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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과 사람이 친해지려면 모종의 계기가 필요하다. 어떤 이는 모종의 계기를 억지로라도 만들며 다가가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런 그릇이 못되었다. 한순간이었다. 짧은 대화, 몇번의 마주침, 번호를 주고 받고, 수없이 문자를 보내다가, 어느순간 몇시간이고 귀가 뜨거워질 때까지 전화를 하는 사이로 나아가는 것은. 그 짧은 시간이 지금의 내게 준 영향을 생각하면, 인생이란 찰나에 결정되는 것이 아닌가 무력해질 때도 있다. 어쩌면 찰나를 만드는 것이 인생을 살아가는 이유인가 싶기도 하고.


각설하고, 그 짧은 순간에 우리가 주고 받았던 대화의 주제는, 음악이었다. 아마 그때 듣던 힙합이나 넬 같은 음악에 대한 얘기로 기억한다. 식상하고 식상해서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고 여겼던 지난 날의 나를 비웃게 될 지경이다. 아무튼, 그녀와 나의 별 볼일 없는 시간을 정리하려면 음악에 대한 얘기를 할 수 밖에 없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사랑을 이루는 것에 특별한 계기를 기대하는 어리석음을 버린 좋은 경험이라 할 수 있겠다.



#2


그 뒤로 꽤 몇 년간, 나는 그녀에게 새로운 음악을 접하고 그것을 그녀에게 전해주는 일을 사명처럼 여겼다. 새로운 음악을 접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한층 그것이 절정에 이르던 때에는, 새로운 음악을 놓친 것을 발견할때마다 죄책감과 자괴감에 빠지기도 했다. 나는 음악을 듣고, 깊은 밤 전화통화를 하면서 그 얘기를 하고, 주말이면 네이트온으로 음악을 전송해주었다. 당연하지만, 죄다 불법 다운로드한 음악이다. 


그 때 우리가 좋아하던 뮤지션 중에서 단 세 팀만 꼽자면, 넬과 에픽하이, 그리고 내귀에도청장치 정도다. 다시금 식상하다는 얘기를 할 수 밖에 없을 정도의 선곡이다. 팻 메스니나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의 음악으로 친해졌다면 좀 더 특별하다는 평을 내릴 순 있겠지만, 아무래도 고등학생이 그런 음악을 접하기는 쉽지도 않고 그녀의 취향도 아니었다. 지금은 내 취향이 되었고, 그녀의 취향에는 여전히 안 맞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의 음악 취향은 변해갔다. 힙합에서 락으로, 락에서 발라드로, 발라드에서 인디음악으로. 지금은 거의 힙합을 듣지 않는다. 올드스쿨의 노래들은 가끔 듣지만, 요즘 나오는 힙합음악들은 귀에 잘 익지가 않는다. 나도 늙은 것이겠지. 그렇게 그녀 역시 조금씩 내 취향에 맞춰 변화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이 변하기 시작한 것은, 불법 다운로드에 대한 정부의 강한 시책과 그녀의 일상에 커다란 변화가 생긴 것.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



#3


고심을 거듭해 고른 선곡으로 나의 마음을 전하려 했다. 너무 많이 전해서 별다른 감흥이 없어질 정도로 미련하게 전했다. 전하는 것을 넘어, 나는 나의 음악으로 그녀의 취향을 소유하려 했다. 그녀가 다른 이와 음악얘기를 나눈다는 것은 나의 존재를 희석시키는 일이었다. 그것은 솔직히 귀찮고 고단한 일이었다. 그러나, 전송된 음악을 듣고 난 그녀의 "역시 난 너 없으면 못 산다니까" 류의 농담들은, 나를 집착속으로 빠져들게 했다. 존재의 이유는 필요에 의해 성립한다. 그 필요를 만드는 것이 나의 일이다. 나는 어느 순간, 사랑이라는 감정보다도 어떤 의무감이나 책임감을 더 큰 가치로 두고 그녀를 대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녀의 책임을 규탄하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그녀의 호의와 선의에는 감사한다. 


실제로 그녀가 나의 음악에서 떠나기 시작했을 때, 그러니까 자신이 직접 결제한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음악을 골라 듣고, 나의 취향과는 점점 멀어지기 시작한 순간, 그녀의 삶에서 나의 존재가 탈락되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토이스토리3에 나오는 잊혀진 장난감들처럼, 그것을 받아들이고 저항하는 일을 반복했다. 억지로라도 내가 좋아하던 음악을 전해주려했지만, 그녀는 더 이상 나의 음악을 듣지 않게 되었다. 어쩌다 들어보아도, 평은 결국 안 좋았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엮어주는 음악이 더럿 있기는 했다. 단지 그것들은 나를 통해 얻어가는 것이 아니었기에, 내가 느끼는 만족감은 그 전같지 않았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네가 추천해주는 건 너무 우울해." 내 딴에는 그다지 우울하지 않은 편의 노래들이었는데도 그런 평을 내렸다. 물론 이소라나 윤상의 음악은 납득을 하겠지만. 그 뒤로는 이소라나 윤상의 음악은 절대 추천하지 않게 되었다. 나는 꼭, 전하고 싶은 말을 전할 수 없는 벙어리가 된 것 같았다. 그녀가 우울한 음악을 듣지 않는 이유는, 일 할 때 템포가 처지기 싫어서, 아니, 처질 수 없어서' 였다. 자신도 우울의 수렁에 빠져들 수 없다고.

나는 그녀를 이해할 수 밖에 없었다. 그녀가 또다시 우울의 수렁에 빠져들게 되면, 그러면야 다시 내게 여린 목소리를 털어놓을테니 기쁘겠지만, 그녀의 삶은 다시 정체될 수 밖에 없으니까.



#4


지금은, 완전히 취향이 갈리고 아예 음악얘기를 거의 하지 않는 수준에 이르렀다. 지난 여름, 내가 처음 운전하는 차를 탄 그녀는, 맘에 드는 음악이 없다며 결국 본인의 핸드폰으로 블루투스를 연결하기에 이르렀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이해가 완전히 된 줄 알았던 내 자신에 대한 실망을 불러일으켰다. 이해하는 것과 느끼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라는 새삼의 깨달음과 함께. 

