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녀가 있다.

그녀를 처음 만난 곳은 어두컴컴한 기숙사 지하의 코인 노래방이었다. 첫 만남에도 당당한 쌩얼로 노래하는 그녀의 모습이 이채로웠지만, 풋풋한 웃음기를 머금은 봄 햇살을 닮은 그녀의 관악기 같은 음색(오보에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에 좋은 사람이라는 근거 없는 확신이 들었다. 지금도, 호흡과 호흡 사이에서 흘러 나오는 그녀의 목소리라면 쉬이 얻을 수 없는 포근함이 느껴지곤 한다. 목소리만큼이나 성격도 역시 그러해서, 자그마한 때깔 조차도 견디지 못할 것 같은 마음씨를 견뎠다. 약간의 취기에도 알프스 산맥의 소녀처럼 발그레해진 볼과 눈으로 상대를 바라본다. 미소가 아름다운 까닭은 다만 그것이 취한 눈으로 바라본 것이 아니라, 그녀의 마음씨가 눈빛으로 전해지기 때문일 것이다. 

여리기만 할 것 같은 그녀의 말버릇과는 달리, 내면에는 한 줄기 강인한 기둥이 솟아있어, 견뎌내기 어려울 가혹한 고통이 밀려와도 어떻게든, 어떻게든 버텨낸다. 비극의 여주인공이 되어도 그 끝은 해피엔딩일 것이다. 그녀는 자신을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 자신을 사랑할 줄 알아서 타인에게 아낌없이 주는 법도 아는 사람. 그래서 동방에 흐르는 공기를 읽는 법을 안다. 자신의 울타리에 있는 사람이라면, 그래서 손을 건네기로 결심했다면, 있는 힘껏 시선을 던지고 손을 뻗어 작고 여린 손으로 강인하게 붙잡는다.

작은 코노에서 노래하다 울 뻔 하기도 하는 그 여린 마음씨지만, 결코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겠다는 곧고 따스한 마음을 가졌기에 오지랖 넓은 나로썬 때때로 걱정이 된다. 거칠고 야속한 세상 살이가 그저 그녀의 그 곧은 마음을 흐리게 하지 않길 바라마지만, 그녀의 내면 안에 있는 그 강인한 기둥이 결코 그녀를 심연 속으로 빠뜨리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그녀의 삶은 그래서 더 따스해질 것이다.

계절이 바뀌고 또 바뀌어 다음 가을이 오면, 나는 파아란 하늘 아래 한 줌씩 떨어지는 낙엽 사이로 걷는 그녀의 뒷모습을 어쩌면 보지 못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소소한 시간 틈새로 주고 받는 농담 안에서 그녀라는 사람의 농도를 마주할 때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적어도 나는, 그녀의 실수로 인해, 그 어떤 이보다 그녀에게 잘 맞을 봄의 그녀를 마주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소라의 Track-3을 좋아한다는 그녀에게 가장 어울리는 단어는, Lovely일 것이다. 이소라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치고 나쁜 사람은 아직 보지 못했다. 나의 첫인상처럼, 그녀는 좋은 사람이다.

 

#2

그가 있다.

그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를 살갑게 맞아 주었다. 10살이나 어린 아이들과 함께 동아리를 함께 한다는 것 자체가 모험이나 다름 없던 일이었는데, 그가 없었다면 나의 학교 생활은 어떻게 굴러 갔을지 잘 그려지지 않는다. 그가 가진 그 쾌활함, 친밀함, 타인의 입장을 고려하고자 노력하는 태도, 그리고 최대한 말을 골라 의도치 않게 전해질 수 있는 상처를 피하려 하는 모습은 뭇 사람들에게 그의 이름 석자가 주는 의미가 어떤 것일지 단박에 눈치채게 했다.

그의 곰 같은 푸근한 외모 - 불곰이나 북극곰은 아니고, 아마 지리산 반달곰 정도 되는 것 같다 - 는 상대가 어떤 이라도 마음을 열고 대화할 수 있을 것만 같은 편안함을 준다. 비단 외모 때문만은 아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상대의 대화 템포를 따라가려는, 그것이 심지어 자신의 생각과 완전히 다른 것이라 할지라도, 그의 화법이 그가 가진 가장 빛나는 부분이다. 나는 아직까지 그가 화를 내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때론 짜증을 내지만, 내가 내는 짜증에 비하면 투정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그가 겪은 최근의 고된 경험에 악영향을 끼친 것이 아닌가 하는 죄책감이 사라지지 않는다. 비록 한바탕 시원하게 울지도, 혹은 미친듯이 상대의 욕을 하지도 않는, 그저 아연한 표정으로 때론 침묵, 때론 말더듬을 반복하며 고통을 겪어내는 그의 모습은 아직 어른이 될 준비가 되지 않는 아이의 등을 떠민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들게 했다. 그러나 이내 곧, 기숙사 1층 소파에 나란히 앉아, 그답지 않게 쉴새없이 푸념하는 그의 새삼스러운 모습을 보곤, 한꺼풀 허물을 벗어내는 나비의 모습을 보았다. 비록 그는 고통스러웠을 것이나, 나는 받아내고 감내하고 이겨내려는 그의 모습이 잠깐 멋있게 보였다.

