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나의 섣부른 기쁨은 곧 고난의 행군을 불러왔다. 옥수수와 조만으로 1주일을 사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을 수도 있으나, 가진 능력의 배를 요구하는 혁명 과업의 완수는 소크라테스의 이름빨을 받은 덕에 널리 알려진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의 참 뜻이 무엇인가에 대해 본질적이고 심도있는 고찰을 할 수 있었다. 불세출의 명곡인 만큼 <여름날>의 주법을 알려주는 기타 강의는 많았으나, 유감스럽게도 미묘하고 섬세하며 가련한 감성을 불세출이 아닌 손 끝 탓에 더이상 따라갈 수 없었던 것이다. 손 끝의 태업에 적잖이 당황했으나, 그보다 문제는 한없이 문디스러워지는 뇌에 있었다. <여름날>이란 제목을 떠오를때마다 '애시당초는 여름장이란 글러버려서...'로 시작되는 명소설의 문장이 떠올라, <여름날>도 여름장도 나의 여름도 모조리 글러버린 것은 아닌가 싶은 강한 사념이 뉴런들을 휩쓸고 다니며 각개격파, 오늘도 누군가의 뇌세포는 노벨 물리학상에 한걸음 다가서는 연구를 위해, 혹은 인류의 지적 자산에 당당히 그 이름을 올릴 중대한 철학적 고찰을 위해 그 값어치를 톡톡히 해내고 장렬히 전사하고 있지만, 주인을 잘못만난 나의 뇌세포는 안타깝게도 물 건너온 예술 영상과 출연하는 아리따운 배우들의 이름을 고이 간직하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자니, 어쩌면 천방지축으로 뛰어다니는 여름의 난동에 뇌가 익어버린 것은 아닌가 싶기도 했다. 어쨌든, 사태수습의 책임은 나에게 달려있으므로 나태한 손 끝과 혼란한 뇌 속에 통제명령을 내렸지만, 도저히 협상의 기미가 보이지 않아 이들의 연대투쟁에 백기투항을 선언하기 직전까지 몰려있었다.

이 난국을 타개하는 데 있어 평소 나의 아름다운 인생에는 1그램도 협조하지 않던 봉투 녀석의 기여가 일정부분, 으흠, 쿼크의 무게만큼은 기여했다는 것은 썩 기분 좋지는 않지만 나는 도덕적인 사람이므로 조금이나마 인정하는 바이다.

"거, 안 되는거 어거지로 하려고 들지 말고 야매로 해라 야매로"

"무사수행의 길에 포기란 없느니"

"포기는 둘째치고, 약속의 그날이 다가오는데 반절도 못치면 개망신 아니겠냐?"

"이 부분만 넘기면 웬만큼 할 수 있다!"

"4일 내내 인트로만 붙잡고 삑사리나는 걸 어쩔 수 없이 들어야 하는 내 신세도 좀 고려하는 게 어때"

"싫으면 나가시든가."

"동거인의 계약이라곤 쥐뿔만큼도 고려하지 않은 놈이로고."

"애시당초 네 놈의 무단침입으로 시작된 것이거늘"

"그건 됐고, 아무튼 그 인트로, 어차피 코드 변주 안 되잖아?"

"할 수 있.."

"아니 할 수는 있는데, 지금은 안 되잖아?"

잠시간 나는 떨리는 손 끝을 바라보았다. 손 끝에 얼굴이 달려있다면, 기타줄에 눌려 얼굴에 기스가 잔뜩 간채로 눈물을 흘리며 내게 "제발 죽여줘..."라는 호소를 하고 있을 것이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두 손을 들 수 밖에 없었다.

"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여러가지 불가항적인 환경 때문에 기한까지 과업 완수의 가능성이 다소 불투명할 수도 있는 것일 수도 있지."

"아휴, 아무튼, 어쨌든, 그러니까 좀 머리를 쓰라고"

"흐음, 계책을 짜내보거라."

"안 되는 인트로 어거지로 맞추지말고, 그냥 코드로 쑥 쳐버려"

"아니 그래도 가오가 있거늘"

"가오같은 소리하네. 백날 인트로 붙잡고 있다가 본전도 못 건질 뽄새구만."

"흐음"

그런 연유로 나는, 지금까지 그래왔듯 '야매'로 이 곡을 때우기 시작했다. 무사수행에도 때때론 실용주의적인 태도가 필요한 것이라는 훌륭한 결론을 낸 채로. 


"안녕하세요."

나긋하게 허리를 숙이며 내게 인사하는 그녀. 그녀의 앞머리가 생긋한 이마를 감추고 합쳐졌다가, 다시 홍해처럼 갈라지며 제자리로 돌아간다. 

"아, 네. 안녕하세요."

그에 반해 나의 앞머리는 강풍에 흩날리는 민들레 씨앗처럼 흩뿌려졌다가, 본모습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헝클어져 괴상한 몰골이 되어 버렸다. 나는 머리에 손을 가져갔다.

"이번엔 갑자기 다른 곡을 부탁하거나 하지 않아요."

그녀의 농담에 머리를 만지던 손 끝이 갑자기 저리기 시작했다. 앞머리는 당최 돌아올 기세가 없었다. 손 끝의 태업은 다시 시작인가.

"나름, 어, 연습을 좀 하긴 했는데, 굉장히 어려워서 어설퍼요."

"어려운 거 알고 있어요. 그래서 부탁드린거니까요."

"그래도 기대는 안 하시는게"

"그런 말은 좀 늦은 것 같은데요."

알싸한 개망신의 기운이 카페 안을 잔뜩 메웠다. 대대적으로 망할 느낌이 손 끝에 잔뜩 몰렸다. 초나라 노래가 사방에서 울려 퍼지던 때 항우의 심정이 바로 이런 것일까.

"그럼, 어쨌든, 해볼게요."

만취한 친구녀석마냥 비오는 날이면 쿡쿡 쑤시는 허리위에 널부러진듯 얹어져 있던 기타를 꺼냈다. 영 시원치 않은, 골골대는 소리를 내며 기타 녀석이 잠에서 깨어났다. 기타야, 이번만큼은 좀 힘내주면 안되겠니. 이제 잘 관리해줄게. 나는 녀석에게 간절한 속마음을 건네며, 조심스레 기타에 스트로크를 던졌다.


눈부시게 반짝거리는

파란 미소의 너의 얼굴 손 흔들며

예전 그대로의 모습으로

내게 달려오고 있어.

그토록 내가 좋아했던

상냥한 너의 목소리 내 귓가에서

안녕 잘지냈니 인사하며

여전히 나를 지켜주고 있어.


"짝, 짝, 짝"

그녀는 여백을 삽입한 박수를 세번 치고 말했다.

"XX씨는 노래를 잘 하시네요"

땀을 삐질삐질 흘리던 나는 그 말을 듣자 뒷머리가 간지럽기 시작했다. 이것은 마치 누군가 칭찬을 할 때 의례적으로 뒷머리를 긁으며 "아니에요~ 그정도는~"하는 말을 하곤, 속으로 '역시 해냈구나'하는 만족이 차오르는 것을 기쁘게 즐겨야 할 때임을 알리는 신호다. 나는 조심스레 손을 뒷머리로 올렸다.

그런데 그녀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

"기타에 비하면 훨씬요."

간지러웠던 뒷머리에 누군가 함마로 후려친 듯한 충격이 들었다. 의식을 깨우친 봉투에게 이제 드디어 손 발이 달린걸까. 사실이라면 태초에 의식이 먼저 발현되었고 뒤이어 진화가 따랐다는 학설을 발표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돌아봐도 머리 뒤에는 허공 뿐, 머리를 후려친 것은 물체가 아니라 목소리라는 것은 고개를 다시 되돌려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야 깨달았다.

"역시 야매가 맞네요. 순전히 노래하실려고 배운거지요?"

내 단 한번도 야매기타가 아님을 부정한 적이, 아니, 기타친다는 것을 알릴때에는 꼭 야매 기타라는 말을 덧붙여 불필요한 오해나 기대를 줄이기 위해 최선을 다해왔으나, 그것을 타인의 입에서 듣는 것은 그다지 환영할 만한 일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서슴치않았다.

"코드변주할 때 운지법, 하이코드 운지법, 스트로크, 아르페지오 주법. 모두 엉망이에요."

"네, 네, 맞, 맞습니다. 그렇지요."

"리듬도 중간에 늘어지고, 삑사리도 네 번이나 났어요."

"네 번이나? 아니 그와중에 그걸 세고 계셨..."

"무엇보다, 인트로를 그렇게 하는 건 반칙이에요 반칙. 이 노래에 인트로가 얼마나 중요한지 아시죠?"

"...면목없습니다."

뒷머리를 긁적이려 했던 내 손은 어느새 곱게 뒤로 모아, 컴플레인을 제기하는 고객님을 응대할때처럼, 그보다 전에 방학숙제를 검사하는 담임선생님께 혼날때처럼, 그보다 전에 방 청소를 안 해놓고 띵가띵가 놀다가 아버지께 털릴때처럼, 양쪽 손에서 샘솟는 땀을 옷에 닦아대고 있었다. 고개는 점차 수그러져 어느새 신발 앞꿈치에 묻은, 이전에는 안보였던 얼룩들이 생생히 보이기 시작했고,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격언을 증명하듯 낯뜨꺼움에 뇌가 뜨겁게 익는 듯 했다. 아아, 망했구나. 망했구나.

"그래도 노래 부른 게 좋아서, 꽤 괜찮았지만,"

라는 말도 한 것 같은데 익은 뇌 때문에 고막도 전골이 됐는지 잘 들리지 않았다.

"그러면, 제 차례인가요?"

"아, 네, 네. 그렇죠."

그렇다. 잠시 잊고 있었지만, 그녀도 곡을 연습해오기로 했던 것이다. 웬만해서는 타인의 결점을 굳이 찾아보려 하지 않는 관대하고도 너그러운 성품을 지녔지만, 뜨겁게 익은 뇌는 평소대로의 자제력을 지니지 못하고 평론가 모드로 접속해버렸다. 그녀가 혹평을 쏟은 까닭의 근본 원인은 대책없이 야매인, 허접하디 허접한 나의 기타 솜씨 때문이지만, 나의 결점을 뒤돌아보기 전에 일단 화부터 내는 어느 연예인의 전략을 써야할 때가 비로소 지금이라는 옳지 못한 결론이 샘솟았다. 폭주하는 뇌여, 제발 멈춰다오. 그것만은 아니되오.

"그러면, <옛사랑>입니다. 잘 들어주세요."

"아, 네. 부탁드립니다."


이제 그리운 것은 

그리운대로

내 맘에 둘거야.

그대 생각이 나면

생각난대로

내버려 두듯이.


일찍이 이데아론을 꺼내들으며 보편 절대적 상태에 대한 스스로의 확신과 동시에 독자에게는 불확실함을 선사했던 플라톤은 "음악과 리듬은 영혼의 비밀 장소로 파고든다."는 말을 했었다. 플라톤의 경우에는 아마도 그 마음속에 있을 동굴에 파고 들었었겠지. 영국의 왕정복고기 이름난 극작가였던 윌리엄 콩그리브는 "음악은 야만인의 가슴을 어루만져 주는 희한한 힘이 있다."고 말했다. 유래없이 많은 식민지를 건설하며 야만인들을 교화해왔던 영국인들의 눈에도 음악의 능력은 대단해 보였나보다.한편, "신은 죽었다"면서 후대에 수없이 많은 중2병들을 양산한 니체는 "간단히 말해서, 음악이 없는 삶은 잘못된 삶이며, 유배당한 삶이기도 하다."고 말했고, 또 젊은 남자와 유부녀의 불륜을 사무치게 그린 <젊은 베르터의 고뇌>를 쓴 괴테는 "음악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사람이라고 말할 자격도 없다.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때서야 비로소 반쪽 인간이 된다. 그러나 음악 활동을 하는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라는 말을 하며 글 쓰는 이 특유의 긴 혓바닥을 자랑하기도 했다. 아무튼 '옳은 인간'이 되기 위해 고민했던 독일의 전통이 베어나온 음악찬사라 할 수 있겠지 뭐. 또 누군지도 몰랐던, 지금도 잘 모르는 칼릴 지브란이란 사람은 "노래의 비밀은 노래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지닌 진동과 듣는 사람의 마음의 떨림 사이에서 발견된다."는 말을 했다. 아직 여기에 적어낼, 음악에 대한 찬사를 붙인 명사들의 수많은 말들이 남아있으나, 그녀의 노래를 듣던 나의 상태를 표현할 만할 꽤 쓸만한 글이 이미 이것들 중 하나로 표현됐으니 이만 쓰도록 하겠다.