그것은 일종의, 그때와 지금은, 그때의 그녀와 지금의 그녀는, 그때와 지금의 우리 관계는, 완전히 달라졌다고 선고하는 듯 했다. 당연히 그 이후의 여정을 마냥 상쾌한 기분으로 임하기엔 쉽지 않았고, 결국 엉망진창으로 끝났다.


한번은 그런 적이 있었다. 어느날, 그녀는

"어떤 노래를 들을 때 내 생각해?"

라는, 그녀 답지 않은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의 상황이 워낙 평범하지 않은, 그녀와 나 사이에 있던 수년간의 기억을 끄집어 봐도 몇 없는 순간이기 때문에, 그런 말이 나왔던 것이다.

나는 거의 모든 노래가 그렇다는 뻔한 대답을(그러나 진심이기도 했다.) 하고, 그것이 부족함을 느껴 이런 저런 노래를 대었다. 넬의 지구는 태양을 네번이라든가, 윤상의 사랑이란이라든가, 토이의 나는 달이라든가.

그러더니 그녀는, 윤상의 <나를 친구라고 말하는 너에게>를 꺼냈다. 그녀가 그 음악을 꺼내는 순간, 나는 발가벗겨진 기분에 몸서리쳤다. 그녀는 한번도, 거들떠도 보지 않던 그 음악을 내게 꺼냈다. 나는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두었던 감정을, 어느 순간 강제로 꺼내어진 느낌에 젖어야 했다. 뒤이어, 


그녀 역시 알고 있었구나. 그래서 싫어한 것이었구나. 라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었다. 

큰 진보였다. 나는 내가 심혈을 기울여 참여했던 라디오 방송의 첫 곡으로 토이의 <좋은사람>이 흘러나오자, 정색을 하며 싫어하던 그녀의 모습을 보았다. 그것은 확신을 주었다.


톱니가 맞지 않기 시작하면 전체가 굴러가지 않는다. 내가 그 사실을 납득하기까지에는 상당한 시간을 요했지만, 그럭저럭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요란하지 않은 슬픔과 개운하지 않은 기쁨을 준다. 

물론, 이런 시행착오를 겪고도 나는 소중한 사람들에게 음악을 추천하는 일을 멈추지 않으니,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는 말은 참으로 세기의 남을 명언이라 하겠다. 어쩌랴. 마음을 전하는 일에 이것 보다 더 좋은 방법이 생각나지 않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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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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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상근예비역으로 군 생활을 보냈다는 것은 참 축복같은 시간이었다. 고졸 무지랭이로 산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 덕에 상근으로 꿀빨 수 있었다는 것은 태생이 가져온 몇 없는 뽀나스같은 것이었다. 현역으로 입대했다면 좀 더 부지런하고 근성있으며 체력도 증강되고 몸도 우람해져서, 우리 사회에 좀 더 나은 인간에 보다 가까워질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상근으로 지내며 잉여로운, 한없이 잉여로워서 담배피며 바라본 앞산이 비웃을 지경으로, 어떻게하면 하루를 날로 먹을 수 있을까 고민하던 면사무소의 모 아저씨의 잉여로움의 호각을 다투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뿌듯하고 살 맛 나는 시간이었다.


훈련소에서 어렵게 얻은 전화 찬스를 그녀에게 써서, 강철같은 마음을 지닌 내가 살짝 울컥하는 통화를 하게 된 이후로 그녀와의 사이가 한층 진보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품게 된 것이 1년, 이미 그것만 해도 손 쓸 수 없는 바보의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지만, 나는 그녀와 내일로 여행을 떠났다.


#2


여행은 좋았고 슬펐다. 그녀는 요상하게도 내게 거짓을 고했기 때문이다. 금쪽같은 휴가를 내고 몇 달간 봉급을 개처럼 모은 것은 둘째치고, 그녀와의 괴랄한 관계가 시작된 후로 처음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 공유할 수 있다는 사실에 나는 향토예비군을 지원하는 복무의 목표는 헌신짝처럼 내버리고 몇달간이나 방북을 염원하는 실향민처럼 그날만 바라보게 되었다.

여행 일주일 전, 가족 사정으로 못 가게 될 지도 모른다는 그녀의 말을 좀 더 진지하게 들었어야 했다. 좀처럼 짜증이나 화를 내지않는, 특히나 상대가 다름아닌 그녀라면 더더욱 그러했던 내가 싸움 직전까지 간 것은 오랜 기간 연마한 인내심과 자비심에 생채기를 긁는 발언이었다. 여행계획을 짜서 기안서까지 만들고, 그 안에 '여행을 파토내는 사람은 벌금을 문다'라는 해지방어조항까지 상빙ㅁㅂ한 나의 노력은, 그녀의 말 한마디에 물거품으로 돌아가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녀답지 않게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며 여행 계획의 재개를 선언했고, 우리는 사전 준비 모임까지 하며 여행의 출발을 기대했다. 적어도 나는 기대했다.


기대하지 말았어야 했다. 파토를 내자는 그녀의 발언을 좀 더 진지하게 들었어야 했다.


#3


그녀는 당시 C와 사귀고 있었다. 그녀가 C와의 관계로 고생하다가, C와 나의 관계까지 작살이 난 상황에서 C를 만나고 있었을 줄은 나는 예상하지 못했다. 뼈아픈 실책이로고. 그녀에 관한한 며칠 철야를 하고난 후 피로에 쩔은 몸상태로도 A4지 수십장정도는 앉은 자리에서 작성하고 이를 '그녀 백서'라고 적을 수 있을 정도로 전문가인 나지만, 그것을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무래도 여행계획에 혼미해진 정신이 잠시 평소의 냉철함을 가린 탓이리라. 어쨌든, 여기저기서 의심스러운 징조가 드러났고 여행 출발 직전에서야 나는 깨닫고 말았다.


여기서 또 하나의 바보짓이 추가된다. 출발 전날, 나는 그 사실을 그녀가 먼저 말해주기를 기대했다. 그러면 적절히 선을 갖춰 행동하면 그만일 뿐이었다. 적당한 말투와 적당한 행동은, 마음의 깊이가 적당한 수준에까지 이르는데 도움을 준다. 혹시 한없이 마음이 커져서 고민인 사람이 있다면 나의 방법을 참조해보라. 그렇다고 고통이 덜어지지는 않는다는 점도 참고해야 한다. 어쨌든, 그런 알량한 기대를 갖고 그녀를 방문했으나, 그녀가 그 사실을 알려줄 기미는, 그녀의 새하얀 얼굴에서 찾아볼 수 없는 기미처럼 보이지가 않았다. 나는 심통이 나서 그녀의 신상 가방을 슬쩍 찼다가, 그녀의 호된 분노와 함께 "대체 왜이러는 거야 오늘?"이란 얘기를 들어야 했다. 


