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매일 세 마리의 고양이를 만난다. 


개묘차라는 말을 들어본 적은 있지만, 캐릭터가 명확하게 나뉘는 녀석들의 꼬라지를 지켜보자면 자못 우스운 생각이 들다가도, 동네의 대빵이 치즈(돼지)고양이 녀석의 무언가 오만하고 나른하며 사람을 아래로 내려다보는 듯한 눈빛을 마주하면 열폭에 가까운 감정이 샘솟는다. 저 자식, 분명 방금 날 비웃은거지? 라며.


녀석의 이름도 성도 모르지만, 벌써 몇 년을 본 건지 모르겠다. 녀석에게 딱히 밥을 주는 것은 아닌데 어디선가 알아서 잘 주워먹고 다니는지 예의 그 풍만한 풍채는, 단체로 식량난에 허덕여 수령님 만세를 부르는 북한 군인들처럼 날 보면 애교를 부리는 다른 동네 고양이 녀석들과는 달리, 놀랄만큼 줄지도 늘지도 않았다. 나름대로 그 풍채를 유지하는 게 자기관리인듯 했다. 

어디까지나 귀납적인 결론에 지나지 않지만, 아무래도 녀석의 자기관리 비법은 예의 그 게으름이 아닐까 싶다. 녀석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는 것은 극히 희박한 일이라, 한 겨울 담배피러 나와 벌벌 떠는 내 모습을 보며 하품만 쩍쩍 내뱉는 녀석에게 괜한 심술로 위협적인 포즈를 취해봐도 이내 고개를 돌리는 것이 고작이다. 녀석이 몸을 움직이는 때는 주로 두 가지인데, 무언가 먹을 것을 찾으러 가거나, 무언가 먹을 것을 가져온 동네 고양이를 삥 뜯거나. 

전자의 경우는 느릿느릿 슬금슬금, 한없이 잉여에 가까운 숫사자의 엉덩이와 비슷하지만, 후자의 경우는 하이에나를 줘패는 숫사자처럼 무섭기 그지없다. 여기서 다른 고양이가 등장할 때다.


전형적인 코숏인 또다른 동네 길냥이는 치즈대빵 녀석과 번갈아가며 등장한다. 치즈녀석이 산으로 가면 녀석이 반대편에서 뿅하고 튀어나오고, 치즈 녀석이 다시 하산하면 녀석은 금새 괴도 루팡처럼 스르르 사라진다. 치즈 녀석이 킹무성처럼 오만하고 게으르며 느긋느긋해서 사람의 열폭을 돋게 한다면, 녀석은 요리조리 살랑살랑 민첩하게 잘 피해다니는 타입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어느날, 치즈녀석이과 코숏이가 누군가 먹다 버린 참치캔을 두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쓰레빠 질질 끌며 담배피러 나온 나는, 그 즉시 의자를 가져다 앉고 참관을 시작했다. 나는 일반적으로 육중한 캐릭터보단 날렵한 캐릭터를 좋아한다. 물론 더킹오브파이터의 김갑환과 장거한 중에선 장거한을 고르지만, 그 정도를 빼면 날렵한 캐릭터를 응원한다. 당연히 코숏이를 응원하며 패배할 치즈 녀석을 위한 육포를 준비했다.


그러나 40년 직장생활을 마치고 정년퇴직 후 집에서 빈둥빈둥 노닥거리는 어느 아버지같던, 방금 세 끼를 부페를 다녀와 배가 불룩해 움직이는 것도 힘들어 누워있는 내 친구같던, 겨울 방학숙제가 마감일이 내일 앞으로 다가왔지만 그저 빈둥거리며 "몰라 손바닥 맞고 말지"라 넘기던 내 과거같던, 사파리 암사자의 하렘 속에서 하품이나 하다가 관광객이 몰려드면 매너리즘에 가득찬 리액션을 하는 것이 고작인 숫사자같던 그녀석이, 놀랄만큼의 스피드와 광속 냥냥펀치로 코숏이를 제압하더니, 이내 그 육중한 체급으로 코숏이를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신경전으로 끝날 줄 알았는데, 저 녀석들, 꽤 심각하다.


아무튼 육포라는 데우스엑스마키나를 던지며 시합을 종료시켰지만, 코숏이는 나름대로 상처를 입은 듯 했다. 육포를 입에 물고 고새 어디로 사라져버렸다. 다시 치즈녀석을 보니, 이 자식, 언제 그랬냐는 듯 도로 그 게으르고 오만한 표정으로 입에 묻은 참치 기름을 낼름낼름 핥고 있다. 녀석의 태연함에 부아가 치밀어올라 참치캔을 치워버렸지만, 이미 깔끔하다. 


그때야 나는 깨달았다. 녀석이 누굴 줘 팰 때와 뭔가를 쳐묵할 때 만큼은 우사인볼트의 달리기나 아웃사이더의 랩핑보다 빠르다는 걸. 저 오만하고 게으른 모습이 사실은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를 숨기기 위한 위장술이었다는 걸. 몹쓸 자식같으니라구.


그 뒤로 코숏이는, 전보다 더 치즈 녀석을 경계했다. 아니 이젠 치즈가 햇볕 좋은 오후, 따스한 햇살에 취해 조느라 고개를 꾸벅거릴 때, 사정없이 꾸벅거리는 졸린 눈을 어쩌다가 마주할 때면 부리나케 튀어 바람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전혀 힘을 주지 않은 눈빛임에도 누군가를 떨게 하는 힘, 노란치즈돼지녀석에게는 태생적으로 마초적 기질이 있는 게 분명하다. 그것은 가끔씩 나도 희망하는 바이긴 했다.


시간이 좀 지난 후, 가게에서 길냥이를 키우기 시작했다. 물론 내 고양이는 아니다. 만사가 귀찮고 잘 챙길 자신도 없는 나는, 동물을 키우지 않는다. 같은 이유로 연애도 안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두자. 


누구를 잘 챙길 자신은 없지만 치즈돼지녀석과 코숏의 관계가 인상에 남은 뒤로, 나는 새로 만난 길냥이를 눈빛으로 제압하기 위한 여러 시도들을 했다. 8개월이 지났다. 녀석은 나름대로 잘 자라주었다. 오늘 나는, 유난히 까부는 듯한 녀석을 제압하기 위해 눈에 힘을 주고 잔뜩 찡그리며 위엄있는 어조로 명령을 내렸다. 녀석은 말을 잘 들었다. 발 빝에서 식빵을 구우며 나를 올려다 본 채 경청중이었다. 내 마음 속에서 만족함과 흡족함이 피어올랐다. 짜식, 키운 보람있구먼. 내 얘기가 끝나자, 녀석에게서 냥냥펀치가 날아왔다.


고양이도 못 다루는 데 누군가와 원만하고 이상적인 관계를 맺기란 애시당초에 틀렸다는 결론을 새삼 확인하며, 험난한 새디스트의 길을 걸으며 욕망을 성취하기 보다, 가까운 떡볶이 집의 소소한 행복에 감사하며 대충 떼우고 살자는 현자타임에 젖어본다. 아니, 조금 더 깊게 사유해보자면, 고까운 것을 보면 냅다 냥냥펀치를 후리는 녀석들처럼, 아름다운 사랑의 현장을 보면 냅다 죽창을 후리는 열사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도 든다.


생각이 거듭되는 가운데,

치즈녀석의 한심한 표정이 자꾸만 아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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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빵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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