고백하건대, 사실 그녀의 입과 손에서 멜로디가 울려 퍼질 때의 나는, 부루마블을 하다가 잠시 정신을 놓은 그 때처럼 어딘가로 유영을 떠나온 듯 해서, 나중에 인터넷을 뒤져 명언으로 대체했음을 밝히는 바이다. 저 양반들이 했던 말 따위 내가 평소에 알게 뭐냐. 

아무튼 그런 관계로, 불을 키고 스스로 익어가며 결점을 찾으려했던 나의 뇌는, 그 열기를 온전히 가슴에게 내준 채 차갑게 식어있었다. 눈과 귀가 그녀에게 인식을 뺏긴 채 넋을 잃었고, 아무 말 대잔치를 벌이려는 볼썽사나운 주둥이에게 몇번이나 되새김질을 시킨 뒤에야 감상이라고 말하기에 조악한 평을 내놓을 수 있었다.

"참, 훌륭하시네요."

"그래요? 흐음, 저는 별론데 말이죠."

"틀린 것도 없고, 너무 잘하시는데요?"

"글쎄요. 아직 썩 성에 차지가 않네요."

그녀의 고집스러운 불만족과 합의하는 것은 미뤄두기로 했다. 어쨌든 그녀가 나보다 훨씬 훌륭한 연주자라는 것을 안 이상, 감놔라 배놔라하면서 이러쿵저러쿵 비평을 달 자격이 없게 된 것이다. 심지어 그 기타실력이 빛이 바랠 정도로 훌륭한 음색의 소유자라는 것을 안 이상, 귀를 씻지 않는 것으로 목소리를 다시 재생할 수 있는 조건이라면 한 50년 쯤 귀는 커녕 귓볼 언저리 조차도 물이 닿지 않게끔 아예 싸매고 돌아다닐 수 있을 정도의 호강한 경험을 했기에, 가타부타 말을 꺼냄으로써 걸쭉한 내 음성이 내 귀로 흘러들어오는 자해행위를 할 맘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영영 아무말도 안 할 수가 없는 법, 나는 말을 꺼냈다.

"감사히 잘 들었습니다."

그녀가 답했다.

"아, 저도."

왠지 거기서 말을 끝내기엔 다소간, 피차간, 상호간, 뭔가 끈적지근함이 있어, 창피해 죽으려고 하던 뇌는 벌써 방관자 모드가 된 채 나는 이 말을 내뱉고야 말았다.

"다음엔 또 어떤 곡을 연습해올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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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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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돈을 벌어야 살 수 있다는 것이다. 하물며 노숙자일지라도 거리에 떨어진 동전 몇 개를 주우는 노동이 필요하다. 노동이야 말로 삶을 영위해가는 근본 요소임이 확실하다. 노동이 우리를 자유케 하리라!

그러나 작금의 나는 노동자가 지녀야 하는 최소한의 태도, 즉, 월급 통장에 찍히는 액수에 대한 더없이 소극적인 주관적 평가를 바탕으로, 국가가 보장한 실업급여 대상자의 자격을 지니지 않기 위해 최대한의 몸부림을 최경량으로 부리는 중이었다. 봉투 녀석은 태업 운운했지만, 확실하게 태업은 아니었다. 다만 태업과 근로 그 사이 어딘가의 지점에서 자신만의 외로운 싸움을 계속했을 따름이다. 철저히 그것을 위장했다고 여겼지만 몇 번정도 탄로날 뻔 했던 위기 - 단골 손님에게 어디 아파보인다는 얘기를 듣거나 - 를 몽실몽실 자연스럽게 극복하면서까지 그래야만 했던 이유는, 칼퇴 후에 이어진 '기타수행 폐관수련'에 있다. 노동이 우리를 자유케 하리라, 나는 그 명제를 믿는다. 폐관수련도 일종의 노동인 만큼, 완전한 자유까진 아니더라도 그에 준하는 보상이 있을 것이라 믿으며. 아니, 냉혹한 자본주의의 섭리에 견주어도 그것은 마땅히 그정도는 받을만하다. 그 보상이 무엇인지는, 에헴, 묵비권을 행사하겠다.


그리고 드디어 동호회 모임 날이 도래했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세탁을 잘못하지도 않았건만 흰 샤쓰가 노란 샤쓰로 변하는 마법이 펼쳐질 시간, 나는 결전에 임하는 무사의 자세로 칼을 차듯 기타를 멨다. 오늘따라 유난히 거울이 예뻐보여 깊은 관찰의 시간을 갖자, 봉투 녀석이 여지없이 초를 쳤다.

"죄없는 거울 그만 고문하고 어여 가라."

"자식아. 잘 좀 들여다 봐라. 승리의 깃발을 휘두르는 장군의 풍모가 보이지 않더냐."

"오, 그렇구만. 보이네 보여."

녀석은 거울을 뚫어지게(봉투가 다소 앞으로 기울여서 휴지가 하나 튀어나왔다.) 쳐다보더니 말을 덧붙였다.

"머리는 산발되고 갑옷은 다 떨어진 채 피투성이로 패전의 소식을 전하는 패잔병이 보이는구만."

"어허, 또 초를 치는군."

"네 놈의 패전이 곧 나의 승리로 이어지는 것을 어쩐다냐"

"애초에 동호회를 시작하라고 한 놈은 너라고"

"그게 꼭 너 잘 되라고 한 얘기라는 보장이 있냐."

어라? 어쩐지 뒤통수에 급격한 빙하기가 찾아와 생의 끝자락에서 공룡이 내뱉는 최후의 숨결같은 한기가 불어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일주일간의 폐관수련은 어지러이 나의 길을 방해하는 그릇된 자들을 단호히 처단할 수 있는 지조를 주었으니, 이번만큼은 녀석의 함정에 빠지기엔 마음이 난공불락의 성채 같았다.

"자, 이제 네 놈의 장단을 맞춰줄 시간이 끝났다. 나는 가노라."

끝까지 비웃음으로 일관하는 녀석에게 나는 문을 열며 덧붙였다.

"이따 두고 보시게. 나의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를 듣게 될 것이니"

육중한 철문이 닫혔다. 닫히는 문틈 사이로 모든 것을 노랗게 만드는 마법의 빛이 어둠속으로 끌려들어갔다.


그녀는 소담소담한 치마를 입고 구석자리에 있었다. 북적이는 카페 안에서 사람들은 북적이는 만큼이나 나름대로의 즐거움을 한껏 연출하고 있었다. 저 무더기 안에서 쏟아지는 말 한마디마다 어리석은 중생들의 일진일퇴가 반복되고 있을 것으로 생각하니, 출입문을 들어서는 나의 발걸음은 흡사 해골물을 만나기 전의 원효의 발걸음에 비할 법 했다. 아아, 세상이 아름답다고 믿는 철부지들은 도대체 어떻게 구제해야 하는가.

그런 와중에도 독야청청, 사방 1m 밖에 AT필드를 친 채 아우라만으로 어리석은 중생 중에서도 아귀도에 떨어질 법한 중생들의 침공을 오늘도 무사 격퇴해내는 수성의 대가, 그녀가 있었다. 머리를 긁적이며 퇴각하는 어리석은 중생들을 한 명으로 합쳐놓는다면, 아마 그의 뒷머리는 부분탈모가 생기리라. 칭찬하지 않을 수 없는 태도이다. 마땅히 그녀의 기세가 영원까지 이어지기를 잠시 기도했으나, 뭐라 말 할 수 없는 흉측스러운 마음이 기도장을 깽판쳐놨다. 몹쓸 녀석들이 현실의 방에도, 마음의 방에도 너무나 많다. 흉측한 마음의 깽판은 어느새 두 다리를 조종해 무량한 만용을 부리며 모든 어리석음을 튕겨내는 AT필드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AT필드를 딱 걸쳐있는 상태로 흉측한 마음이 말을 걸었다. 

"아, 네"

"저번에..."

"그, '나를 사랑하지 않는 그대에게' 쳐주시기로 했죠?"

흉측한 마음이 킬킬 거리고는 속삭였다. '거봐, 팔로미라고 ?'

"네, 네. 그래서 연습을 좀 해와..."

"엄청 고민해봤는데, 그 노래보다 더 좋아하는 노래가 떠올랐어요."

"아, 네."

흉측한 마음의 아가리가 상암월드컵경기장처럼 주우우우우우우우우욱 넓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네?"

"좋아하긴 하는데, 완전 좋아하지는 않아요. 그래서 다른 노래를 생각해왔어요."

"어떤....어떤 노래인가요?"

"유희열의 '여름날'이에요."

"아!"

"아세요?"

"저도 제법 맘에 품고 있습니다만"

"그럼, 그걸로 부탁드릴게요"

"예?"

"안 돼요?"

'안 돼요?'라는 그녀의 물음이 마음의 방 안으로 도달하자, 흉측한 마음이 침을 질질 흘리면서 공허한 마음의 동굴을 타액으로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그 노래가 훌륭하다는 것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으나, 문제는 나의 비루한 기타 실력이 그 노래를 연주하기에 썩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생각지도 못한 그녀의 말이 고막을 때리자, 순간 내 몸의 모든 땀샘이 햇빛 좋은 날 빨래를 널기 위해 활짝 열어제낀 창문처럼 무제한적인 개방정책을 실시했고, 덕분에 잠들어있던 땀들이 삐질대며 자유로운 해방전선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나는 대답을 찾아야만 했다.

"그게...그게 말이지요."

"왜요?"

'왜요?'라고 되묻는 그녀의 눈망울이 겨울날의 시리우스처럼 빛났다. 

"그 뭐시기...그 노래는 한번도 연습해보질 않아서요."

"그런가"

빛나던 시리우스가 순식간에 백색왜성으로 변했다. 수십억년의 시간을 넘나드는 그녀의 눈방울은 참으로 신묘하기 그지없다.

그녀가 입술을 빼쭉 내밀더니 아랫입술로 윗입술을 왼쪽으로 물고, 다음엔 오른쪽으로 물었다. 나 역시 어린 날, 동네 아이들 중에 가장 똑똑하다며 어르신들의 만장일치 판정을 받은 그 시절(동네에 아이들이라고는 동생과 나 밖에 없었다는 점은 간과해도 좋다.)의 얼굴에는 미약하게나마 지금 그녀의 얼굴과 비스무리한 무언가가 남아있긴 했다. 입술을 좌우로 삐쭉거리는 것은 과자가 먹고 싶다며 툴툴대던 말과 동시에 시행하는 일종의 안면근육 시위였는데, 유감스럽게도 엄한 부친께서는 시위에 몽둥이로 응징, 강력 진압 해버리셨다. 하지만 그 엄한 부친께서도 지금의 그녀와 마주하신다면, 몽둥이를 집어던지고 함께 시위대열에 합류하실 것이 분명하다.

말없이 관찰하던 내가 이상해진건지, 아니면 용건이 끝난것인지, 그녀는 천천히 몸을 돌리고 있었다. 공기가 회전문처럼 그녀를 감싸고 돌았다. 어쩐지 이 회전문은 그녀를 태우고 돌면 작동이 영영 멈춰버릴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니, 일종의 확신에 가까웠다. 흉측한 마음이 락페스티벌이라도 온 것 마냥 미친놈처럼 뛰댕기며 부실공사를 간신히 지탱하고 있는 마음의 방을 곧 무너뜨릴 것 같았으니까.

"다, 다음 주까지!"

나는 애타게 외쳤다. 그녀가 천천히 돌아보자, 백색왜생으로 변했던 그녀의 눈망울엔 어느새 어떤 일이 펼쳐질지 알 수 없어 궁금해하는 성운의 어둠이 깔려있었다.

"다음주모임에어떠세요?그때까지연습해보지요."

"음"

음절을 반 이상 갉아먹으며 숨을 토하듯 부리나케 뱉은 나의 대답에 그녀는 잠시 골똘한 표정을 지었다. 성운의 구름은 점점 퍼졌고, 시간이 꽤나 흐른 것 같은데 여전히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어쩌면 나는 그녀에게 '이상한 놈'이라 여겨지는 걸까. 아니, 그것만은 아니되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못 한다고 하고 다른 말이나 좀 붙일 것을. 아아, 어찌하면 좋으리오.