그때 물었어야 했다. 확실한 정리 후에 길을 떠났어야 했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그길이 여행길이 아닌 귀가길이 될까봐 두려웠고, 그래서 웃음으로 때우고 말았다.


#4


결국, 내가 그 사실이 진짜냐고 묻게 된 것은, 여행이 막바지로 접어든 경주에서였다. 막바지여서 물었을 뿐인데, 그 날이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다. 숙소를 잡고 자전거를 빌려 그녀를 안내하다가, 길치인것이 드러나 예의 그 조롱과 핀잔을 실컷 듣고는, 그녀의 뒤를 따라가는 처지가 되었다. 바보짓도 정도가 있다. 평소보다 바보력이 월등이 폭등해, 바보의 3승 정도로 진화한 일주일간의 나였다. 어쨌든 그래도 쌈박한 밥도 먹고, 나름대로 좋은 구경도 하고, 경주 박물관에서 나의 열띤 역덕 해설을 들으며 생각지도 않게 그녀의 깊은 이해를 느낄 수도 있었다. 몰랐던 바와 새로이 깨닫게된 바가 많았다. 모든 것이 좋은 와중에, 딱히 내 마음을 들키고 싶지는 않지만 굳이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하나를 꼽자면,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와중에 내가 튼 정재형의 running을 듣고, 선곡이 좋다며 칭찬해 준 그녀의 말 한마디였다. 


하지만 우리는 같은 공간에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 조짐은 얼핏 읽었는데, 홀로 개풀뜯어먹는 상상에 빠져있던, 바보의 5승까지 치달은 나는 조짐을 알고도 외면했다. 나의 페이스와 그녀의 페이스는 남극과 사하라 사막처럼 어마어마한 간극에 빠져있었다. 그것을 알게 된 것은 어느 한 카페에서 시간을 보낼 때 였다.


방문자가 포스트잇을 붙이는, 흔한 컨셉의 그 카페는, 그러나 옛날 집 특유의 낮은 천장과 고즈넉한 분위기가 살아 있었다. 그것에 매료되, 계획에 없던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저 구석, 노란 조명 아래 포스트잇들이 빛나고 있던 자리에서 우리는 무언가 얘기를 나눴고, 아마도 나는 책을 읽지 않았나 싶다. 

그러다가 우리는 각자 포스트잇에 무언가를 적었다. 그때라도 멈췄어야 했다. 나는 바보력의 관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녀와의 여행'을 기념하고 추억할만한 글귀를 적었다. 뻔하디 뻔해서 라디오 사연으로 올린다면 0.001초만에 작가의 눈에서 벗어날 글귀였던 것 같다. 그런데 그녀는, 포스트잇을 적는 표정이 사뭇 진지해서, 나를 놀라게 했다. 자연스레 내용이 궁금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설마하니, 나와 함께 있는데 한 글자정도는 적어주겠지. 라는 희망과 불안이 서로를 껴안듯 피어올라 호기심이 솟았다. 그런 그녀는 나의 표정을 읽고, 화장실로 떠나며 "절대 읽지마"라는 언질을 단단히 남겼다.


하지만 나는 읽었다. 읽지 말았어야 했다. .


#5


고열 감기에 시달리던 그녀에게 치명상을 입힌 나의 어리석음으로, 어리석음이 한없이 농축된 아로니아 진액같은 실수를 저지른 탓에, 여행은 그날로 끝났다. C와 사귀는 것이 맞냐는 질문, 그녀의 정색이 섞인 부정, 하지만 C와 통화하는 것이 확실한 그녀의 목소리. 그녀 핸드폰에 뜬 C의 이름을 훔쳐본 나. 그 날 새벽, 세계 바보짓 대회가 열린다면 순위권에 들 수 있을 것 같은 바보짓을 벌인 것까지. 하루가 더 남긴 했지만 그것까지 되새기기엔 나의 알량한 자존감이 꽤나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라 차마 바라볼 수는 없다. 


여행에 대한 기억이 점차 흐릿해질수록, 뇌리에 남는 것은 그 카페의 포스트잇 뿐이었다. 다른 것들도 물론 강렬하게 자리잡고 있긴 한데, 기억의 창고에서 탈출할때마다 나의 차디찬 이성이 꾹꾹 눌러 담고 있는 중이다. 그나마 꺼낼만 한 것은, 카페에서의 포스트잇 뿐이다.

그래서 몇 년 간이나 궁금해했다. 언젠가 다시 경주로 가게 되면 꼭 들러봐야지. 하지만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고, 나의 귀찮음은 나날이 자가증식하고 있었다. '그녀와 함께하는 어리석은 꿈에서 깨어나게 되면, 그 때 가보리라'라는 생각이 있긴 했지만, 아무래도 귀찮음에 대한 합리화같다.


어쨌든, 나는 얼마 전 다시 그 자리에 가봤다. 기억이 많이 흐릿해져 위치를 찾는 데 고생했지만, 나는 바로 그 카페를 근처에 두고 200m 근방을 왔다 갔다 하며 헤맸다. 헤멘 이유는, 카페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건물도 위치도 그대로였지만, 주인도 카페 이름도 내부도 많이 바뀌었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포스트잇들도 쓰레기통에 쳐박혀 소각장으로 보내지거나 했을 것이다. 문을 열며 그 사실을 바로 파악했음에도, 나는 그 곳에서 커피를 주문하고 앉아보았다.


앉을 수 밖에 없었다.


영원히 그곳에 남아 있을 것 같던 그녀의, 그녀와의, 하지만 그녀는 없던 그 시간이, 이제는 영영 사라져버렸음을 마주하는 시간이었다. 앉으며 나는 글을 썼다. 할 수 있는 것이 글 밖에 없었다. 우스운 짤방이나 보고 있을 기분이 아니었다. 기억을 해방하는 일을 그렇게 단순하고 잉여스러운 일을 통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꼭꼭 숨겨두었던 기억을 해방하고, 그것과 마주하며, 창문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여전히 본가 어딘가에 짱박혀 있을, 그 때 찍은 포스트잇 사진을 다시 보고 싶기는 하다. 나는 무엇이라 적었고, 그녀는 무엇이라 적었는지 궁금하기는 하다. 그날 일기장에 적은 활자들이 뿌옇게 떠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확인하지는 않았다.

