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길은 일방통행으로 흐른다. “사랑한다”는 말을 아무리 퍼부어도 “왜?”라는 질문을 받는다. 반대로 “날 왜 사랑해”라는 질문을 아무리 퍼부어도 “그냥”이라는 말을 듣는다. 우리의 모든 사랑은, 태생적으로, 극복할 수 없는 소통의 장애에 시달리고 있다.

 

“말이 잘 통한다”라는 이유는 적잖은 거짓이다. 사람은 말을 통해 생각을 전한다. 생각은 말을 통해 생겨난다. 다시, 생겨난 생각을 담고 말은 떠난다. 그 말을 듣고 또 다른 생각이 피어난다. 무수히 많은 생각은, 다만 비슷해 보일 뿐, 단 하나의 모양새도 똑같이 생기지 않았다. 구조적으로 “말이 잘 통한다”라는 이유는 성립할 수가 없다. 우리는 크고 작은 소통의 답답함에 시달리며 살아가야만 한다.

 

“말이 잘 통한다”는 이유로 사랑에 빠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오직 둘만의 우주가 탄생하는 새벽녘의 시간. 감정의 온도가 모닥불보다 따스해질 때의 말은 다르다. 그것은 그럴 리 없을 것이라 여겼던 말의 모양새를 비슷해 보이게끔 우리를 현혹한다. 누구에게도 느낄 수 없었던 것이었노라, 다시는 이런 사람을 만날 수 없으리라. 마법의 시간은 사기와도 같이 우리의 눈을 속인다.

 

“말이 잘 통한다”가 유효한 시간은 필연적으로 만료될 수밖에 없다. 둘만의 우주가 탄생하던 시간은 점차 블랙홀로 빨려 들어간다. 그 반대의 틈새로 솟아오른 자그마한 미혹의 점이 넘실거리는 사랑의 바다를 오염시킨다. 오염된 한 줌의 점이 생각에 실린다. ‘왜 그렇게 말을 했을까?’ 납득은 되지 않으나 납득 해야만 한다. “말이 잘 통한다”라는 말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단 한 줌의 의혹도 사라지지 않으면, 자그마한 물구멍에 터지는 댐처럼, 잘 통하던 말의 모양새가 와르르 무너진다.

 

“말이 잘 통한다”는 말은 그때부터 명제가 아니라 선언이 된다. 참과 거짓을 논해야 하는 영역에서 멀어진다. 그래야만 한다는 당위가 우리의 존재를 휘감는다. 어떻게든 통하게 만들어야 하는 사명을 띠게 된다. 좀처럼 납득이 되지 않는 위기의 순간, 우리는 광야로 나가 기쁘게 고독을 마주한다. 잘 통하는 것이 얼마나 안락한 것이었는가. 떠나온 그곳은 여기에 비해 얼마나 행복한 곳이었던가. 행인은 떠나가던 말을 다시 품고 집으로 돌아온다.

 

“말이 잘 통한다”라는 말은 기어코 끊어질 듯 희미한 숨을 내쉰다. 아무런 의미 없이 던진 말로도 행복한 웃음을 짓던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말에도 고개를 끄덕이던 그. 말의 생산 없이 껴안듯 감싼 팔베개로 모든 것을 읽어내던 그는 희미하다. 아무런 의미 없이 던진 말은 시간의 틈새로 사라져 버린다.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말에는 갸우뚱한 표정을 지을 뿐이다. 요새처럼 단단한 팔베개를 만든 손은 슬쩍 빠져나온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 잘 통하던 말은 모두 어디로 사라졌는가. 티 없이 맑았던 사랑의 바다는 어느새 이토록 검게 물들었는가. 행인은 공황에 빠진다.

 

작가는 말한다.

 

그것은 사랑 때문에 일이다, 라고 아버지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있었던 일이 없었던 일이 되거나 없었던 일이 있었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말하지 않는 것이 더 크게 말하는 방법이 되는 말이 있다. 사랑의 말이 그렇다. 무엇보다 사랑은 잘 말해져야 한다. 예컨대 말하지 않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말해져야 한다. 그것은 사랑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사랑 때문에 시작되었고 사랑 때문에 이루어졌다. 나는 장작 위에 누웠고, 아버지는 칼을 들었고, 신은 놀라서 소리쳤다. “그 아이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마라.” 바치라는 명령은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명령으로 대체되었다.

 

 

 

 

말해진 사랑은 그 자체로 존재를 엮는다. 말해지지 않는 사랑은 존재를 광야에 나서게 한다. 엮일 것인가, 나툴 것인가. 말해지지 않는 사랑에 가슴 아파하던 그가 무색하게, 말해진 사랑이 채워놓은 족쇄에 고통스러워한다. 족쇄에서 해방하여 자유로울 것인가, 훈장처럼 족쇄의 무게를 짊어질 것인가. 숙명처럼 지어진 숙제에서 우리는 단 한 순간도 도망칠 수 없다.

 

이해는 다시 불가해의 영역으로 돌아왔다. 사랑은 그래서 무한한 힘을 머금었다. 이 고통스러운 무게를 짊어지게 할 만큼, 그래서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으로 완성하고자 할 만큼, 불가해한 영역의 힘으로 사랑은 삶을 움직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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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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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두 번째 책,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 (들녘, 2021)이 세상을 향해 모험을 떠납니다.😁

 

『일기들』 은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에 이어, 조선 사람들의 단맛 짠맛 나는 속내를 속속들이 밝혀내는 책입니다. 그들의 미주알고주알 속사정이 담긴 일기를 치느님의 닭 다리처럼 양손으로 잡아, 씹고 뜯고 맛보고 즐겼습니다. 책 속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의 일러스트를 제가 그렸고(중학교 때 미술 성적은 ‘양’이었습니다), 그 인물들의 모습이 오늘날을 사는 ‘김 씨 아조씨’의 좌충우돌 하루와 맞닿아 있음을 보이기 위해 야무지게 비벼봤습니다.

 

제가 미시사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서문에도 썼듯 ‘두려움’ 때문입니다. ‘석학 한 명이 사라지는 것은 도서관 하나가 불타 버리는 것과 같다’라던 베르베르의 말처럼, 한 세대가 저무는 것은 그 안에 담긴 수많은 이야기가 사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존재는 인식될 때 비로소 ‘존재 지어’ 집니다. 찬란한 역사는 ‘우리 역사’, 아픈 역사는 ‘흑역사’로만 구분 지을 때, 그 안에 살던 사람들의 삶을 인식하지 못할 때, 그들의 존재는 책에 박히는 잉크 몇 ml로 날아가 버리기 쉽습니다.

 

잊혀지는 것, 사라지는 것이 두려운 것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우리의 시대가 찬란하지 아니한 이유로 ‘암흑 시대’ 정도로 여겨진다면, 나의 삶 또한 ‘무가치한 것’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두려움은 우리로 하여금 무언가를 계속 쓰고, 찍고, 남기게 합니다. 아마도 저와 같은 불안감이 조선 사람들에게도 있었나 봅니다. 기록 덕력을 뿜뿜 뽐내며 적어나간 일기들, 그 안에 담긴 그들의 올망졸망한 삶을 읽었을 때, 비로소 그들의 존재는 제 안에 ‘존재 지어’ 졌습니다. 그처럼, 저의 삶 역시 누군가에게 ‘존재 지어’ 질 수 있다는 희망. 그것이 미시사를 읽는 가장 큰 즐거움입니다.

 

책에 담긴 인물들, 그리고 에피소드들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몇 가지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영남의 1티어 선비’라고 불렸던 김령은, 과거에 합격하자마자 온갖 ‘똥군기’를 마주하게 됩니다. 악명 높은 조선 공무원들의 신고식 문화를 마주한 뉴비 관리 김령은 몇 달간 정신이 안드로메다로 자유 유영하는 체험을 하게 되는데요. 직장 다니던 시절의 저처럼, ‘다음 날이 안 왔으면 좋겠다’라며 일기에 토로합니다.