자책이 무럭무럭 자가번식하기 시작할 무렵, 그녀가 말했다.

"그러고보니,"

한 마디를 던져놓은 그녀가, 말을 이었다.

"이번 주에 들려주시기로 한 것은 죄송합니다."

그러고는 싱그러운 단발이 찰랑이며 쏟아지면서 고개를 숙였다. 

나는 당황했다.

"아니, 아니 그러실 것 까지는"

"아니요. '좋은' 노래를 내내 생각하다보니 기왕이면 제일 좋아하는 노래를 듣고 싶어서 저도 다른 생각을."

"그렇다고 사과하실 것 까지는 없, 없습니다만"

"다음 주에 <여름날> 연주해주시기로 했으니, 그러면 저도 나름 답례를 드리고 싶은데요."

"예?"

"좋아하시는 음악을 알려주세요. 저도 연습을 좀 해볼게요."

평소 같았으면 퇴계 이황의 문하로 들어가도 예의범절이 몸에 익은 것으로는 문하생 중 으뜸이라 평가받고 걸어다니는 예기 그 자체라 불릴만한 선비의 자세를 지녔기에 한껏 겸양있는 사양을 부려야 하겠지만, 그 때의 나는 갓끈 따위 어디다 갖다 버렸는지, 냉큼 대답을 해버렸다.

"이문세의 <옛사랑>이요!"

"아아, 그 노래요."

하지만 미처 간과하던 사실이 부메랑처럼 뒤통수에 강한 지진을 일으켰다. 과연 그녀가 이 노래를 연주할 수 있을 것인가. 다짜고짜 뱉어놓기만한 자신이 한심했다.

"뭐, 그러지요."

그녀는 웃은건지 무표정인건지 알 수 없는 표정을 보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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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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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내가 한 것은, 흑암지옥을 방불케 하는 집 구석의 오른쪽 모퉁이를 향해 수색정찰에 돌입하는 일이었다. 가뜩이나 좁은 방에 괴상하고 파렴치한 봉투 쪼가리가 떡하니 공간을 차지, 어느 시점부터 내가 월세를 내고 있는 공간이라 여기지 않게 된 공간이었다. '나의 공간으로 인식하지 않기에 청소를 하지 않는다'는 지극히 이치에 입각한 논리는, 먼지와 괴물처럼 쓰레기를 내뿜고 있는 고약한 봉투들이 다소간 어지러울 뿐인 공간이, 한 사람의 생명이라도 더 구하기 위한 소방대원의 사투가 펼쳐지는 대지진 현장으로 진화해버렸다. 

물론 내가 이 상황을 타개하려는 노력을 안 한 것이 아니다. 다만 논리적, 상식적으로 이미 내가 책임져야 할 공간이 아니게 되었기 때문에, 적극적인 개입을 할 수 없었을 따름이다. 게다가, 통 큰 양보를 통해 봉투 녀석에게 공간을 내주었으니, 방을 절반으로 나누어 빗금을 치고 공간 안에 있는 쓰레기와 먼지들에 대해 상호 간 무한 책임을 지자는 나의 선량한 제안에 녀석은

"평화 지대 구축에 장애만을 덧쌓는 잠꼬대 같은 궤변으로, 우리 공화국의 인민은 모두 똘똘 뭉쳐 이런 오만하고 간사한 제안의 저의를 꿰뚫어보고 더욱 '우리 먼지끼리'를 외치며 혁명적 논의를 이어가고 있다."

라는 해괴한 논평으로 거절, 그 순간만큼은 쓰레기를 품은 녀석이 김정은의 배를 연상케 할만큼 불량하기 짝이 없었다. 그 제안이 수포로 돌아간 이후 이 지역은 그야말로 유사이래 인류의 손이 닿지 않은 미탐사 지역처럼 고이 먼지가 쌓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곳을 굳이 나의 폐를 걸고 탐사하는 까닭은, 장판에 쌓인 먼지 두께만큼 똑같이 먼지에 눌려있는 기타를 구해내기 위해서였다.

"너는 앞으로 물건을 사지 않는게, 아니 그냥 입산출가해서 무소유의 삶을 사는 게 어떠냐?"

"무슨 뜻이여"

"네 놈이 소유하는 물건들의 운명이 너무나 안타깝다는 말이다."

"네가 신경쓸 바가 아니다!"

"이대로 놔두면, 곧 나같이 득도할 녀석들이 이 방에 가득가득 할지도 모르겠군."

"뭐시라?"

매사의 사려깊은 나조차도 깨닫지 못했던 중요한 포인트를 녀석이 짚었을 때, 심장이 씽크홀이라도 생긴 것처럼 철렁했다. 아뿔싸, 통렬한 아뿔싸였다. 저 괴이쩍인 봉투 놈 한 명으로도 족한데, 봉투 같은 녀석이 떼로 떠들어 대면 정말로 입산출가하는 것이 더 현명할지도 모르겠다. 조만간 청소를 하긴 해야겠다 싶었다.

물론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보다 더 중요한 임무가 있으니.


오랜만에 꺼낸 기타는 주인을 책망하듯 애닳픈 소리를 내었다. 줄이 다 풀린 채 '딩딩'대는 녀석을 보니, 불현듯 울화가 치밀었다.

"이 녀석도 저 녀석도 죄다 괘씸한 녀석들 뿐이로고."

봉투가 물었다. "또 무슨 궤변을 늘어놓으려고"

"생각해 봐라. 이 녀석, 지가 무슨 일주일간 음식 섭취를 못한 조난자처럼 아사 직전의 소리를 내고 있지 않냐. 우리 부친께서 내게 그러하셨듯, 가풍에 따라 강하게 키웠는데 그 결과가 이따위라니. 이 녀석의 나약함에 울화가 치민다. 울화가 치밀어."

"그 울화를 잘 새겨둬라."

"왜?"

"춘부장께서도 네 녀석의 꼬락서니를 보실 때마다 울화가 치미실테니."

항우가 살아 돌아와 용을 쓴다 하여도 한 치도 움직이지 않을, 태산보다 더 부동부혼의 사나이 자긍심에 한 줄기 새빨간 스크래치가 갔다. '조만간' 있을 대청소 때 그냥 모조리 버릴까도 싶다.


기타줄을 새 것으로 갈아끼고 먼지를 싹 청소하고 나니 진이 다 빠졌다. 작일의 나였다면 이미 지쳐서 깨끗해진 기타를 다시금 유배보냈을테지만, 당면한 목표가 시급했으므로 그리할 수는 없었다.

"웬일이냐? 도로 안 집어넣고"

"이 몸은 목표가 생기면 경부 고속도로를 시속 200km로 달리는 사내이기 때문이지"

"기타 동호회에서 또 부질없는 연심을 품을 여성이라도 만난 것이겠구만. 뻔하다 뻔해. 너무 뻔해서 신작영화의 스포일러를 당한 느낌이야"

"연심이라니, 무엄하도다. 기왕 동호회 활동을 하게 된 것, 구성원으로써 좀 더 적극적인 의무를 수행하기 위함에 지나지 않으니, 나의 순수하고 선량한 의도를 곡해하지 말도록"

"기왕 스포일러 당했으니 나도 스포일러로 갚아줘야겠다. 너, 그 연심의 결말을 내가 알려주.."

"조용! 조용! 지금 누가 소리를 내었는가! 나는 지금 무사수행의 삼매에 빠져야 하니 조용히 해주길 정중히 요청한다."

내가 녀석의 말을 끊는 일은 좀처럼 없는 일이나, 녀석은 화를 내기는 커녕 씨익 웃으며

"그럼 어디 한번 열심히 연습해보셔."

라는 말과 함께 나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녀석의 불량한 의도와는 달리 나의 연습은 순조로웠다. 코드도 찾고 운지법도 열심히 체크하며 한 소절 한 소절 열심히 반복했다. 문제는 한 소절 뿐이었다는 점에 지나지 않으니 이 기세라면 이 달안에는 마스터할 수 있는 속도였다. 그녀에게 이 곡을 연주해주겠다는 호언장담을 하긴 했지만 딱히 언제라고 시기를 언급한 것은 아니니, 꼭 다음주에 있을 모임까지 마스터해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테클걸지 마라"

"당치않는 소리. 나는 여기서 그저 미소를 띄운 채 네 녀석의 연주를 관람하고 있을 뿐이라고?"

"속으로 비웃고 있는 거 다 안다. 그리고 연주를 관람이라니, 문법부터 익히고 오도록"

"하라는 곡 연습은 안 하고 왜 관심법부터 마스터했냐. 그리고, 연주라고 하기엔 너무 조악해서 볼 꺼라고는 낑낑대는 네 꼬라지 밖에 없어서 관람이라 한 것일 뿐"

역시나 순조로웠던 연습은 녀석의 훼방으로 인해 차질을 빚기 시작했다. 부아가 치밀어 올라 두개골을 열고 승천할 것 같았지만, 잠시간의 화를 억누르고 다음 소절로 진입했다.

"오호"

"왜 또!"

"거기까지 하고 관둘 줄 알았더니만, 다음 소절로 넘어가긴 하네?"

"이미 말했듯, 나는 목표가 생기면 시속 200km로 경부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사나이라고"

녀석이 덧붙였다. "10km도 못 가서 항상 차가 퍼져버리던데"

"기억을 날조하지 마시게 제군"

가볍게 응수한 후,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연습을 이어나갔다. 세번째 소절로 접어들 무렵, 녀석이 또 말을 걸어왔다.

"그거 쳐주겠다고 또 헛된 약속을 남발하고 온 게냐"

"헛된 약속이라니. 이름을 걸고 천지신명께 올린 맹약이다."

"오호, 흥미롭구먼. 돈 받고 하는 일도 여름방학 숙제처럼 미루기만 하는 자식이, 이렇게 내일 할 일을 오늘 몰아서 하는 게. 사회학적으로 아주 흥미로운 주제야. 춘부장께서 이 모습을 보면 조금이나마 혈압이 낮아지실 것 같군."

대꾸하고 싶었지만, 굳은 살이 많이 무뎌진 손가락에 베여드는 기타줄이 반론대신 희뿌연 신음소리만 입으로 보내고 있었기에 기운이 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건전한 동아리 활동을 위해 이토록 애를 쓰는 자신의 모습은 조금은 칭찬받아도 마땅하다. 칭찬해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은 다소 아쉬운 요소지만.


천금같은 휴일을 모두 쏟아부은 결과 천신만고 끝에 1절을 모두 연습할 수 있었다. 며칠만 더 하면 완곡은 무리없이 소화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늘 그렇듯 밤이 능구렁이 같이 방 안에 스며들자, 남사스럽게도 외로움이 지렁이처럼 이불 안으로 기어들어왔다. 이불 속에서 꼬물꼬물대는 외로움을 퇴치하기 위해 나는 머릿 속으로 그녀를 그려 넣었다. 그녀를 그려넣고 보니 다소 배경이 허전하여, 다음 모임 때 모이기로한 카페를 좀 더 그려보았다. 아기자기한 카페에 홀로 앉아 있는 그녀는, 다소 민망한 말이지만 아름답다는 말을 얼렁뚱땅 붙일 수 있는 풍경으로 남았다. 그럼에도 질긴 외로움이 질척대며 온 몸에 비비적거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아름다움으로도 지울 수 없는 녀석의 극악무도함에 꼭 봉투 녀석 같았지만, 그쪽을 쳐다보면 즐거운 상상의 나래가 산산조각이 날 것이므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다만 정적을 먹고 점점 자라는 외로움을 경고하기 위해 자그마한 소리를 내보았다.

"흠냐흠냐"

당연하지만 잠이 없는 녀석은 그 소리를 듣고 또 입을 열었다. 한번쯤 그냥 지나쳐주는 에티켓은 도대체 언제 새길런지.

"야심한 밤에 망상은 금물이니라."

"망상따위 하지 않았다. 예술에 가까운 상상을 했을 뿐"

"보나마나 그녀에게 기타를 쳐주고 칭찬을 받는 것 따위의 저질스러운 생각이겠지"

바로 그것을 위해 정신을 가다듬은 것이나, 아직 본격적으로 시작조차 하지 않았으니 이런 비난은 부당하다.