눈으로 직접 그것들을 확인하고, 가라앉은 열병의 바이러스들에게 활기를 제공해서, 무위에 그칠 희망의 나날에 연장티켓을 끊는 일을 하지 않는 것. 이것만으로도 내겐 꽤 진일보한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 카페가 확 바뀌고 포스트잇이 사라진 것은, 어떤 의미로 다행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이번 겨울의 여행은 후회로 남지 않게 되었다. 나는 여행을 하면 항상 후회하는 편인데, 손가락에 꼽을 만큼 후회없는 여행이었다. 그리고, 다녀온 후 그녀와의 통화에서 잠깐 그 카페를 말해보았으나, 예상대로 그녀는 전혀 기억을 하지 못했다.


바야흐로, '용기를 가지고 패배하는 법'을 시작하게 된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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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빵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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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 오는 밤은 요행이었다. 예상치 못한 비가 내리는 날엔 영원히 잠든 것 처럼 보여 곧 무덤자리를 알아봐줘야 할 같은 전화기가 요란하게 울렸다. 불쑥 찾아온 전화는 대뜸 우는 소리를 전한다. 그 때 마다 당황스러웠지만 익숙해지는 것 또한 때 마다 반복되었다. 그녀는 영원히 여릴 것만 같았고, 나는 그녀의 여린 마음이 온전하기를 바랬다. 주기적으로 깊은 상처를 입고 내게로 돌아오기를. 다치고 또 다쳐서 나에게만 울고 또 어리광부리기를. 다만 그 정도의 보상은 받을 만한 존재가 아니던가라며 자신을 과대평가했지만, 그보다 좀 더 내밀한 속마음 속에는, 아프다 보면 아프지 않을 선택을 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것은 옳았다. 그녀는 바야흐로 아프지 않는 법을 배웠다. 다만, 그 선택지 안에는 내가 없었음을 나는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2

세상에 익숙해지고 개차반 생활을 견뎌내는 그녀의 표정이 나날이 루즈해질수록, 나와의 전화 통화도 뜸해지기 시작했다. 함께 써 왔던 다이어리의 반짝이는 new알림은 수명이 다 된 전구처럼 고요하기만 했다.
그 즈음에는, 얼굴에 비하면 훨씬 예쁘다는 평을 받는 다섯 손가락 사이로, 그녀가 스멀스멀, 새어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항하의 모래를 움켜쥐는 느낌이 이런걸까. 한번도 그녀를 소유는 커녕 곁에 두지도 못했으면서 상실의 감각에 두려움이 앞서던 나는, 혼란스러웠다. 갖지도 못했으면서 상실한다는 억울함과 괴리감이 피어올라, 머릿 속에서 혼세마왕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미련하고 어리석게도 나는 수도없이 불안함을 내비쳤다. 정정한다. 나는 내비침을 넘어 너도 불안해하라고 강요했다. 나의 불안함이 글을 타고 전염되어 그녀의 삶도 불안해지기를. 감정도 불안해지기를. 그렇게 다시 예전처럼, 불안함에게 지배되어버린 그녀가 나를 통해 해소하기를.

사악한 기도가 아예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나의 경우는 한번도 이뤄지지 않았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3

여름비가 목욕 후 바르는 스킨처럼 촉촉히 숲을 감싸던 날, 그녀와 나는 늦잠을 자고 일어나 노닥거렸다. 한 공간에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좋은 일인데 비까지 내린다. 내게 있어선 원더랜드로 여행을 떠나는 것과 유사한 사태였다. 감사한다. 그 날이 여름이었음을. 겨울비였다는 나는 또 감정의 충동질을 이겨내지 못하고 엉뚱한 일을 벌였을 것이다.

나긋하고 그윽한 목소리들이 오가며(사실은 아주 일상적이고 게으른 대화였다. 전혀 로맨틱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격렬하게 아무것도 하기 싫은 냥이처럼 시간을 꾸물대던 우리가 좋았다. 한량없이 한량이 되는 것이 좋았다. 그렇게 잠든 그녀가 좋았다.

애타게 꿈꾸던 나날이 째깍째깍 소멸해간다는 사실에 불안함이 더 가득했다.


#4

결국엔 불안함이 모든 것을 망쳤다. 그녀를 잃기 두려워서 더 나아가지도 않았고, 멈춰서지도 않았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지도 않았다. 모든 것을 다 가질 수는 없음을 인식하는 것이 잘 조율된 삶의 출발이라는 나의 지론은,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취하지 못함을 증명하게 됐다.

어리석게도, 수년에 걸친 가혹하고 뼈저린 교훈을 얻고도 지론도 행동도 달라진 바가 없다. 실패한 사랑은 여전히 진행중이다.

불안함에 시달려 내게로 올 것이라니, 가장 불안한 존재가 꾸는 꿈치고는 지나치게 허황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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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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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늘에서 하얀 눈이 내리는 날,
조그만 테잎을 내밀며

"오래전부터 너를
좋아하고 있었어.
이런 내 맘을
고백하고 싶었어"


#2

재주소년의 <눈 오던 날>은, 나의 아이덴티티와 사회적 관계, 인생의 단맛 짠맛과 존재론적 고민이 복합적으로 녹아들어가 있는 갓곡이다. 그녀는 이동진의 <천일의 몽상> 씨디를 선물했고(그녀를 안지 6년, 만난 적은 4년만에 처음받은 선물이다) 그 안에서 이 노래를 만났다. 씨디를 손에 들었던 때가 여름이었던지라 잠시 외면했었는데, 기어코 겨울이 되어서야 고요했던 마음 속에 폭풍이 일어나며 출근길에 듣고 일하다가 흥얼거리고 퇴근길에 듣고 집에서 책 읽으며 듣고 뭐 그렇게 됐던 것이다. 지금도  듣고 있다.

#3

이 노래를 사랑하게 된 것은, 생애 전체를 갈아넣어 기름으로 짜낸 다면 몇방울 되지 않을 콩닥콩닥한 에피소드 중 하나와 관계가 있다.