 

또한, 틈만 나면 바가지를 긁어대는 아내 때문에 제대로 삐져버린 남편, 이문건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아내는 열 받을 때마다 방문을 쾅 닫고 들어가 드러누워 버렸는데요. 밥짓기는 커녕, 손에 물 한 방울 묻혀 본 적 없던 양반 이문건은 그때마다 쫄쫄 굶어야만 했습니다. 그놈의 자존심 때문에 먼저 사과할 수 없었던 이문건은 결국 물에 밥을 말아먹으며 주린 배를 채웠죠.

 

사랑 앞에 눈이 멀었던 ‘송노-분개 커플’의 대탈주 스토리도 흥미롭습니다. 오희문의 노비였던 송노와 분개는 어느 날부터 눈이 맞아 비밀 사내 연애를 시작합니다만, 사내 연애가 늘 그렇듯 다들 눈치채게 됩니다. 그러나 분개는 이미 남편이 있는 몸, 이들의 사랑은 결국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탈주라는 선택지로 귀결되는데요. 오희문은 그들의 탈주를 막기 위해 온갖 계략을 꾸미는데, 송노는 장판파의 장비처럼 그 모든 계락을 막아내며 탈주를 계획합니다.

 

개요만 적어도 꿀잼각이 서지 않나요? 과연, 선배가 된 김령은 후배들을 어떻게 대했을까요? 시원하게 악습을 철폐해 ‘1티어 선비’의 이름값을 더했을까요? 아니면, 그 역시 One of them이 되어 애꿎은 복수를 실행했을까요. 또한, 이문건과 아내는 도대체 왜 싸운 걸까요? 그들은 결국 화해했을까요? 마지막으로, 송노-분개 커플의 탈주는 결국 성공했을까요? 드라마 <추노>처럼, 비극으로 끝나지는 않았을까요?

 

이 모든 에피소드는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부끄럽지만, 지난 책보다 더 좋은 결과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권 사서 한 권은 재밌게 읽으시고, 한 권은 평소 감사했던 분의 집의 안방에 슬쩍 버려주세요.

 

감사합니다!😀

 

* 교보문고, YES24, 알라딘, 인터파크 등 온 오프라인 서점에서 구매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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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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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노랫말이라는 말은 반쯤만 사실에 부합한다. 시가 곡()이었던 시대도 있었으나, 이미 노랫말을 만드는 작법과 시를 쓰는 작법이 너무도 달라진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시가 노랫말로 여겨지는 까닭은, 시를 지을 때와 노랫말을 엮을 때의 마음가짐이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일지 모른다.

 

소설가가 되려고 했던 이제니 시인의 세 번째 시집,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은 시는 노랫말이라는 우리의 통념을 거부한다. 시인의 언어는 노래가 아니라 소설이다. 긴 호흡으로 나열되는 단어와 문장들은 분명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비록, 소설보단 덜 적나라할지라도.

 

마주 보며 되비치는 두 개의 거울로부터 시작할 수 있다. 죽을 때까지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사랑이 있다.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 비선형적으로 흐르는 곳에서. 점층법이 더는 어울리지 않는 장소에서. 이미 찢겼지만 다시 찢겨야만 하는 표면이 있다. - 발화 연습 문장

 

 

좀처럼 행으로 끊어지기를 거부하는 시인의 시는 이것이 분명한 이야기임을 선언한다. 그런데 우리는 좋은 이야기에서 납득할 만한 개연성을 찾는다. 개연성이 부족해지면 우리는 그 이야기에 ‘B이라는 꼬리표를 붙인다. (때로는 B급이 칭찬이 될 때도 있다) 이러한 문장이 소설이 아니라 시가 될 수 있는 까닭은, 이야기가 한껏 움츠러들었기 때문이며, ‘시는 노랫말이라는 오래된 관념이 적중하듯 읽는 이의 입술이 움직이는 형태, 그리고 그 입술에서 뿜어지는 목소리의 형태를 한껏 의식하고 있다. 다시, 발화 연습 문장이다.

 

중복된 문장과 반복된 약속과 수정된 광기와 망각된 용기와 드물게 피어오르기도 했던 온건한 사랑이 뒤섞인 목소리에서. - 발화 연습 문장

 

시가 노랫말이라면, 이는 밴드 넬의 노랫말과 닮았다.

 

비난의 채찍과 멸시의 수갑을

외로움의 족쇄와 희망의 해체를

녹이 슨 열정과 망각의 권태를

이겨낼 수 있는 끝없는 용기를

Promise me - Promise me

 

절구로 끊어지는 넬의 단순한 노랫말은 운율이라 하는 시와 노래가 공유하는 코드에 충실했다. 이제니 시인의 문장은 절구로 끊어지지 않으나, 어지럽게 펼쳐진 잉크 안에 분명한 운율이 숨어 있다. 이것이 이 분연한 이야기가 시가 될 수 있는 첫 번째 까닭이다.

 

그런데 시에 운율을 부과하는 것은 여전히 곡()이었던 시절의 관습이다. 기나긴 문장 속에 배치된 단어들은 단지 나열에 지나지 않는가. 우리는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운, 또는 내 안에 울림을 주지 않는 시를 만날 때 그것을 기계적인 단어의 나열처럼 느낀다. 그런 점에서 이제니 시인의 시는 친절하다. 문장이 길다는 것은, 소설보단 덜하나, 다른 시보다는 더 쉽게 시선을 따라갈 수 있게 돕는다.

 

해변은 자음과 모음으로 가득 차 있다. 모래알과 모래알 속에는 시간이 가득하다. 시간과 시간 사이로 모래알이 스며든다. 미약한 마음이 미약한 걸음으로. 미약한 걸음이 다시 미약한 마음으로. 너는 너를 잃어가고 있다. 너는 너를 잃어가면서 비밀을 걷고 있다. 노을은 점점 옅어지고 있다. 슬픔은 점점 진해지고 있다. 언제가 가게 될 해변. 우리가 줍게 될 조약돌과 조약돌이 호주머니 속에 가득하다. - 언젠가 가게 될 해변

 

 

해변은 자음과 모음으로 가득 차 있다는 시를 어떻게 해석하든지 그것은 전적으로 독자의 자유에 달려 있다는 명제를 전제로 한다면, 자음과 모음은 해변에 밀려오는 파도가 부서지면서 뿜어내는 파열음처럼 들린다. 이 문장을 시작으로 열거되는 시어는 자연히 해변을 바라보는 화자의 시선을 따라가게 한다. 자음과 모음으로 가득 찬, 파도가 부서지는 해변. 홀로일 땐 너무나 미약하지만, 항하사의 수만큼 모이면 능히 파도를 부숴버리는 수없이 많은 모래알. 그 모래알의 수만큼이나 쌓인 와의 시간들. 시간이 흐를수록 옅어지는 추억과, 그 추억만큼 약해지는 미약한 마음’. 필멸하는 존재라면, 언젠가는 반드시 가게 되는 망각의 해변을 향해 우리는 걷고 있다.

 

이렇듯, 시는 시선을 따라 단어를 내뱉고, 다시 그 앞선 단어를 이어받아 새로운 문장을 창조해낸다. 물론 읽는 이의 입술 모양을 적잖이 의식하면서. 이로써 시는 단어의 나열이 아니라, 소설의 정교한 플롯처럼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냥 사람이라는 말. 그저 사랑이라는 말. 그러니 너는 마음 놓고 울어라. 그러니 너는 마음 놓고 네 자신으로 존재하여라. 두드리면 비춰 볼 수 있는 물처럼. 물은 단단한 얼굴을 가지고 있어서. 남겨진 것 이후를 비추고 있었다. - 남겨진 것 이후에

 

사랑은 사람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러나 사람이 사람으로 남을 수 있는 까닭도 사랑에 있다. 사랑을 잃은 사람에게는 반드시 실존적 위기가 온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 존재하기 위해, 사람으로 존재하기 위해, 사람과 사랑을 등치시키는 시어에 끌린다. 화자는 단단한 얼굴을 가진 을 통해 시련과 고통을 암시하면서, 실존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단어의 주고받음을 펼쳐 보인다.

