에 더욱 믿을 수 없었으나, 점차 믿고 있는 자신이 낯설기만 했다.

그러나 그녀는, 차츰 시일이 지날수록 달콤했던 약속과 멀어지는 그를 보았다. 모든 것을 할 수 있겠노라 다짐했던 그의 입에선 어느새 피곤함이 자주 등장했고,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신경쓰며 조심했던 그의 몸짓은 점차 합의없는 독단을 보이고 있었다. 그는 한번도 말하지 않았지만, 자신이 모든 것을 감내하고 있다고 온 몸으로 외치고 있었다. 그녀가 문제라고. 그래서 내가 이렇게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고. 오직 홀로.

그녀는 원망하기 시작했다. 그가 아니라 자신을. 그 달콤하고 허술한 약속의 진의를 단번에 파악하지 못했던 자신을. 자신이 더 인내하고 노력하면 결국엔 그 역시 그가 한 말을 실현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자신을. 또한, 세심하고 깊은 그라면, 당연히 그녀가 하고 있는 모든 노력을 알아채릴 것이라 믿었던 자신을.

어둠이 서툴게 가라앉기 시작한 어느 날 어느 때에, 그는,

"나 너무 피곤한데, 미안한데 내일로 미루면 안될까?"

그 말이 끝나는 순간, 그녀가 자신을 버려가며 세웠던 모든 세상은 무너졌다. 그에게서 의심의 그림자가 드리워질 때마다 세뇌하듯 듣던 그 노래 역시, 집으로 돌아가는 그 길에서 영원히 삭제해버렸다. 


#4

모든 것이 조화로워 보이던 어느 날, 그녀가 자신을, 또한 그를 의심하게 된 계기는 아주 사소한 대화 때문이었다.

"예전에 너, 나랑은 모든 것이 잘 맞아 아무 것도 참지 않고도 사랑할 수 있을거라고 확신한다고 했잖아? 지금도 그렇니? 아무 것도 참지 않고 있니?"

가볍게 던진 질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멈칫했다. 긍정의 대답은 나왔으나, 그 대답은 짧았고 한 박자가 느렸다. 그녀의 표정은 느리게 변했고, 그것을 바라본 그는 연극을 시작했다. 5초 전까지 침묵을 유지하던 그의 입은 가볍고 편안한 일상적인 이야기를 쉴틈없이 토했고, 과거의 그와 그녀가 함께 웃었던 무언가를 꺼내며 따스함을 찬미했다. 또한, 그녀가 너무나 사랑했던, 그녀를 부서지듯 꼬옥 껴안으며 사랑을 고했다. 그는 생각했다. 자신의 연극을 보며 진심어린 맞장구를 치는 그녀의 모습에서 자신의 진심이 노출되지 않았다고. 아마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 광경을 보았다면, 형편없는 연기 실력을 가진 배우가 극을 망치는 모습에서 굉장한 불편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보다 더한 불편함이 그녀를 덮쳤음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도로에 멈춰선 그는 그 표정을 떠올릴 수 있었다. 한없이 무너지는 내면과, 어떻게든 서 있으려 노력하는 외면이 충돌하던 그녀의 표정을. 그제서야 알아차린 것은 아니었을테지만, 묻어둔 까닭에 아무 의미 없는 것이었들이라 여겼다. 묻어둔 것 위에 세웠던, 자신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선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다고 믿었던 것 역시, 마지막 남은 성냥개비처럼 부러져버렸다. 

실은, 그가 악셀을 다시 밟게 되기 까지엔 제법 긴 시간이 흘렀다. 거짓으로 점칠된 과거로 유턴할 수는 없는 일이었으나, 직진을 한다고 해도 거짓으로 점칠된 자신을 마주할 수 밖에 없었다.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그는 멈춰 있었다. 


모든 모순이 사라진 세계가 있다면,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던져버리고, 기름이 떨어지는 그 때까지 달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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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빵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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