씨디를 선물받은 그 해 겨울, 그녀와 나는 칠흑같은 새벽, 엄습해오는 공복감에 심각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밖은 동장군이 엄격 진지한 기세로 도시를 꿀꺽 삼켜 아그작아그작 씹고 있었다. 휘몰아치는 눈 폭풍에 배달도 안 오는 날, 그녀는 왜 아까 편의점에 들리지 않았냐며 칭얼대는 나를 혼냈다. 그럼에도, 편의점에 같이 가자는 나의 제안을 받은 것을 보면, 평소의 그녀와 달리 그녀도 심경에 조금은 변화가 있던 날이지 않나 싶다. 당연히 그 조그만 입술에서 "꺼져 너 혼자 갔다와"라는 말이 나올 줄 알았는데.

그때의 나는 동장군을 비웃으며, 수면바지와 반팔을 입고 위에는 두터운 코트와 부츠를 신는,  괴랄하기 그지없는 복장으로 길을 나섰는데, 아뿔싸, 눈보라를 뚫고 가보니알고 있던 편의점이 망해버렸다. 당연히 엄청난 핀잔을 들었다. 고민하던 우리는, 기왕 여기까지 온 거 다른 편의점을 가보자는 합의(욕을 엄청 먹고 난 뒤의 합의)를 보고, 다시 눈 폭풍을 뚫어야 했다.

우리는 고개를 숙이며 종종 걸음으로 헤쳐나갔고, 쏟아지는 눈을 욕하며 웃었다. 주황색 가로등을 지날 때 마다, 곁에서 걷는 그녀의 모습이 환하게, 붉게 빛났다. 웃을 때마다 새어나오는, 이제는 흔치 않은  그녀의 미소도 또렷이 기억난다. 하얗게 쌓여가는 눈 밭은 그녀로 인해 두터워지는 나의 덧없는 마음처럼 커져만 갔다.

그 길을 어떻게 걸었고, 어떻게 돌아왔는지, 지금 생각하면 참 진귀한 경험이었다. 어쩌면 다시 없을,


#4

추워서 걸음을 빠르게 옮기는 와중에도, 이 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는 허접하고 식상한 망상을 했었다. 좀 더 그럴싸하고 신사다운 생각을 하길 바랬는데, 운치없게도 딱 그 정도 수준이었다. 당시의 나는 수행이 부족했던 것 같다. 지금이라면 의연하고 젠틀하고 시크하게 대처했을 것이 틀림없다.

그렇지만 그건 앞으로의 일일 따름이고, 중요한 것은, 그녀가 그 곳에 있었던 건지 확신이 들지 않는다. 나는 이렇게 쏟아지는 눈과 재주소년의 노래를 들으면, 나의 박약한 의지와는 관계없이 그 때의 기억이 튀어나와 정신이 혼미해지거늘, 왜 그랬는지  진짜로 그랬는지 장담할 수가 없다. 꼭, 내뇌망상으로 소설을 쓰는 기분이다.

그렇게 느끼는 이유는, 그 모든 것이 꿈결처럼 사라져가고, 흩어져가는, 오늘의 나와 조우한 까닭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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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칠흑같은 새벽, 까까머리 소년이 불꺼진 법당에 홀로 들어선다. 높은 천정에서 내리쬐는 전구 불빛은 암흑을 거두기에 부족하다. 시려운 발을 움직여 종종 걸음을 걷는다. 삐걱삐걱, 나뭇바닥의 격한 환영인사가 귓속을 파고든다. 지이익 성냥을 그어 일그러진 초에 불을 켠다. 작은 촛불이 향하는 끝에, 불상의 표정이 드러난다. 낮에는 한없이 자비롭지만, 새벽만 되면 무서운 표정으로 변하는 불상들을 애써 외면하며 다른 초에 불을 붙인다.-각양각색으로 색칠된 탱화들도 밝아진다. 어둠 속에 숨어 나를 노려보는 신장의 그림. 이윽고 청정수를 따른다. 고요 속에 물 떨어지는 소리만 가득하다. 왼쪽에서 쏟아지는 신장들의 시선, 오른쪽에서 쏟아지는 죽은 자들의 시선, 소년은 정신을 차리기 위해 눈을 감고, 물 따르던 주전자는 제기를 친다.

"땡그르르"

바닥에 떨어진 제기 뚜껑 소리에 놀란 소년은,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고개를 숙인다. 딸랑- 딸랑-. 세찬 북풍이 풍경을 휘두른다. 나무문들이 삐걱삐걱거리며 요동친다.

'그것이 올거야..그것이 올거야...'

소년이 두려움 가득한 채 고개를 드는 순간.


문이 열렸다. 촛불이 꺼졌다.
'그것'이 말했다.

"동자야, 동자야. 노올자."


#2

미쓰다 신조를 알게 된 것은 24살 무렵으로 돌아간다. 실패한 사랑의 끈을 부여잡고 헛짓거리를 하던 때, 아마 그 때 서점에서 사지 않았나 한다. 아닌가. 독후감을 쓰니 어쩌니 했던 것 같은데. 생각해보니 도서관에서 먼저 안 것도 같고.

어쨌든, 미쓰다 신조의 작품들은 내 마음에 쏙 들었다. 베이스에는 설화와 전설, 뼈대에는 미스터리와 추리, 지붕은 괴기와 환상으로 마무리한 이 짬뽕공포소설들은, 전설의 고향을 몇 단계 업그레이드한 느낌이었다.

대저, 일본은 추리소설이 넘치고 넘쳐서 도서관에 가면 책 뒷면에 온갖 수상 자랑으로 떡칠된 홍보카피들이 현란한 춤을 추며, 지식의 사막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는 나의 알량한 판단력을 흐리게 한다. 물론 일찌감치 아랫도리의 국제관계는 친일로 택한 지 오래지만, 뇌 속에서 춤추는 활자들은 세계적으로다가 채워넣고 싶은 허영심이 있었다. 그렇지만, 결국에는 늘 일본도서 코너에 손을 갖다대는 것이다. 미쓰다 신조도 그렇게 알게 되었다.