"하지 않았느니라"

"할려고 했겠지"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군. 나는 그런 의도따위 없었지만, 설령 의도가 있었다 하더라도 하지 않은 일 때문에 비난받는 것은 옳지 않다 이 녀석아"

"네 놈의 지난 망상들을 적어서 경찰서에 제출하면 그대로 철창행이야. 전과만으로도 입증은 충분하다."

시덥잖은 입씨름을 하루종일 해서 그런지, 범죄를 운운하는 녀석의 시비를 무시하고 본격적으로 망상에 빠졌다. 녀석은 창문 가운데에 있던 달이 어느새 창문을 벗어나 도망갔을 시간동안이나 지난 나의 망상들을 읊조려댔지만, 시속 200km로 질주하는 망상의 오토바이는 모든 소리들을 잡아먹고 달렸다. 오랜만에 썩어빠진 독자 제위들의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붙여두는 말이지만, 기타연주를 하는 상상에 몰두하다보니 다른 상상은 그려낼 틈이 없었다. 기타를 연주하는 손이 상상 속임에도 불구, 방자하게 제멋대로 움직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망상이 아니라 예감인듯 하여 외로움이 있던 자리에 불안감이 차고 들었으나, 망각의 이불을 덮어쓰기 위해 작은 전등을 껐다.

방 안에 어둠이 켜지고, 상상의 방 역시 어둠이 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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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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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야기가 끝났다. 이 때에 이르러 굳이 생성과 소멸, 혹은 만남과 이별에 관한 고전적인 글귀들을 되새기고 싶지는 않다. 뇌리에 지나치게 가득 박혀있어, 영원을 탐하는 것조차 죄악으로 생각했던 나날들이 여전히 깊은 자욱을 내고 그 안에 도사리고 있으니. 

독자의 내면에서 좋은 책으로 결정되는 순간은, 대부분 책장을 덮고 난 그 순간이다. 쏟아졌던 이야기로 들어가 한참을 유영한 뒤, 이야기에서 빠져나와 파리한 현실의 온도를 체감했을 때, 그 이야기가 쓰라린다거나, 아프다거나, 달콤하다거나, 따스해진다거나, 두려워진다거나, 뿌듯해진다거나, 깊은 생각에 잠기게 한다거나, 등등의 감상이 온전하고도 오롯이 보존될 수 있다면 그 책은 제법 좋은 책이라 할 수 있다. 꼭 그것이 책장을 덮은 찰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삶을 영위해가는 가운데 독자에게 주어지는 난제들, 또는 아주 쉬운 문제라 하더라도, 그것들과 마주하다보면 책을 덮은 순간은 새로운 시간으로 다시 생산된다. 이 괴랄한 논리를 전하면 그녀는 항상 모순덩어리의 존재였던 나를 대할 때 처럼 어이없어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야기는 끝났으되, 내게는 끝나지 않은 것과 같다. 


#2

생각해보면, 이야기가 끝났음에도 나의 세계가 그다지 붕괴되지 않아 천만다행이라 생각한다. 8월 한 달간, 마지막 페이지가 코 앞에 있음에도 일부러 넘기지 않았던 나의 어리석음은, 역설적이게도 결말을 꽤나 편하게 맞을 수 있는 준비기간이 되어주었다. 스포일러를 잔뜩받은 영화는, 지나치게 높아진 기대나 타오르기도 전에 식어버린 설렘을 준다. 문제는 공포영화였다는 것에 있지만.

로맨스 영화로 미화하기엔 솟아나는 두려움이 꽤나 컸기에, 나는 게으르고 미덥지 못하며 뭐든지 엉성하게 매듭짓는 그 특유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결말을 한없이 미뤄왔고 그 결과 한꺼번에 받을 고통을 한 달간 할부로 받았다. 여전히 의아한 것은 그녀의 태도다. 그녀의 내적 세계는 대칭과 균형으로 잘 짜맞춰져 있는데, 나의 존재는 어쩌면 그동안 그 균형을 함부로 해쳐놓는 시간이 아니었나 싶다. 더이상 그래야 할 이유가 그녀의 내면에서 사라졌음에도 불구, 왜 미뤄뒀던 것인지 알 수 없다. 더이상 중요해지지 않아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거나, 그녀 역시 결말을 보기가 두려웠다거나, 아니면 항상 불안함을 표현하기만 했던 나에 대한 배려, 그 마저도 아니면 또 나의 단견이 닿지 않는 의미가 있거나, 정말로 아무 의미 없을지도 모르겠다. 지극히 자의적인 해석으로 나는 그녀의 배려심이라 여기기로 했다.


#3

어떤 사람의 바닥 끝을 보고 난 뒤에 지쳐 쓰러지듯 고하는 이별이 아니라면, 대부분의 이별은 아쉬움을 기저에 깔고 또다른 감정들을 양산하게 된다. 나의 경우는 아쉬움이 가장 컸다. 그녀에게 투정부리듯 전했던, 함께 하고 싶은 것들이 엄청나게 많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어느 순간부터 나의 희망사항에 대해 "생각해 볼게"라는 답을 전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퇴보하는 나의 태도에 기인한 대답이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그런 아쉬움들을 더이상 느끼지 않아도 되는 논리적 근거 역시 그녀가 만들어주었다. "그런게 꼭 나와 함께여야 한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어." 그렇다고 일거에 아쉬움이 해소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아쉬움을 느끼기 전에 자신에 대한 회의와 비판으로 채울 수 있는 말이었다. 나의 희망이 타인의 이해와 배려 속에서만 꽃 필 수 있는 것이라면, 희망을 피우기도 전에 짓밟는 것이 좋다고 여겨왔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추악한 욕심이 생각의 줄기를 휘어잡았는지 모르겠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그녀의 말대로, 내가 아무리 스스로 비판을 해도 개선이 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개선이 되지 않기 때문에, 나는 가을의 푸른 하늘을 보고 착각에 빠져, 어느 봄날 찬란하게 뿌려졌던 파란 하늘의 바다를 떠올리고, 여름의 끝자락을 고하는 키가 다 자란 풀들을 보고 망각에 빠져, 바람 세차게 불어 가슴 속과 망막에 맺힌 실루엣조차 흔들리게 했던 목장의 초록을 떠올리며, 차에서 흘러나오는, 보랏빛 목소리로 불려지는 "미안해 널 미워해"란 가사를 듣고 회상에 잠겨, 형형색색의 빛들이 요란했던 작은 방에서 보라보다 더 짙은 보라색으로 울려퍼지던 어느 목소리를 떠올리며, 도서관에서 새로운 책을 찾다 무심코 시선이 멈춰버린 모리미 도미히코의 책들을 보고 몽상에 잠겨, 멍청하고 조잡하기 짝이 없는 글들의 책으로 엮어 감사의 말에 그녀의 이름을 적어놓는 꿈을 꾸게 되는 것이다.

어리석은, 한없이 어리석은 시간은 언제까지나 나와 함께 할 것이다. 나의 존재와 그것을 칼로 자르기에는, 찰랑이는 물살이 너무 거세다.


#4

유감이지만, 나는 앞으로 그녀와 같은 사람을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이다. 가장 특별했기에, 0으로 수렴하는 가능성을 무시하고 나는 어설프게 쌓아올린 누각으로 그녀를 모시려 했다. 그녀는 누각에 들어서자 곳곳의 금가고 빈틈 투성이인 곳에서 환멸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너와 나의 다름이 결국 이해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야"라고 말했다. 나는 용납할 수 없다.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자 다짐했던 과거의 나는 어디로 가고, 이 모든 것들이 다 한바탕 꿈이였노라 퉁치길 바라는 현재의 나를. 바라지도 않은 존재에게 꿈을 제멋대로 투영하고, 또 제멋대로 서운해하는 편협한 존재를 용납할 수 없기에, 그래서 타인에게도 전해주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불완전함이란 단어의 의미에 닿기에 상당한 양의 허점을 담고 있는 내가 그녀에게 양해를 구하기엔 그녀는 너무나 완벽에 가까왔다. 그녀라는 존재를 규명할 수 있는 수식어는 꽤 많다. 합리적이고, 현실적이며, 논리적이기도 하고, 또 대부분의 면에서 완벽주의적인 기조를 유지하며, 그로 인한 스트레스는 내면의 논리구조로 격파하며, 아주 깊은 곳의 자리잡은 소녀적인 감성은 현실과 적절한 비율로 유지되며, 자신만의 이상세계가 뚜렷하고, 또 그것을 온전히 느끼는 법을 알고, 그렇기에 타인에게서 존재 이유를 찾으려는 어리석음과 거리가 멀고, 또 필요를 느끼지 않음에 결핍조차 없으며,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의 경계가 극명하고, 놀라울 정도의 기억력과 기저에 깔려있는 타인에 대한 집중력이 있다, 그 외에도 그녀를 설명할 문장은 상당히 많지만, 사실 그 어떤 문장으로도 그녀를 나타낼 수 없다. '어리석음'이란 단어로 완벽히 설명이 가능한 나와는 다르다. 그녀는 나의 모순적인 면을 이해하기 어려워했듯, 나는 그녀의 논리적 완벽성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만큼의 사랑스러운 그녀였다. 이해의 영역을 아득히 뛰어넘은 감정의 공간. 나는 그녀를 우주처럼 사랑했다. 


#5

모든 것들이 흐르고 난 뒤에 자리한 감정이, 즐거운 꿈에서 꾼 뒤에 느끼는 아쉬움과, 꿈을 이루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부정, 그리고 꿈의 환상이 현실에 뿌리는 이해불가의 것들로 가득차 있다는 것조차, 다시는 그녀같은 사람을 만날 수 없을 것이라는 강한 암시를 들게 한다. 앞으로는 어떤 이야기가 나의 세계와 맞닿아 그녀를 되새기게 될 지는 모르겠지만, 원망같은 감정들과는 한없이 거리가 먼 것들일 것은 분명하다. 

좋은 책을 읽고 나면 항상 이런 작품을 써준 작가에 대한 무량한 감사함이 피어오른다. 감사의 글이라고 보기에 지나치게 추접했지만, 이 글은 본디 감사의 글이다. 활자를 찍어내는 손가락을 타고 올라가면 자리하는 갈비뼈 언저리에 가득한 감정이, 그녀가 처음 내가 사는 시골로 놀러온 그 때의 감사함과 비슷한 것이므로.

지혜로운 그대가 앞으로 그래왔듯, 앞으로도 아무런 문제없이 살아갈 것임을 알기에, 남는 것이 감사함 뿐이라는 것에 다시 한번 감사함을 느낀다.



픽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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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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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다른 사람과의 대화를 그다지 즐기지 않는다. 귀찮다고 하는 것이 적절한 표현이겠다. 상대에게 굉장한 실례가 되는 표현이라는 것 알고 있지만, 귀찮은 것은 귀찮은 것이다. 답을 하는 행위 자체를 일종의 의무이행 정도로 생각할 때가 많다. 그런데 또 간사한 것은, 때때로 어떤 사람과의 대화가 측량이 불가능할 정도로 즐거울 때가 있다는 것이다. 이대로 모조리 집어치고 대화만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마법같은 시간이 있다. 백이면 백, 나는 그 사람과 몹시 가까운 사람이 되기를 희망하곤 한다. 그러다가도 또, 어느 시점이 되면 그 사람과의 대화가 귀찮아지곤 하니, 간사하다는 표현으론 부족할 정도로 최저의 인간이기도 하다. 

대화란 것은 때때로 끝없이 펼쳐진 푸르른 초원과 수많은 생명을 낳는 강물이 넘실대기도 하지만, 또 위구르의 사막처럼 메마른 강바닥에 푸석한 모래만 남아 황량하기 그지없는 풍광에 절망스러워질 때도 있다. 그렇게 된 연유가 감정의 고갈인지, 화제의 고갈인지, 시간의 고갈인지는 때에 따라 다르다. 감정의 고갈이라면 귀찮다는 느낌이, 화제의 고갈에는 절망스런 마음이, 시간의 고갈이라면 그리움과 불안함이 뒤섞이곤 했다.

나는 그리움과 불안함이 혼재되어 있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2

요즘 그녀는 부쩍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녀의 커리어가 어떤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지 잘 알 수는 없지만, 균형과 대칭에 극도로 신경쓰고, 스스로도 완벽주의적인 스타일에서 나오는 스트레스를 얘기할만큼 나와는 비교도 안 될 바쁜 업무를 수행할 것이 상상된다. 이러다보니 서로 하루의 패턴이 다른 만큼, 대화의 시간도 비약적으로 줄 수 밖에 없다. 그것을 온전한 평정심으로 대할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소인배가 어디가랴. 나는 줄어드는 시간처럼 그녀 안의 내가 줄어들고 있을까봐 불안하기 짝이 없다. 그렇다고 매일 같이 징징댈 수는 없는 일이다. 아니, 그럴 수야 있지만 이후에 찾아들 초라함을 나는 감당할 수 없다.