 

시선은 단어를 만들어내고, 단어는 문장을 만들어낸다. 그런데 여전히 의미가 솟아나는 데까지엔 뭔가가 더 필요하다. 언어는 사태와 1:1로 대응하지 못한다는 한계는 명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에는 어떤 의미가 담기는가.

 

지금 우리가 언어로 말하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 새롭게 태어납니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기대하지 않았던 빛을 통해 낯선 것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과거의 이야기들이 미래에도 보이는 세상입니다. - 지금 우리가 언어로 말하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

 

숨겨진 뜻이, 참된 의미가 드러나지는 않는다. 시는 시선을 따라 유려하게 흐를 뿐이다. 어떻게든 의미를 끄집어내고 싶은 욕구를 들게 한다. 그런데 의미는 끄집어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인가? 혹은 바깥으로부터 부여받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일까? 의미라는 말에는 가치가 담겨 있다. 무가치하게 되는 것, 그로부터 압도되는 공포감이 우리로 하여금 수없이 의미를 묻고 발굴하게 한다.

 

하지만 그 모든 의미는 과거에도 있었고 미래에도 있을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과거부터 없었고 미래에도 없을 것이다. 그 두 가지 의미가 모두 통용된다. 왜냐하면, 의미는 발굴되는 것이 아니라,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마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소년이라고 부르던 소년이 보인다. 어떤 소년에서 한 소년으로 움직인다. 세상 끝으로 떠도는. 아버지를 갖지 못한. 꽃도 피어나는. 불도 피워내는. 자신의 숨은 광기를 걱정하는. 웃어야 할 때 웃을 줄 모르고 울어야 할 때 울지 못했던. 시들어버린 얼굴 위로 석양이 지고 있었다. 순간에서 영원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중략)

마음이란 어디에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다른 어딘가를 바란 적이 없는데도 언제나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 와 있었다.

(중략)

소년은 중심으로 중심으로 가고 있었다. 중심은 더 깊어가고 있었다. 기어이 미래로 돌아갈 겁니다. 기어이 그곳에 도착할 겁니다. 대화는 쳇바퀴처럼 맴돈다. 꽃은 꿈으로 피었다 진다. 꿈은 망각으로 소멸되며 완성된다. 깊어지다 어두워지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것. 말할 수 없이 어두워지는 것은 깊어지는 것. 소년은 자라 소년이었던 소년이 된다. 소년이었던 소년의 오래된 미래가 된다. 어떤 소년에서 한 소년으로 돌아간다. - 소년은 자라 소년이었던 소년이 된다

 

 

소년의 삶은 의미를 부여받지 못했다. 소년에게는 길을 가르쳐주는 이도 없었다. 소년은 언제가부터 소년성을 잃어, 소년임에도 소년이지 아니한 삶을 살게 되었다. 의미를 잃었기에 의지가 향할 곳도 없다. 좀처럼 흔들리는, 흔들리기 그지없는 바람과 같은 삶 속에서 그의 미래는 빛을 잃는다.

 

그러나 한 순간 소년은 깨닫게 된다. 그토록 바라마지 않았던 찬란한 미래는 자신을 마주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임을. 우리의 존재는 누군가 숨결을 불어넣어 주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스스로 존재를 깨달아야만 살아 숨 쉬게 되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소년은 다시 길을 찾는다. 의미를 찾기 위해 변두리를 쫓기듯 방황했던 삶에서 벗어나, 자신을 마주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버리고 길을 나선다. 점차 그 용기있는 여정에 끝에서, ‘어떤 소년이었던 소년은 한 소년으로 재탄생한다. 자신의 의미를 마주한 자의 성취, 그것이 이라는 한정사를 부여받을 자격의 존재이다.

 

우리의 삶도 그렇다. 인간은 인정욕구에 사로잡힌 동물이다. 어릴 때는 부모님과 선생님에게, 커서는 윗사람에게, 때로는 사랑하는 연인에게, 우리는 인정받고 싶고 자신의 가치를 증명받고 싶어 한다. 그것이 의미를 부여받는 방법이라며.

 

그러나 그것으로는 도저히 끝이 없다. 의미가 종속된 삶은 결국 맴돌게 될 뿐이다. 우리가 바라보는 사물, 우리가 마주하는 세계, 그리고 그것을 주재하는 우리의 의미는 부여받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있었음을, 앞으로도 거기에 있을 것임을 깨닫는 것이다.

 

쉬운 일은 아니다. 더없는 용기가 필요하다. 가치를 창조해내는 삶은 얼마나 매력적인가. 그래서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오로지 달빛/다시 태어나는 빛

그것이 오래오래 거기 있었다.

발견해주기만을 기다리면서/

홀로 오래오래 거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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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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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작은 서재에서 ①] 길 잃은 청춘의 아이슬란드 여행기 : 김동영 저, 『나만 위로할 것』 (달, 2010)

 

 

한동안, 아이슬란드는 미지의 땅이었다. 거친 바닷사람들과 바이킹의 이야기가 신화처럼 내려오는 땅. 밤이면 찬란한 오로라가 검은 하늘에 융단처럼 펼쳐지고, 낮에는 세상을 다 묻어버릴 듯이 퍼붓는 눈보라가 태초의 모습으로 복원시키는 자연의 땅. 가끔 <걸어서 세계 속으로>와 같은 여행 방송이 아니고선 좀처럼 그 모습을 볼 수 없던 날것의 땅이었다.

 

이 책은 벌써 10년도 전인 2009년, ‘생선’이라는 필명으로 방송 작가와 출판을 겸업하던 김동영 작가가 180일간 아이슬란드에서 지내며 쓴 여행기이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낯설었던 아이슬란드의 이야기는 10년이 지난 지금, 사람들의 입소문을 탄 리얼 예능 프로그램, 그리고 여행 유튜버들 덕분에 제법 가까워진 것으로 보인다.

 

책날개에서, 그는 이렇게 자신의 ‘현재’(그러니까, 책이 나왔던 2010년의 시점에서)를 이렇게 표현한다.

 

좀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싶었고,
좀 더 많은 일을 하고 싶었으며,
좀 더 많은 길을 걷고 싶었다.
그리고 좀 더 멋진 사람이 되는 것.
하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평범했고 참을 수 없이 무기력했다.

 

사춘기가, 혹은 중2병이, 10대 시절에만 올 것이라고 믿는 것은 편견이다. 20대에도, 30대에도, 심지어 모든 것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불혹의 나이에도 무게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가벼웠던 무기력함이 먼지처럼 켜켜이 쌓여, 어느 순간 더 이상 짊어질 수 없는 짐이 되어 우리의 어깨를 짓누른다. 그처럼, 몽유병과 수면장애, 자각할 수 없을 정도의 심한 폭식에 시달리던 생선 작가는 ‘늦은 중2병’에 빠진 듯했다. 그것이 저 멀리 아이슬란드를 향해, 그것도, 작가의 팍팍한 잔고를 탈탈 털어서까지 떠나야만 했던 계기였다. 도대체 무엇이 그를 공허에서 허우적거리게 했을까?

 

당신은 날 부러워했지만 난 당신처럼 살고 싶었습니다.
...
당신이 보람찬 하루 일을 끝내고 늦은 밤 집으로 돌아와 개운하게 샤워를 하고 TV를 볼 때 난 벌써 어두워진 창문을 바라보며 시간은 왜 이렇게 빠른 건지 걱정스럽고 두려웠던 겁니다. 당신은 어디든 자유롭게 떠나고 아무 곳에도 얽매이지 않은 나를 부러워하며 자유로운 영혼이라 부를 때 난 말하고 싶었습니다. 내가 만약 당신처럼 살 수 있다면 당신처럼 살고 싶다고. 하지만 난 그렇게 살기에는 너무 게으르고 불안정한 인간이기에 그럴 수 없어 지금 이렇게 살 수밖에 없다고

 

책은 끊임없이 ‘너’를, 그리고 ‘당신을’ 향해 대화와 질문을 던진다.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때로는 아이슬란드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 때로는 종이 너머 그 활자를 읽는 독자에게로 ‘너’는 향한다. ‘나’는 ‘너’가 있기에 존재할 수 있다는 상대론적 개념의 재발견, 책은 끊임없이 타자와의 이뤄졌거나 이뤄지지 않았던 대화를 꺼내며 허무에 휩싸였던 자신을 되찾아 나간다. 그러나 반대로, ‘너’는 때때로 너무나 잘나고 멋있어, ‘나’를 한없이 초라하게 만드는 빛이다. 뭔가가 잘못되고 있다는, 이래서는 안 될 것만 같다는 불안이 정처 없이 내면을 휘젓지만, 하루아침에 뚝딱 새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각자가 가진 삶의 무게, 각자가 가진 삶의 성취는 계량할 수 없는 것임을 알면서도 우리는 매 순간 저울질하며 자신의 무게를 측정한다.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검은 손들이 우리를 그 수렁으로 잡아당기고, 자신이 믿어 왔던 것, 자신이 해 오던 것 또한 빛이 바래, 어느새 자신조차 잃어버리는 시간이 다가온다.