#3

당연한 얘기겠지만, 호불호가 갈릴 것이다.
설화와 전설 같은 민속학에 대해 관심이 없거나, 과학적이고 치밀한 정통 추리소설에 관심있는 사람들은 미쓰다 신조의 책을 읽기에 좀 고역스러울 수도 있다. 미쓰다 신조의 책들은 가장 결정적인 장면마다 비현실적인 이야기로 채워넣기 때문에, 추리자체도 비현실적이다. 이 비현실적인 현상에 가로막혀 추리를 진행할 수 없는 일도 부지기수. 육면팔비로 덥쳐오는 민속적인 공포는 세련된 도시사람에겐 당최 먼 헛소리를 하는 것인지 의아할 수도 있다.

요컨대, 나같은 녀석에겐 딱 맞는 코드였다는 이야기다. 그래도 한국에서 꽤 번역이 잘 되는 것을 보면 읽는 이가 많은 것 같다.


#4

3~400여쪽에 이르는, 등장인물이나 이야기 구조도 꽤 복잡한 소설들을 완벽히 이해하기는 좀 여럽다. 개략적인 등장인물의 관계를 파악하고, 미스터리한 현상을 그대로의 것으로 받아들이면, 나머진 술술 풀린다. 소설을 읽는 것이 아니라 리듬을 탄다고나 할까. 다만 항상 모호한 결론과 조우한 채 책을 덮게 되는 것이 고정적인 패턴인데, 소재가 미스터리인 만큼 완벽한 해결이 불가능함을 작가가 아주 유용하게 쓰고 있다. 독자도 나름 만족이다. 긴장감의 텐션이 절정을 쳤다가 현자타임까지 올 정도의 코스는 된다. 그렇게 몰아치는 것이 작가의 매력이다.

진짜로 새벽에 작은 불빛을 켜놓고 읽으면 꽤 소름돋는 일도 있었다. 낮에 읽으면 좀 실소할때도 있지만. 쓰다보니 전에 읽었던 것들이 그리워졌다. 이번주말에는 다시 읽어야지.어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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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날씨가 어중띤 날이 있다. 어중띠다하면 매서운 시베리아의 칼바람이 손발을 찢어놓을 정도로 미친듯이 불어제껴 옆구리가 시려운 것도 모른다던가, 아니면 태양의 이글거림이 "때가 도래했다. 으하하"라고 포효하며 세상을 화탕지옥으로 몰아넣을 듯한 패기를 보인다던가 하는 그런 날씨가 아닌 날을 말한다.

그리고 1년 중 많은 날이, 날씨가 어중띤 날로 채워져있다. 그런 날에 나는, 꼼짝없이 알러지성 비염으로 콧물찡찡이가 되어버린다.


#2

하염없이, 신체의 모든 수분을 코로 뱉어낼 기세로 끈질기게 솟아나는 콧물을 닦아내다 보면 기어코 코가 헐어버린다. 특단의 대책인, 휴지로 코를 틀어막아 버리는 비법을 시전할 때도 있지만, 쥐꼬리만큼이지만 나도 밖에서의 사회적 지위가 있는 몸이다. 게다가 양쪽 다 막혀버릴 경우엔 숨쉬기나 말하기 둘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 골치아픈 일이다.

어떤 때는 흡착기 같은 것을 사서 싹 뽑아내 볼까, 아니면 아쉬운대로 청소기라도 깨끗이 닦은 후에 코에 대고 버튼을 눌러볼까 고민했지만, 인간의 존엄성까지 잃어버리는 것은 다소 지나친 일이라는 생각에 최후의 순간까지 미뤄두기로 했다.

그렇지만, 여러 콧물약들도 소용없이, 콧물, 콧물, 코풀기, 재채기, 에취, 다시 콧물, 콧물, 가래, 에취, 코풀기, 다시 콧물의 무한 츠쿠요미를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그 지랄을 떨고 있노라면, 내가 특별히 철학적인 고찰을 즐기는 허세왕이라서가 아니라, 누구라도  자연스럽게 인생이란 무엇인가,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런 시련을 견뎌야 하는가, 라는 존재론적 고민과 함께 하늘을 향해 힘껏 뻐큐를 날리게 된다.

비록, 콧물때문에 고개는 치켜들지 못해도 말이다.


#3

이러고 산지도 어언 20년이 지났으니, 이젠 그냥 그려러니 할 때도 있다. 다행인지 직업적으로 크게 지장이 없기에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는 심정으로 운명에 순응하는 중이다.

라는 건 쌩핑계고, 진작부터 모 대학병원의 이비인후과에는 처방전 한 방이면 50년 묵은 비염조차 싸그리 날려버린다는, 비염계의 화타가 있어 전국에서 그 영험함을 주워듣고는 매일 문전성시라는 소문을 접했다. 심지어 어떤 이는 사랑하는 사람의 비염을 고쳐주겠다는 일념하나로 가산을 탕진하며 전국의 이비인후과를  돌다가 끝내는  그 화타에게서 고칠 수 있었다는, 아름다운 러브스토리도 인구에 회자된다고 한다. 일각에서는 불치에 가까운 병인줄로만 알았던 비염을 고쳐낸 그의 업적이야 말로 세계4대성인과 어깨를 견줄 만 하다며 비염계의 예수, 비염계의 마호메트라 칭송하는 세력도 있다고 한다.

어쨌든, 그런 얘기는 들었으나, 그냥 졸라 귀찮아서 안 갔다. 대학병원이라니, '아직 그런 데 갈 나이는 아니지 않나'라는 옹졸한 자존심이 단전에서부터 불쑥불쑥 나와 "비염을 잘 견디고 있군. 역시 자넨 싸나이야!"라는 칭찬을 해 주는 것만 같았다.

싸나이고 나발이고, 헐어버린 코로 인해 데이트가 엉망이 되거나 한다면(언제가 될 지는 모르지만, 항상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준비만 20년째다) 그깟 옹졸한 자존심이 책임을 질 것인가라는 반문에 그 녀석은 한번 너털웃음을 짓고는, "그럼 가보던가 얼레얼레~~~~~" 하고는 단전밑으로 쑤욱 튀는 것이였다.

괘씸한 놈이로고.


#4

지금이야 휴지가 너무나 흔해 빠진 덕에, 책상 앞에 두고 불순하거나 순수하거나 하는 다양한 용도로 쓰고 있지만, 휴지는 커녕 신문지조차 귀하던 시절의 사진을 보면 아이들의 코밑에는 하얀 콧물자국이 그대로 있다. 몇번이고 계속 쌓여서 마치 석고처럼 굳어져보이는 그 자국은 어른들의 사진에선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그 시대의 어른들에게 비염이란 없던걸까? 아니, 맑고 깨끗한 공기로 인해 지금보다 그 수는 적었겠지만, 어른들은 열심히 잘 닦았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하겠다.