'무의미한 대화가 이어질 때에 드는 슬픔'에 대해서 그녀가 말한 적이 있었다. 나는 불안함을 감추기 위해 답장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면서도 '잘잤어?' 나 "오늘도 덥네" 따위의 보잘 것 없는 안부를 묻곤 한다. 안부를 묻는다는 명분과 함께. '의미있는 대화'에 대해 허접스런 생각을 이어가다 보니, 안부를 묻는 행위의 의미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됐다. 상대의 안부를 묻고 확인하는 것은 사실 나의 위안감을 위한 위선이었음을. 그렇다고 걱정하는 마음이 전혀 없다고 하는 것은 다소 지나치지만. 실제로 나는 걱정이란 물음표 때문에 일상이 흔들릴 때가 종종 있으니.

그러다보니 어쩔 수 없이 주말을 기대할 수 밖에 없다. 예전에도 이런 때가 있었는데, 아직 퇴사하기 전이었던 그녀는 무척이나 바빠보였고, 나는 그녀가 내가 같은 시간을 공유할 수 있는 주말을 기다렸다. 그녀와 대화할 거리를 되새기거나, 그녀의 의견을 묻고 싶은 것들을 정리하곤 했었는데, 요사이의 내가 다시 그 행위를 반복하고 있으니, 이 소인배적 기질에 더없는 자기혐오가 든다. 피어나는 그리움과 함께. 여러 감정이 뒤죽박죽된 마음가짐을 버리고 온전히 비워진 마음으로 그녀를 담을 수 있다면 참 좋으련만. 


#3

"아무리 대화를 이어가도 기억을 하지 못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 란 그녀의 말이 귓가를 맴돈다. 서로 간에 나눴던 대부분의 대화를 기억하는 그녀에게 놀랐지만, 더 놀란 것은 무심한듯 대답하는 그녀가 실은 상당한 신경을 쏟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굳이 자신의 패턴을 무너뜨리면서까지 새벽 시간의 나를 기다려주었던, 그 덕에 지금 하는 일 따위 모조리 집어치워 버리고 하루 종일 얘기만 하고 싶다고 느꼈던, 측량이 불가능할 정도로 즐거웠던 그 시간을 사실 상당한 정도의 그녀의 배려가 있었음을 나는 간과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나는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이런 저런 화제를 챙기고 있었지만, 사실 그녀가 바라는 것은 단순히 즐거운 시간을 위해 소모하는 대화가 아니었을 것이다.

이제야 알아차린 것은 아니지만, "먼저 말을 꺼내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대화를 이어가지?" 란 부담감 - 솔직해진다면 서운함 - 이 들었기 때문에 온전히 마주하지 못했던 사실이다. 아쉬움이 들고 나서야 사실을 알아차리는 이 무지막지한 옹렬함, 소위 '엽전'같은 태도엔 '이제서야 알게 됐다' 는 류의 노래를 수없이 부르는 김동률도 한심한 듯 나를 쳐다볼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오로지 소모하기 위해 그 시간을 기다렸냐고 자문해보면, 꼭 그렇지는 않다. 10편째 쓰고 있는 이 졸렬한 글에 다 담지 못한 마음, 그것이 어떤 언어로 표현해 내야 할 지 잘 모를 때가 있는 마음은 그때보다 무겁고, 그때보다 그립다. 내가 그녀를 그리워하는 만큼 그녀가 내게 실망했다면 참 쓰라린 사실이지만, 자신의 잘못을 축소하고 은폐하는 것처럼 후일 바보같은 짓은 없을 것이다.


#4

"너는 생각만 하고 행동이 안 바뀌는게 제일 문제야" 라는 그녀의 말이 귓가를 맴돈다. 문제를 마주하고 반성하는 것은 익숙한 만큼 쉽지만(사실 정말로 솔직하게 마주했냐에 대해선 때때로 문제의 소지가 있었지만) 기억에 대한 깊은 고민이 든다. 기억하는 것, 기억하기 위해 그녀와의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것, 소중히 여기는 것을 넘어 조금 다른 자세로 임하는 것. 

공전을 반복하며 공존하는 것에는 서로의 중력이 모두 필요하다. 여기선 보이지 않지만 달의 뒷면엔 충격적이리만큼 무수한 상처가 있고, 비록 물로 가득차있지만 바다에는 지구의 소멸을 넘나드는 상처가 있다. 하루에 두번, 지구와 달은 조수간만으로 대화하고 있지만, 그것의 정도도 역시 날마다 조금씩 다르다.

나는 그녀가, 그녀와의 대화가 마냥 그립다. 마냥 그리워하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계속 공전하기 위해서, 결국 공존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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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빵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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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일랜드를 꿈 꿔왔다. 원스를 접한 순간부터. 

20세기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들은 종종 한국을 '아시아의 아일랜드'라고 칭할 때가 있었다. 오랜 세월 잉글랜드에 핍박 받아온 아일랜드의 역사를 일제 치하를 겪은 한국에 빗댄 것이기도 하지만, 그 이면에 숨어있는 정서적 동질성을 빗댄 말이기도 하다. 물론 아일랜드의 단 한번도 가 본 적 없지만, 그들의 삶과 우리네의 삶은 현저히 다르다. 먹는 음식에서부터 생활하는 습관까지. 하지만 나는 아이리쉬 음악을 들으면, 서편제에서 듣던 억눌린, 구슬픈, 이룰 수 없는 꿈을 노래하는 그 음율을 듣곤 했다. 영화 <원스>에서 접한 아일랜드 뮤지션의 포크송들은 한편 , 세시봉 이후에서 김광석, 유재하에 닿아있는 한국 포크송을 들었을 때의 감정과 같은 편린들을 가슴에 남기고 흘러갔다. 오래도록 그들의 음악은 내 플레이리스트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 만큼이나, 누군가 원스 음악을 단순히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세세한 이야기들을 알고 나아가 영화 곁가지에 서린 이야기들도 함께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상상을 오래도록 했었다. 물론 언젠가 아일랜드에 가고 싶다는 막연한 희망과 함께. (아일랜드로 가는 비행기표와 그곳의 물가를 알아 본 순간 그 희망은 무기한 보류 딱지를 붙여놓았지만)


#2

그녀가 음악을, 그것도 아주 다채로운 장르로 좋아한다는 사실은 내겐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러운 면모이다. 일본의 애니 음악부터 비와이까지. 장르를 종잡을 수 없는 음악 섭렵은 그녀와 나 사이에 벌어져 있을 것으로 예상했던, 예상했던 것보다 더 컸던 그 간극을 채워주는 소중한 은하수가 되어주었다. 김동률의 음악을 마음 편히, 하루 종일 흥얼거릴 수 있다는 사람이 곁에 함께한다는 것은 개인의 역사를 비춰볼 때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의 요소이다. 행복과 불행은 종이 한 장 차이라지만, 이토록 사소한 것에 행복해질 수 있다는 사실에 기본적으로 회의주의자를 자청했던 내 자신에 놀라곤 한다.

행복이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가는 칸트 이전의 철학가들에게 끝없이 고민거리가 되었던, 동시에 수천년간 풀지 못한 난제였다. 칸트조차도 그 물음에 빗겨가는 법을 택했지만, 이후로 행복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는 다소 사그러들게 되었다. 희노애락의 인간사 중에서 희와 락의 비율이 가장 적지만, 작기에 더 없이 소중한 희와 락의 비율로 나머지 80퍼센트를 채운 노와 애, 그리고 무덤덤한 일상을 견딘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한 달에 한 번 꼴로 봐왔던 그녀의 작고 총총한 눈빛으로 나는 나머지 27일 가량을 살아가곤 했다. 물론 그녀가 없었다 하더라도 그럭저럭 잘 살았을 것이다.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그러나 그녀가 있는 삶과 없는 삶의 세상을 그림으로 그려보라면, 나는 붓에 먹물을 듬뿍 찍어 몇번 휘두른 후 '이것이 산, 이것이 강'이라며 우겨댈만한 수묵화를 그리는 것과 색깔마다 조심스레 물을 부어 그 농도를 맞춘 뒤, 수차례의 꼼꼼한 붓질로 색을 메워가는 수채화의 차이라고 답하겠다. 무엇이 전자이고 후자인지는 굳이 덧붙일 필요가 없겠다. 


#3

하지만 행복이란 것도 그리 간단한 녀석이 아니다. 행복 안에 담겨 있는 또다른 희노애락을 무시할 수는 없다. 행복이 마치 저 찬란한 극락정토나 유토피아나 무릉도원의 주거자들이 매일 같이 느끼는 감정에 가까운 것이라면, 나는 기꺼이 이승을 택하겠다. (써놓고 보니 다소 겁이 들지만) 매일같이 행복에 젖어 산다면, 진짜 행복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될 것이다. 마약에 쩔어있는 사람들처럼.

티비에선 아일랜드로 버스킹을 떠난 뮤지션들이 나오고 있었다. 평소 유난히 좋아하던 두 사람이 여정에 함께하고 있어 기대할 수 밖에 없는 프로였다. 비록 몸은 피곤함 - 항상 그녀에게 미안해하지만 사라지지 않는 그 피곤함 - 에 눅눅히 젖고 있었지만, 내 눈은 브라운관에서 펼쳐지는 아일랜드의 녹음에, 내 귀는 그 가수들의 입을 통해 나오는 음악들에 맞춰져 있었다.

내 코를 간지럽히는 내음이 익숙해지지 않는, 코를 갖다 대면 늘 심장의 '내가 여기 있다고!' 라며 외치는 소리를 듣게 되는 그녀의 체취가 함께 했다는 사실이, 그 시간을 특별한 기억으로 간직하게한 중요한 요소였던듯 하다.

웬만해서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 조금이라도 눈물을 흘릴 기회가 있으면 되도록 멀리하던 내가 어째서 그 장면에서 덧없는 화학작용을 느끼게 된 것인지 아직도 알 수 없다. 눈꺼풀이 뿌옇게 되고 초점이 흐려질 때가 되어서야 그 사실을 자각했다. 여전히 브라운관에서 음악은 흘러나오고 있었고, 그녀는 평소같은 표정으로 티비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를 발견하고 놀리듯 말을 거는 그녀 덕분에 곤란하고 민망한 상황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이번에도 역시, 탈출하고 나서야 감정의 파도를 막고 있던 방파제가 무너질 위기에 놓여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 묘한 감정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모른다.


#4

정확히는 모르지만 대략적으로 추측할 뿐이다. 행복이란 감정이, 눈을 감고 홀로 어둠에 휩쌓여 때때로 날 괴롭게 하던 불안함이 눈 녹 듯 사라져 함께하는 존재를 느끼고 어둡지만 충만한 빛을 느끼는 것이거나, 속절없이 쏟아지는 슬픔 속에서도 존재 덕분에 나는 괜찮을 수 있다는 근거없는 확신이 기저에 깔려있다거나, 그녀의 웃음소리를 들으면 곧 침몰하려던 배같던 감정이 기적처럼 솟구쳐 다시 항해를 이어나간다거나,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사형수처럼 오늘 이 순간이 차라리 마지막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거나, 그러면서도 다시 내일을 기약하며 한 때의 이별을 감내할 용기를 갖게 한다거나, 그녀의 화난 목소리를 들을 때 조차도 미안함만으로 가득차 사고의 매커니즘을 모조리 파괴한다거나, 그로인해 나의 존재 이유에 또 하나의 이유를 추가하고 싶다는 욕심이 들게한다면, 대략 비슷한 것이 아닐까 싶다.

코가 시큰해지고 눈이 흐려지는 시간은 참으로 짧았지만, 나는 그보다 길게, 그 묘한 감정에 젖을 수 있었다.


#5

뒤돌아 눕고, 뒤돌아 앉은 그녀를 바라볼 때의 심정은 분명 행복과는 부산에서 모스크바를 향해 떠난 여행객처럼 몰아치는 추위와 지난한 거리에 당혹감, 지난 결정에 대한 미안함과 후회들로 가득찼지만, 그녀는 또 한번 자신을 다독이고 나를 향해 웃어주었다. 어떤 고민도 해결되지, 아니, 해결하지 않았지만, 

속절없이, 염치없이, 좋아하는 마음만 깊어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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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빵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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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XXX입니다. 기타는...한 5년 쳤는데 야매로 배워서 엉망이에요. 잘 부탁드립니다."