 

 

그런 의미에서, 많은 여행이 그러했듯, 작가의 아이슬란드행은 ‘도피’였을 것이다. 그의 내면에서 그를 휘젓는 허무와도 같이, 그 역시 정처 없이 이국의 낯선 풍경을 향해 거닌다.

 

그 길은 사람이 자주 오고 가는 길은 아니었다. 마을 한쪽 구석에 있는 길은 산 정상으로 이어져 있었는데, 산 정상에는 오래된 산장이 하나 있다고들 했다. 나는 그 길을 따라 산장으로 올라가고 있었고 넌 사륜구동 오토바이를 타고 흙먼지를 폴폴 날리며 내려오는 길이었다. (...)다시 갈 길을 가려는데 네가 뒤를 돌아 내게 소리쳤다.
“어디로 가는 거야?”

 

낯선 땅, 낯선 마을, 그리고 그 마을 사람들조차도 가지 않는 낯선 길에서 두 낯선 이가 만난다. 둘은 가벼운 미소를 향한 채 스쳐지나 치지만, 한 이방인이 부리는 ‘객기’가 걱정됐던 낯선 이는 오토바이를 돌려 그를 만류한다. 특별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그 산장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다고. 낯선 이는 이방인에게 ‘태워 주겠다’라는 호의를 내비치지만, 이방인은 그 친절을 정중히 사양한다. 단지, 조금(?) 걷고 싶을 뿐이라고.

 

그 길의 끝에서 이방인이 발견한 것은 사무치도록 새삼스러운, 아이슬란드가 아니어도 괜찮을, 평범하기 짝이 없는 광경이었다.

 

그리고 넌 이 길에 아무것도 없다고 했지만 난 그 길에서 산들바람을 만났고 네가 남기고 간 타이어 자국도 발견했으며 그리고 누군가 버리고 간 장갑 한 짝도 찾아냈어.
넌 모르겠지만 이게 여행인지도 몰라. 그래서 꽤 많은 대가를 지불하고 여기까지 온 것인지도 몰라. 마치 돌과 돌이 부딪혀서 불꽃을 만드는 것과 같은, 실제로는 아무것도 아닌데 정말로 굉장한 그 무엇을 만나게 되는 그런….

 

특별한 것이라는 말이 담은 함의는 우리가 지향해야 할 가치가 담겨 있다. 사람들이 찾는 것, 돈이 되는 것, 더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 것. 그러나 특별함은 시시각각으로 그 기준이 바뀌고, 어떻게 쟁취할 수 있는지도 잘 모른다. 모르기에 우리는 가장 유력해 보이는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더 좋은 학교에, 더 좋은 직장에, 더 좋은 위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고 쓰여 있는 표지판을 지나쳐 힘겹게 걷는다.

 

하지만 늦게나마 알게 되는 것은, 그 길이 특별함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는 섬뜩한 사실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가슴 속에 자신만의 감옥을 만들며 산다. 이해할 수 없고, 해소할 수도 없는 감옥은 특별해질 줄 알았던 자신이 소스라칠 만큼 새삼스러운 보통의 존재임을 자각하게 한다. 아니, 보통의 존재라면 차라리 다행일 것이다. 상황이 더 나쁘다면, 깨닫게 되는 것은 한없이 밉고 초라하고 볼품없는, 밑바닥의 끝에 위태롭게 서 있는 자신일 테니.

 

어쩌면 특별하다는 것은 그곳에 당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서 있는 무언가를, 그리고 우리가 이미 그곳에 있음을 알고 있었던 무언가를 오롯이 재발견해낼 때 빛을 발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누군가와의 마주침, 친절이 담긴 짧은 대화, 다시 만날 기약 없는 인사와 헤어짐, 그 뒤에 찾았던 그의 흔적, 또 다른 누군가가 남긴 인생의 흔적. 작가에게는 모험의 증거였지만, 우리에게는 스트레스를 선사하는 일상의 족쇄들이다. 너무 많은 사람, 너무 많은 정보, 너무 많은 말…. 그것은 아무런 특별함도 없는 것이지만, 아이슬란드에서 벌어진 낯선 모험 속에 등장했을 때 특별함으로 빛나 책으로 엮어졌다.

 

허무가 자신을 둘러싼 바깥의 것들을 쫓다가 발생한 것처럼, 치유도 자신을 둘러싼 바깥의 것들을 재발견할 때 시작된다. 다만, 작가에게는 아이슬란드라는 시공간이 중요했던 것처럼, 재발견을 돕는 계기와 사람이 필요할 뿐이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들이었는지 깨닫다 보면, 한없이 초라했던 나의 실존이 가치를 지닌 채 재탄생한다. 그동안 이루지 못했다고 생각했던 것들, 하지 않았다고 여겼던 것들, 도저히 이룰 수 없을 것만 같은 것들이 가능성을 머금은 채 다시금 빛을 발한다.

 

아직 쓰이지 않은 책을 좋아해.
아직 결론이 나지 않은 연재만화를 좋아해.
아직 다 만들어지지 않은 영화를 좋아해.
아직 녹음되지 않는 노래를 좋아해.
아직 시작하지 않은 말랑말랑한 상태의 연애를 좋아해.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은 내 인생을 좋아하지.

 

지금 다시, 이미 널리 알려진 아이슬란드 여행기를 읽어야 할 중요한 이유는 단 한 가지도 없다. 게다가 이 책은 누군가의 대화를 가장한 독백으로 점칠 되어 있고, 황량한 아이슬란드의 사진에서 온기를 느끼기는 좀처럼 쉽지 않다. 제목처럼, 어쩌면 책을 읽다가 그동안 필요하지 않았던 위로를 만들어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언젠가는 온다. 이미 지났어도 또 올지 모른다. 도망가고 싶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은, 약속 없이 찾아오는 불청객의 노크가 들릴 때 이 책은 빛을 발한다. ‘너’의 의미는 ‘나’에서 나온다는 것, 그것이 작가가 사람을 찾아보기 힘든 땅, 아이슬란드에서 했던 무수히 많은 독백 속에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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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꾼

,

 

제 인생의 첫 책,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이 나왔습니다.

 

저는 소위 고등유민이었습니다.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이래저래 방황하는, ‘꿈은 높은데 현실은 시궁창이야라는 짤방처럼, “역사학자 또는 작가가 되지 못할 거라면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아라는 패기로운 다짐과 함께 대학 진학을 포기한 것과는 달리 그저 그런 20대 초반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가슴 한구석에서, 글을 써서 사람들과 소통하고 호흡하고 싶다는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차근차근, 느리게 느리게, 여러 시행착오와 함량 부족을 경험하면서, 첫 책을 내기 위한 노력을 밟아왔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첫 책을 역사 교양서로 내게 되었습니다.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은 다른 역사 교양서와는 사뭇 다른 구성을 취했습니다. 일반적인 서적이 인물, 사건, 시대, 사상 중심으로 엮는 것에 반해, 저는 조선 시대 편지 속에 담긴 생활양식과 개개인의 정서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죽지 못한 아비는 눈물을 씻고 쓴다.”, “사랑한다는 말은 다 거짓이었나요?”라고 잡은 목차처럼, 각 내용은 여러 비슷한 사건, 비슷한 정서를 포괄하는 여러 인물의 편지를 종합하였습니다.