더 써서 글을 마무리지어야겠지만, 방금 재채기 3연벙을 했기 때문에 빨리 대충 마무리짓고 휴지를 돌돌 말아야겠다. 다른 뜻은 없으니 오해말기를. 아무튼, 코풀러 간다 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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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면의 우울, 과거의 상처. 그런 것들을 숨쉬듯 가볍게 대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 일일까. 또 나는 그렇게 되기릴 얼마나 고대하며 지냈던가. 그러나 삶의 수레바퀴는 나의 통제권을 벗어난 채 돌아가고 나는 그저 올라타 빙글빙글 돌 뿐이다. 돌면서 읊조려본다. "미싱은 돌고도네 돌아가네"

 

#2


나는 신파극을 싫어한다. 과거의 상처들과 마주앉아 백분토론을 벌이는 것은 물론이요, 어쩌다 조우하는 것조차 싫어한다. 싫어하는 것을 넘어 혐오한다. 이것이 내가 타인들에게 선보이는 세상 사는 방법이다.

그러나 비가 귀신처럼 쏟아지는 밤, 또는 사브작 눈이 내려오는 밤 같은 날이면 또 술 한방울 안 섞인 맨정신임에도 스멀스멀 무덤에서 기어나오는 편린들을 느끼고 어쩔 줄 몰라 한다. 어린 날 시장에서 어머니의 손을 잃은 때처럼 허둥지둥. 평소에는 근처에도 안 가는 카페를 찾고, 기대하지도 않고 '힐링 영화' 따위를 검색하고, 전화기 주소록을 오르락 내리락하며, 전에 써두었던 일기들을 펼쳐 보기도 한다.

오랜 경험으로 이런 행위들이 저 녀석들을 다시 무덤으로 돌려보내기는 커녕 오히려 춤판을 만들어 주는 격임을 잘 알면서도, '녀석들이 파블로프고 나는 개인가' 라는 생각이 들기까지 할 정도로 나는 연전연패. 

그럼에도 그럭저럭 먹고사는 문제에 부딪히다보면 무덤이고 나발이고 불도저로 밀고 재개발해버릴 때도 있다. 어영부영 괜찮아졌나보다. 나는 드디어 새마을 새사람이 되었나보다. 라고 방심할 때 쯤이면 또 가오나시처럼 기어나오는 녀석들과의 대면. 내게 있어 요즘 몇 주는 오랜만에 꽤 강력한 녀석들 덕분에 코너에 몰리고 있는 시기였다. 

그러던 중 김도인을 만났다.

 

#3


'지대넓얕 폐인'이라면 <숨쉬듯 가볍게>가 그동안 김도인님의 발제한 에피소드는 물론이요, 지나가면서 언뜻 던진 것들까지 모두 총망라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팟캐에서의 김도인은 월리처럼 채,김,깡 사이에 숨어 이기론과 밀당을 하고 있지만, 이 책은 그 넓고 얕게 퍼진 김도인을 좁고 깊게 모아놓은 것이다. 오롯이 김도인만 있음에도 하나의 책을 정합성있게 끌고 가니, 그녀가 계룡산에서 하산한 까닭이 여기에 있나 보다.

그렇지만 한 줄 한 줄 담담하고 꾹꾹 눌러쓴 문장들 덕에, 그래서 템포를 놓치게 된다면 갑자기 휘몰아치는 당혹감에 첫 장부터 도돌이표를 하게 되었다. 그것은 늘 시간에 쫓겨 각개전투하듯 책을 읽어내려갔던 나의 독서습관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이 책의 템포는, 게을러보이는 제목처럼 아주 느리다. 뭐 숨쉰다는 표현이 거칠게 몰아내쉬는 격렬하고 격정적인 활동에도 수반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우린 잘 알지 않는가. 나긋나긋하고 중간 중간 끊어읽는 그녀의 템포를. 그래서 이 템포를 꼭 맞추고 읽으시길 권유드린다.

수학익힘책은 딱지용으로 밖에 쓰지 않고 국사책을 신줏단지 모시듯 하던 어릴때부터의 나는, 어쩐지 이 책이 김독실님의 상대성이론 편보다 어려웠다. 책을 읽다보면 내가 얼마나 망가져있는지 새삼 알게 된다. 내가 애써 외면하던 기억들과 마주하는 것은 소개팅 자리보다 더 좌불안석이다. 불편함을 넘어 고역스럽기 까지 한다. '타인보다 더 예민한 사람 체크리스트'에 펼쳐진 동그라미의 향연을 축하하며 라디오가 축가를 불러준다. "루저, 외톨이, 쎈척하는 겁쟁이" 

이렇게 문제를 아는 것 까진 성공했는데 묘안이 떠오르지 않는다. 물론 김도인님이 제시해 준 해결책을 믿지 못한다는 것은 아니다. 나도 사은품으로 온 향초를 켜놓고 명상이란 것을 해 볼 요량이다. 그런데 책 중 '시우'의 판타지가 마음에 걸린다. 내가 지대넓얕을 만난 것이, <숨쉬듯 가볍게>를 산 것이 시우의 판타지처럼 일상적이지 않는 치유의 첫 걸음일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 모든 과정을 오롯이 홀로 감당해야 한다는 것에 두려움 먼저 들었다. 겁을 먹고 걸음을 내닫으니 시야가 온전히 들어올리가 있겠는가?


하여 나는 첫 단추를 잘못 꿰고 있다는 생각에 들고나서야 책을 덮었다. 더 솔직해지자면 일종의 구원을 기대했던 것도 같다. 여기서 김도인은 꽤 냉철하다. 어투는 친절하지만, 허황된 약속은 하지 않는다. 행여나 나처럼 미련한 이가 구원의 기대를 갖고 이 책을 산다면 먼저 드는 감정을 실망일 것이라고 경고하고 싶다.

혼란스러움에 빠져있던 20대 중반의 어느날, 나는 자그마한 암자에서 노스님과 며칠을 같이 보낸적이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혼돈에서 빠져 나오게 된 한마디는, 스님의 입이나 화엄의 세계가 아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시시콜콜한 목소리였다. 내게는 지극히 일상적인 라디오가 새벽3시 산사에서 들으니 지극히 비일상적인 일이되었고, 그 뻔한 이야기로 인해 녹야원처럼 느끼게 되었으니, 인간이란 참 간사한 일이 아니던가.