숨막히는 어색함이 장내를 휘감는 카페 안, 나는 왼손으론 뒷머리를 긁적이고 오른손으론 뒷짐을 진채 엉성한 인사를 했다. 몇가락 허공에 흩어지는 박수가 증발했다. 20여 명 즈음 되는 동호회 사람들의 시선을 오롯이 받는 일은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개중 몇몇은 자신의 핸드폰을 만지작 거렸지만. 성비는 6 : 4. 남자가 살짝 우세하지만 동호회치곤 희망적이다. 뭐가 희망적이냐고 묻지 마시길. 나도 프라이버시 쯤은 가질 만한 사람이다.

자기소개라는 것은 뭘 어떻게 해도 난감하다. 너무 튀면 튀는 대로 욕 먹고, 너무 짧으면 짧은 대로 욕 먹고. 이런 것은 대강 무난에 무난을 더해 무한무난의 태세를 취하며 넘겨버리는 것이 뒤탈없다는 것은 거듭된 시행착오 끝에 얻어낸 값비싼 경험이다. 아무튼, 신입 회원은 남자 4, 여자 1명. 남자 4명이 모두 인사를 마치고 신입 여성 회원의 차례가 되었다. 나는 문득 공기의 냄새가 달라짐을 느꼈다. 남성 신입 회원들의 자기소개에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던 이십대 후반 ~ 삼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성 회원들이 갑자기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기존 여성 회원들은 신입 남성 회원들에게 지어보이던 미소와 농담들을 거뒀다. 이 무슨 난데없는 긴장감이더냐, 그녀가 무슨 죄가 있기에. 나는 몇 분 뒤 쏟아질, 쓰잘데없는 환호성과 과한 박수 소리에 이 쪽 테이블을 찡그리며 쳐다 볼 옆자리 손님들의 눈빛과, 서로의 눈빛을 관찰하며 환영의, 그러나 그것이 진심인지 무엇인지는 도대체 알 수가 없는 묘한 미소를 지을 사람들의 표정이 스쳐지나갔다. 아아, 이것이 예지력인 것인가. 방구석 무사수행 2년이면 초능력이 생기는 것일까. 그러나 예지력 따위 그렇게 순순히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 몇 초 뒤의 벌어진 상황으로 깨닫게 되었다.

"김여은입니다."

우주를 담고 있는 듯한 검은 눈동자와 날렵하고 굳센 코, 붉고도 작은 입술, 힐을 신고 같이 거닐어도 내가 그다지 작게 보이지 않을 정도의 아담한 키(딱히 같이 걷는 상상을 한 것은 아니고 대충 그렇다는 것이다), 구름을 사뿐사뿐 건널듯한 플랫슈즈, 발목까지 올라오는 앙증맞은 흰 양말, 한 쪽 팔은 반대쪽 팔꿈치를 잡은 상태로 뒷짐을 진 채 인사하는 그녀를 따라 하늘거리던 푸른 치마, 그 팔을 종종 쫓아올라 새들의 쉼터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작지만 포근한 양어깨, 유려한 샛강의 곡선을 훤히 뽐내는 목선과, 강변에서 흩날리는 억새처럼 목선 위에서 나풀거리던 검은 단발. 그리고 내가 수백번 들락거린 집 앞 편의점에서 우유를 살 때처럼, 지극히 무신경한듯한 그 목소리.

으음, 상황을 정확히 전달하려는 나의 설명이 다소 과한 감이 있지만 아무튼 그녀는 그랬다. 허공에 초점을 맞춘 채로 이름 석 자를 알리는 멘트와 함께 꾸벅, 그걸로 끝이었다. 그녀가 자리에 앉자, 박수를 치기 위해 두 손을 미리 세워 모션을 취하고 있던 앞 자리의 남자는 '응?' 하는 표정을 지었고, 그 옆의 남자는 그의 손을 바라보며 자신이 더 민망해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소개할 때마다 얼굴을 맞대며 소곤소곤대던 여성들은 그대로 멈춰, 모두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황함과 민망함이 장내에 퍼지는 몇 초가 흐른 뒤, 누군가 빈약한 박수를 쳤다.

짝, 짝, 짝

끊어지는 박수를 뒤늦게 사람들이 따랐고, 덕분에 모션만 취하고 있던 사람도 위기에서 탈출했다. 그의 표정에서 '좋아, 자연스러웠어.' 라고 여기고 있는 것이 훤히 보였다. 

그 뒤로는 기존 회원들의 무난, 무색, 무취, 무개성한 자기 소개가 이어졌다. 막혔던 흐름이 뻥 뚫렸다. 이 난국을 타개한 것은, 누군가 먼저 냈던 끊어지는 박수 소리. 칭찬할 만하다. 흐름과 분위기를 잘 읽었다는 점에서 가히 유재석의 센스에 닿아있다. 아마도 그는 모든 상황을 이해하고 속으로 몇 초간의 유쾌함을 즐기고 있었을 것이다. 

생각해보니, 그 몇 초간의 나는 다소 유쾌했던 것도 같다. 그 외에 다른 감정도 가슴 안 쪽에서 불쑥 고개를 내밀다가 이성의 뿅망치를 맞고 두더지처럼 되돌아갔는데, 그 감정의 이름을 밝히는 것은 하등 중요하지 않으므로 비밀로 부치겠다.


 

뒤풀이로 이어진 회식에 따라갔다. 벌써부터 피곤하고 다소간의 유쾌함은 얻었으니 분수를 알고 돌아갈까도 했지만, 그래도 첫 날이니만큼 얼굴을 비춰주는 것도 필요하리라. 맥주집에 주욱 늘어선 테이블로 사람들이 착석했다. 이 배치는 좌, 우, 앞 자리의 사람들 밖에 이야기 할 수 없어서 여러 사람들과 친해지기 위해선 술잔들고 돌아다닐 수 밖에 없다.

"자, 신입 회원분들, 환영합니다!"

회장의 건배사와 함께 사람들이 술잔을 들었다. 10여 명이 넘는 사람과 함께 재잘대며 술잔을 기울이는 것은 나도 오래간만의 일이라, 분위기에 취하여 흥이 돋는 일은 인생을 통틀어 손 꼽을 만큼 흔들림없는 자세를 유지하는 나조차도 다소간 들뜬 기운이 들 수 밖에 없었다. 그것도 잠시, 잔이 몇 배순 돌고 난 뒤 나는 예의 그 관찰하는 습관으로 되돌아갔다. 봉투 녀석은 나의 이 습관을 빌어

"중증 관음증이야. 그거"

라며 폄하했지만 듣자마자 각하했다. 관음증이라니, 진리를 탐구하는 첫 시작은 관찰이 아니던가. 물론 관찰하다보면 관찰 결과와 뇌리에 잔영이 남아있는 물 건너온 예술 영상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남사스러운 형태로 꿈에 나타나기도 하지만, 그런 것은 부수적인 결과물일 뿐이지 이 관찰 활동의 본 목적과는 하등 거리가 멀다 하겠다.

끝 자리 사람들이 모인 지점에서 엉거주춤 걸터 앉은 신입 남성 회원. 스물 아홉이라고 했던가. 그는 빛나는 개그센스를 선보이며 주목 받고 있었다. 옆 자리 여성의 물컵을 자신의 것과 바꾸며,

"이게 물물교환이지요 하하"

비록 나의 짧은 소견이지만, 첫 만남 자리에서 이 따위 개그를 치는 사람들은 모조리 재입대 시켜, 사회를 불편하게 만드느니 적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적과 조우할 시 총 보다 이런 종류의 개그를 치는 것이 어쩌면 지구 평화에 더욱 도움이 될 지도 모르겠다. 대포동 미사일보다 더 심장을 찌르는 듯한 충격적인 개그, 이것도 나름의 용기일까. 진심으로 정색하는 듯한, 옆 자리 기존 여성 회원의 표정에도 기계적인 웃음소리를 내는 그를 보자 어쩐지 아련해졌다.

반면 바로 반대편에서 아예 서로를 바라보며 불타는 시선을 교환하는 남녀들이 있었다. 신입회원인 20대 초반의 남성과 기존회원 20대 후반의 여성. 훔쳐 들으니 내용은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따위의 소소한 것에 지나지 않건만 왜 그 목소리들은 칠리소스를 잔뜩 끼얹은 듯한 뜨거운 내음이 가득한건지 모르겠다. 웃으며 빵긋 미소를 짓는, 키가 훤칠한 남성과 물개박수와 함께 까르르 까르르 연달아 볼이 발그레한 여성, 맞은편에서 '물물교환' 개그를 하는 것과 비교하니, 어쩌면 저들은 몇일 뒤에 진짜로 육체의 물물교환을 할 지도 모르겠다는 도덕적인 노파심이 잠시간 일렁였으나, '관음증' 운운하는 불쾌한 목소리가 떠올라 고개를 돌렸다.

양 편으로 모임의 축이 옮겨간 테이블에서 가운데 나란히 앉아 있는 두 남성이 눈에 들어왔다. 기존회원의 20대 남성 두 명은 그야말로 유유자적, 무사평안, 안빈낙도의 술자리를 만들고 있었다. 왁자지껄한 사람들 가운데의 평화로운 무릉도원, 태풍의 핵 같아서 마치 그 둘의 시간은 타인보다 백 배쯤 느리게 가는 듯 했다. 잠시 귀를 기울였다. ...치지직, 치치직 하는 소리가 그들의 대화를 엿 듣는 것을 방해했다. 이상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안개에 휩쌓여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그들의 대화에 대한 호기심이 증폭했다. 그들의 논의는 도대체 무엇이기에 이토록 위험한 호기심이 들게 하는가. 나는 조심스레 발을 내딛었다. 그러자 그곳에선,

..."그러니까 그 때, 아직 날짜도 기억해 1월 21일, GOP 들어가있는데 무슨 일이 있었냐면..."

나는 1초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들을 수 있던 그들의 대화를 파악하자마자 뜨거운 냄비에 손을 데인 사람처럼 황급히 벗어났다. 조금만 더 빠져들었어도 나는 영락없이 군대 얘기에 갇혀 앞으로 술 먹을때마다 헤어나올 수 없는 수렁에 빠졌을 것이라 생각하니 식은 땀이 줄줄 흘렀다.이런 불운은 이제 사양이라고!

반대쪽 테이블 끝의 그룹에선 진짜로 기타 얘기를 하고 있었다. 기타를 정말로 좋아한 나머지 술자리에서 조차도 기타를 꺼내어 튕기는, 20대 초반의 기존회원을 중심으로 아직 기타가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한 사람이 물었다.

"이거 칠 수 있어요? 벛꽃엔딩"

"아, 네."

벙거지 모자를 쓰고 나온 그 기존회원은 코드를 잡으며 인트로를 연주했다. 그런데 인트로가 채 끝나기도 전에,

"이것도 칠 수 있어요? <금요일에 만나요>"

라며 다른 사람의 신청곡이 날아 들었고, 그는

"아, 이거 였던가."

라며 새로운 연주를 시작했다.

또다시 몇 소절 가지도 않은 채,

"이건 어떻게 치는거야?"

라든가,

"난 꼭 이 곡을 치고 싶었어."

따위의 배움 요청을 빙자한 사실상 신청곡 메들리를 연주하는 신세가 되었지만, 사실상 완곡은 한 곡도 못하는, 그저 노래방 기계에 준하는 존재가 되어 버렸으니 일말 측은한 감정이 들었다. 그의 표정이 어두워질때마다 기타 줄도 늘어졌으나, 알콜이 쏟아진 사람들에게 그 정도 변화가 눈에 들어올리 있으랴. 아티스트의 길은 원래 외로운 법, 그의 건투를 빌며 다시 눈을 돌렸다.