 

또한, 원문의 표현을 제멋대로 상당히 윤색했습니다. 특히, 한문 편지의 경우는 더욱 이러한 초월번역이 심했습니다. 옛 시대의 기록을 아무리 잘 번역해도, 우리가 읽기엔 낯선 점이 너무나 큽니다. 독자에게 더 짙은 농도로 그들의 삶을 펼치기 위해 택한 방법입니다. 제가 학자였다면 감히 이런 시도를 하지 못했겠지만, 관련 분야에서 묵묵히 종사하시는 훌륭한 학자님들의 연구 덕분에 이러한 시도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이 사랑하고, 아파하고, 즐거워하고, 실망했던 수많은 사건과 정서를 조합하여, 조선 사람들이 살았던 시간과 공간에 여러분도 같이 설 수 있는 책으로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이 책이 부디 여러분께 그러한 체험을 선사하길 바라봅니다.

 

무명 작가의 투고를 믿고 출판해준 들녘 출판사<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은 온·오프라인 서점에서 구매 가능하십니다. 정가는 15,000,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모시겠습니다. 더 상세한 책 소개는, 출판사 직원분들께서 성심껏 작성해주신 온라인 서점의 책 상세 소개 페이지를 읽어주세요.

 

뱀발.

 

사주시고 읽어주시는 독자 여러분을 위해 개인적으로 조촐한 이벤트를 하려고 합니다. 책을 읽으신 뒤 비평 또는 감상문을 우편으로 보내주시면, 적당한 분량의 손편지로 답을 해드리려고 합니다. 편지를 주고 받았던 #아날로그갬성 을 다시 찾고 싶네요. 제 주소는 디엠을 보내주시면 답변 드리겠습니다. (@ddirori0_099)

 

한 줄 요약.

 

책 좀 사주세요ㅠㅠ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 ㅠㅠ

 


WRITTEN BY
빵꾼

,

 

 

 

#1

그녀가 있다.

그녀를 처음 만난 곳은 어두컴컴한 기숙사 지하의 코인 노래방이었다. 첫 만남에도 당당한 쌩얼로 노래하는 그녀의 모습이 이채로웠지만, 풋풋한 웃음기를 머금은 봄 햇살을 닮은 그녀의 관악기 같은 음색(오보에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에 좋은 사람이라는 근거 없는 확신이 들었다. 지금도, 호흡과 호흡 사이에서 흘러 나오는 그녀의 목소리라면 쉬이 얻을 수 없는 포근함이 느껴지곤 한다. 목소리만큼이나 성격도 역시 그러해서, 자그마한 때깔 조차도 견디지 못할 것 같은 마음씨를 견뎠다. 약간의 취기에도 알프스 산맥의 소녀처럼 발그레해진 볼과 눈으로 상대를 바라본다. 미소가 아름다운 까닭은 다만 그것이 취한 눈으로 바라본 것이 아니라, 그녀의 마음씨가 눈빛으로 전해지기 때문일 것이다. 

여리기만 할 것 같은 그녀의 말버릇과는 달리, 내면에는 한 줄기 강인한 기둥이 솟아있어, 견뎌내기 어려울 가혹한 고통이 밀려와도 어떻게든, 어떻게든 버텨낸다. 비극의 여주인공이 되어도 그 끝은 해피엔딩일 것이다. 그녀는 자신을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 자신을 사랑할 줄 알아서 타인에게 아낌없이 주는 법도 아는 사람. 그래서 동방에 흐르는 공기를 읽는 법을 안다. 자신의 울타리에 있는 사람이라면, 그래서 손을 건네기로 결심했다면, 있는 힘껏 시선을 던지고 손을 뻗어 작고 여린 손으로 강인하게 붙잡는다.

작은 코노에서 노래하다 울 뻔 하기도 하는 그 여린 마음씨지만, 결코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겠다는 곧고 따스한 마음을 가졌기에 오지랖 넓은 나로썬 때때로 걱정이 된다. 거칠고 야속한 세상 살이가 그저 그녀의 그 곧은 마음을 흐리게 하지 않길 바라마지만, 그녀의 내면 안에 있는 그 강인한 기둥이 결코 그녀를 심연 속으로 빠뜨리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그녀의 삶은 그래서 더 따스해질 것이다.

계절이 바뀌고 또 바뀌어 다음 가을이 오면, 나는 파아란 하늘 아래 한 줌씩 떨어지는 낙엽 사이로 걷는 그녀의 뒷모습을 어쩌면 보지 못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소소한 시간 틈새로 주고 받는 농담 안에서 그녀라는 사람의 농도를 마주할 때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적어도 나는, 그녀의 실수로 인해, 그 어떤 이보다 그녀에게 잘 맞을 봄의 그녀를 마주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소라의 Track-3을 좋아한다는 그녀에게 가장 어울리는 단어는, Lovely일 것이다. 이소라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치고 나쁜 사람은 아직 보지 못했다. 나의 첫인상처럼, 그녀는 좋은 사람이다.

 

#2

그가 있다.

그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를 살갑게 맞아 주었다. 10살이나 어린 아이들과 함께 동아리를 함께 한다는 것 자체가 모험이나 다름 없던 일이었는데, 그가 없었다면 나의 학교 생활은 어떻게 굴러 갔을지 잘 그려지지 않는다. 그가 가진 그 쾌활함, 친밀함, 타인의 입장을 고려하고자 노력하는 태도, 그리고 최대한 말을 골라 의도치 않게 전해질 수 있는 상처를 피하려 하는 모습은 뭇 사람들에게 그의 이름 석자가 주는 의미가 어떤 것일지 단박에 눈치채게 했다.

그의 곰 같은 푸근한 외모 - 불곰이나 북극곰은 아니고, 아마 지리산 반달곰 정도 되는 것 같다 - 는 상대가 어떤 이라도 마음을 열고 대화할 수 있을 것만 같은 편안함을 준다. 비단 외모 때문만은 아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상대의 대화 템포를 따라가려는, 그것이 심지어 자신의 생각과 완전히 다른 것이라 할지라도, 그의 화법이 그가 가진 가장 빛나는 부분이다. 나는 아직까지 그가 화를 내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때론 짜증을 내지만, 내가 내는 짜증에 비하면 투정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그가 겪은 최근의 고된 경험에 악영향을 끼친 것이 아닌가 하는 죄책감이 사라지지 않는다. 비록 한바탕 시원하게 울지도, 혹은 미친듯이 상대의 욕을 하지도 않는, 그저 아연한 표정으로 때론 침묵, 때론 말더듬을 반복하며 고통을 겪어내는 그의 모습은 아직 어른이 될 준비가 되지 않는 아이의 등을 떠민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들게 했다. 그러나 이내 곧, 기숙사 1층 소파에 나란히 앉아, 그답지 않게 쉴새없이 푸념하는 그의 새삼스러운 모습을 보곤, 한꺼풀 허물을 벗어내는 나비의 모습을 보았다. 비록 그는 고통스러웠을 것이나, 나는 받아내고 감내하고 이겨내려는 그의 모습이 잠깐 멋있게 보였다.

나는 이제 몇달 뒤면, 절망적일 정도로 시력이 좋지 않은 나조차도 100m 밖에서 알아볼 수 있는 그의 시그니처 뒷모습을 바라보지 못한다. 어쩌면 그를 다시 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걱정하지 않는다. 비록 때론 서툴고, 비록 때론 엉성하며, 때론 꼼꼼치 못하지만, 뭇 사람들과 함께 손과 손을 맞잡으며 그 어디에 있더라도 잘 헤쳐나갈 것을 의심할 수 없다. 그의 우직한 노래 스타일처럼, 그의 내일도 그렇게 흘러갈 것이다.

매번 힘들어 하지만 매번 재도전하는 멜로망스의 노래처럼, 그에게 가장 어울리는 단어는 Pure일 것이다. 잘난 듯 그에 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댔지만, 나보다 그가 훨씬 더 좋은 사람임을 부정할 수 없을 고백해야겠다.

