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이브날을 떠올리며



#1


따스한 겨울이란 것은 참 지랄 같은 일이다. 싫다는 것은 아니고, 아니, 좋다는 것에 가깝지만, 뭔가 '야레야레'한 뉘앙스와 함께 "이래서 되겠어!" 라는, 선비의 호통을 빌려와야 할 것 같은 기분이다. 모름지기 겨울은 추워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기상예보의 내일부터 추워진다는 말은 여전히 두렵다.



#2


자전거로 10분이면 닿는 곳이지만, 비내섬을 간 것은 1년에 끽해야 한 두번이다. 대부분은 그냥 지나치며 관람했을 뿐, 걷기도 불편하고 바람도 많이 부는 그 섬에 들어가 쓸데없는 감상을 만드는 것 처럼 잉여같은 짓은 없을 것이다. 잉여올림피아드에 나간다면 순위권에 들 자신이 있을 만큼, 잉여짓에 관해서는 제법 쌓아온 업적이 많다고 자부하는 바, 나는 시간이 붕 떴을 때 잉여짓을 하지 못하거나 할 만한 잉여짓을 떠올리지 못하면 지루함을 넘어 급기야 우울해지기 까지 하는 것이다.

비내섬을 가는 잉여짓은, 수 많은 잉여짓 리스트에서도 꽤 저 아래편, 우선순위가 무척이나 낮은 행위다. 아무리 아름다운 풍경도 자주 보면 지겨운 법이라는 변명과 함께.





#3


올 해, 아니 벌써 작년이 되었군. 아무튼 그 때의 비내섬은 새로운 경험요소가 몇 가지 있었다. 새로운 코스와 새로운 사람, 새로운 사진. 추석 즈음의 황금빛 논 처럼, 늘 넘실거리고 아늑했던 억새밭은 가을과 겨울의 어중간한 시간에 내팽개져진 채 초라하고 고통스럽게 휘어져 있었다. 이런 풍경을 볼 수 있던 것도, 드라마 촬영 스텝의 제지로 인해 원래 가던 코스로 가지 못하고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코스로 갈 수 밖에 없던 일 덕분이다. 이 쪽으로는 나도 처음 오는 것이었다. 이리 저리 따져도 들어갈 수 없다는 스텝의 답변에 나는 창문을 닫고 한참 후진을 하며, 일부러 들으라는 듯 모기 목소리로 욕을 했지만, 조금은 고마운 기분도 있다. 아주 조금.


차와 사람들이 꾹꾹 눌러놔서 다니기도 용이하고 억새밭도 정리되어 있는 저 쪽 코스에 반해, 이쪽은 좀 더 날 것의 기운이 물씬 풍겨왔다. 걸을 때 마다 발을 휘감는, 덜 잘려진 억새 나부랭이들이 슬슬 짜증나게 했지만, 그 거칠고 앙상한 모습에 일말의 동정심을 들었다, 어쩐지 수 년 전의 내 모습이 오버랩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아무도 보지 않을 때 과거에 대한 향수를 그윽하게 담아, 꾸역꾸역 즈려밟아 주었다. 피어오르는 과거를 목격하는 일은 이제 전혀 반갑지 않다.


강물을 보고싶다는 동행인의 요청에 오게 된 것이었지만, 겸사 겸사 근사한 억새밭을 보여주고도 싶었다. 그러나 근사한 억새밭은 커녕 이 비루함을 넘어 비참해보이기 까지 하는 억새와, 풍요로움을 잃어버린 섬의 풍광은, 어디서 어떻게 사진을 찍어도 중2병 사진이 나오게 되었다. 나는 중2병과는 다른, 조선 선비의 기풍을 이은 신사라 자부하지만, 찍히는 사진을 보자니 그런 나 역시 고개를 저을만큼 감당할 수 없는 사진이 많았다. 하드에 영구히 보관하고 임종 후 보여주던가 해야겠다. "제사를 똑바로 안 지내면, 니네 자식들 커서 이렇게 된다" 라는 유서와 함께. 줄 수 있는 유산은 없지만 제사와 차례는 꼬박 꼬박 받아내고야 말겠다는 조상님들의 지혜를 잇는 일은 꽤나 보람 찰 것이다. 

후손의 생성 가능성에 대한 생물학적 및 사회학적 고찰과 반성에 대한 지적은 사양하겠다.


동행인은, 내게 있어 지난 몇 달간 매일 본 야동처럼 감흥이 없게 된 그 강물을 보고 뭔가 곰곰히 생각하는 듯 했다. 곰곰히 생각하는 것은 사실 그냥 멍 때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학창시절, 틈만 나면 창 밖을 바라보는 나를 들먹이며 선생님들이 "ㅁㅁ는 생각이 깊은가봐" 라며 뒷담화를 하는 것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개뿔, 그냥 대체로 여자 생각을 했을 뿐이다. 물론 이것은 불순한 사상으로 그득그득 채워져 있는 나로 한정할 이야기이고, 동행인은 무언가 다른 생각을 했을 것이다. 답답한 사람이 답답한 환경에 갇혀 있었으니, 답답했겠지.

아무튼 강물이고 억새밭이고 섬이고, 모두 유난히 고요한 날이 었다.



#4


가을과 겨울 사이에서 방황하는 섬의 모양새를 계속 보자니, 썩 좋은 감상에 젖을 수는 없었다. 차라리 눈이라도 쌓여 있으면 더 그럴 듯 하겠건만, 내 눈이 보고 싶어하는 것을 억지로라도 이 섬에 조성하고 싶었다. 영원히 사랑할 수 있을 것만 같던 이 섬 역시도, 나의 사랑을 시험하는 겉모습으로 나를 맞았으니, 어릴 때 내게 들려준 억새들의 약속을 심각하게 위반하는 것이다. "언제든 내게 오면 안아줄게"라는 속삭임은 가을-겨울 잠이라도 자는 걸까. 비내섬의 사정이야 내 알 바 아니고, 나는 지금 갈비뼈가 으스러지듯 뒤에서 안아주던 그 포근함이 필요했다. 필요했다고! 

그 날들에 나를 충만하게 채워주었던 억새들도, 철새들도, 그 때의 그녀도, 모두 어디로 간 걸까.



가을과 겨울 사이에서 방황하는 나의 모양새를 계속 보자니, 썩 좋은 감상에 젖을 수는 없었다. 내 마음도, 내 각오도, 그 때의 그 감정도, 모두 어디로 간 걸까.





'전파낭비잡문기 > 비내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내섬 (4)  (0) 2017.11.23
비내섬 (2)  (0) 2017.01.07
비내섬 (1)  (0) 2017.01.07

WRITTEN BY
빵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