앞서도 말했지만 나는 본디 관찰하는 것을 즐긴다. 12층 아파트 난간에 올라서서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차들이 어디로 향하는지 지켜보는 것도 즐겁고, 밤이면 옥상에 올라 앞 동 여러 세대들을 지켜보며 작은 방의 불이 몇 시 쯤 꺼지는지 지켜보는 것도 즐거웠다. 모두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야자 시간, 맨 뒷자리에서 그들의 뒤통수를 관찰하며 그들이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책을 토대로 뒤통수들 위에 말풍선을 그려보기도 했다. 자전거를 탈 때, 빨간불에 걸리면 몇 초 뒤에 파란불로 돌아오는지, 파란불은 또 몇 초 동안 지속되는지, 이 파란 불 다음엔 어느 신호등의 불이 바뀌는지 몇일 간 살펴보는 것도 소시민의 깨알같은 일상에서의 낙이랄까. '어쩌면 이러다가 정말 중요한 사건의 목격자가 되는 행운을 얻고 9시 뉴스에 데뷔할지도 몰라!' 라는 섣부른 기대가 앞선 나날들도 있었다.

뜬금없이 웬 자기회고인가 싶겠지만, 이는 앞으로 전개될 나의 다소 과한 관찰결과가 독자 제위의 오해, 이를테면 '언제 이딴 걸 다 보고 있었지?', 혹은 '처음부터 이쪽만 뚫어지게 봤구만' 따위의 오해들을 차단하기 위한 사전 설명이니, 글쓴이의 의도를 잘 파악해야만 하는 국어 시험에 임하듯 글을 읽어주시기 바란다.

"신입회원 여러분, 환영합니다"

출렁이는 맥주와 맥주를 감싼 투명한 맥주잔과 그것을 움켜 쥔 손가락과 그 손과 맞닿아 있는 회장의 얼굴과 회장의 입에서 튀어나온 목소리가 장안을 휘감을 무렵, 그녀의 작은 입술도 남들에게 들릴듯 말듯한 목소리로,

"환영해주세요"

라고 하는 것을 눈치챘다. 술이 몇 순배 돌고 서로 서로 대화의 과녁을 찾아가고 있을 때, 여기 저기 그룹에 살짝씩 담궜다가 어색함을 느끼며 자리를 떠나기를 반복하는, 저러다가 결국 둘만 자리잡아 군대얘기를 나눌 것만 같은 두 남성이 그녀에게 말을 걸기도 했다.

남성 A : "여은씨, 맞지요?"

"네."

남성 B : "반가워요. 잘 들어왔어요."

"네."

남성 A : "기타는 언제부터 관심가졌어요?"

"얼마 안 됐어요."

남성 B : "...제일 좋아하는 노래는 뭐에요?"

그 질문에 잠시간의 정적이 흐르다, 그녀는 

"생각나는 건 있지만 딱히 댁한테 말씀드릴 이유는 없는 것 같네요."

라는, 도저히 인간세에 남아있을 수 없는 듯한 신선의 풍모가 가득담긴 멘트와 함께 남성 B를 빤히 쳐다보았고, 두 남성은 소싯적 잃어버린 장난감을 찾는 소년들처럼 할 말을 찾느라 황망한 자세로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다, 격퇴되는 패잔병처럼 사라졌고 이윽고 그들만의 안개에 갇히게 되었다.

한편, 조금 뒤에는 예의 그, 1918년부터 복개 공사가 진행된 청계천이 다시 뜯어지기 직전까지 고여있던 물처럼 완전히 썩어 문드러진 개그를 선보이던 그가 그녀에게 다가가기도 했다. 나는 바로 전 격퇴당한 두 사람이 떠올라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그를 지켜보았다.

그와 그녀는 몇마디 인사를 주고 받더니,

"여은씨, 피카츄가 드럽게 안 까지는 귤을 까면서 하는 노래가 뭔지 아세요?"

"어? 그거 개그에요?"

"네. 완전 웃긴 개그에요 이거."

"으음, 글쎄요. 뭘까요?"

"언제언제까지나~"

나는 설마하는 심정으로 그를 지켜보았지만, 답이 흘러나오자 차마 땅 밑으로 시선을 보냈다. 완전무결한 범죄기록을 자랑하는 내가 어째서 대역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야하는지 모르겠지만, 이것이 몰래 훔쳐들은 죄라면 기꺼이 양심이 이르는 대로 벌을 달게 받아야 할 것 같았다. 이윽고 그녀가 지을 것으로 예상되는, 시베리아 사하 공하국의 기후를 닮은 냉혹한랭한 표정과 반응이 걱정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풉"

이라며 수도꼭지를 돌릴 때 처음 나는 소리처럼 물꼬를 트더니,

"으하하하하하하하하하"

라며 박장대소를, 아니 이건 박장대소 수준을 아득히 넘어 헤드벵잉이나 브레이크댄스를 추는 비보이의 수준으로 요란하게 웃어 제끼는 것이었다. 

"으아, 피카츄가, 언제언제까지나래 으핳"

그 가녀린 속눈썹에 맹글대는 눈물을 닦아가며 웃음을 간신히 거둔 그녀를 보며, 왼쪽 어깨는 수미산처럼, 오른쪽 어깨는 태산처럼 솟아버린 그는 연거푸 썩은 개그를 난사했다. 이제 '고삐풀린 그를 누가 막을쏘냐' 라며 걱정하는 나를 비웃듯, 또 그녀는 싸늘한 반응만 이어가는 것이었다.

"이렇게 물을 서로 바꾸면..."

"물물교환이라구요? 재미없어요 그거."

도대체 뭐가 재밌는 개그고 재미없는 개그인지 종잡을 수 없는 기준을 가진 그녀의 선구안도 물론 놀랄만한 것이지만, 고작 몇 초 사이에 개그콘서트 방청객에서 대법원 형사소송의 방청객으로 모드가 바뀔 수 있는건지 귀신같은 태도변화에 더 놀랐다. 저 차가운 눈빛과 말투에 충격을 먹은 그는 어쩌면 테이블을 돌며 계속 물물교환 개그를 시도하는 트라우마에 빠질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한편, 술이 몇 잔 들어가자 그녀도 폭신해보이는 양 볼에 붉은 등을 킨 채 기타 토크에 빠져있는 무리에 끼었다. 사람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돌아가며 신청곡을 내고 있을 때 그녀는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기만 했다는 점이다. 물론 옆 사람과의 농담이나 이야기를 진지하게 귀 기울여 듣고 있었지만, 이야기의 끈이 다른 이로 향할 때 그녀는 여지없이 생각에 잠긴 표정을 화면보호기처럼 띄우고 있었다.

보통 관찰중엔 주제넘게 사건에 개입하는 것을 극도로 삼가는 것이 내 주의이자 일종의 기자정신이기도 하지만, 이번만큼은 나와 독자의 알 권리를 위해 질문을 해보기로 했다.

"왜 노래 신청을 하지 않으시는건가요?"

매우 신사답게 정중하며 교양있는 나의 질문과 태도에 놀랄 법도 하지만 그녀는 전혀 아무렇지 않은 채,

"아까 질문을 받았었는데, 아직 좋아하는 노래에 대한 정리가 다 안 끝나서요."

라는 답변을 내놓는 것이었다.

"좋아하는 노래를 고르는 것에 그렇게 고민할 필요가 있어요?"

"당연한 거 아닌가요? 아무 노래나 다 좋다고 할 수는 없다구요."

"물론 그건 그렇지만, 브로콜리너마저의 <사랑한다는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이나 가을방학의 <가끔 네가 미치도록 안고 싶어질 때가 있어>라는 노래들은 누구에게나 다 '좋다'로 꼽혀지는 곡이잖아요."

"그 노래들이 싫지는 않아요. 당연히 좋다에 가깝긴 하죠."

여기서 그녀는 잠시 뜸을 들였다.

"하지만 제게 있어서 그 노래들은 '꽤 괜찮은' 정도에 가까운 걸요."

"'꽤 괜찮은' 정도라구요? 그거, 나름 등급인가요?"

"네. 상당히 후한 평가에요."

"그럼 '좋은' 노래가 도대체 뭐길래요?"

"그러니까, 지금 고민중이라니깐요."

으음, 보통 남의 문제나 고민에 간섭하는 것은 지극히 합리적인 개인주의자에 가까운 나의 모던한 성향과는 거리가 멀지만, 이번만큼은 나의 호기심(전적으로 학문적인 호기심에 가깝다) 문제가 걸려있어 살짝 개입해보기로 했다.

"넬은 어때요"

"괜찮아요."

"국카스텐은?"

"그럭 저럭이네요."

"콜드플레이"

"괜찮구요."

"라디오헤드는요?"

"뭐, 그럭 저럭이에요."

흠,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음악 성향은 마치 아나키스트의 심보 같아서, 이 장르로 묶으면 이래 저래 도망가고, 또 어떤 가수로 묶으면 셀프 국외 추방하기를 반복하며 '좋은' 음악을 찾아 동유럽을 떠도는 집시가 되었다. 왜 내가 추격자가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소라는 어때요? 이소라의 <나를 사랑하지 않는 그대에게>"

10분 여의 숨바꼭질 끝에, GG치듯 던진 마지막 질문에 그녀는

"어라?"

라며 잠시 눈을 위로 치켜뜨며 생각에 잠기더니

"으음...음..."

하며 마감이 코 앞으로 다가온 만화가처럼 고뇌에 찬 소리를 내고

"하아"

라며 어쩔 수 없이 선고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상고심 피고처럼 한숨을 쉬며

"그건 정말로 '좋은' 노래네요." 

선언하듯 인정하고, 바로 벙거지 모자를 쓴 그에게 돌아서

"<나를 사랑하지 않는 그대에게> 쳐주세요."

라는 것이었다.


그 순간 나는 비상식량도 없이 보트 한 척에 의지해 망망대해에 강제적으로 띄워진 표류민처럼 소스라친 상실감, 혹은 고립감, 또는 당황스러움, 아니, 그 모든 것들을 믹서기에 넣고 돌린 감정에 젖어 들었으나, 이내 연주를 기대하는 반짝이는 눈빛을 별빛으로 착각하고, "그래 저기가 북쪽이구나"라며 별자리를 보고 항해하는 사람처럼 현명한 사람의 자세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것이 진짜로 별빛이 아니라는 것이 다소 위험한 사실이었지만.

"음, 그 노래는 몰라요."

하지만 벙거지모자를 쓴 회원의 답변에, 별빛은 나도 모르는 새 초신성 폭발을 마치고 이미 백색왜성으로 찌그러들어 아무런 빛도 남지 않은 채 어둠 저 너머로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나는 무엇을 의지하여 항해해야 하는가. 긴 항해가 물거품이 된 것만 같은 두려움이 배 안으로 쏟아져 내렸지만, 나는야 사나이, 이런 것에 지지 않아야 하는 법이다.

"그거, 제가 다음에 연주해볼게요!"

나의 말 한마디에 백색왜성은 시간을 거슬러, 흩어졌던 초신성 폭발의 잔해들과 감마선이 다시 모여들고 영롱하고 찬란한 빛을 내는 별로 바뀌었다. 나의 항해도 그 덕분에 계속할 수 있을 것 같아 다행이었다.

"음, 기대되네요. 다음 모임 때는 가능하겠죠?"

"네. 물론이죠."

"간신히 좋은 곡을 찾았는데, 못 듣고 넘어가면 아쉬울 것 같아서요."

"앞으로도 계속 찾아보죠. 기대한 만큼 아쉽기도, 또 뿌듯하기도 하는 것이니까요"

나의 궤변에 그녀는 잠시 갸우뚱하더니, 

"그렇군요!"

라며 나도 하지 못한 납득을 거둔 채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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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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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아아아아악!"

열대야의 가혹한 시련 속에서 창문이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입을 벌리고 있고 뜨듯한 바람이 창문의 아가리로 한없이 쏟아져들어오고 있었다. 그럼에도 밤은 고요하고 사람들은 잠이 들어, 모든 것이 조화롭고 태평해서 이대로 전쟁이 터진다 해도 "그래. 쉴 만큼 쉬었으니 전쟁쯤이야."라며 가볍게 납득한 후 총을 들쳐메고 나갈 수 있을 정도로 평화로운 새벽을 헤집고 터진, 석연치 않은 비명이 창문의 아가리를 향해 뻗어나갔다. 

"뭐하냐 너."

"으어억, 소..손이..."

"손이 뭐."

"손이...으아아아.."

"뭐하냐 너. 왜 오징어가 되고 있어."

"손이....오.....오....오그라든다아아아악!!!!"