 

#3

그녀가 있다.

그녀는 서운하다는 이야기를 때때로 듣게 되는 것 같다. 그녀는 동의하지 않겠지만, 나는 동의한다. 그녀가 없는 공간, 그녀가 없는 모임은 그 공간과 모임의 의미를 반쯤은 잃어버리게 되는 것만 같다. 그녀가 내뿜는 색이 너무나 강렬해서, 그 자리에 함께하는 모든 이를 웃고 울리게 만들 수 있는 마법 같은 힘을 지녔다. 현실세계의 헤르미온느, 그런 느낌이라 해도 좋다. 그 티 한점 없는 꾸밈 없는 성격이, 우물쭈물 쩌리 같이 찌그러져 있는 나에게 거침없이 이것저것 물어봤던 그녀와 나 사이의 첫 연락을 가능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넘모'라는 말을 썼다고 웃는 그녀의 답장을 보며 생각했다. 그동안 왜 나는 이런 사람과 친해지지 못했던 걸까, 하고. 

그 때는 이름 석자 정도 밖에 모르던 사이였으나, 나의 예감은 몇가지 적중했다. 첫 번째는, 걸어 다니는, 아니, 뛰어 다니는 호기심 덩어리일 것이라는 예감. 그럴 일은 없겠으나, 또 그럴 일이 없길 간절히 바라지만, 먼 훗날 그녀의 얼굴을 다시 보게 됐을 때 그 반짝이는 눈빛에서 호기심이 사라져 있다면, 나는 더없이 서글퍼질 것 같다. 자그마한 몸으로 이리저리 바쁘게 다니느라 발에 뭐가 채이는 지도 제대로 모르는, 그래서 책상에, 계단에, 돌부리에 부딪히고 찍히고 꺾이는 일이 빈번히 발생하지만, 예의 그 꾸밈없는 털털한 웃음으로 날려버리는 그녀의 성격은 아마도 반쯤은 그 눈부시게 반짝거리는 호기심이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 면에서 그녀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수려한 외모 보다 빛나는 내면에 있다.

두 번째는, 분명 노래를 잘 할 것이라는 생각. 회의 테이블 끝과 끝에 앉아 있었지만, 나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예감했다. 당연히 적중했다. 넷이서 함께 코노를 갔을 때 그녀의 노래를 듣고 생각했다. 얼마나 많은 친구들이 그녀와 함께 하는 코노를 기다리고 있을까. 시원하게 지르며 그녀와 타인의 속을 뻥 뚫어 놓을 뿐 아니라, 순간의 분위기와 타인의 기분을 고려하는 선곡 스타일이 그녀라는 사람이 가진 매력을 단적으로 드러냈다. 그녀가 두 번째로 아름다운 순간은, 그 청아한 음색으로 부르는 음표 사이에 있다.

이제 저 넓은 세상 밖으로 날개를 펼칠 준비를 조금씩 해 나가는 그녀에 대한 걱정은, 미안하지만 1도 없다. 도망치거나 혹은 잠시 외면하고 쉬고 싶은 약한 마음이 들 법한데도, 애초에 그러한 선택지는 고려하지도 않았다는 듯이 꿈을 설계해나가는 그녀의 야무진 태도를 보면 나도 모르게 펭수 웃음을 지을 때가 있다. 그러고보니, 아직 친해지기 전에 '야무질 것 같았다'는 카톡을 보냈던 것 같다. 그 예감은 틀렸음을 인정해야겠다.

그러면 어떠랴. 그녀에게 어울리는 가장 적절한 단어가 Positive인 것을. 그 어느 곳에, 그 어디에 있더라도 그녀라는 존재가 내뿜는 반짝거림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묘한 확신이 든다.

 

#4

그리고, 그가 있다.

한참을 고민해도 그다지 쓸만한 점이 없는 그로썬, 그나마 없는 것 가운데 그럭저럭 사람 구실을 하는 글로써 그들에 대한 감사함을 기록해 둔다. 그는 그들을 오래도록 기억할 것 같다. 그녀와 그와 그녀도, 먼 훗날, '아 그런 사람이 있었지', 정도로 그를 기억해준다면 그걸로도 충분히 감사할 따름이다.

그녀와 그와 그녀가 그와 함께하는 시간만이라도 편안하고, 따스하고, 내려놓을 수 있도록, 못난 것들은 잠시 접어두고 있어 보이는 척이라도 좀 해보려 한다.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으나, 요즘의 그의 삶에선 그들이 의미가 되어주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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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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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떤 노래가 있었다. 

그가 그녀에게 그 노래를 들려주었을 때, 며칠 뒤 그는 말했다.

"퇴근하는 지하철에서 내내 이 노래만 들었어"

그녀는, 사랑한다는 말대신, 그렇게 마음을 전하는 사람이었다.

그와 그녀는, 갓 포장된 아스팔트 도로를 양 옆으로 가로지르는 희뿌연 바다를 바라보며, 그 노래에 함께 취했다. 함께 돌 수 있다고. 영원히 함께 할 수 있다고. 서로 간에 벌어지는 힘의 차이, 살아온 궤적이 만든 세상의 차이는, 어려운 조율 과정을 거치기만 하면 언젠가 안정화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갓 사랑에 빠진 모든 청춘이 하는 착각처럼, 공전하는 것은 서서히 파멸하고 있음을 간과하는 것처럼, 조율과정의 그 지난함을 과소 평가했던 그는 한 음조차 놓치지 않겠다며 함께 듣던 그 노래가 주례 선생의 백년가약 인증보다 훨씬 더 굳건한 약속이라 생각했다. 그는 그에 대해 너무나 잘 알았다. 그가 좋아하는 모든 음악을 4분 동안 모조리 쓸어담은 듯한 선율을 들으며, 그는 결코 이 노래를 트랙리스트에서 지우는 일은 없을 것이라 여겼다.

멀리서 보기엔 그저 두 행성이 자신의 길 따라 돌고 있을 뿐이나, 서로가 발을 딛고 있는 세계는 삶과 죽음의 거리만큼이나 다르다. 발을 닿지 않았을 때는 오직 반짝임만이 날에 따라 수줍음을 가르고 비출 뿐이었으나, 발을 딛고 난 뒤의 저 곳은 온갖 상처와 흉터와 공포스러운 환경이 펼쳐져 있다. 그는 그것을 몰랐다. 알았다고 자신했으나, 알았음을 증명하기엔 그는 무력한 모습만을 보였다.

그가 몰랐던 것은 하나 더 있다. 그 노래를 먼저 듣지 않게 된 쪽은 그가 아니라, 그녀일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에게는 공포였던 그녀의 강력한 중력은, 사실 그보다 그녀 자신에게 더 힘든 것이었음을.


#2

안개인지 먼지인지 모를 뿌연 것들이 모든 산봉우리를 숨기고 있던 날, 도로를 달리던 그는 라디오에서 어떤 낯선 노래를 듣게 되었다.

그 노래였다.

그의 세계 안에서 그 노래는 완전히 사라진 것에 가까웠다. 그 가수의 이름자만 보아도 귀를 막았고, 한 음절의 목소리만 들어도 눈을 감았다. 감각을 차단해 나가는 연습을 통해 무덤이 되는 법을 연습했다. 시간이 지나자 그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이제, 어지간한 일이 닥쳐와도 결코 수렁으로 빨려 들어가지 않아"

자기 안에 있는 커다란 구멍을 메우기 위해 하루도 쉬지 않고 부어놓은 콘크리트의 단단함에 자신이 있었다. 백 년 정도 지나면야 물론 여기저기 균열이 가겠지만, 적어도 죽는 날까지 이 콘크리트에 금이 갈 일은 없을 것이라고. 모든 시간이 흐르는 동안에도 견고하게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고. 

