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노랫말이라는 말은 반쯤만 사실에 부합한다. 시가 곡()이었던 시대도 있었으나, 이미 노랫말을 만드는 작법과 시를 쓰는 작법이 너무도 달라진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시가 노랫말로 여겨지는 까닭은, 시를 지을 때와 노랫말을 엮을 때의 마음가짐이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일지 모른다.

 

소설가가 되려고 했던 이제니 시인의 세 번째 시집,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은 시는 노랫말이라는 우리의 통념을 거부한다. 시인의 언어는 노래가 아니라 소설이다. 긴 호흡으로 나열되는 단어와 문장들은 분명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비록, 소설보단 덜 적나라할지라도.

 

마주 보며 되비치는 두 개의 거울로부터 시작할 수 있다. 죽을 때까지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사랑이 있다.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 비선형적으로 흐르는 곳에서. 점층법이 더는 어울리지 않는 장소에서. 이미 찢겼지만 다시 찢겨야만 하는 표면이 있다. - 발화 연습 문장

 

 

좀처럼 행으로 끊어지기를 거부하는 시인의 시는 이것이 분명한 이야기임을 선언한다. 그런데 우리는 좋은 이야기에서 납득할 만한 개연성을 찾는다. 개연성이 부족해지면 우리는 그 이야기에 ‘B이라는 꼬리표를 붙인다. (때로는 B급이 칭찬이 될 때도 있다) 이러한 문장이 소설이 아니라 시가 될 수 있는 까닭은, 이야기가 한껏 움츠러들었기 때문이며, ‘시는 노랫말이라는 오래된 관념이 적중하듯 읽는 이의 입술이 움직이는 형태, 그리고 그 입술에서 뿜어지는 목소리의 형태를 한껏 의식하고 있다. 다시, 발화 연습 문장이다.

 

중복된 문장과 반복된 약속과 수정된 광기와 망각된 용기와 드물게 피어오르기도 했던 온건한 사랑이 뒤섞인 목소리에서. - 발화 연습 문장

 

시가 노랫말이라면, 이는 밴드 넬의 노랫말과 닮았다.

 

비난의 채찍과 멸시의 수갑을

외로움의 족쇄와 희망의 해체를

녹이 슨 열정과 망각의 권태를

이겨낼 수 있는 끝없는 용기를

Promise me - Promise me

 

절구로 끊어지는 넬의 단순한 노랫말은 운율이라 하는 시와 노래가 공유하는 코드에 충실했다. 이제니 시인의 문장은 절구로 끊어지지 않으나, 어지럽게 펼쳐진 잉크 안에 분명한 운율이 숨어 있다. 이것이 이 분연한 이야기가 시가 될 수 있는 첫 번째 까닭이다.

 

그런데 시에 운율을 부과하는 것은 여전히 곡()이었던 시절의 관습이다. 기나긴 문장 속에 배치된 단어들은 단지 나열에 지나지 않는가. 우리는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운, 또는 내 안에 울림을 주지 않는 시를 만날 때 그것을 기계적인 단어의 나열처럼 느낀다. 그런 점에서 이제니 시인의 시는 친절하다. 문장이 길다는 것은, 소설보단 덜하나, 다른 시보다는 더 쉽게 시선을 따라갈 수 있게 돕는다.

 

해변은 자음과 모음으로 가득 차 있다. 모래알과 모래알 속에는 시간이 가득하다. 시간과 시간 사이로 모래알이 스며든다. 미약한 마음이 미약한 걸음으로. 미약한 걸음이 다시 미약한 마음으로. 너는 너를 잃어가고 있다. 너는 너를 잃어가면서 비밀을 걷고 있다. 노을은 점점 옅어지고 있다. 슬픔은 점점 진해지고 있다. 언제가 가게 될 해변. 우리가 줍게 될 조약돌과 조약돌이 호주머니 속에 가득하다. - 언젠가 가게 될 해변

 

 

해변은 자음과 모음으로 가득 차 있다는 시를 어떻게 해석하든지 그것은 전적으로 독자의 자유에 달려 있다는 명제를 전제로 한다면, 자음과 모음은 해변에 밀려오는 파도가 부서지면서 뿜어내는 파열음처럼 들린다. 이 문장을 시작으로 열거되는 시어는 자연히 해변을 바라보는 화자의 시선을 따라가게 한다. 자음과 모음으로 가득 찬, 파도가 부서지는 해변. 홀로일 땐 너무나 미약하지만, 항하사의 수만큼 모이면 능히 파도를 부숴버리는 수없이 많은 모래알. 그 모래알의 수만큼이나 쌓인 와의 시간들. 시간이 흐를수록 옅어지는 추억과, 그 추억만큼 약해지는 미약한 마음’. 필멸하는 존재라면, 언젠가는 반드시 가게 되는 망각의 해변을 향해 우리는 걷고 있다.