그처럼 템포와 마음을 가라앉히고 일상적이지 않은 공간에서 책을 다시 들여다보니, 보이지 않았던 문장이 또렷하게 다가오며 인사한다. "팔로미" 그 문장을 따라 걷다보니 2시간 전에 내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던, 잔인했던 그녀의 목소리와 차가운 표정이 바늘처럼 콕콕 찌르던 그 감각이 잦아듬을 느꼈다. 이렇게 쓰니 뭐 거창한 신비체험 같아서 좀 염려스러운데, 후려치자면 이거다. "극뽀옥!"


#4 


팔만의 장경 속에서 내게 가장 무겁고 또 소중히 여기는 붓다의 말은 '자등명 법등명(自燈明法燈明)' 이다. 뜻은 쉬운데 따르기는 너무너무너무너무 어렵다. 김도인의 책이 어려운 까닭은 여기에 있었다. 스스로 과거를 헤집고 상처를 마주보며 답을 찾는 여행. 김도인이 제시하는 것들과 위에서 내가 운운한 '팔로미'는 그저 보조제다. 시우에게 있어 스승도, 문지기도 시우의 긴 여행에는 구원자가 아닌 안내자일 뿐이다. 김도인도 김도인의 이 책도 안내서 일 따름이다.

그리하여 나는 이제서야, '용기를 가지고 패배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책은 얇지만 이 모든 코스를 소화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아득하다. 정말로 계룡산 집합이라도 가고 싶어진다. 

언젠가 하산할 즈음이 되면 다시 독후감을 써보겠다. 그 때가 되면 이 글이 싸이월드에 저질러놓은 중2병 일기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모든 아픈 이들이여, 전우들이여, 김도인의 추종자들이여, 벗으로써 진심으로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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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떤 이유에선지, 그녀는 나를 만나는 것을 무척이나 부담스러워했다. 왜 그러는 것인지, 고민하는 것은 나의 오래된 고찰거리였다. 만남이 부담스러운 사랑이 성공하기를 바랬다는 나의 조악한 판단력은 댁들의 동정어린 시선을 빌려 그냥 넘어갔으면 한다. 굳이 찔러야 시원하시겠다면 무참히 난도질하시고.



#2


내가 그녀를 실제로 만나고 난 이후, 그녀의 인생은 늘상 긴장과 바쁨의 연속이었다. 그녀의 생활은 결핍과 자조의 연장이었다. 그 틈바구니 새로 스며드는 치명적인 외로움을 견디기 위해, 그녀는 다른 사람들에게 어깨를 빌렸다.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실제적으로 내가 쓰이는 곳과 나에게 주어진 역할을 깨닫고(사실 알아차린 것은 꽤 오래되었지만, 받아들이는 것은 퍽이나 서글픈 일이라 나머지 공부를 째는 초딩마냥 빙빙 도망갔을 뿐이다), 그 롤에 적응하는 것은 쉬운 일 만은 아니었다.

그 결과, 그녀의 일상에 있어 나의 존재는 몇순위 아래로 밀려가게 된 것이다. 학업, 연애, 알바, 잉여짓, 기타 등등 그녀의 삶을 존중해 줘야만 했다. 그것이 내게 주어진 가장 큰 역할이었다. 그녀의 삶을 바라보고 받아들이고 몇십 걸음 뒤에서 "난 널 응원하고 있어"라며 한껏 과장된 훈훈한 표정과 함께 언제라도 나를 찾아달라고 대인배인 척 애원하는 일. 흠, 꽤나 사내로써 지조를 지켰다고 할 만하다.

개뿔. 사실은 앞순위로 올라가기 위해 나름 얼마나 비벼댔는지 모른다.



#3


아무튼 그래도 끈은 이어가야 하니까, 어쩌다가 이뤄지는 만남은 대부분 그녀의 한껏 귀찮음을 견뎌야 하는 시간이었다. 설레고 행복했던 감정은 스스로의 존재가 공깃장처럼 얇아지며 대기중으로 휘발되어 갔다. 그녀는 항상 피곤해했고, 귀찮아했고, 쉬고싶어했고, 빨리 나를 보내고 집에 가고 싶어했다. 음, 항상 이라고 표현하자니 좀 쎄하고, '꽤 대부분'이라 정정하겠다.

서운했냐고? 물론. 나도 닝겐이다! 서운함이란 감정은 정말 자주 일었으나, 그것을 품에 안고 이해하는 것 또한 나의 역할이었다. 그녀는 스스로 자신의 부족함을 쿨하게 인정했고, 그녀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은 시원하게 잘라냈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갔다가 낙오되는 사람들을 지켜보며, 반면교사의 예를 수집한 사람이다.

어쩌면 그때부터 나는, 그녀가 좋아하는 것 보다 그녀가 싫어하는 것을 훨씬 더 신경쓰고 알게 된 것 아닌가 생각한다.



#4


아무튼 경험의 축적과 망상의 늪에 빠진 결과, 나는 "그녀가 싫어하는 것 중에, '나와의 만남'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되자 이제 나는 두려움이 들었다. 의식적으로 나는 거친 말과 싹바가지 없는 행동을 했다. 한 때 그녀가 조금은 좋아했었던, 그나마도 몇 개 없는 나의 면모들은 사라지고, '그저 그런' 나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시간은 좀 더 흘렀고, 그 모든 것을 극복하고 잘 해보고 싶었다. 잘 꾸려나가고 싶었다. 잘 해주고 싶었다. 한달에 한번만이라도 얼굴을 보자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망념이었던가. 하하.

한 마디 변호를 붙이자면, 그녀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의 연속이었다. 특히 나와 얽힌 것들은, 그냥 내버려 두고 잘 안 풀리면(거의 잘 안 풀린다) "어쩔 수 없다"며 서로 그냥 퉁 치고 넘어가는 일이 잦았다.

"어쩔 수 없다"는 말을 하고, 또 그녀에게서 들을 때, 나는 그 앞에 "너와 나의 해피엔딩은 1급 큐피트가 온갖 뻘짓을 다한다 해도" 라는 문장이 붙어있는 것을 가끔 느꼈다. 포기하듯 말했고, 섬뜩하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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