"....멍청한 놈"


여전히 달빛 은은한 밤. 오늘도 월용할 양식을 구하기 위해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 뛰어든 한 부품이 되어, 이리저리 육체의 정신의 담금질을 반복한 고된 하루를 마치고 퇴근한 나는, 지난 밤의 이야기를 되새기며 하루종일 비웃을 멘트를 준비했을 봉투 녀석의 계략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 바로 잠이 들었다. 녀석의 간교한 함정에 빠질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침대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깊은 잠에 빠졌을 때즈음, 아뿔싸, 지난 밤의 에피소드가 꿈의 장막에 영화처럼 펼쳐지고 말았다. 꿈 속의 나는 애써 그 장막을 걷어 치우려 노력해봤지만, 봉투 녀석이 손잡이를 길게 늘리더니 내 발을 부여잡고 한 치도 움직이지 못하게 막았다. 장막에서는 월하독부, 달밤 아래 홀로 부루마블을 하는 나의 모습이 비쳐졌고, 롤러코스터같은 감정 분출 행동을 보이더니 어느 순간 절체절명의 위기에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바로 그 때, 육중한 철문이 열리며 남녀남녀의 인간들이 뛰어든 것이었다.

차마 더 이상 볼 수 없음에 나는 꿈 속에서 손을 꺾었다. 그때문에 꿈에서 깼으니, 비록 관절을 잃었으나 긍지는 취할 수 있었다는 훌륭한 무사의 이야기로 독제제현께서 후세에 전해도 좋을 것이다.

"자다가 뭔 지랄이여 갑자기"

"아, 아무것도 아니니라."

"얼레? 정색하는 걸 보니 또 뭔가 추잡스러운 꿈 꿨구만."

"네 놈은 알 것 없음이라."

"어젯밤 꿈 꿨나?"

"..."

"풉"

녀석은 일소를 머금고 잠시 뜸을 들였다. 나는 재빠르게 긍지를 취할 수 있는 탄탄한 논리에 기반한 멘트들을 궁리하고 있었다. 녀석의 어떤 비웃음에도 단호히 반격하기 위해서. 그러나 녀석의 이어진 말은, 뜻밖이었다.

"너 말야."

녀석은 눈이 찢어진 채로(gs 글자가 늘어져있었으니 대략 그런 느낌인 것 같았다.)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부러우면 부럽다고 하는 게 좋아"

"부럽지 않다! 그깟 한 때의 허상따위. 남녀남녀가 달빛 아래 모여 맥주를 마시든 뭔 지랄을 하든, 인간사에 피고 지는 크고 작은 에피소드들 뿐이다. 모두 다 윤회의 수레바퀴를 더욱 밀어제끼는 부질없는 짓일 뿐이라고."

"뭐가 부러운 지는 아직 얘기 안했는데?"

이런 젠장.

"거 드럽게 부럽나보구만"

"부럽지 않다고! 사나이 가는 길에 시기와 질투 따윈 없다. 그런 것에 굴복하면 지는 거라고."

"너는 시기와 질투를 하지 않아도 연전연패의 나날들 아니더냐"

"네 녀석은 사실을 교묘하게 부풀려서 타인을 공격하는 삼류 언론인 같은 기질이 있어. 누누히 말하지만 말이지."

"어쨌든 사실에 기반한다는 것이군. 또한 나 역시 네 놈이 자꾸 같은 실수를 반복하니까 이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준비했던 반격멘트들이 꽁지 빠지게 퇴각했다. 삼십육계 줄행랑. 사나이 긍지가 잠시 휘청했다. 

"좋다. 내가 해결책을 하나 제시해주지."

"뭐냐? 또 지난번 처럼 간악한 술수를 쓰는 거면 이번에야 말로 손모가지를 잘라주겠다."

"들어봐라. 현인의 지혜를 빌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뭔데 그게."

"듣고 싶지? 굴복하면 지는 거니 뭐니, 사실은 해결하고 싶고 너도 남녀남녀 무리 속에 끼어든 불나방이 되고 싶지?"

"얼른 내놓기나 하라고!"

본디 초조함과는 거리가 먼, 대해와 같은 인내심에도 한 줄기 파도가 일었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가.

"주변에 사람이 모이지 않는다면, 사람들 속으로 찾아가는 수 밖에."

"그걸 누가 몰라서 이러고 있냐?"

"개뿔이나, 네 놈은 알기만 하지 움직이진 않잖아."

"그거야 다 무언가를 결행하려 할 때엔 심사숙고하여 마스터 플랜을 짜은 후 수차례의 시뮬레이션과 시행 착오들을 거친 후에"

"개소리말고. 잔말 말고 들어라."

말을 끊다니. 아, 도대체 세상이 어떻게 되는 것인가. 매너가 사라진 세태에 나는 잠시 서글퍼졌다.

"동호회를 들어라."

"엥?"

"동호회 말이다."

"뭔 동호회?"

"맨날 주접 떨면서 혼자 기타줄이나 튕기고 있지 말고, 사람들과 좀 함께 하라고."

"아, 기타 동호회?"

"뭐가 됐든 좋은데 네 놈 그 특유의 허세를 위해선 아무래도 쥐똥 만큼은 손에 익은 기타 동호회가 낫겠지."

"허세라니, 입조심해라. 무사수행으로 농축된 결과물을 그리 얕보지 말라고?"

"맨날 똑같은 것만 연주하고, 조금이라도 어려운 거 나오면 집어치는 주제에 무슨 결과물. 입 아프게 하지 말고, 빨리 찾아보기나 해봐."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 당시 티비에서는 꽤 인기를 구사하던 시트콤이 있었다. 논스톱시리즈라고, 대학생들의 청춘연애일상코믹개그판타지류의 모습을 보여주는 시트콤이었다. 지금 다시 보자면야 정말 말도 안 되는, 어처구니 없는, 이런 곳이 있다면야 그 즉시 행복 대학교로 이름을 바꾸고 '극락국 행복대학교 한국 캠퍼스' 정도로 이름을 바꾸어도 자타가 공인할 만한 풍경을 보여주는 허황된 프로였다. 문제는 이것을 사회의 단맛쓴맛 다 본 후에야 깨달았다는 것이다. 애초에 대학을 가지 못한 나로썬 직접 겪지 못했지만, 몇 없는 지인들의 대학생활 고군분투를 보면 어렴풋이 깨달을 만한 것이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당시의 꼬꼬마 세대들은 그 프로를 보고 환상에 젖을 수 밖에 없었으니, 소위 순정만화를 보고 백마탄 왕자님을 꿈꾸는, 틈만 나면 책상의 금을 치고선 최대한 멀찍이 떨어져 앉던 옆 자리 짝꿍 여자아이의 심리도 이해할 만한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단연 백미를 꼽자면, 동호회 활동에 있었다. 물론 연애 이야기야 탐 나는 것이지만, 나는 원체 타고 나기를 그런 말랑말랑하고 잡스러운 감정에 혼을 빼앗기는 것과 거리가 먼, 바위와도 같은 마음새를 지니고 태어났기에 진부한 사랑 이야기 따윈 흘려 보내며 모른 척 키스신만 잠시 감상하는 정도로 만족할 줄 알았다. 다만 주인공들의 예의 그 동호회 활동은 시선을 빼앗기에 충분했다. 청춘의 서브 퀘스트를 수행하는 보람찬 취미 활동, 나 같이 다양한 재능을 지닌 이에게 선망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는 소재였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중학교 내에서 내가 가입하고 있던 동아리는 <역사탐구 동호회>라는 거창한 이름에, 사실은 국사책 펴놓고 시험공부를 대신하는 곳이었다. 2학년이 되어 동아리를 선택할 수 있게 되자, 한 선배는 "너 국사 성적 좋다며? 혹시 답사같은 것도 관심있니?"라고 나의 진심어린 혼을 이끌려놓고는, 주저없이 가입하고 첫 모임에서 "첫 답사는 이 고장을 아름답게 만드는 활동이 좋겠지"라는 불길한 멘트를 날리며 동네 뒷산으로 올라가 쓰레기 줍기 활동을 시켰다. 괴이하기 짝이 없었으나, 첫 답사니까 그려러니 했다. 붙여두는 말이지만, 그 산은 이름도 없는 산이라 애초에 향토 지리서에서 한 줄 찾아보기도 힘든 산이다. 주목할 만한 역사로는 전쟁에서 전사한 사람들의 공동묘지가 있었다는 정도. 

불길함은 항상 사실이 된다. 다음 모임에서 그 선배는 "그동안 고마웠고. 난 이제 여기 탈퇴할게"라며 후배 여학생들의 짝사랑을 훔쳐가는 그 빛나는 미소와 함께 사라졌다. 밴드 동아리에 가입하기 위해 역사탐구 동호회에 사람을 모집해서 명맥을 잇게한다. 라는 담당 쌤과의 교섭이 있었다는 것은 아주 뒤늦게나 알게 된 사실이다. 그 뒤로 나는 어떻게든 동호회를 건설적으로 만들기 위해 여기저기 답사를 제안했지만, 담당 쌤은 

"답사가면 지도 선생도 나가야 하잖아~ 귀찮아 자식들아~"

라며 일언지하에 거절. 게다가

"답사 따위 느그들 대학가면 신나게 할 수 있으니까, 진짜로 답사하고 싶으면 역사과를 가기 위한 국사 공부를 하는게 좋겠어."

라는 십년지대계를 제시하며 보충수업을 시켰다. 학창시절의 추억이 죄다 어째 이런 식인가 싶다. 여기에 막상 동아리 시간이 되어 국사책을 꺼내놓으면, 꼭 

"xx야~ 일로 와바. 어깨 좀 주물러라~"

라며 한 시간 내내 강제 노동을 시키면서, 그마저도 하는 말이

"야, 신라 금관을 구부리면 휠까 안 휠까? 그거 순금이라던데"

따위의, 도대체 역사 선생으로서의 자각은 안드로메다가 아니라 저 멀리 퀘이사 즈음으로 쾌속으로 날려보낸 발언을 일삼았으니, 내가 역사쌤이라는 어린 날의 목표를 포기하게 된 계기에는 일정 부분 그 양반의 책임도 있다. 지금에 와서 정신적 피해보상 청구 소송을 건다해도 시효가 만료일테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좌우간 나의 학창시절 추억이 그렇게 썩어 문드러질 때, 모두가 동경하던 밴드 동아리는 시 도 대회를 출전, 각종 상을 휩쓸며 학교를 대표하는 동아리로 거듭났다. 나는 밴드 동아리에 소속된 녀석들이 듣는 음악 수준을 아주 잘 알고 있었기에, 코웃음치며 시류에 영합하지 않는 고고한 절개와 높은 이상을 포기하지 않았다. '녀석들의 음악은 진정한 음악이 아니야! 자본주의의 산물들일 뿐이지.' 나의 강경한 발언에 당시 베스트프렌드였던 한 여자아이는

"그러니까 네가 여친이 안 생기는 거야"

라며, 우째 지금 봉투 녀석과 비슷한 말을 들려주었던, 자못 안타까운 기억도 방금 딸려왔다.

물론 시기와 질투를 전혀 하지 않았냐고 묻는다면, 보편적 권리인 묵비권을 당당하게 제시하겠다. '밴드 동아리에 대한 열등감 때문에 기타를 배웠구만?'라는 의문을 품는 독자들에겐, 댁들이 왜 평소 '이래서 눈치빠른 녀석들은 싫다니깐?'라는 말을 듣는 것인지 자각을 좀 하길 바란다.


심사숙고 끝에 밤새 닥쳐오는 출근을 외면하고 동호회를 뒤져보았다. 기타 동호회 <아르페지오> 적당한 품위를 지닌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거 동아리 고르는 것도 허세에 찌들은 이유구만"

녀석의 빈정거림은 무시하고 나는 가입신청서를 넣었다. 아, 드디어 절차탁마한 기타실력을 뽐낼 수 있는건가. 마음 맞는 사람과 버스킹을 하는 것도 괜찮겠지. 모임 후 술자리에서 즐거운 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운이 좋으면 검은머리를 가진 묘령의 여인과 함께 행복의 나라 저 편으로 떠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이 봉투 녀석의 조언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자못 마음에 걸리는 일이나, 어둠 속에서 피어나는 즐거운 상상을 즐기며 설레는 마음을 달랬다. 오리엔테이션이 기다려진다.

잠이 들기 직전, 어쩐지 봉투 녀석이 또 그 불쾌한 미소를 슬며시 머금은 것 같지만, 표정이 없는 녀석의 표정을 찾게 되는 것은 무익한 일이기에 무시하고 잠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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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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