그의 착각은 계속된 셈이었다. 그 견고해보이던 철옹성은 단 2초의 시간 동안 종잇장처럼 무너져 내렸고, 속절없이 뛰쳐 나오는 무력했던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자신도 모르게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흥얼거리면서 그는 또렷해진 기억에 황망해졌다. 마침, 한적했던 쉼터에 정차한 그는, 자신과 자신과 자신이 내뿜는 비아냥의 소리들을 통제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그래요. 지나고 보니까 알겠어요. 당신도 참 힘들었겠네요."

죽음 이후에 건네는 인사보다 더 무효한 읊조림을 마치자 곡이 끝났고, 그는 다시 악셀을 밟았다. 속도 계기판이 한 칸 올라올때마다 뛰쳐나오는 자신들이, 불쾌한 손짓으로 눌려진 정지버튼 탓에 침묵하는 라디오를 대신해, 영원함이란 것이 무엇인지 희미하게 알게 했던 과거의 몇몇 노래들을 하나씩 들려주었다. 어떤 곡은 세상의 종말처럼 슬펐고, 어떤 곡은 생명의 탄생처럼 찬란했으며, 어떤 곡은 세상의 모든 설탕을 녹여만든 것처럼 달콤했다. 

참으로 많은 노래들이, 그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아득히 넘어선 수의 노래들이, 그의 귓 속에서 거미집을 짓고 있었다.


#3

그는 참으로 서툰 방법으로, 그에게는 가장 세련된 것이라 믿고 있던 방법으로, 사랑을 고했다. 사랑한다고. 당신을 위해서라면 나의 모든 것들을 버릴 수도 있고, 바꿀 수도 있다고. 당신에게 사랑받는 날을 꿈꾸며, 그 날이 완전히 오게 되기까지 한 순간도 멈추지 않겠다고.

그녀는, 모든 것에 냉소했던 자신을 비웃을 정도로 그 말을 믿었다. 의심의 눈초리를 완전히 지우지 못했으나, 그와 같은 사람을 단 한번도 만나본 적이 없었다. 그의 이야기는 달콤하지 않았으나 깊이가 있었고, 그의 목소리는 매력적이지 않았으나 진심처럼 떨렸었다. 그의 손짓은 능숙하지 않았으나 뜨거웠고, 그의 웃음은 멋있음과는 거리가 멀었으나 섹시함이 있었다. 그녀에겐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처음이었기에 더욱 믿을 수 없었으나, 점차 믿고 있는 자신이 낯설기만 했다.

그러나 그녀는, 차츰 시일이 지날수록 달콤했던 약속과 멀어지는 그를 보았다. 모든 것을 할 수 있겠노라 다짐했던 그의 입에선 어느새 피곤함이 자주 등장했고,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신경쓰며 조심했던 그의 몸짓은 점차 합의없는 독단을 보이고 있었다. 그는 한번도 말하지 않았지만, 자신이 모든 것을 감내하고 있다고 온 몸으로 외치고 있었다. 그녀가 문제라고. 그래서 내가 이렇게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고. 오직 홀로.

그녀는 원망하기 시작했다. 그가 아니라 자신을. 그 달콤하고 허술한 약속의 진의를 단번에 파악하지 못했던 자신을. 자신이 더 인내하고 노력하면 결국엔 그 역시 그가 한 말을 실현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자신을. 또한, 세심하고 깊은 그라면, 당연히 그녀가 하고 있는 모든 노력을 알아채릴 것이라 믿었던 자신을.

어둠이 서툴게 가라앉기 시작한 어느 날 어느 때에, 그는,

"나 너무 피곤한데, 미안한데 내일로 미루면 안될까?"

그 말이 끝나는 순간, 그녀가 자신을 버려가며 세웠던 모든 세상은 무너졌다. 그에게서 의심의 그림자가 드리워질 때마다 세뇌하듯 듣던 그 노래 역시, 집으로 돌아가는 그 길에서 영원히 삭제해버렸다. 


#4

모든 것이 조화로워 보이던 어느 날, 그녀가 자신을, 또한 그를 의심하게 된 계기는 아주 사소한 대화 때문이었다.

"예전에 너, 나랑은 모든 것이 잘 맞아 아무 것도 참지 않고도 사랑할 수 있을거라고 확신한다고 했잖아? 지금도 그렇니? 아무 것도 참지 않고 있니?"

가볍게 던진 질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멈칫했다. 긍정의 대답은 나왔으나, 그 대답은 짧았고 한 박자가 느렸다. 그녀의 표정은 느리게 변했고, 그것을 바라본 그는 연극을 시작했다. 5초 전까지 침묵을 유지하던 그의 입은 가볍고 편안한 일상적인 이야기를 쉴틈없이 토했고, 과거의 그와 그녀가 함께 웃었던 무언가를 꺼내며 따스함을 찬미했다. 또한, 그녀가 너무나 사랑했던, 그녀를 부서지듯 꼬옥 껴안으며 사랑을 고했다. 그는 생각했다. 자신의 연극을 보며 진심어린 맞장구를 치는 그녀의 모습에서 자신의 진심이 노출되지 않았다고. 아마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 광경을 보았다면, 형편없는 연기 실력을 가진 배우가 극을 망치는 모습에서 굉장한 불편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보다 더한 불편함이 그녀를 덮쳤음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도로에 멈춰선 그는 그 표정을 떠올릴 수 있었다. 한없이 무너지는 내면과, 어떻게든 서 있으려 노력하는 외면이 충돌하던 그녀의 표정을. 그제서야 알아차린 것은 아니었을테지만, 묻어둔 까닭에 아무 의미 없는 것이었들이라 여겼다. 묻어둔 것 위에 세웠던, 자신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선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다고 믿었던 것 역시, 마지막 남은 성냥개비처럼 부러져버렸다. 

실은, 그가 악셀을 다시 밟게 되기 까지엔 제법 긴 시간이 흘렀다. 거짓으로 점칠된 과거로 유턴할 수는 없는 일이었으나, 직진을 한다고 해도 거짓으로 점칠된 자신을 마주할 수 밖에 없었다.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그는 멈춰 있었다. 


모든 모순이 사라진 세계가 있다면,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던져버리고, 기름이 떨어지는 그 때까지 달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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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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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름다움을 더하기와 빼기로 책정한다고 가정하면, 나는 일관되게 빼기파에 속한다. 화려한 색감과 복잡한 기교가 가득한 예술보다, 여백과 본연의 모습을 살린 예술에 더 마음을 뺏기는 쪽이다. 사람을 바라볼 때에도 그렇다. 나는 화려한 웨이브와 트렌드를 쫓은 컬러의 헤어를 가진 사람보다 몇가지의 꾸밈으로 충분한 사람을 더 원해왔다. 

'검은단발머리'란 빼기파로 따지자면 가장 최고봉의 위치라 할 수 있다. 숏컷이든 단발이든 그것은 관계가 없다. 심지어 마구 헝클어져도 좋다. 머릿결이 좋지 않아도 괜찮다. 나는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구경하는 것도 좋아하지만, 사실은 머리카락 사이에서 오롯이 솟아난 두 개의 귀와, 뚜렷하게 본모습이 보이는 목선과, 또한 가려지지 않고 쭈욱 뻗어진 어깨선을 보는 것이 더 좋다.

아마 그래서 검은색 머리를 고집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가벼운 염색이면 괜찮지만, 아무리 단발이라 할지라도 색감이 화려하면, 내가 보고 싶은 귀나 목선, 어깨에 아무래도 시선이 덜 가게 된다. 마우스 커서를 아무리 옮기려해도, 나도 모르게 19금 광고를 클릭하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 

그런데, 모든 남성들에게 긴 머리가 어울리는 것이 아니듯, 모든 여성들이 또 '검은단발머리'를 잘 소화하는 것은 아니다. 꽤나 운 좋게도, 나는 꽤 오래 전에 그런 사람을 알게 되었다.