나는 이제 몇달 뒤면, 절망적일 정도로 시력이 좋지 않은 나조차도 100m 밖에서 알아볼 수 있는 그의 시그니처 뒷모습을 바라보지 못한다. 어쩌면 그를 다시 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걱정하지 않는다. 비록 때론 서툴고, 비록 때론 엉성하며, 때론 꼼꼼치 못하지만, 뭇 사람들과 함께 손과 손을 맞잡으며 그 어디에 있더라도 잘 헤쳐나갈 것을 의심할 수 없다. 그의 우직한 노래 스타일처럼, 그의 내일도 그렇게 흘러갈 것이다.

매번 힘들어 하지만 매번 재도전하는 멜로망스의 노래처럼, 그에게 가장 어울리는 단어는 Pure일 것이다. 잘난 듯 그에 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댔지만, 나보다 그가 훨씬 더 좋은 사람임을 부정할 수 없을 고백해야겠다.

 

#3

그녀가 있다.

그녀는 서운하다는 이야기를 때때로 듣게 되는 것 같다. 그녀는 동의하지 않겠지만, 나는 동의한다. 그녀가 없는 공간, 그녀가 없는 모임은 그 공간과 모임의 의미를 반쯤은 잃어버리게 되는 것만 같다. 그녀가 내뿜는 색이 너무나 강렬해서, 그 자리에 함께하는 모든 이를 웃고 울리게 만들 수 있는 마법 같은 힘을 지녔다. 현실세계의 헤르미온느, 그런 느낌이라 해도 좋다. 그 티 한점 없는 꾸밈 없는 성격이, 우물쭈물 쩌리 같이 찌그러져 있는 나에게 거침없이 이것저것 물어봤던 그녀와 나 사이의 첫 연락을 가능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넘모'라는 말을 썼다고 웃는 그녀의 답장을 보며 생각했다. 그동안 왜 나는 이런 사람과 친해지지 못했던 걸까, 하고. 

그 때는 이름 석자 정도 밖에 모르던 사이였으나, 나의 예감은 몇가지 적중했다. 첫 번째는, 걸어 다니는, 아니, 뛰어 다니는 호기심 덩어리일 것이라는 예감. 그럴 일은 없겠으나, 또 그럴 일이 없길 간절히 바라지만, 먼 훗날 그녀의 얼굴을 다시 보게 됐을 때 그 반짝이는 눈빛에서 호기심이 사라져 있다면, 나는 더없이 서글퍼질 것 같다. 자그마한 몸으로 이리저리 바쁘게 다니느라 발에 뭐가 채이는 지도 제대로 모르는, 그래서 책상에, 계단에, 돌부리에 부딪히고 찍히고 꺾이는 일이 빈번히 발생하지만, 예의 그 꾸밈없는 털털한 웃음으로 날려버리는 그녀의 성격은 아마도 반쯤은 그 눈부시게 반짝거리는 호기심이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 면에서 그녀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수려한 외모 보다 빛나는 내면에 있다.

두 번째는, 분명 노래를 잘 할 것이라는 생각. 회의 테이블 끝과 끝에 앉아 있었지만, 나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예감했다. 당연히 적중했다. 넷이서 함께 코노를 갔을 때 그녀의 노래를 듣고 생각했다. 얼마나 많은 친구들이 그녀와 함께 하는 코노를 기다리고 있을까. 시원하게 지르며 그녀와 타인의 속을 뻥 뚫어 놓을 뿐 아니라, 순간의 분위기와 타인의 기분을 고려하는 선곡 스타일이 그녀라는 사람이 가진 매력을 단적으로 드러냈다. 그녀가 두 번째로 아름다운 순간은, 그 청아한 음색으로 부르는 음표 사이에 있다.

이제 저 넓은 세상 밖으로 날개를 펼칠 준비를 조금씩 해 나가는 그녀에 대한 걱정은, 미안하지만 1도 없다. 도망치거나 혹은 잠시 외면하고 쉬고 싶은 약한 마음이 들 법한데도, 애초에 그러한 선택지는 고려하지도 않았다는 듯이 꿈을 설계해나가는 그녀의 야무진 태도를 보면 나도 모르게 펭수 웃음을 지을 때가 있다. 그러고보니, 아직 친해지기 전에 '야무질 것 같았다'는 카톡을 보냈던 것 같다. 그 예감은 틀렸음을 인정해야겠다.

그러면 어떠랴. 그녀에게 어울리는 가장 적절한 단어가 Positive인 것을. 그 어느 곳에, 그 어디에 있더라도 그녀라는 존재가 내뿜는 반짝거림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묘한 확신이 든다.

 

#4

그리고, 그가 있다.

한참을 고민해도 그다지 쓸만한 점이 없는 그로썬, 그나마 없는 것 가운데 그럭저럭 사람 구실을 하는 글로써 그들에 대한 감사함을 기록해 둔다. 그는 그들을 오래도록 기억할 것 같다. 그녀와 그와 그녀도, 먼 훗날, '아 그런 사람이 있었지', 정도로 그를 기억해준다면 그걸로도 충분히 감사할 따름이다.

그녀와 그와 그녀가 그와 함께하는 시간만이라도 편안하고, 따스하고, 내려놓을 수 있도록, 못난 것들은 잠시 접어두고 있어 보이는 척이라도 좀 해보려 한다.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으나, 요즘의 그의 삶에선 그들이 의미가 되어주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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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빵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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