 

이렇듯, 시는 시선을 따라 단어를 내뱉고, 다시 그 앞선 단어를 이어받아 새로운 문장을 창조해낸다. 물론 읽는 이의 입술 모양을 적잖이 의식하면서. 이로써 시는 단어의 나열이 아니라, 소설의 정교한 플롯처럼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냥 사람이라는 말. 그저 사랑이라는 말. 그러니 너는 마음 놓고 울어라. 그러니 너는 마음 놓고 네 자신으로 존재하여라. 두드리면 비춰 볼 수 있는 물처럼. 물은 단단한 얼굴을 가지고 있어서. 남겨진 것 이후를 비추고 있었다. - 남겨진 것 이후에

 

사랑은 사람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러나 사람이 사람으로 남을 수 있는 까닭도 사랑에 있다. 사랑을 잃은 사람에게는 반드시 실존적 위기가 온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 존재하기 위해, 사람으로 존재하기 위해, 사람과 사랑을 등치시키는 시어에 끌린다. 화자는 단단한 얼굴을 가진 을 통해 시련과 고통을 암시하면서, 실존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단어의 주고받음을 펼쳐 보인다.

 

시선은 단어를 만들어내고, 단어는 문장을 만들어낸다. 그런데 여전히 의미가 솟아나는 데까지엔 뭔가가 더 필요하다. 언어는 사태와 1:1로 대응하지 못한다는 한계는 명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에는 어떤 의미가 담기는가.

 

지금 우리가 언어로 말하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 새롭게 태어납니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기대하지 않았던 빛을 통해 낯선 것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과거의 이야기들이 미래에도 보이는 세상입니다. - 지금 우리가 언어로 말하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

 

숨겨진 뜻이, 참된 의미가 드러나지는 않는다. 시는 시선을 따라 유려하게 흐를 뿐이다. 어떻게든 의미를 끄집어내고 싶은 욕구를 들게 한다. 그런데 의미는 끄집어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인가? 혹은 바깥으로부터 부여받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일까? 의미라는 말에는 가치가 담겨 있다. 무가치하게 되는 것, 그로부터 압도되는 공포감이 우리로 하여금 수없이 의미를 묻고 발굴하게 한다.

 

하지만 그 모든 의미는 과거에도 있었고 미래에도 있을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과거부터 없었고 미래에도 없을 것이다. 그 두 가지 의미가 모두 통용된다. 왜냐하면, 의미는 발굴되는 것이 아니라,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마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소년이라고 부르던 소년이 보인다. 어떤 소년에서 한 소년으로 움직인다. 세상 끝으로 떠도는. 아버지를 갖지 못한. 꽃도 피어나는. 불도 피워내는. 자신의 숨은 광기를 걱정하는. 웃어야 할 때 웃을 줄 모르고 울어야 할 때 울지 못했던. 시들어버린 얼굴 위로 석양이 지고 있었다. 순간에서 영원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중략)

마음이란 어디에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다른 어딘가를 바란 적이 없는데도 언제나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 와 있었다.

(중략)

소년은 중심으로 중심으로 가고 있었다. 중심은 더 깊어가고 있었다. 기어이 미래로 돌아갈 겁니다. 기어이 그곳에 도착할 겁니다. 대화는 쳇바퀴처럼 맴돈다. 꽃은 꿈으로 피었다 진다. 꿈은 망각으로 소멸되며 완성된다. 깊어지다 어두워지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것. 말할 수 없이 어두워지는 것은 깊어지는 것. 소년은 자라 소년이었던 소년이 된다. 소년이었던 소년의 오래된 미래가 된다. 어떤 소년에서 한 소년으로 돌아간다. - 소년은 자라 소년이었던 소년이 된다

 

 

소년의 삶은 의미를 부여받지 못했다. 소년에게는 길을 가르쳐주는 이도 없었다. 소년은 언제가부터 소년성을 잃어, 소년임에도 소년이지 아니한 삶을 살게 되었다. 의미를 잃었기에 의지가 향할 곳도 없다. 좀처럼 흔들리는, 흔들리기 그지없는 바람과 같은 삶 속에서 그의 미래는 빛을 잃는다.

 

그러나 한 순간 소년은 깨닫게 된다. 그토록 바라마지 않았던 찬란한 미래는 자신을 마주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임을. 우리의 존재는 누군가 숨결을 불어넣어 주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스스로 존재를 깨달아야만 살아 숨 쉬게 되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소년은 다시 길을 찾는다. 의미를 찾기 위해 변두리를 쫓기듯 방황했던 삶에서 벗어나, 자신을 마주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버리고 길을 나선다. 점차 그 용기있는 여정에 끝에서, ‘어떤 소년이었던 소년은 한 소년으로 재탄생한다. 자신의 의미를 마주한 자의 성취, 그것이 이라는 한정사를 부여받을 자격의 존재이다.

 

우리의 삶도 그렇다. 인간은 인정욕구에 사로잡힌 동물이다. 어릴 때는 부모님과 선생님에게, 커서는 윗사람에게, 때로는 사랑하는 연인에게, 우리는 인정받고 싶고 자신의 가치를 증명받고 싶어 한다. 그것이 의미를 부여받는 방법이라며.

 

그러나 그것으로는 도저히 끝이 없다. 의미가 종속된 삶은 결국 맴돌게 될 뿐이다. 우리가 바라보는 사물, 우리가 마주하는 세계, 그리고 그것을 주재하는 우리의 의미는 부여받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있었음을, 앞으로도 거기에 있을 것임을 깨닫는 것이다.

 

쉬운 일은 아니다. 더없는 용기가 필요하다. 가치를 창조해내는 삶은 얼마나 매력적인가. 그래서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오로지 달빛/다시 태어나는 빛

그것이 오래오래 거기 있었다.

발견해주기만을 기다리면서/

홀로 오래오래 거기 있었다.

 

 


WRITTEN BY
빵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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