#2


나는 그녀의 단발머리를 관찰하는 것을 좋아한다. 시도 때도 없는 단발타령이 본인을 향한 것임을 그녀도 일찌감치 알고 있듯, 항상 멍을 때리는 척을 하며 그녀의 얼굴을 오래 훔쳐보는 것 또한 알면서 모른 척 지나가는 일이다. 한 해가 다르게 주름이 깊어지는 나의 얼굴과는 달리, 그녀의 얼굴은 10년 가까운 시간에도 그다지 달라진 것이 없다. 가끔은 그녀의 머리도 제법 길었던 때가 있으나, 때때로 쿨병에 걸리는 것인지 아니면 이제 아예 남극 같은 사람이 된 것인지 몰라도, 시원히 머리를 쳐내며 내 기억 속에 '그러한' 모습으로 되돌아오곤 했다. 

되돌아오는 것은 나 역시 그러했다. 외로움은 언제나 우리를 집어 삼키기 위해 입을 벌리고 있고, 이상적인 만남은 한 5만 번 윤회를 거듭한다 해도 쉬이 이뤄지지 않는다. 그러니 적당 적당히 맞춰가며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그것이 이성적인 관계이든, 적당한 인간관계에 속하는 만남이든, 혹은 그저 서로를 향해 외로움을 쏟아내기 위한 만남이든, 모든 관계에서 적당주의적인 태도를 취할 수 밖에 없어진다. "이제는 다른 스타일의 머리가 좋아"라며 섣부른 결론을 낸 채 이제 다시는 검은단발머리의 그녀를 보지 않아도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며 자신만만해 하다가도, 결국은 "아무래도 역시 검은단발머리가 최고야."라며 그녀의 얼굴을 되새기는 좌절을 반복하게 되었다.

여러 문제에 있어 상호간의 입장차는 쉬이 좁혀지지 않았지만, 그녀에게 검은단발머리가 가장 어울린다는 사실은 그녀도 나도 모두 동의하는 바가 틀림이 없다. 나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머리에 대해선 여전히 견해의 차이가 꽤 벌어져있는 것은 썩 만족스럽지 않지만, 정작 그녀가 잘 어울린다고 평한 머리를 하고 다녔을 때의 기억들은 썩 좋지 않아서 영 손이 가지 않는다.

최근에 나는, 꽤 오랜 시간동안 그녀의 얼굴(과 단발머리를) 관찰할 수 있었다.


#3


서로 '누가 누가 더 피곤한가'를 겨루는 듯한 피로한 모습은 차치하더라도, 매번 조금씩 달라지는 그녀의 연한 화장법 역시 논외로 두더라도, 그녀의 모습에서 지난 번과는 다른 무언가를 찾아내는 일은 꽤 즐겁다. 억지로, 매우 억지로 달라진 요소를 찾아낸 다음, 그녀에게 찾아낸 바를 부풀려 통보하며 "역시 넌 자꾸만 변하는구나?"라는 말을 아무렇지 하는 일은, 영 몹쓸일이지만 꽤 즐거운 일이었다. 

사실은, 그다지 변한 것이 없다. 그녀의 귀(딱히 이유는 없지만, 나는 그녀의 왼쪽 귀를 더 선호한다.)는 여전히 시크하게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그녀의 귀가 빨개지는 상황은 흔치 않아서 나는 그녀가 화를 낸다거나, 아니면 화를 낸다거나, 그것도 아니면 또 화를 낸다거나 할 때 그녀의 눈을 보는 척하며 사실은 귀를 보고 있을 때가 많았다. 머리칼이 스쳐지나며 귀는 여전히 시크하며 뾰로퉁한 표정으로 그곳에 있었다. 그녀가 사는 동네의 악명높은 칼바람이 싫은 이유는, 물론 춥다는 것인 첫번째 이유겠지만, 몹쓸 바람들탓에 그녀의 머리칼이 흐트러져 하얗고 혹은 빨갛던(빨갛던 때가 더 좋았다는 것은 조심스레 밝혀둔다.) 그녀의 두 귀를 가린다는 것이 두번째 이유라 할 수 있다. 

놀라울만큼이나 주름이 깊어지지도, 줄어들지도 않는 그녀의 목 또한 관찰하기에 좋은 포인트다. 언제나 아주 심플한 디자인의 목걸이가 감싸고 있는 그녀의 목은, 그녀의 작은 얼굴에 비해 다소간 튼튼해보이나, 그래서인지 시선을 자꾸 뺏어간다. 그녀의 목이 가장 돋보일 때는, 아무래도 브이넥 회색 면티를 입었을 때였던 듯 싶다. 집으로 돌아와 나는, 그녀의 회색 면티를 집안에서 볼 수 있을 그 때 그녀의 남자를 꽤 저주했었다. 어쨌든 그녀의 목은 그 외적인 요소보다도, 이제는 쉬이 들을 수 없는 그녀의 '여자여자한' 목소리가 저 곳에서 나온다고 생각할 때 더 빛이 난다. 그녀가 우효의 노래를 부를 때, 기억 속에서 알싸히 퍼지는 목소리가 들렸으니, 앞으로는 자주 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분에 따라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동그라졌다, 가늘어졌다하는 눈 모양새도, 건조한 공기 때문에 삐쭉삐쭉 갈라진 입술도, 동그란 선을 그리며 언제나 손가락으로 꾸욱 눌러보고 싶지만 실제로 그랬다간 온갖 욕을 바가지로 먹을 게 분명하기에 매번 참아야 하는 그녀의 양 볼도, 사실은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 눈으로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은, 아름답다고 말하기에 부끄럽던 때처럼 언제나 아름다웠다. 

아름답다고 말할 때의 그녀가 항상 그랬듯, 어떠한 칭찬에도 그녀는 모른 척 할 게 분명하기에, 나는 "눈 밑에 피로한 자국이 완전히 굳었구만?"하며 또 실없는 소리를 하고야 말았다. 

나란 닝겐, 잘했다. 하하. 이번에도 또 질 수는 없는 법이다. 추악하고도 미련한 본성에 지지 않는 스스로의 이성에 치얼스다.


#4


변한 것이 있다면, 아무래도 그녀가 아니라 그녀를 바라보는 내 눈이 문제일 것이다. 나의 뇌나 마음은 상관없다. 오로지 제 멋대로 세상을 판별하는 눈의 잘못이 분명하다. 보통은 잘쌩기기 위해서 안경을 쓰는 존잘남들의 상황과는 달리, 어떤 안경을 써도 못생김이 더해지는, 그렇다고 안경을 벗으면 오히려 상황이 안 좋아지는, 이도저도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존못으로 태어남을 받아들여야 하는 내 사정 상 안경을 벗을 수는 없다. 어떤 사람과의 관계가 끝이나면, 나는 안경을 바꾼다. 그동안 바꾼 안경 갯수야 당연히 묵비권을 행사하겠지만, 중요한 것은 안경을 바꾸는 가운데에도 그녀는 거기에 늘 그대로 있었다.

재밌었다. "나는 여기에 서서 항상 그대로 있을게,"라며, 소름이 돋는 말을 아무렇지도 하던 나는 아무래도 북한이나 ISIS에 납치되어 버린 채, 금방이라도 아스라히 사라지거나, 홀연히 멀어질 것 같았던 그녀는 항상 그곳에 있었다는 사실이.

물론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실은 그녀 역시 꽤 많은 것들이 변했다. 나는 썩 그것이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내가 만족스러운 것이 어디 몇가지 되기나 하던가. 아주 특수한 상황이나 짧은 순간만을 만족스러워하는 고약한 심보탓인지, 웬만한 일에 모두 툴툴대며 쿨병걸린 중학생 같은 태도로 일관하던 내가 아닌가. 어라, 혹시 이 문장, 그녀의 모습이기도 한건가?

제멋대로 변하는 그녀의 내면도, 쉽게 변하지 않는 그녀의 외면도, 밝힐 수 없는 애로사항으로 인해 애타던 내 기억도, 썩어가는 나의 피부도, 모두 그녀의, '아름답다'라고 쉬이 말할 수 없으나, 예쁘다고 하기에도 다소간 민망하나, 내가 애타게 부르짖는 단발찬양론의 가장 이상적인 모델임은 아마 오래도록 불변할 것 같다.

이미 변해버린 것들이야 어쩔 도리가 없지만, 검은단발머리여, 영원할지어다. 



WRITTEN BY
빵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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